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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Column

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새를 쫓던 천재 소년, 에릭 돌피. 그가 남긴 유산 (1)

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

새를 쫓던 천재 소년, 그가 남긴 유산.


(에릭 돌피 1928.6.20 ~ 1964.6.29)


서울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던 1986년. 내가 살던 지역의 학생들은 성화 봉송을 위한 매스 게임 연습에 동원되었다. 반나절 이상을 카드 섹션이나 집단 무용 따위를 연습해야 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에게 국가가 강요한 유희(遊戱)는 버거웠다. 탈주를 꿈꾸었다. 나에게 다른 세상으로 이끈 사람은 에릭 돌피였다. 돌피를 듣는 것은 비밀스러운 나만의 놀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돌피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나서야 처음 느끼게 되었다. 여태껏 경험한 적 없는 실로 기묘한 소리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낯선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려 따라가다 강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던 아이들처럼 나는 돌피의 음에 유괴된 채 재즈의 강으로 빠져 버렸다. 1961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는 '아주 멀리 떠난다'는 제목의 뜻처럼 돌피 역시 탈주와 도약을 꿈꾸는 듯 느껴졌다. 돌피의 연주가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새를 쫓고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처럼 연주하고 비상하기를 갈망했다.

“나는 항상 새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연습하곤 했습니다. 새 소리를 녹음한 뒤 느리게 재생해봤더니 플루트와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플루트를 느리게 연주하는걸 녹음해서 빨리 돌려보았더니 역시 새 소리 같았구요. 새들은 음과 음사이에 또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F와 F#사이에 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이지요. 인도 음악이 쿼터 톤을 가지고 있듯이 새는 아주 특이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운비트, 1962년 4월 12일 인터뷰)


에릭 돌피는 나의 히로우면서 동시에 미스테리였다. 그가 불현듯 다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에릭 돌피 사망 50주년을 맞아 에릭 돌피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있었던 가운데 에릭 돌피의 유품을 미 의회 도서관이 확보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박스 다섯 분량에 달하는 돌피의 유품은 대부분 그의 음악 문서와 테이프였는데 돌피의 친구인 헤일스 스미스 부부를 거쳐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뉴튼이 보관해온 것이었다.

찰리 파커, 스트라빈스키, 바흐의 작품을 채보한 문서, 특히 바흐의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Bach's Cello Suite No.1과 플루트를 위한 Partita In A Minor For Flute의 채보는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임프로비제이션의 기반으로 쓰려고 작곡한 많은 노트도 있었고 새소리를 채보한 문서도 있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이 새소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역작 "새의 카탈로그" 작품이 완성된 해가 1958년이니 아마 돌피는 메시앙과 비슷한 시기에 새를 연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돌피의 유품은 그가 얼마나 음악의 구조에 대해 면밀히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에릭 돌피는 여러 음악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 음악, 특히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 인들의 노래도 차용하고 있었다. 유품에는 발표되지 않은 곡들도 다수 있었으며 기존과 다른 편곡의 Hat and Beard, Gazzelloni, The Prophet 작품도 있었다. 

에릭 돌피는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이 물건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남기고 1964년 미국을 떠났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돌피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연습만 하는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연습을 끝내고도 집에서 더 하려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했죠. 그와 만나려면 그가 연습을 끝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요. 저 녀석은 언젠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모든사람이 생각했지요." 에릭 돌피의 중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1928년생 캘리포니아주 LA에서 태어난 에릭 돌피는 중학교 2학년 때 남가주 대학 음대의 장학금을 얻을 만큼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리었다. 부모와 학교 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초중고를 거치면서 심도 있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돌피의 부모는 외동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집 마당에 연습실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서 음악을 전공할 때에는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를 음악적 멘토로 삼게 된다.

돌피는 알토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이 주악기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실력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존 콜트레인을 포함해 LA에 공연하러 오는 타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면서야 그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졌다. 그에게 뉴욕에서 연주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피는 무척이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같은 선생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았던 여섯 살 위의 친구 찰스 밍거스도 50년에 이미 뉴욕에 정착해 찰리 파커와 연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돌피 역시 비상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완벽히 준비됐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거처에서 연구하고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닦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돌피가 서부에서 미대륙을 횡단하여 동부로 온 것은 치코 해밀턴 퀸텟의 멤버로서 활동했던 1958년이었다. 치코 해밀턴 퀸텟의 돌피가 1958년 7월 4일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Jazz on Summer’s Day>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동부의 섬에서 돌피의 플루트 연주는 뜨거운 한여름 밤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 치코 해밀턴 밴드로서 돌피는 음반을 여럿 녹음했고 이듬해 1959년에는 뉴욕의 버드 랜드 클럽에서 연주하고 방송도 탔다. 드러머 치코 해밀턴은 훌륭한 연주자이고 밴드 리더였으나 돌피는 “제한된 음악적 자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돌피는 치코 해밀턴 밴드를 떠나 자기의 음악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정착한다. 그의 옛 친구 찰스 밍거스가 돌피를 환영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콜트레인과도 교류를 이어나간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그러나 돌피는 강한 몰입도로 그의 음악 세계를 펼쳐보인다. 


에릭 돌피는 프레스티지사와 계약하고 1960년 한 해만 리더로서 세 장의 음반을 위해 녹음했다. 1960년 4월 1일 첫 리더작 <Outward Bound>를 녹음한다. 프레디 허버드, 재키 바이어드, 조지 투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전형적인 비밥 퀸텟 구성이다. 돌피의 룸메이트였던 22세의 프레디 허버드는 첫 리더작 <Open Sesame>를 녹음하기 직전의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돌피가 베이스 클라리넷으로 연주한 On Green Dolphin Street은 압권이다. 나의 돌피 패이버릿 중 하나인 Glad To Be Unhappy곡도 이 음반에 담겨있다. 라이브로 이 곡을 들었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체념조의 노래를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8월 15일에는 쿼텟 구성으로 2번째 음반 <Out There>를 녹음했다. 이 음반의 독특한 사운드를 위해 첼로가 등장한다. 첼로는 치코 해밀턴 밴드에서 만나 돌피와 통했던 론 카터가 맡았다. 두 사람은 그해 11월 듀엣으로 Dolphy'N과 Triple Mix라는 곡을 녹음했는데 에릭 돌피 사후에 각각 <Other Aspect>(1987), <Naima >(1987) 음반으로 나뉘어 발매된 바 있다. 실로 귀한 음원이 아닐 수 없다. <Out There>에는 찰스 밍거스에 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를 위한 곡 The Baron (밍거스는 LA에서 Baron Mingus라는 예명을 썼다.)과 밍거스의 곡 Eclipse도 연주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녹음된 돌피의 세 번째 음반, <Far Cry>에서는 찰리 파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재키 바이어드의 곡 두 개를 담았다. 론 카터와 재키 바이어드, 로이 헤인즈가 다시 참여했고 클리포드 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22세의 트럼펫 천재 부커 리틀과의 짧지만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부커 리틀이 이듬해 10월 요독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사망 석 달 전 FIve Spot 클럽에서의 라이브 <At The Five Spot>은 Far Cry와 더불어 에릭 돌피와 부커 리틀이 남긴 명작이다.

“재즈는 내 삶의 모든 것이다. 걷고 보고 듣고 내 감각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나는 음악으로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한 감정을 내 연주에 쏟아 부으려 한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앞으로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시도해야 할 것도 많다.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색다른 것들을 항상 듣게 된다. 그러면 늘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내가 음악가로서 더 성장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운드를 영원히 발견해 나갈 것이다.” (에릭 돌피)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과 논란에 휩싸이다.


1961년 5월에 녹음된 존 콜트레인의 음반 <Ole>의 오리지널 LP에는 George Lane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 프레스티지사와의 계약을 고려해 에릭 돌피가 가명으로 참여한 것이다. 

앞서 약간 언급했지만 존 콜트레인은 에릭 돌피의 LA 시절에 처음 알게 됐다. 1954년 존 콜트레인이 색소포니스트 조니 호지스와 공연하기 위해 LA에 왔을 때 콜트레인은 돌피 연주를 듣고 반하는데, 콜트레인 전기를 보면 마약을 사기 위해 돌피에게 돈을 빌린 것이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는 설을 소개한다. 돌피는 마약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콜트레인은 동부에 오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콜트레인은 조니 호지스 공연을 위해 1954년에 여러 번 LA를 왔고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LA에서 공연하러 왔을 때도 돌피와 시간을 가졌다. 돌피는 콜트레인과 잼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 얘기를 하느라 밤을 새울 정도로 깊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돌피는 콜트레인 전 인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콜트레인은 돌피에게 재즈의 메카 뉴욕에서 연주하기를 원했고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두 사람은 멀리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전화로 음악 얘기를 나누며 끈끈한 우정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에릭 돌피가 콜트레인 밴드에 참여한 것은 돌피가 세 장의 리더작 녹음을 끝낸 1961년이었다. 에릭 돌피는 오네트 콜맨과 비견되며 재즈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논란을 만들던 중이었다.  콜트레인도 Blue Train(1957), Giant Steps(1959), My Favorite Things(1960) 등을 비롯해 많은 작품으로 재즈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고 새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었다. 돌피와 콜트레인의 만남은 사건이었다. 특히 1961년 여름의 공연부터  11월 1일부터 5일간 연린 뉴욕 빌리지 뱅가드의 연속 공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공연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도 11월 23일 <다운비트> 잡지는 이렇게 혹평한다.

“최근에 커지고 있는 안티 재즈(Anti-jazz) 트렌드 성향, 즉, 아방가드 뮤직이라는 이름 아래 성장하고 있는 이 안티 재즈의 두 리더, 존 콜트레인과 에릭 돌피의 연주를 몸소 체험했다. 소름 끼치고 몸서리쳐진다. 두 개의 혼이 만드는 니힐리즘적인 운동(다운비트는 ‘연주’라는 말도 쓰기 싫어서 ‘exercise’라고 표현했다)이 그 밴드의 좋은 리듬 섹션을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콜트레인과 돌피는 의도적으로 스윙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안티 재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나키적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다운비트>의 혹평은 독자들의 상반된 뜨거운 반응으로 나타났다. 뉴욕 재즈신이 마치 혼란에 휩싸인듯했다. 

다운비트의 혹평으로 에릭 돌피는 크게 상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릭 돌피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조롱을 받았다. 콜트레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들은 우리가 음악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양 비판했다. 돌피가 마음이 상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상했다.” 

다행히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에게 ‘해명’의 기회를 줬다. 62년도 4월 12일에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의 공동 인터뷰를 진행한다. 콜트레인과 돌피의 서로를 향한 애정과 재즈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인터뷰의 내용은 지면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관련해서 독자께 숙제를 드린다면 당시 논란의 정점이었던 돌피 & 콜트레인의 빌리지뱅가드 공연이 다행스럽게도 1997년 콜트레인 탄생 71주년을 기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점, 그래서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을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2001년 파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61년~63년까지 존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를 담은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7장 박스 셋에서는 콜트레인 유럽 투어에 참여한 돌피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이 박스 셋에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이 포함되었고 특히 My Favorite Things에서 돌피의 플루트 솔로는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돌피를 포함해 콜트레인, 그리고 프리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터트리고 싶어서 참으로 근질근질하다. 다음 호에는 재즈 사에 길이 남을 역작 <Out To Lunch>와 돌피의 마지막 음악 여정을 이어가겠다. 

(다음 호에 계속)


에릭 돌피와 존 콜트레인의 공연. 다운비트 매거진이 '안티 재즈'라 혹평했던 1961년 경이다.


<프레스티지 시절 발매된 돌피의 앨범들>

Outward Bound (1960)

Out There (1960)

Far Cry (1961)

At the Five Spot, Vol. 1 (1961)







<콜트레인과 1961년 11월에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을 담은 박스셋,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돌피의 연주를 담은 2001년 출시된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 박스 셋,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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