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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Column

어느 나른한 오후,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 특별한 방법.

어느 나른한 오후,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 특별한 방법.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의 피아니시즘.

1961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의 맨해튼 빌리지 뱅가드. 빌 에반스, 스캇 라파로, 폴 모션 - 세 명의 젊은이, 빌 에반스 트리오는 어둡고 담배 연기 뿌연 지하의 이곳에서 다섯 세트에 달하는 긴 하루를 시작한다. 첫 번째 세트, Gloria’s Step, Alice in Wonderland에 이어 세 번째로 연주된 곡은 빅터 영 작곡, 네드 워싱턴 작사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 보통 발라드는 분당 60~70비트로 연주되곤 하는데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보통과 달리 분당 50비트로 훨씬 느리게 연주했다. 이날 몇 안 되는 오후 관객들은 심장 박동수 보다도 느린 그 곡을 들으며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운지 음악을 즐기듯 편안하고 무덤덤했던 청중과 달리, 그날 오후 이후 빌 에반스라는 이름은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투명하고 고결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빌 에반스가 아니었다면 그 시절 누가, 특히 59년~62년 사이에 누가 이렇게 모던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가. 에반스는 재즈 피아노 모더니티의 핵심이고 시작이었다.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각별히 사랑했다. 64년 코펜하겐에서도, 이듬 해 파리와 런던에서도, 그리고 1980년 여름 빌리지 뱅가드에서 다시 연주할 때까지, 말년에 이르러까지도 열 번 이상 라이브 레코딩으로 남겼다. 

사랑스러운 멜로디 같은 밤이 되었어요.

조심해야지요, 내 어리석은 마음이여.

영원히 변함없이 하얗게 빛나는 달이여,

나의 이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주세요.

사랑과 매혹, 두 개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그 간격을 알아보기 힘들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가왔던지.

사랑인지, 매혹인지, 그러나 느껴지는 감각은 비슷하거든요.

그의 입술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어요.

아, 어리석은 내 마음이여, 조심해야 해요.

열망하는 두 입술이 맞닿아지는 순간, 

이제 불꽃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건 더 이상 매혹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랑이랍니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여. 

나에게 다가오는 존재, 나에게 한눈에 매혹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비슷한 이 감정의 간극을 분별하려 애쓰는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 그러나 많은 상처가 있었던 여인은 머뭇거린다.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탓하고 독려한다. 변별하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주려는 듯, 빌 에반스는 느린 호흡으로 노래에 숨을 쉬게 만들고 있다. 

본디, 빅터 영이 1949년 영화 <My Foolish Heart> 사운드 트랙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영화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못잊는 여인 엘루이즈의 심정을 중심으로 다룬다. 에반스의 느리면서 차갑고 세련된 연주는 위스키 잔에 얼음을 떨어뜨리는 차가운 낯빛 그녀의 어떤 씬을 연상시킨다. 빌 에반스는 토니 베넷과의 듀엣으로도 이 곡을 남겼다. 1975년 캘리포니아 팬타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나의 어리석은 마음’은 에반스와 토니의 애정어린 밀착 교감으로 한편의 로맨스 단편 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빅터 영(1900-1956)은 내면에 멜로디가 너무 많아 일찍 산화된, 한편의 풍경 같은 사람이다. 그가 남긴 그 숱한 아름다운 곡들, My Foolish Heart, Love Letters, Stella By Starlight, Beautiful Love……나는 빌 에반스야말로 빅터 영과 감성적 궁합이 맞은 최초의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에반스 자신이 쇼팽의 팬이었듯, 인상주의 어법으로 피아니시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멜로디와 리듬의 긴장과 이완, 드럽 보이싱, 대체 코드, 크로매틱 어프로치 등 테크닉적으로도 진보적이고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면서 빅터 영의 옛스러움을 고풍스럽게 현대화켰다. 이후 그 어떤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에반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빅터 영의 많은 작품 중에 유난히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 내 감성이 꽂히고 만 것은 멜로디와 가사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딜레마의 뉘앙스 때문이다. 매혹과 사랑, 구분하기 모호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지만 본질은 다른 것이고 딜레마적이다.  빅터 영이 주린 배를 참으며 폴란드에서 고된 음악 훈련을 받았던 어린 시절, 그는 밀수품 음식과 그 내면에 넘쳐나는 멜로디를 그 주린 배에 함께 채워 넣어야 했던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작곡가 호기 카마이클의 명곡 ‘Stardust’의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선택 되었던 순간에도 그는 고향 시카고와 성공 가도 헐리우드의 환희를 두고 숱한 딜레마에 잠식 되었을 것이다. 빌 에반스가 모든 음을 조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서정시의 슬픈 아이러니였던 것처럼.


빌 에반스 이후 여러 재즈 연주자들이 빅터 영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녹음 했지만, 나에게 압권은 키쓰 자렛이었다.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키쓰 자렛 연주에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발라드로 주제부를 이끌다가 어느덧 자신의 이야기로 훅 바꾸어버렸다. 안그래도 그토록 아름다운 주제를 더욱 품격있고 신비로운 멜로디로 확장시키면서 중요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가 생산해 내는 음에 밀착된 나의 영민한 감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화음과 멜로디를 미묘하게 변화시키면서 동기를 부여하고 흐름을 끝까지 유지시켰다. 


키쓰 자렛은 빅터 영 이상으로 한없이 멜로디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에반스가 재즈 피아노의 현대 문학이었다면 키쓰 자렛은 철학이었다. 스피리츄얼한 키스 자렛의 멜로디 조합은 헤쳐졌다 다시 모여 군집하고 하나의 방향성과 맥락을 이루면서 지향점있는 고결한 악풍을 이루는 것이니. 키쓰 자렛 ‘나의 어리석은 마음’의 그녀는 연약한 수동적 여인이 아니라, 그 어떤 상처도 감내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승격되었다.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들을 때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을 낳는다. 지금 우리가 재즈 스탠다드라고 부르는 곡들의 상당수는 주로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작곡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재즈 연주자들에 의해 주요 레퍼토리가 됨으로써 ‘재즈 스탠다드’로 불리게 된 것들이다. 옛날 곡인 경우, 뮤지컬, 클럽 쇼,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경우가 많았고 작곡 당시부터 본유의 노랫말과 함께 짝을 이루었다. 재즈 연주자들은 가사와 노랫말이 서로 의지하는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주제 삼아 본유의 어법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발전시켰는데, 익숙하게 듣고 자란 아름다운 노랫말은 연주자에게도 창의성의 영감이 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비영어권 연주자들도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할 때 본래의 노랫말을 음미해 볼 것을 나는 권장한다.)

노랫말을 음미한다는 것은 문학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며 리스너로서는 보컬 없는 연주곡일지라도 심미적 내러티브와 무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최고 수준의 연주일 경우 카타르시스나 초월적 상태까지도 이를 수 있다.   

키쓰 자렛은 고대 중동 음악의 엑스터시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왔다. 원시 주술의 세계에선 가상과 실재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예술이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 행위였다. 사냥을 많이 해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동물 그림을 벽에 그렸고 종족 보존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인의 가슴과 배, 엉덩이를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그렸다. 곡소리 같은 주술적인 보이스를 반복적으로 내어 실제 세계 너머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었고 그들이 믿는 한 그것은 실재가 되었다. 우리가 믿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실재와 가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는 자신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술, 특히 미술에서는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판타시가 존재한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실제이며 어리석은 마음의 여인은 가상이다. 나는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진 재즈 스탠다드와 최상의 연주가 만났을 때, 리스너의 상상력과 감성을 파고드는 문학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초월적 상태로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쓰 자렛의 표현으로는 ‘엑스터시’이고 나의 표현으로는 ‘에로티시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는 리스너와 진정한 인터렉션을 할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관계 미학을 창출해 낼 수 있다.

나는 키쓰 자렛이야말로 문학적 맥락을 자신의 음악에 끌어들일 수 있는 시인이요, 철학가라고 여긴다. 2005년에 발매된 키쓰 자렛의 다큐멘터리 <The Art of  Improvisation>에서 음악 외의 어떤 것에 영향 받느냐는 질문에 “음악은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기가 아기로부터 나온다는 말과 같다.”라고 잘라 대답한다. 키쓰 자렛에게 영감을 주는 비음악적 요인들, 문학, 철학, 그리고 인간의 삶. 키쓰 자렛이 테크닉을 너머 미학적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인은 여기에 있다. 키쓰 자렛이 쓰는 관용구들 조차 멜로디 윤곽을 선명하게 하기 위한 트렌지션 장치로 보이는 것도 그가 스탠다드 재즈를 연주할 때 그 곡의 전통과 심미적 요소 모든 것을 통렬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서의 여인의 욕망은 우리가 아는 맹목적인 육체적 욕망을 넘어 선 것이다. 그녀는 매혹과 사랑이 같은 성적 강도로 어프로치된다는 것을 알고 분별하려는 여인이며, 육욕을 넘어선 지순한 사랑을 꿈꾸는 여인이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리스너의 그러한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우리가 피하려고 할 수록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이 주는 교훈 아니던가.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이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왜 욕망하는 지는 모르고 살아간다. 욕망의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느 나른한 한낮에 듣는 옛날 재즈 스탠다드 한 곡만으로도 우리는 감성의 힘을 빌려 간접적으로 나마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의 어리석은 마음이 욕망의 작동 장치일진대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욕망의 매커니즘을 그 곡을 통해 주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즈 곡 하나 듣는데 왜 이렇게 쓸모없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가?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예술은 쓸모 없는 것이어야 한다. 편하거나 실용이 되어버리는 순간 예술은 예술이 되지 않는다. 예술은 한없이 어리석어야 한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 내 마음을 울렸던 피아니시즘 앨범.

빌 에반스의 My Foolish Heart가 수록된 앨범.

(빌 에반스는 My Foolish Heart를 열 네차례 앨범으로 남겼다. 이 중 추천 앨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 (Riverside, 3RCD-4443-2, 2005)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 전체를 담은 세 장의 박스 셋, 같은 곡이 <Waltz for Debby>(Riverside, RLP-399, 1962)에도 수록되어 있다.

빌 에반스 (p), 스캇 라파로(b), 폴 모션(d)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Fantasy, F-9489, 1975)

보컬 토니 베넷과 빌 에반스의 듀엣 앨범. 두 사람의 밀착된 애정어린 교감의 My Foolish Heart을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 트리오의 My Foolish Heart

<My Foolish Heart>(ECM, ECM 2021/2022, 2007)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최상의 My Foolish Heart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p), 개리 피콕(b), 잭 드죠넷(d)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빌 에반스 트리오의 모습



(재즈피플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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