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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Column

(재즈탐미 8회)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1 : 스윙 재즈의 메카, 코튼 클럽을 찾아서.

월간 재즈피플 2014년 8월호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스윙 재즈의 메카, 코튼 클럽을 찾아서.



스윙과 비밥의 흔적을 찾아 뉴욕 이곳저곳을 누볐던 지난 5월. 비밥을 태동시켰던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와 한때 비밥의 거리라 불렸으나 지금은 재즈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맨하탄 32번가에 대해서는 본지 6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초여름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체감하며 할렘 한복판을 쏘다녔던 이야기로 그날의 여행을 이어가고자 한다. 

도시란 곳곳에 위험천만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겠지만, 흑인 거주 지역이자 슬램가로도 알려진 할렘을 나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할렘의 가스 폭발로 빌딩이 붕괴되고 사망자가 속출한 사고가 일어난 지 채 두  달이 안된터라 걸음은 보다 조심스러웠다. 노후된 가스관이 문제였던 사고였다. 90년대 이후 새 건물이 많이 증축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노후화된 빌딩과 불결한 시설물이 거리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곳이 할렘이었다.  길거리에 떼를 지어 서 있는 청년들, 온갖 욕설로 난무한 거리의 낙서, 귀가 터져라 강력 우퍼 볼륨으로 힙합 드라이빙을 하는 사람들. 흑인 거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 문득 난감해졌다. ‘흑인 음악’ 재즈를 제외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이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세 집 건너 하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미용실, 가발 가게, 화장품 가게 등은 치장하기 좋아하는 흑인 여성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에서 헤어 손질 비용의 30%는 흑인 여성들로 인해 발생한다는 통계가 있다. 미용실에는 오전임에도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가 자라면서 머리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작업으로 머리를 꼬고 있었다. 적게는 세 시간부터 10시간까지도 걸리는 작업이라고 한다. 70년대 한국의 동네 이발관 비슷한 허름한 미용실에서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용실 외관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창문 열린 윈도우 너머로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미용사 한 명이 뛰어 나왔다. 

“당장 여기서 꺼지던가 100불 내고 사진 찍어!”

아프리카 전통 복장과 흡사한 알록달록한 드레스에 머리를 스카프로 꽁꽁 도며맨 이 여성은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그녀의 흙빛 주름진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땀방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누그러트리고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어딨는지 아나요?” 

미용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더니 

“코튼 클럽? 난 그런 곳에 관심 없어”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한 여성이 소리쳤다. 

“거긴 춤추는 곳이잖아. 지금 가봤자 닫혀있을걸.”

그들은 코튼 클럽에 대해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들어가버렸다. 

듀크 엘링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튼 클럽. 그러나 그곳에 가기 전에 벌써 진이 빠지려고 했다. 거리에서 불친절한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로 녹초가 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찬란한 역사는 어디로? 현재의 코튼 클럽


코튼 클럽은 맨해튼 서쪽 마틴 루터킹 주니어 블로바드라고 불리는 125번가에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맑은 하늘에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건너편 카페에서 코튼 클럽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곡을 모은 음반을 귀에 꽂았다. 2011년 발매된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Storyville 1038415). 이 음반은 1938년 4월 17일부터 5월 29일까지 코튼클럽에서 녹음된 방송용 라이브였다. 앨링턴의 음악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코튼 클럽의 전성기가 거의 끝나가던 시기의 녹음이다. 78 RPM판으로 녹음된 47곡이 두 개의 시디로 나뉘어 복원된 것인데 코튼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든다. 낡고 지글거리는 음질이 강한 빗소리와 함께 운치를 자아내는 듯 하다.

이윽고 비가 개었고 코튼 클럽의 문도 활짝 열렸다. 입구에 놓인 책상 앞에는 티켓을 받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몹시 친절한 말투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는 공연이 시작하려면 멀었으니 들어와서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이곳은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던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77년에 재오픈된 곳이었다. 

럭셔리했던 옛 코튼 클럽과 달리 현재의 코튼 클럽 실내는 몹시 소박했다. 70년대 오픈했을 당시 그대로의 인테리어인 듯 했다. 붉은 색 테이블 위에 깔린 비닐과 밋밋한 플라스틱 의자는 옛날 옛적 빵 가게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빨간색 조명과 네온사인이 시골 선술집을 연상시키는 듯도 했다. 무대는 협소했지만 1층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무대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쏙 들었다. 2층은 보다 프라이빗한 대화가 가능한 곳이었다. 벽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이르는 찬란했던 코튼 클럽 전성기의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오케스트라 편성의 스윙 재즈의 메카,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개의 상징은 다름 아닌 코튼 클럽과 듀크 엘링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코튼 클럽은 외견상은 허름해 보이지만 도쿄에도 2호점을 낼 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코튼 클럽에는 매 주말 열리는 가스펠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과 관광객들이 몰린다. 월요일에는 스윙 댄스 나잇으로 꾸며져서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한다. 빌리지 뱅가드나 버드랜드와 같은 재즈 클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흑인들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댄스 파티가 열리는 장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리지널 옛 코튼 클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옛 코튼 클럽도 스윙 재즈, 즉 춤을 추기 위한 댄스를 연주했고, 코미디라든가 벌레스크 같은 희극 혹은 보드빌과 같은 버라이어티 쇼도 선보였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콜롬비아 대학이 우리 클럽을 포함해 이 지역을 매입하겠다고 덤벼서 절대 안판다고 싸웠어요. 학교 캠퍼스 확장하려고 주민들까지 다 내쫓겠다는 거였죠. 이게 말이 되나요? 코튼 클럽을 없앤다는 건 흑인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건데….결국 우리가 이겼죠.” 코튼 클럽 웨이츄리스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코튼 클럽의 정신, 즉 할렘 컬쳐의 대표라는 자부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 전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할렘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궁금했다. 



맨하탄 서쪽 125번가에 있는 현재 코튼 클럽의 모습. 30년대 코튼 클럽의 역사를 이어받아 1977년 재오픈한 곳이다.


 현재 코튼 클럽의 내부. 붉은 색 테이블과 조명이 인상적이다.


 코튼 클럽 입구에서 티켓을 받는 직원. 이들은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했던 코튼 클럽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 앞에서


코튼 클럽은 1920년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인 잭 존슨이 세운 “클럽 딜럭스(Club Deluxe)”가 전신이다. 잭 존슨이 마피아 두목이었던 오웬 ‘오우니’ 매이든에게 클럽을 넘기면서 1923년부터 코튼 클럽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장소는 142번가와 레녹스 애비뉴가 만나는 코너에 자리했다.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다고 할 수 없었다. 택시 운전사가 142번가 어딘가에서 여기 어디쯤 아니겠느냐며 퉁명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차를 세우게 했다. 현재의 코튼 클럽이 맨해튼과 제법 가까운 웨스트 사이드에 있었다면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는 업타운, 즉 주거지가 밀집한 ‘진짜 할렘’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8차선 도로를 중앙에 둔 인도, 그러나 상점들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고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드물었다. 언제 비가 쏟아졌느냐는 듯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나는 황량한 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정적이 긴장되어서 나도 모르게 움칫거리고 말았다. 문이 닫힌 상점 앞에서 청년들이 삼삼오오 몰려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들의 시선이 일찍부터 나에게 고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쪽 모퉁이 구석에서도 눈빛들이 느껴졌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뭇 불안했다. 아니, 모든 불안은 할렘에 대한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할렘에서는 최대한 관광객티를 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관광객이 아니라 친할렘적인 복장과 말투를 쓰는, 마약을 단속하는 사복 경찰이라는 것이다. 마침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 밖을 나온 노인에게 코튼 클럽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아버지에게 코튼 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코튼 클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20달러를 줬더니 코튼 클럽의 방향을 짚어주었다. 예상했던 장소였다. 그 노인에게 몇 분간 들었던 코튼 클럽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30년대 당시 이 길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장소였는지 과장스럽게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보이는 그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은 진작에 사라졌고 지금은 ‘미니싱크 타운 하우스’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할렘에서 총기범죄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단체 건물이었다. 

1922년, 마피아 두목 오웬이 코튼 클럽이라 이름 지었을 때 이곳이 쇼비즈니스의 정상에까지 올라갈 엄청난 곳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40년에 문을 닫은 뒤에도 할렘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 공을 세운 장소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2014년 5월.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겠다고 물어물어 찾아온 아시안 여성이 이곳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오웬은 이것만큼은 분명히 예측했을 것이다. 금주령이 떨어진 이 땅에서 백인들이 몰래 술을 마시기 위해 할렘 은밀한 곳까지 반드시 찾아 올라오리라는 것을. 


1923년 142번가와 644 레녹스 애비뉴에 세워졌던 초창기 코튼 클럽의 자리.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있다.


1923년 처음 설립된 코튼 클럽의 모습 (출처: 뉴욕 시티 홈페이지)


코튼클럽 전성기 그리고 듀크 앨링턴


코튼 클럽 출연 당시의 듀크 엘링턴.


1927년 가을, 28세 청년 듀크 엘링턴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밴드에 추가로 다섯 명을 더 영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연주 장소였던 코튼 클럽의 오디션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곳 운영진의 요구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클럽은 최소 11명의 뮤지션을 요구했다. 듀크에게 코튼 클럽에서의 오디션 기회가 온 것은 순전히 킹 올리버와 자신의 매니저 어빙 밀스 덕분이었다. 킹 올리버는 그해 9월 개런티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코튼 클럽의 하우스 밴드 자리를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듀크의 매니저 어빙 밀스가 오디션의 기회를 얻어온 것이었다. 어빙은 듀크의 수입 45퍼센트를 가져가는 계약 관계였고 어빙이 열심히 일을 찾아온 덕분에 듀크는 레코딩 기회도 여럿 얻을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듀크가 고향 워싱턴에서 할렘으로 이주해온 것은 불과 3년 전 일이었으나 워싱턴에서부터 닦아온 기량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에서의 성공을 코튼 클럽을 통해 뉴욕에서도 이어가고 싶었다. 코튼 클럽은 듀크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흡족해했고 1927년 12월 4일 코튼 클럽에서 듀크 엘링턴 코트 클럽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이 열리게 된다.

코튼 클럽은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백인들만 청중으로 받는다는 것 그리고 최소 167㎝의 키와 옅은 피부색을 가진 흑인 여성만 엔터테이너로 고용한다는 것이었다. 지원한 모든 여성은 소위 ‘페이퍼 백(Paper bag)’테스트를 거쳐야 했는데 즉, 물건을 담는 갈색 종이 봉투와 비교했을 때 그보다 옅은 피부색을 가진 여성만이 고용될 수 있었다. 코튼 클럽은 철저히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코튼 클럽이 오픈하게 된 것도 1920년부터 시행되었던 금주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할렘에 클럽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법으로 술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인들이 음지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할렘의 코튼 클럽은 더없이 근사한 장소였다. 198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코튼 클럽’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마피아의 아지트였고 마피아 보스가 운영했던 재즈의 메카가 바로 코튼 클럽이었다. 불법이 자행된다는 점에서 오명(汚名)의 클럽이기도 했지만 듀크 엘링턴과 같은 재능있는 뮤지션들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꿈같은 장소였다. 코튼 클럽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라디오 방송을 위한 라이브 레코딩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듀크의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코튼 클럽에서의 주 작곡자는 지미 맥휴였고 작사는 도로시 필즈가 주로 맡았는데 앨링턴도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코튼 클럽 시절 듀크 엘링턴은 1928년 Victor(지금의 BMG)레코드에서 발매된 Black and Tan Fantasy와 Creole Love Call, 두 개의 첫 히트곡을 냈다. 이듬 해에는  The Harlem Footwarmers라는 이름으로 Doin’ the New Low Down, Diga Diga Doo 등이 Okeh레코드 (현 Sony)를 통해 발매되기도 했다.  듀크의 초기 최대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Mood Indigo는 듀크가 코튼 클럽을 떠나기 5개월여 전인 1930년 10월 15일에  Brunswick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는데 이 곡은 코튼 클럽에서 연주했던 Dreamy Blues에 가사를 붙이고 발전시켜서 완성된 곡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4년여간의 코튼클럽 하우스 밴드로서의 활동을 끝냈던 1931년 2월, 그는 전국적인 명사가 되어 있었다. 코튼 클럽을 떠난 후 그는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Rockin' In Rhythm, Creole Rhapsody, Sophisticated Lady을 비롯한 많은 명곡을 더 남겼는데, 이후에도 라디오 방송 레코딩을 위해 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코튼 클럽에 서기도 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이어서는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1940년 코튼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캡 칼로웨이 시절 코튼 클럽은 수난을 겪었는데 1935년 할렘에 폭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할렘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시각이 팽배했고 이에 코튼 클럽은 1936년 9월 다운타운 쪽 웨스트48가로 이전하게 됬다. 

코튼 클럽의 대표 엔터테이너는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외에도 싱어 에설 워터스, 레나 혼, 댄서였던 빌 보장글스 로빈, 니콜라스 브라더스, 도로시 댄드리지 등이 있다. 레나 혼은 초기 코튼 클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뮤지션인데 16세의 나이에 무대에 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운타운으로 이주했던 코튼 클럽 2기에서는 루이 암스트롱, 베시 스미스, 엘라 핏제럴드, 넷 킹 콜, 빌리 홀리데이도 출연해서 이름을 알렸다. 코튼 클럽은 1940년 높은 렌트비와 나이크 클럽을 대상으로 한 세금 조사 압박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코튼 클럽은 ‘뉴 니그로 운동’이 펼쳐졌던 할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흑인들의 재능이 오직 백인 청중들을 위해서만 펼쳐질 수 있었기에 보통 흑인들에게는 외면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코튼 클럽 말기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과장된 제츠쳐로 노래했던 루이 암스트롱 보다 듀크 엘링턴이 할렘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백인의 광대임을 거부하려했던 그들의 저항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29년 녹음된 루이 암스트롱의 “Black and Blue?”에서 “나의 유일한 죄는 내 피부색”이라 노래하는 루이는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애잔하다. 이 곡은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 보다 10년이나 앞서 인종 차별 문제를 지적한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이 암스트롱의 해맑은 웃음이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도 미국은 인종 차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루이가 노래했듯 검은 피부가 ‘죄’라는 인식은 드물 것이다. 아니 할렘에서만큼은 검은 피부색이야말로 권위를 가진다. 빈곤할지언정 그들이 쌓아온 저항의 역사를 존중한다. 그들의 피부를 존중한다. 흑인이 만든 재즈가 전 세계에 퍼졌을 지라도 할렘 특유의 컬쳐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다. 


1927년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할 무렵의 듀크 엘링턴 코튼 클럽 오케스트라.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프레디 젠킨스(Freddie Jenkins, 트럼펫), 투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트럼펫), 소니 그리어(Sonny Greer, 드럼), 아더 웻솔(Arthur Whetsol, 트럼펫), 잔 티졸(Jaun Tizol, 트럼본), 웨랜 브라우드(Wellman Braud,베이스),  해리 카니(Harry Carney, 색소폰), Fred Guy(프레디 가이,벤조) 바니 비가드(Barney Bigard,클라리넷), 조 난튼(Joe Nanton, 트럼본),  조니 호드지스(Johnny Hodges, 색소폰)과 듀크 엘링턴(피아노)


1936년 코튼클럽에서의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와 코튼 클럽 코러스의 공연 모습. 


16세의 나이에 코튼 클럽 무대에 섰던 인기 가수, 레나 혼.


                 초창기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일명 ‘정글 사운드’에 영향을 주었던 트럼펫터 제임스 바버 마일리


추천할 만한 코튼 클럽 라이브 음반.


Duke Ellington Live at the Cotton Club

1927년 12월 29일~1929년 9월 16일 라이브 녹음

2001년 TKO Record.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던 1927년부터 2년간의 연주를 모은 음반. 특히 그의 오케스트라 초기 트럼펫터였던 바버 마일리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의미가 깊다. 마일리는 그라울(Growl)스타일, 즉 으르렁거리는 사람의 발성 기교를 흉내 낸 거칠고 야성적인 사운드를 선호했고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운드를 그 시대 사람들이 ‘정글 스타일’이라고 불렀던 보다 거칠고 세련된 느낌의 색깔로 변모시키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1938년 4월 17일~1938년 5월 29일까지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커튼 클럽 라이브.

2011년 Storyville.


후기 듀크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커튼 클럽 라이브로 47곡이 두 장의 시디에 나뉘어 담겨져 있다. 보너스 클립으로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엘링턴의 연주 클립이 담겨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