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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Column

조지 거슈인의 꿈에서 오늘을 읽다-융합이라는 예술의 절정을 위하여

조지 거슈인의 꿈에서 오늘을 읽다.

융합이라는 예술의 절정을 위하여.


*이윽고 스물 두 번째 곡이 연주되기 시작되었을 때 많은 청중이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얼어붙은 듯 정지하고 말았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매우 독특한 클라리넷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기개 넘치는 소리, 라흐마니노프와 래그타임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새로운 매혹의 늪 속으로 청중을 이끌고 가는 듯했다.* 빼어나게 화려한 폭스트롯(foxtrot)을 타고 멜로디는 오감의 세세한 부분으로 내려앉았다. 곡이 끝나자 청중은 더 연주해달라며 아우성을 쳤고 여러 차례 고개 숙여 인사하던 지휘자는 끊이지 않는 기립 박수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을 일으켜 세웠다. 청중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준 바로 이 곡,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였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1924년 2월 12일, 뉴욕의 이올리언 홀 무대에 선 스물 다섯살 청년 조지는 과연 느끼고 있었을까?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던 이날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 거슈인의 작품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많이 들어왔을 것이고 거슈인이 음악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여다볼 기회는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재즈탐미는 거슈인의 삶에 대한 것이다. 

                     조지 거슈인 (1898.9.26 –  1937.7.11)


나는 조지 거슈인의 평전을 읽으면서 소름 돋을 정도로 전율을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가 시대의 한 획을 그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그러니까 1차대전이 끝나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미국을 대표할 새로운 음악이 필요하며 그것을 이루어낼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휘자 폴 화이트는 시대에 걸맞은 참다운 미국 음악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현대 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색 공연을 기획했다. 그리고 이 공연의 말미에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선보였다. 관중석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해 야샤 하이페츠,  프리츠 크라이슬러도 앉아 있었다. 이 위대한 음악인들은 무엇이 미국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이 말하길, 미국만의 홈그라운드 뮤직은 클래식 현대 음악처럼 이해하기 어려워서도 안 되었고 흑인이나 사창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재즈처럼 품위가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날의 진정한 해답은 '랩소디 인 블루'였다. 16분에 걸쳐 연주되었던 이 오케스트라 곡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거슈인은 3주 만에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했고 편곡할 시간도 촉박해서 데뷔하는 날엔 피아노 솔로 부분이 비워져 있었다. 악보에는 단순히 'Wait for nod', 피아노의 고개 신호 후 합주를 시작하라는 사인이 있었을 뿐이었다. 재즈교향곡이라는 틀 안에 여러 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어야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라고 거슈인은 생각했다. 1926년에 거슈인이 '씨어터'잡지에 발표한 글을 보자. 그는 재즈를 의식한 듯 "미국의 영혼은 흑인이 아니라 흑색과 백색이 다 섞여 있는 것이다. 모든 인종과 영혼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날 폴 화이트만의 야심찬 기획 공연에는 Livery Stable Blues외에는 흑인 작곡가의 작품은 연주되지 않았으며 단 한 명의 흑인 연주자도 없었다.  백인이 주도하는 미국 음악, 미국 음악은 백인만이 정의할 수 있다고 암시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조지 거슈인 그 자신도 주류의 백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여러 음악 사학자가 공감했듯이 나 역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형제와 함께 뉴욕의 서른 군데 아파트를 전전하며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던 일개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이 어찌 (감히) 미국의 보이스를 담을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많은 주류의 백인 음악가들이 추구해오던 작업이 무색할 정도로 '랩소디 인 블루'는 대부분  매체로부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미국 음악"이라는 찬사를 얻었고 거슈인은 일약 음악계의 파이오니아로 발돋움했다. 


빈민가 천재적인 소년의 시련, '블루 먼데이'와 '뉴욕 협주곡'

거슈인은 1898년 9월 26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의 형 아이라와 두 살 어린 남동생 아써, 그리고 8살 터울의 여동생 프란시스가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몇 해 전 러시아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이민을 온 아버지는 미국 사회의 여러 가능성에 도취되어 거의 매년 새로운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여 가족은 빈민가를 전전해야 했다. 유대인들의 계율에 엄격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문화적 다양성은 늘 열려있었다. 유태인 성(姓)인 '거쇼비츠'도 쉽게 발음될 수 있게 거슈인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거슈인이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를 회상하는 부분은 다소 신화적인 면모가 있다. 피아노 레슨을 단 한번도 받지 못했던 거슈인이 12살이 되던 해 자기 집에 들어온 낡은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 뒤 4년간 드뷔시, 리스트, 쇼팽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그의 피아노 선생은 거슈인은 천재이며 절대 재즈를 시키지 말라는 편지를 그의 부모에게 보냈다. 1916년 재즈 피아노의 파이오니아 중 한 명인 제임스 P. 존슨이 "피아노를 손에 댄지 4년밖에 안됐는데 묘기를 부리는 대단한 아이가 있다"며 거슈인을 언급하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거슈인의 천재성은 당대에 많이 회자된 것임은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거슈인은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음악 교육은 열심히 음악을 듣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다. 

"피아노는 빈민가의 나쁜 소년을 좋은 소년으로 변화시켰다. 나는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음이 손가락 사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거슈인은 말한다. 거슈인은 이미 10대부터 야망에 찬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고 Swanee라는 곡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시련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1922년, 스물셋에 작곡한 재즈 오페라 '블루 먼데이(Blue Monday)'는 대실패였다. '뉴욕 월드'잡지는 "제일 한심하고 바보같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성 없는 흑인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며 비판했고 결국 단 한번 연주하고는 바로 막을 내려야 했다.  청년 거슈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강한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믿음이란 서두에 언급한바, 바로 자신이 역사의 전환기에서 큰일을 해낼 바로 그 사람이라는 믿음이었다. 미국이라는 커다란 땅에 여러 갈래의 음악 스타일이 있고 그 위에 존립할 수 있는 통합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염원, 이 긴장의 시대에서 대표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그 욕망을 스스로 달래었다.  

2년 뒤 '블루 먼데이'의 실패를 딛고 발표한 '랩소디 인 블루'는 크게 호평받았지만 심드렁하거나 부정적인 평가 중에서도 의미심장한 면이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올린 다운즈 평론가는 "구조적으로 분명하지 않고 기술적으로도 개발되어 있지 않은 곡이다. 미국의 전통이 있으나 문학적인 측면이 좀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허점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썼다. 

거슈인은 유대인 특유의 강인한 콧날이 무색하게 부드러운 눈매와 입술, 턱을 지녔다. 늘 단정히 옷을 입었으며 말이 없었으며 순진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여성편력도 없었다. 그저 유부녀들 사이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녀들 사이에서는 불필요한 연애를 할 필요가 없이 안전함과 안락함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20대 중반의 거슈인은 명성과 재산을 얻으면서 호화 파티를 많이 열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저 피아노 앞에 오롯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윽하게 쳐다보았지만 거슈인은 늘 자신이 외롭고 고독했음을 토로했다. 그는 이미 그 시대의 영웅으로 묘사될 만큼 파이오니아로서 대우받고 있었지만 그만큼 세상의 시선과 비평에도 큰 압박을 받았다.   

거슈인은 '랩소디 인 블루'를 이을 대곡을 쓰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후계곡에 '뉴욕 협주곡(New York Concerto)'이라는 가제목을 달았다.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F 장조 (Concerto in F)'로 개명되어 1925년 12월 카네기홀에서 초연된다.  '랩소디 인 블루'가 발표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던 시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브람스가 나타났어도 이 정도의 열기는 없었을 것"이라며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도했지만, 혹평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협주곡으로서의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의 내용도 없다.” 

피아노 협주곡 F 장조를 작곡하는 동안 거슈인은 마감의 압박에 시달렸으며 음악 공부를 심도 있게 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가 아놀드 쇤베르크나 헨리 코웰, 윌링퍼드 리거 등과 같은 작곡가에게 하모니 훈련을 받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악장 알레그로 - 2악장 아다지오 - 3악장 알레그로아지타토로 구성된 피아노 협주곡 F 장조는 참신한 멋이 있었고 피아노 테크닉도 빼어났다. 피겨 스케이트 여왕 김연아는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이 곡을  편곡하여 배경음악으로 썼다.  많은 국내 언론이 거슈인의 '숨은 명곡'을 김연아가 꺼내 들었다며 열광했다. 피아노 협주곡 F 장조 초연 당시 혹평을 가했던 뉴욕 타임즈도 찬사를 보냈다. 복합 예술로 연출된 거슈인이 전 세계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거슈인은 피아노 협주곡에 실망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설 자리가 위축되고 있음을 느꼈다. 1924년 가을, 그러니까 피아노 협주곡 F 장조가 발표되기 얼마 전 뉴욕의 음악계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행보가 있었다. 다름아닌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가 파리 유학에서 귀국한 것과 루이 암스트롱이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의 클래식 음악과 재즈가 그 나름의 선봉에 선 파이오니어들에 의해 각자 고유의 길을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행보였다. 거슈인이 꿈꾸는 멜팅 팟(melting pot) 으로서의 음악, 클래식과 재즈가 융합되고 인종이 융합되는 음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거슈인이 바라던 융합(synthesis)이라는 이상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발상이 오히려 그를 어중간한 위치에 놓는 것은 아닌가? 거슈인이 설 자리는 클래식도, 재즈도 아닌 듯하였다. 그는 팝스여야(만)했다. 

거슈인은 교향곡을 구상하는 와중에도 많은 파퓰러 보컬 곡들을 작곡했다. 그의 형 아이라 거슈인이 작사를 도맡았다. 1924년 말에 나온 브로드웨이 뮤지컬 Lady Be Good은 형 아이라와의 첫 공동 작품이다. 이 작품의 Fascinating Rhythm은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가 노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슈인의 곡들은 다양한 보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보컬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창법이 다듬어지고 보컬 테크닉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재즈 뮤지션들이 앞다투어 그의 곡을 녹음했다. I Got Rhythm은 작곡 후 12년 동안 무려 79개의 레코딩 버전이 있었다. 그러나 거슈인은 피아노협주곡의 실패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작품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고 브로드웨이에 몸담으며 쉴 새 없이 뮤지컬곡을 쓰는 동안에도 ‘An American in Paris’(1928), ‘Second Rhapsody’(1931) 등 여러 개의 오케스트라 작품을 내놓았다.  


희비가 엇갈렸던 '포기와 베스'

거슈인이 평생을 통해 인정받고 싶었던 장르는 오페라였다. 첫 오페라 작품 ‘블루 먼데이’의 실패 이후 오페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그래서 브로드웨이와 필름을 통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하모니와 대위법 공부를 했고 마침내 그가 오페라화하고 싶은 스토리를 찾아냈다. 거슈인은 '포기(Porgy)'라는 대중 소설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 소설은 남부의 시골 마을 절음발이 흑인 거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1926년 거슈인은 '포기'의 작가 뒤보스 헤이워드에게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고 문의하였으나 이미 연극으로 각색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거절당했다가 1932년도에 이르러서야 오페라로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소설 '포기'는 거슈인이 말하고 싶은 모든 것, 즉 '멜팅 팟'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스토리였다. 절음발이 거지인 포기가 다른 남자(크라운)의 애인인 베스와 사랑에 빠진다. 베스의 애인 크라운은 살인자였고 포기는 베스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크라운을 살해한다. 그러나 정작 베스는 포기가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또 다른 남자의 꾀에 넘어가 뉴욕으로 떠나고 만다. 결국, 포기는 절음발이 몸을 이끌고 그녀를 찾으러 뉴욕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작은 시골을 배경으로 흑인들 간의 치정, 도박, 마약 등 밑바닥 흑인의 삶을 담고 있으며 다채로운 대사들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슈인이 열광할만한 모든 요소가 있는 작품이었다. 

저자인 헤이워드는 지역 신문에서 포기를 연상시키는 한 흑인의 이야기를 발견했었고 이를 소설화시켰다. 그는 백인었지만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린 경험이 있어 주인공 포기에 완전히 감정 이입될 수 있었다고 한다. 거슈인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는 동안 헤이워드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이들은 극의 배우들이 모두 흑인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당시만 해도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나와 연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흑인이 오페라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들은 오페라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거슈인과 헤이워드는 한 가지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거슈인은 흑인들의 대사에 레치타티보(말하듯이 노래하는 창법)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 반면 헤이워드는 반대했다. 거슈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산문을 읽는 캐릭터와 시를 읽는 캐릭터로 구분되듯이 흑인과 백인의 대화가 차별화되도록 흑인은 레치타티보로 대사를 읊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결국, 거슈인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문제는 오페라 경력을 충분히 가진 흑인 가수들을 찾는 일이었다. 결국, 포기 역은 바리톤 토드 덩컨(Todd Duncan)이, 베스 역은 소프라노 앤 브라운(Anne Brown)이 맡게 되었다. 정식으로 오페라 교육을 받았던 토드 덩컨은 대중음악을 무시했고 흑인은 영가를 불러야 한다는 공식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거슈인이 오디션을 볼 때에 18세기 이탈리아 아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덩컨에게 포기 역을 부탁하자 그는 되려 거슈인의 작곡된 곡들을 들은 뒤에 결정하겠다고 한 발짝 물러섰다. 거슈인은 '포기와 베스'에서 불릴 곡들을 들려주었고 덩컨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하였다고 한다. "백인인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영감을 받았기에 이토록 절절한 흑인의 감성을 담은 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일까" 

포기와 베스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Summertime"은 1933년 12월에 작곡되었다. 11개월간 모든 작곡을 끝냈고 이후 9개월간 오케스트라 편곡을 했다. 한 두 시간이면 노래 몇 곡을 작곡하는 그로서는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할애한 나날이었다. 거슈인은 '포기와 베스'야말로 자신의 일생일대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푸가(fugue)를 작곡하다니,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리라…"

1935년 8월에 보스턴의 콜로니얼 씨어터에서 리허설겸 초연되었다가 정식 데뷔를 위해 뉴욕으로 이동했다. 뉴욕에서는 총 세 시간짜리 작품이 많이 단축되었다. 마침내 1935년 10월 10일 뉴욕의 알빈 씨어터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극장에는 거슈인의 새 오페라를 보러온 청중들로 대만원이었다. 뉴욕의 평론가들은 1924년부터 거슈인을 벼르고 있었다. '랩소디 인 블루'이후에 나오는 대작들은 신통치 않았기에 그들은 더는 거슈인을 파이오니아로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브로드웨이쇼에 어울리는 팝스 작곡가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에 대한 문화적 기대감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랩소디 인 블루'때와 같이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인들은 청중석에서 보이지 않았다. 미국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던 아론 코플란드도 거슈인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연극 평론가와 음악 평론가 두 명을 보냈다.  

                                영화, 포기와 베스의 한 장면


첫 장면은 캐피쉬 로우라 불리는 흑인들의 아파트 정원이다. 빠르고 힘찬 서주가 끝난 뒤 주제를 피아노가 이어받아 블루스로 연주한다. 이어 여러 흑인 커플들이 등장하여 춤을 추며 낮은 톤으로 다-두-다를 반복하며 주술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때 무대 한편의 조명과 함께 등장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클라라)이 소프라노로 '섬머 타임'을 노래한다.  이 아름답고 절절한 노래가 끝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포기와 베스'에 등장하는 명곡들을 우리는 여러 경로로 들어왔을 것이다. 1막 1장에 서두에 등장하여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Summertime, 1막 2장의 My Man's Gone Now,  2막 3장에 등장하는I Loves You, Porgy, 3막 3장의O Lawd, I'm on My Way 등을 말이다.  특히 세리나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부르는 아리아 My Man's Gone Now는 소프라노 루비 엘지(Ruby Elzy)의 몫이었는데 관객을 압도할 만큼 잘 불러서 갈채를 받았다. 후에 이 세리아 역할을 부탁받았던 빌리 홀리데이는 My Man's Gone Now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 곡을 매일 밤 불러야 한다는 것은 가슴이 메어지는 일"이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My Man's Gone Now는 엘라 핏제랄드, 빌 에반스, 허비 핸콕, 마일스 데이비스, 빌 프리셀 등 많은 뮤지션들이 레코딩 했다. 

루비 엘지를 비롯해 '포기와 베스'의 가수들은 맡은 역할을 잘 했지만, 결론적으로 거슈인의 두번 째 오페라 작품이며 그가 일생 일대의 심혈을 기울였던 '포기와 베스'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한 마디로 대실패였다. 뉴욕타임즈 연극 평론가는 오페라 스타일의 레치타티보를 쓰는 것을 비판했고 음악 평론가는 오페라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 불평했다. 무엇보다 거슈인은 버질 톰슨의 비평에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 "거슈인은 지속적인 음악 개발 능력에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거슈인은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훌륭한 클래식 작곡가는 물론 아니거니와 제대로 된 작곡가도 아니다. 비판적인 사고 없이 '멜팅 팟'에만 중점을 줬다. 다양한 인종의 음악적 전통만 수용하려고 여기저기에서 퍼왔다. 포기와 베스는 생동감은 있으나 엉터리 전설에 기반을 둔 가벼운 오케스트레이션이다."  

흑인들 사이에서는 '포기와 베스'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도 가해졌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흑인들은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았으며 미신을 잘 믿는다. 주인공 남자는 절음발이고 여자는 마약중독자였다. 흑인 스스로 발언권이 없는 당시 상황에서 백인이 흑인의 상황과 감정을 세세히 묘사한 것은 인종차별과 다를바 없다는 주장이었다. 듀크 엘링턴도 거슈인의 노골적인 흑인 묘사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포기와 베스'는 결국 백인 상류층의 잘못된 계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공연은 석달만에 막을 내렸고 거슈인은 투자한 모든 금액을 잃었다.  여러 백과사전들이 '포기와 베스'를 당대에 성공한 오페라로 잘못 기술하고 있는데 거슈인 생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실패하자 거슈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1936년 할리우드로 떠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평가받았던 사람에게 시련이 닥쳤다. 할리우드는 그를 특별히 반기지 않았다. '포기와 베스'에 몰입하느라 거슈인은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낸 지도 오래되어가고 있었다. 유명 영화 제작자인 샘 골드윈은 거슈인에게 "당신은 왜 어빙 벌린처럼 히트곡을 못 내놓느냐"며 빈정거렸다.  

거슈인은 매일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거슈인은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에 휴식이 약이라는 충고 외에는 의사조차 그의 질병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벌리 힐스에서 그의 형 아이라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집에서 식사하는데 거슈인이 음식을 쏟았다. 아이라의 아내가 거슈인에게 당장 식탁에서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고 거슈인은 형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으로 힘없이 올라갔다고 한다. 형 아이라는 그 모습이 가장 마음이 아팠노라 회상한다. 그들은 작사가, 작곡가로서 좋은 동반자 관계였다. 아이라는 이날 이후 거슈인을 근방의 작은 집으로 이사 보냈다.  거슈인은 햇볕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아팠고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았다. 피아노는 더 이상 칠 수 없었다. 그러던 1937년 7월 9일, 할리우드로 온 지 1년여 만에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 다음 날 뇌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치의가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뇌수술 전문가를 주선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늦었고 거슈인은 사망했다. 1937년 7월 11일, 불과 서른 여덟의 나이였다. 그의 시신은 뉴욕으로 되돌아갔고 장례식날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지만 그를 추모하는 참석객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해 가을, 할리우드 볼 풋볼 스타디움에서 추모식이 열렸는데 프레드 어스테어가 거슈인 곡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를 불렀고 '포기와 베스'의 루비 엘지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 My Man’s Gone Now를 열창했다. 


 ( 거슈인의 음악 동반자인 형, 아이라 거슈인. 그는 조지 거슈인의 작품에 노랫말을 달았다.)


포기와 베스, 논란은 계속되다. 


거슈인 사후에도 '포기와 베스'는 찬사와 혹평을 오락가락하였다. 거슈인이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942년 '포기와 베스'는 뉴욕에서 리바이벌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평론가들은 성공의 주된 이유를 레치타티보를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초연 당시 가혹한 비평으로 거슈인을 아프게 했던 평론가 버질 톰슨까지 이번에는 찬사를 보내었다. 그러나 1953년에 리바이벌된 '포기와 베스'는 다시 비난에 휩싸였다. 줄리아드를 막 졸업했던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가 주인공을 맡았던 이 작품에 대해 제인스 힉스 평론가는 “흑인에 대한 가장 모욕적이고 가장 명예훼손적이며 가장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가혹한 행위”라며 악담을 했다. 1960년대의 리바이벌 작품에 대해서도 가혹한 평가가 있었다. 비평가 헤롤드 크롤스는 "거슈인은 1920년대 할렘 나이트 클럽에서 훔쳐온 음악으로 명성을 얻었다"며 독설을 내뿜었고 모든 흑인 음악가들은 '포기와 베스'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슈인의 이상에 걸맞은 '포기와 베스'를 부활해낸 사람은 다름아닌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었다. 1986년 사이먼 래들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포기와 베스’는 거슈인이 고집했던 레치타티보를 부활시키는 등 거슈인의 품위와 그의 음악적 목표를 완벽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악가 하롤린 블랙웰, 윌러드 화이트, 신시아 헤이몬, 데이먼 데반스, 신시아 클라레이, 브루스 허버드, 마리에타 심슨, 그레그 베이커가 참여했으며 글라인드본 합창단이 합창을 맡았다. 사이몬 래틀의 '포기와 베스'는 같은 캐스팅으로 1988년 2월, 스튜디오에서도 녹음되었다. 흑인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조지 거슈인에게 이제 평론가들은 '화이트 니그로'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융합의 음악을 이룬다는 거슈인의 꿈은 그의 삶을 이끌어온 주요한 힘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분명 성공한 작곡가였지만 진정한 멜팅 팟의 도시 뉴욕과 아브라함 링컨에 대한 이야기,  그토록 원했던 발레 작품에 대한 열망은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그가 죽은 뒤 공개된 재산은 당시로는 엄청난 40만 불 이상이었다. 이 중 '랩소디 인 블루'는 20,125달러 가치로 측정되었고 '포기와 베스'는 250불로 제일 가치 없는 곡으로 감정되었다. 예술도 경제적 가치로 재단시킬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미국의 속성일진데 '포기와 베스'가 거슈인이 떠나고 한참 후에야 찬사를 받은 것을 보면 거슈인의 꿈은 자본과 통속이 범람했던 시대가 감히 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친 비평과 오해의 칼날 속에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고독과 비애의 딱지 속으로 숨어들어간 꿈. 아니 도처에서 500여 개가 넘는 그의 작품들을 들어오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그의 꿈을 헤아려본 적이 있었던가? 인종적 융합으로 표출되는 예술의 절정에 그만큼 다가선 음악가가 있었던가? 거슈인의 그 꿈이 오늘날에도 이리 설레는 건 아직도 품어보아야할 시대의 과제로서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서두의 **부분은 거슈인 평전George Gershwin: An Intimate Portrait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왔다 /이 글에 등장하는 팩트들은 거슈인의 글과 메모들을 세세히 기록한 거슈인 평전들과 -The George Gershwin Reader(로버트 와이엇 외, 2004년), George Gershwin: An Intimate Portrait (월터 림러 저, 2009년)- 뉴요커(The New Yorker, 2005년 1월 10일)등 여러 기사에서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추천 앨범

Bernstein Century - Gershwin: Rhapsody in Blue / An American in Paris; Grofe, 1997, Sony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콜롬비아 심포니의 1959년 ‘랩소디 인 블루’를 최고의 레코딩으로 꼽는다. 조지 거슈인 오리지널의 가뿐한 느낌이 번스타인에 와서는 장중하면서 극대화된 기쁨으로 새롭게 각색되었다. 이 곡은 번스타인의 어메리칸 클레식들을 모은 다른 음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George Gershwin: Porgy and Bess (COMPLETE Recording on 3 CD's from 1988 Glyndebourne Festival Production)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과글 라인드본 합창단, 윌러드 화이트(포기 역), 신시아 헤이먼(베스 역) 등이 참여한 1988년 녹음된 스튜디오 음반이다. 거슈인의 품위와 그의 음악적 목표를 완벽하게 표상하고 있는 역사적인 음반으로 각광받는다.


Clara: Paula Ingram(sung by Harolyn Blackwell), The London Philharmonic conducted by Sir Simon Rattle, The Glyndebourne Cho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