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azz Column

재즈, 에로티시즘을 향하여 (재즈를 왜 들어야 하는가 2 -나의 경우)

나에게 음악은, 때때로 폭력이다. 거리에서, 마켓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원치 않은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조르쥬 바따이유가 말했던 비천함(abjection)에 몸을 떤다. 나는 그 음악을 거부하기 위해 감각의 환각을 동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 귀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한편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화하는 나를 느낀다. 또한, 동시에 내 귀의 사용가치가 쾌락을 향한 감각적 확신임을 느끼면서 섬뜩해진다. 사적인 공간을 벗어난 내 쾌락의 욕망이 불손하여 다시 비천함을 느낀다. 공공장소에서 나의 쾌락은 배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만큼 특정 부분을 과장되게 그리는 아이처럼 내가 그리는 그림 역시 커다란 귀를 갖은 무언가일 것이다. 나에게 귀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공공장소에서, 혹은 어떤 이미지를 두고 갈팡질팡한다면 그것은 아마 귀로 형상화되지 못한 ‘에로티시즘’을 향한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에로티시즘. 이것은 성행위라고 말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초감각적인 경험이다. 쾌락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유한한 내 신체와 귀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비밀의 세계이다. 그 비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나에게는 음악만큼 좋은 도구는 없는 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문을 열기 위해 형이하학적인 내 몸을, 내 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내가 토마스 차핀의 음반을 걸어놓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에로티시즘이 작동한다. 존 콜트레인의 오리지널 LP를 사기 위해 이베이를 기웃거릴 때도 그 에로티시즘은 작동한다. 키쓰자렛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 눈길을 헤치고 수백 마일을 달려갈 때도 그 에로티시즘이 꿈틀댄다. 쾌락을 향한 에너지가 뒤숭숭하게 일상에 섞이고 말 때, 마치 사이렌의 아름다운 소리를 거부하기 위해 제 몸을 기둥에 묶어버리는 오디세이처럼 비장해진다. 오디세이가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제 몸을 묶은 것은 그 쾌락의 끝에 있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파멸로 이끄는 사이렌의 소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그것은 곧 심오한 쾌락이고 죽음이다. 에로티시즘은 죽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디세이처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
"감각의 정신으로의 추상이 에로티시즘"


나에게는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다.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재즈인가? 클래식인가? 유행가요인가? 이른바 장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나에게 릴랙스를 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인가? 예민하고 영민한 나의 감각을 일깨우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말인가? 

좋은 음악이란 감각과 그 감각이 느끼는 쾌락과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하는 음악이다. 에로티시즘으로 가기 위해서는 감각을 ‘추상(抽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적인 편안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관념화하고 정신적으로 추상시킬 수 있어야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흔히 말해지는 감각적 일차 단계, 섹스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영원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측면이다. 관념화된 쾌락, 이것이 에로티시즘이다. 우리의 귀는 정신적인 것에 닿으므로 감각기관인 귀를 발전시킬 때 고차원적인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악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느낄 것인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재즈와 같이 임프로비제이션 음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임프로바이저의 창의성, 유동성, 노마드적 요소, 반-토널리티, 테크닉…. 재즈는 타부를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던 에로티시즘 그 자체와도 유사하다. 임프로비제이션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하모니, 리듬, 형식 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소규모 재즈 캄보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변증법은 우리를 충분히 깊은 재즈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서로 코멘트하기도 하고 백업도 하는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을 보며 각각 독립적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연주자의 자기희생을 응시하게 된다. 뛰어난 임프로바이저는 분석적이고 창의적이며 기술적인 테크닉을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가. 응시와 집중으로 그러한 연주의 사이클에 참여하여 유동적이고 효율적으로 감각의 협상을 진행하여야 한다. 리스너는 각자 다른 식으로 음악에 어프로치하게 되는데. 따라서 리스너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그루브와 무드만 지닌 채 챌린지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듯, 리스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루브와 무드만 느끼며 재즈의 본질을 다 아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로티시즘으로 가려는 동기를 가졌다면, 단기적,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좋은 음악을 수집하고 집중하고 챌린지하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음악을 오래 들었다고 반드시 ‘에로티시즘’ 훈련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어떻게 듣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진지한 집중과 탐구 없이 수집 그 자체에 골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발랜스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공연장에서 재즈를 감상할 때 연주자가 간혹 과장된 스킬로 청중을 순간 무아지경으로 이끌려고 하는 수준 낮은 경우를 보곤하는데 훌륭한 음악은 스킬과 챌런지 사이의 밸런스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재즈 공연에서 많이 행해지는 작풍 자체도 청중의 음악 수요와 뉘앙스 적으로 펼쳐지는 음악 자체의 수요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변증법적으로 합류된 방식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음악작품은 계획과 짜임새의 논리적인 면과 즉흥적이고  듣는 현지 상태의 논리가 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주로부터 전해지는 그 무아지경의 상태가 밸런스를 통해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로티시즘은 안정적인 쾌락의 상태인 것이다.

에로티시즘이 감각의 관념화, 정신 추상의 상태라고 말해질진대, 그렇다면 이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유용한 방식을 선택해볼 수 있다. 시각화된 이미지가 그것이다. 트럼보니스트 커티스 풀러는 임프로바이징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도 “그래픽적인 방법을 통해 음악을 보라”로 이미지화를 강조하곤 했다. 음악의 시각화에 대한 허쉬의 생각은 명료하다. “멜로디를 들을 때 어떤 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을 상상하라. 올라갔다 내려가고 비틀고…추락하려할 때는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려보라. 나는 이미지화시키는 것을 늘 생각한다” [폴 베르니너 저, Thinking in Jazz: The Infinite Art of Improvisation 중)

청각을 시각화시켜 추상하는 작업을 몸소 현실화하는 대표적인 연주자는 앤써니 블렉스톤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편의 추상화 양상으로 악보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공항 터미널을 영감으로한 그의 작품 Composition No. 377의 악보를 보라.  

앤써니 블렉스톤과 같이 청각에서 시각으로, 다시 시각에서 정신 추상을 하는 방법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시각 이미지 외에도 맛을 탐구하는 요리 연구가로서 나는 미각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일상에 나의 감각 기관으로 상상할 수 있는 다채로움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감각의 추상화는 그 자체가 새로운 감각기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다시 추상으로 발전해나가는 변증의 속성이 된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죽음과 하나로 보았다. 에로티시즘을 죽음의 축소판으로 보는 ‘작은 죽음’의 세계로 본 것이다. 절정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 암컷에게 잡아먹힐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수컷처럼.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이 존재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므로 삶을 포함한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갈 줄 알면서 영위되는 것처럼 삶 역시 죽음을 포함한다. 죽음을 말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기 위함이고 삶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출발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과정에 생성과 파괴가 있다. 죽음은 삶을 본질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며 죽음과 삶의 통로에 에로티시즘이 있고 좋은 음악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은 죽음을 표상하는 음악이며 동시에 삶을 표상하는 음악이다. 성행위와 달리 에로티시즘은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정상에는 에로티시즘이 존재하고 있을진대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독과 대면하고 극단, 다시말해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리스너는 이를 체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로틱의 영역인 섹스는 하나의 재료이자 단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섹스를 통해 합일과 연속성을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섹스는 개별자의 안정적된 감각을 저해하고 다시 우리를 위협한다. 섹스는 하나로 합일되고자 하는 개별 본성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좌절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장치이다. 리스너는 음악의 ‘몸’성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집중과 훈련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법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은 일주일 단위로 구성된다. 워밍업 / 집약과 집중 / 발전 / 성숙의 사이클로 구성해둔다. 

1) 워밍법 : 워밍업은 말 그대로 워밍업이다. 최근 나온 음반일 수도 있고 옛날 음악일 수도 있다. 포인트나 무드로 선택되기도 한다. 내가 식사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할 때 들을 수도 있는 BGM으로 내버려둘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BGM이라도 종일 틀어두지는 않는다. 집중의 시간을 위해 귀를 아낀다. 

2) 집약과 집중 : 집중해서 들어야 할 음악을 평소 골라둔다. “탐미용”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탐미를 하라는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사정이 조금 다르겠지만) 리스너는 제대로 탐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케일을 연구하는 등 굳이 재즈 이론을 공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국문학자나 작가가 아니어도 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듯 탐미를 제대로 하다 보면 재즈의 언어가 제대로 들린다. 재즈의 본성이 느껴진다. 

집중해야 할 음악의 선곡은 오래 하다 보면 자체 발전하여 자기 스스로 꾸미는 경우가 많지만(이것 역시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어느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리뷰나 전문지를 참고해볼 만 하다. 제대로된 리뷰를 읽고 재즈 음반을 구입하여 라이너 노트를 읽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약과 집중도 귀를 아껴야 한다. 아무리 애정이 깊다 하여도 일반적으로 30분을 혼신으로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상을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능력자이거나 건성으로 듣는 것이다. 듣지 않거나 공기의 허무 속으로 음들을 날려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집중할 곡은 10분 내외로도 충분하다. 아니 2-3분짜리 중요한 솔로를 몇 번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10분~30분을 투자할 수 있어야 진지한 리스너가 될 수 있다. 음반 전체를 다 듣지 못하더라도 나누어서 들어도 좋다. 집중과 집약을 할 수 있으면 나와 관계 맺은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음악이 형성되는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정기적인 텀으로 근육을 발전시켜 나간다. 에로티시즘의 훈련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나의 정신의 근육을 발전시키는 위해서는 정기적인 양질의 훈련이 필요하다. 리스너는 자신의 피상적인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할 줄 알아야 한다. 달콤한 디저트만 맛보려한다면 진정 좋은 음식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리스너는 감상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어야 한다. 음악은 감상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콤하고 편안 음악만 듣다보면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같은 공연료를 내고도 그 묘미의 극히 일부만을 겉핧기로 알고 갈 뿐이다. 오픈 마인드하고 집중하라.

3) 발전: 책 한 권을 읽어도 그 감동은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 텍스트가 주는 영향력을 음악에서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집약과 집중으로 자기화된 음악을 통해 내 일상에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진지한 리스너는 일상의 삶도 진지할 수밖에 없다. 음반 수집에만 골몰할지언정 그 물리적 음반에 대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 정리정돈하는 습관이라도 갖게 된다. 발전의 단계는 음악을 내 삶 속으로 끌어들여 그 음악의 체계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음악이 단지 듣고 있는 그 순간으로만 끝나버린다면 음악의 중요한 효과를 우리는 놓쳐버리는 꼴이 된다. 우리가 시간을 애써 써가며 듣는 음악을 그렇게 순간으로 날려보낸다는 것은 정말 아깝지 않은가. 강조하건대 음악은 정신의 영역에 존재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의 정신은,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감각의 경험을 기억한다. 좋은 재즈 음악을 통해 우리는 삶을 유동적이고 긍정적이고 소통하는 세계로 이끌 수 있다. 겸손과 비천과 위대함을 일상에서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발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소개하겠다.


4) 성숙 : 감각을 추상하는 단계, 즉 에로티시즘의 단계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하고 많은 음들을 체험하면서 쾌감에 이르는 어떤 공통분모를 산출하고 총체화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본능은 자연스럽게 데이터베이스화시켜 축적한다. 에로티시즘은 단편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아폴로적인 양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뮤즈의 어머니가 “기억”이라는 뜻의 므네모시네로 명명되는 것처럼 우리는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발전시켜야 한다.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의 2010년 저서 <Primacy of The Ear>에서 강조된 ‘뮤지컬 메모리’ 훈련도 도움이 된다. 감각의 기억력이 모여져 관념으로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닿을 때 새롭고 견고한 음악의 세계가 뮤즈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니까.


< 양수연의 추천 음반 >

추천 음반에는 재즈 언어의 법칙 안에서 형식을 파괴한 아방가드 음반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해하게 느껴지는 아방가드의 추상적 속성이 감각의 관념화를 더 용이하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꿔 말하면 용이하다는 것이지, 아방가드나 프리 재즈 음악이 다른 스타일의 음악보다 작품적으로 반드시 더 훌륭하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별의 작품들이 그 수준을 말해준다. 어떤 음악이든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나의 예와 같이 나름의 훈련이 필요하다.



The Art Ensemble of Chicago, [Bap-Tizum], Atlantic, 1998

시카고 아트 앙상블은  1966년 12월 시카고에서 색소포니스트 로스코 미첼(1940~)을 중심으로 레스터 보위(트럼펫), 마라치 패버스(베이스), 필립 윌슨(드럼)이 주축이 되어 처음 조직되었다. [Bap-Tizum]은 앤 마버 블루스&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괴성과 다채로운 악기들을 활용하여 급직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낸다. 신경질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자유분방하며 기괴한 면이 있지만, 혹사당한다고 느낄 만큼 분투하는 음악의 몸성이 느껴지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느린 호흡으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색소폰과 베이스 듀엣 곡 Unanka, 음을 가루처럼 흩뿌리는 다채로운 칼러와 무한한 혼란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작 Ohnedaruth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Albert Ayler Trio, [Spiritual Unity], ESP-Disk, 1965

1960년대 프리 재즈의 클래식이 된 음반, 제목 그대로 ‘영적인 합일’로 향하려는 알버트 아일러(색소폰), 게리 피콕(베이스), 서니 머레이(퍼커션)-개별자의 몸부림이다."Ghosts: First variation,” "The Wizard,” “Spirits,” “Ghosts: Second variation” 총 30분이 안되는 4곡으로 프리재즈에 새로운 혁신성을 던져주었다. 알버트 아일러보다 수년 앞선 1959년 오네트 콜맨이 막강한 프리재즈의 역량을 과시한 바 있다. 콜맨의 ‘파괴’와 ‘혼란’이라는 프리 재즈의 언어가 형식만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던 존 폴락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면, 알버트 아일러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어찌 보면 날 것과 같은 음을 영적인 조합으로 이끌며 보다 디테일 있는 아티스틱한 표현으로 감동을 준다. 본작은 존 콜트레인의 혁신적 음반 [Love Supreme]보다 5개월 전인 1964년 7월에 녹음되었다. 6년 뒤 34세를 일기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알버트 아일러, 그의 시신이 발견됐던 이스트 리버를 지날 때마다 나는 ‘영적인 합일’을 생각하곤 한다.



Mal Waldron & Steve Lacy, [Live at Dreher, Paris 1981], Hat Hut, 1981

최고의 색소폰-피아노 듀오 앨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81년 8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파리의 클럽에서 녹음된 피아니스트 말 왈드론과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랙시의 멋진 교감. 이 라이브는 1996년에 볼륨 1과 2로 나뉘어 각각 두 장의 더블 시디로 나왔었고 2003년에는 볼륨 1 & 2, 총 4장으로 합쳐 발매됐다. 재키 바이어드와 셀로니어즈 몽크의 어법을 연상시키는 말 왈드론은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의 감각성을 촘촘하게 조각한다. 평생 오직 소프라노 색소폰에 몰입했던 스티브 랙시는 그의 긴 연주 경력 동안 알려지지 않은 보석같은 곡이 많아 스타일을 캐내는 기쁨을 준다. 재즈의 본질의 특성을 잘 살리는 듀오 편성은 감각의 교미와 표현의 성실함을 직접 감지하기 쉽고 리스너에게 오픈된 상상의 공간을 제시한다. 돌발성의 우연이 심연 깊은 곳으로 직행한다.


Paul Bley, [Annette], hatOLOGY, 1992

폴 블레이의 연주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재즈 탐미 미학을 제공한다. 읊조리듯 느껴지나 동시에 무척이나 분명하고 독특하여 움직임 자체가 율동의 챌린지와 같다. 본작 대부분은 블레이의 첫째 부인 애니트 피콕(앨범 사진)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한 곡 한 곡이 표상적이며 라인 사이의 짧은 침묵은 미끄러져 내린 벌거벗은 음들이 숨죽이는 긴장의 공간이다. “Touching” 곡은 미니멀리즘이다. 피부에 간신히 닿아 떨리며 매만지듯, 또한 감성의 표피를 간절하게 벗겨내듯, 그렇게 ‘닿는’ 음악이다. 간절하기에 한없이 고독하다. 센스가 센서빌리티로 형성되는 교착점에서 끊임없이 리스너를 추궁한다. 감각의 세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고. 



Dave Liebman [Lookout Farms], ECM, 1974

이 음반은 노스탤지어를 향한 끝없는 여정을 상상하게 한다. 계획된 여정이다. 어래인지먼트가 주는 감동이 임프로비제이션의 맛깔스러움을 압도할 지경이다. 존 애버크롬비, 리치 바이락, 프랭크 투사, 제프 윌리암스를 비롯해 10명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프로그레시브 모던 재즈 앨범으로 Pablo's Story, Sam's Float, M. D. / Lookout Farm 등 세 곡으로 구성되었다. 24분간 연주되는 마지막 곡 M.D./Lookout Farm은 치밀하게 구성된 여러 패턴을 통해 다양한 텍스쳐와 칼러를 선사하는데, 본 음반의 구성과 컨셉을 설명하기 위해 리브맨이 동명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이다. 리브맨은 훌륭한 임프로바이저이자 개념론자(conceptualist)라 할 수 있다. 본작이 발표되기 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혁신적인 [On The Corner]앨범을 녹음했었으므로 리브맨의 이른바 ‘뉴 사운드’에 대한 실험력이 물이 올랐을 때이기도 하다. 본작은 데이브 리브맨의 ECM 데뷔 음반이다. 리브맨은 ECM을 통해 본작과 이듬 해 [Drum Ode] 총 두 장의 앨범을 냈다. [Lookout Farms]는 숨죽이고 한번에 들을 수 있는 음반이다. 장황한 Farm의 숲속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Don Cherry [Blue Lake], BYG, 1971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한 음반이다. 이 음반을 듣고 네이티브 어메리칸 인디언 플룻을 사서 연습했을 정도였으니까. 광활한 뉴멕시코주의 타오족 거주 지역의 블루 레이크. 야생의 세계에서 존재의 확고함을 실감하기 위해 분투해야했던 투쟁의 인디언 역사. 돈 체리의 본 악기 트럼펫 외에도 인디언 플룻으로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저항하는 인디언, 그들의 삶 한복판으로 잡입해 새로운 음 족(族)을 창출해낸 것 같다. 보이스로 주술 하는 돈 체리는 가히 새 음족의 추장이다. 음들을 흩뿌리고 감성을 건드린다. 존재가 추구하는 합일의 세계로, 또한 그것을 방해하는 내 안의 저항을 매만진다. 탐미는 매만짐이다.



Julius Hemphill [Fat Man and the Hard Blues], Black Saint. 1991

줄리우스 헴필(1938~1995)은 나에게 있어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가 오랜기간 누적된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그 화석을 연구할수록 또 새롭고 신비스러운 것들이 쏟아져서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존재. 줄리우스 헴필의 리스너라면 전작들, [Dogon A.D.](1972)나 [Coon Bid’ness](1975)만으로도 충분히 매료됐겠지만 헴필의 다른 양상의 혁신적 앨범들은 World Saxophone Quartet 이후의 줄리우스가 섹스텟을 구성하면서부터 본격화됐으므로 살펴볼 만하다. 듀크엘링턴이 색소포니스트였다면 분명 이러한 그룹을 꿈꾸지 않았을까? 한 명의 알토(줄리우스 헴필), 두 명의 소프라노(마르티 에이를리히, 칼 그럽스), 두 명의 테너(제임스 카터, 앤드루 화이트), 바리톤(샘 퍼니스), 여섯 명 멤버 모두가 섹소포니스트라는, 대단히 독특한 구성의 섹스텟이 아닌가. 줄리우스는 색소폰 섹스텟으로 두텁고 깊은 하모니의 수준 높은 극 하나를 완성한 것만 같다. 블루스, 가스펠 등 흑인의 뿌리와 감성을 캔버스 위에 논리적으로 배열한 뒤 창의적인 또 다른 감성의 구조를 쌓아놓았다. 색소폰이 닿으려는 에로티시즘의 세계, 바로 이것이 아닐까.



Thomas Chapin [Menagerie Dreams], Knitting Factory, 1994

토마스 차핀(1957-2005)은 라산 롤랜드 커크와 에릭 돌피를 합쳐놓은 것 같은 숨은 천재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치코 해밀턴 밴드와 활동했고 재즈 클럽 '니팅 팩토리'가 만든 니팅 팩토리 레이블의 간판 연주자였으며 존 존, 안토니 블랙스톤과 많이 협연했다. [Menagerie Dreams]에도 존 존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본작은 차핀 트리오의 역량이 집결된 음반 중 하나로 차핀 작곡의 “Bad Birdie”의 2분부터의 솔로와 듀크 엘링턴 곡 Daydream의 인상적인 형식에 집중해볼 만 하다. 차핀이 그려내는 세계는 역동적 몽환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몽상가였고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에릭 돌피처럼 새소리를 탐구하고 자아화시켰다. 차핀의 몽상에 동참해보자. 사후에도 그의 몽상을 쫓는 리스너들이 그를 기념하고 있다. 몽상을 낳은 천재. 그 몽상을 에로티시즘으로 연결하는 것은 리스너의 몫이다.


Keith Jarrett [Radiance], ECM 2005

키쓰 자렛은 늘 전작의 명반들과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걸출함은 워낙 독보적이고 이슈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여러 명반을 차치하고 [Radiance]의 각별함 역시 별개의 운명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 언급되지만 몹시도 탐미적이다. 이전의 키쓰 자렛과 관련한 나의 글에서 나는 키스 자렛 음악의 몸성과 옴짤달싹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지고 마는 수동적 리스너로서의 나에 대한 한탄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다. 신체적 병약함을 극복하고 솔로이스트로서 다시 무대에 오른 키스 자렛이 음악의 몸성에 힘겹게 분투하고 자기화하고 그런 음악적 자아가 표출하는 음악적 팡세를 [Radiance] 음반으로 구성하였다. 진실을 담은 간결한 아포리즘이다. 유명세를 타는 키쓰 자렛에게 리스너는 소수의 참여자와 다수의 관찰자로 구성된다. 그의 새 앨범은 비참을 포함한다. 키쓰 자렛은 분투하는 만큼 존엄을 갖는다. 존엄을 갖는 만큼 키쓰 자렛은 소진된다. 키쓰 자렛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인가? 오만한 것은 키쓰 자렛이 아니라 리스너일 수 있다. 그는 멜로디 그 자체이다. 그는 에로티시즘 그 자체이다. 빛남, 광명의 의미가 있는 Radiance의 솔로 ‘단편집’(기존의 긴 솔로 트랙들을 떠올려보라)을 통해서 무한함과 허무의 중간 상태에서, 광명과 비참의 중간 상태에서 리스너는 비로소 심연의 질서 속으로 키쓰 자렛이 이끌어가는 에로티시즘의 단계로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John Coltrane, [Love Supreme], Impulse!, 1965

재즈가 스피리추얼의 세계로 올라섰다면 단연 그 시작과 중심에는 존 콜트레인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명반 중 명반으로 꼽고 있지만, 대중적인 음반은 아니다. 나는 이 음반이 시디장 구석에서 빠져나와 모두의 리빙룸에서 끊임없이 자주 재생되는 것을 꿈꾼다. 음반에서처럼 나는 “Love Supreme” 보이스를 주술처럼 19번 읊조리곤 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 작품의 의도와 정신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과 평행선을 이루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 꿈틀대는 물결은 잔잔하되 심연에 들끓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는 삶을 압도할 지경이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고 하였는가. 이 음반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에로티시즘의 세계는 그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히 흐르고 마르는 법이 없다.



<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1>은 <재즈피플> 2015년 3월호를 통해 소개했다. 본 글은 후속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