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재즈피플 2014년 5월호


재키 바이어드를 그리며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다”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 후기


모던 재즈의 거장,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1922-1999)


1999년 2월 11일 오후 11시 40분. 뉴욕 주 퀸즈의 한 가정집에서 백발의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총알은 머리를 관통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노인의 두 딸이 그 집에 함께 있었지만 아무도 총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도 없었고 범행에 쓰인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면식범에 의한 소행이 아닐까 추정될 뿐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 이른바 모던 크리에이티브를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날 또 한 명의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를 잃어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 리포트는 더는 업데이트 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끔찍한 사고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 같다. 적어도 그를 주제로 지난 4월 13일 열린 "재키 바이어드의 삶과 음악에 관한 심포지엄"에서는 말이다. 


봄볕이 따사로웠던 4월 둘 째주 일요일 오후, 나는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 씨의 브룩클라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약속 시각보다 좀 일찍 도착했지만, 그는 봄날에 어울리지 않은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두른 채 일찌감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안부를 묻자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너무 슬프다"고 짧게 답했다. 노약자용 워커에 몸을 의지하며 힘겹게 집을 나서는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키 바이어드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흘렀지만, 그의 슬픔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슬픔에 잠긴 그와 함께 재키 바이어드의 심포지엄이 열리는 우스터로 향했다. 1시간 남짓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이 백발의 거장을 울게 하는 재키 바이어드는 진정 누구인가. 내가 들어왔고 느꼈던 그를 넘어서 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그를 사로잡고 있단 말인가. 랜 블레이크 씨는 슬픈 목소리로 이따금 “오…재키…."하며 혼잣말로 탄식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 했으므로.


"미 서부 우스터에서 열린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


우스터의 알든 메모리얼 홀에 도착하자 여러 뮤지션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이날의 패널인 조지 쉴러, 쳇 윌리엄스 외에도 랜 블레이크와 오랜 친분이 있는 많은 뮤지션들이 블레이크 씨 주변에 모여들었다. 재키 바이어드는 시간과 장소의 장벽을 거두고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뮤지션들은 올뮤직가이드 등에 실린 짧은 바이오그라피로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바이어드의 삶과 음악의 내밀성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었다. 재키 바이어드의 음악은 여전히 이곳 뮤지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현실적인 범위에 있었는데, 그의 교육자로서의 커리어가 큰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재키 바이어드는 69년부터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NEC)에서 15년간 아프로 아메리칸 뮤직을 가르쳤고 코네티컷주로 옮겨 하트 음대, 그리고 89년부터 사망하기까지 10년간은 뉴욕의 맨해튼 음대에 몸담았다.


2014년 4월 16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열린 모던 크리에이티브의 거장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의 모습.

이날 심포지엄에 함께 동행한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 전학장,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 그는 함께 연주활동을 해온 생전의 바이어드를 그리며 시종 비통해하였다. 랜 블레이크는 재키 바이어드를 위한 헌정곡으로 Only Yesterday를 연주했다. 


“재키의 연주를 듣는 것은 수도꼭지를 틀고 피아노의 모든 물줄기를 듣는 것과 같다. 즉, 제임스 존슨에서 세실 테일러까지 물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린다” 

-1999년 재키 바이어드 장례식에서 평론가 게리 기든스의 추모사 중


재키 바이어드는 자못 생소한 연주자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주는 희열을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뿜을 듯 다소 불만스럽고 퉁명스러운 눈빛을 담은 검은 얼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연주, 때로는 오른손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왼손으로는 색소폰을 부는 이색적인 모습, 대부분의 악기를 고차원으로 다루기에 어렵다고 난색을 보이는 뮤지션에게 호통치는 그의 모습 등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게 배우는 뮤지션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 앞에 가면 얼어버렸다. 혁신적인 작곡가였고 위대한 이론가이자 임프로바이저였던 재키 바이어드는 치팅하는 뮤지션에게는 거짓말쟁이! 라고 화를 내며 가차 없었지만 진실한 연주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는 한 마디로 비밥 혁명 이후에 “어떻게 재즈를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위대한 교육자였다. 1967년 군터 실러, 랜 블레이크, 조지 러셀이 주축이 되어 클래시컬 뮤직의 명문 NEC에 처음 재즈 교육이 시행되고 1969년에는 재키 바이어드에 의해 아프로아메리칸 뮤직과(課)가 개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재즈 교육의 모델로 평가되어온 NEC. 그 중심에 또한 재키 바이어드가 있었으니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즈 교육의 또 다른 파이오니어 랜 블레이크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십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그토록 슬퍼하고 있는지도 헤아려볼 수 있을 듯하다. 랜 블레이크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재키와 함께했던 날들이 어제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며 Only Yesterday를 연주했다.


모던 재즈에서 아방가드의 영역까지 재키 바이어드의 연주 스타일은 광범위하고 진보적이었다. 그의 바이오그라피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몰아서 정리했다. 그의 음반을 한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유튜브에서 그를 찾아보기를 당부드린다. 유튜브에서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Aaluminum Baby를 타이핑하면 2012년 NEC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빅밴드 곡을 제일 먼저 찾아볼 수 있는데 바이어드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가 얼마나 멋지게 이 곡을 해석하는지도 지켜볼 수 있다. 지금부터는 우스터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가 주최한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에서 재키 바이어드에 대한 패널들의 회상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다”

“나는 재키가 이끌었던 빅 밴드 아폴로 스톰퍼스(the Apollo Stompers)에 참여했고 그와 트리오를 한 적도 있었다. 모두 두려운 경험이었다. 재키와 함께 연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레슨을 받는 것과 같다. 우리 트리오는 찰리스 탭이라는 아주 비좁은 클럽에서 연주했는데, 재키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차선을 바꾸어 출구로 나가는 사람처럼 종횡무진 연주를 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재키의 아름다움이었다. 재키가 뭘 할지 모르고 어떤 식으로 변화를 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의 모든 연주는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매년 몹시 추운 2월에 노쓰 다코타주의 비스마르크 시에서 연주하곤 했다. 비스마르크 재즈 축제 기획자 로이 앤더슨 씨가 20년 동안 변함없이 재키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95년에 재키와 함께 비스마르크 재즈 축제에서 연주했고 곧이어 파르고 시로 이동해서 트리오로 다시 협연했다. 매일 영하 20도의 기록적인 추위에도 그는 연주를 감행했는데 그 즈음해서 그는 미네소타주 둘러스에서 솔로 콘서트를 하러 떠났다. 그곳은 영하 35도였다. 그는 자신의 연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키가 NEC에서 가르치고 있었을 시절, 나는 MIT방송 WMBR에서 재즈 방송을 진행했는데 어느 주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재키 바이어드 페스티벌을 기획한 적이 있다. 총 15시간이었는데 이 시간 동안 재키의 곡만 틀었다. 웬만한 것은 다 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와인 2병을 들고 재키를 인터뷰하러 갔다. 그때 인터뷰했던 카세트 테이프를 얼마 전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그가 어린 시절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술회하였는데 잊히지 않는 말은 “네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그곳이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자 원천”이라는 것이다.” 

-조지 쉴러(George Schuler, 드러머, 군터 쉴러의 아들)- 


“의도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스윙이다.”

“NEC에서 재키와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테크닉이 모자라서 재키가 가르칠 수준은 못되었다. 그의 이론교육은 몹시 까다로워서 힘겨웠다. 나는 플루트를 연주했는데 재키는 보이싱을 가르쳤다. 어느 날 레슨을 받으러 갔는데 재키가 드뷔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2초 뒤에 리듬 체인지를 하는 것이었다. 음악적 컨셉과 관련해 나는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재키는 스윙에 여러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스타일로서의 스윙이 있고, 필(Feel)로서의 스윙, 그리고 의도(intend)로서의 스윙이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무슨 종류의 음악이던지 간에 의도가 있으면 그것이 곧 스윙이라고 말했다. 재키는 그 개념을 몸소 실천했는데 그는 클래식과 재즈 모두 똑같은 기쁨이자 똑같은 아름다움으로 생각했다. 재키 바이어드는 재즈계의 찰스 아이브스(모던 클래식의 혁신적인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불과 4마디에서 조차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제이미 바움(Jamie Baum, 플루티스트)-


“재키가 NEC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969년부터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학교의 모델이었고 여러 세대 학생들에게 아직도 그 영향을 느낄 수가 있다. 찰스 아이브스와 같은 음악, 다양한 종류의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스윙은 물론 무조음악을 했고 노래도 했으며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화해내는 뮤지션은 별로 없다. 재키 바이어드는 학교의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해냈으며 NEC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방향을 잡아줬다.”

-켄 쉐포트스 (Ken Schaphorst, NEC 재즈와 학과장)-


재키는 시끄럽게 굴어서 연주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사람들이 너무 떠들면 피아노 위에 채터링 티스(Chattering teeth,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엽기 치아)를 두 개 올려놓고 태엽을 감아 다다다닥 소리를 내게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챗 윌리엄슨(Chet Williamson, WICN 라디오 진행자)-


찰스 밍거스와 에릭 돌피, 재키 바이어드가 함께한 음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와 같이 나도 그렇게 스윙을 하고 싶었다. 재키의 연주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 때가 1975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재즈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많지 않았고 NEC는 선두에 있었다. 재키가 NEC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리고 NEC 복도에서 재키와 마주쳤는데 그에게 “나는 지금 신시내시티에서 보스턴까지 운전해서 왔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에게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좋아, 딱 10분만 시간 내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 앞에서 연주를 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좋아, 입학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보스턴으로 이주해 왔다. 

-프레디 허쉬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의 제자)-

*허쉬의 이 말은 에단 아버슨 씨와의 인터뷰에서 인용한 것임.


<재키 바이어드의 음악 세계>


재키 바이어드는 1922년 6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Worcester)에서 태어났다. 우스터의 마칭 밴드에서 연주하던 아버지,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트럼펫, 색소폰 등 여러 악기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들은 베니 굿맨, 러키 밀린더, 팻츠 월러에 심취했고 뮤지션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커머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가서도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스트라빈스키나 쇼팽을 비롯해 많은 클래시컬 작곡가들과 재즈 하모니를 연구했다. 플로리다에서 군 복무 하던 시절에는 어린 캐논볼 애덜리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46년 군대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이어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보스턴 지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페리(Ray Perry)와 연주하는 것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 고든(Joe Gordon), 샘 리버스 (Sam River)와 함께 보스턴 지역에서 비밥 밴드를 만들어서 투어했고 보스턴 북쪽 린(Lynn) 지역의 뮤직 라운지에서 색소포니스트 찰리 마리아노(Charlie Mariano)와 함께 3년간 정규 공연을 펼쳤다. 비밥이 태동했던 뉴욕과 가깝지만 음악의 변방이었던 보스턴에서 재키 바이어드는 찰리 마리아노, 허브 포메로이(Herb Pomeroy)등과 함께 이른바 '보스턴 비밥'을 태동시켰고 이끌었다. 바이어드는 1952년부터 3년간 색소포니스트 허브 포메로이스 밴드에서 연주했고 재키 바이어드가 참여한 허브 포메로이 밴드의 음반은 1958년 Progressive Jazz 레이블을 통해 Herb Pomeroy and His Orchestra : Band in Bostond와 Life is a Many Splendered Gig 으로 발매된 바 있다. 1959년부터 61년까지는 트럼펫터 메이나드 퍼거슨(Maynard Ferguson)과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바이어드는 솔로 피아노 연주 활동에도 열정을 보인다. 그래서 재키 바이어드가 처음 발표한 리더작도 솔로 연주 앨범인  Blues for Smoke (1960, Candid)였다. 이 앨범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이어드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1962년부터 64년까지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활동하며 밍거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Impulse!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파이브 밍거스)와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를 녹음했으며 밍거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떠난다. 

바이어드는 찰스 밍거스 외에도 에릭 돌피, 부커 더빈, 로랜드 커크, 샘 리버스의 사이드 맨으로서 중요한 레코딩들을 녹음했는데, 이 중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1960, Prestige)는 모던 재즈의 최전선에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 밴드로 유럽 투어를 했고 (1965년) 1967년에는 엘빈 존스와 연주했다. 70년에 들어서 밍거스 밴드에 다시 합류해 유럽 투어를 했다.  

재키 바이어드는 60-70년대에 괄목할 만한 리더작들을 남겼는데  Live! At Lennie's Vol.1 & 2 (1965, Prestige), Freedom Together (1966, OJC), Sunshine of My Soul (1967, OJC), Jaki Byard with Strings (1968, Prestige), The Jaki Byard Experience (1968, OJC)는 60년대에 발표된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재키 바이어드의 데뷔작인 솔로 앨범 Blues for Smoke. 보스턴을 떠나 처음 비밥의 메카 뉴욕에서 녹음했던 작품. 클래시컬 뮤직과 고전적인 재즈의 분위기를 발랄하고 개성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음반은 녹음은 1960년에 되었지만 89년이 되어서야 출시되었다. 


The Jaki Byard Experience. 1968년 프리스티지에서 발표된 음반으로 뉴올리언즈 스타일, 비밥, 프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재키 바이어드 쿼텟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수작이다. 


재키 바이어드와 랜 블레이크, 써드 스트림의 거장들이 함께한 피아노 듀엣 앨범. On Green Dolphin Street 스탠다드 곡부터 여러 자작곡들에서 이들의 깊이 있는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재키 바이어드가 참여한 찰스 밍거스의 64년도 음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Impulse!). 


 

70년대 들어 바이어드는 솔로, 혹은 듀오 등 소규모 그룹으로 녹음을 많이 했는데 공연할 때는 피아노를 치면서 트럼펫, 색소폰을 불거나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등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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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i Byard

(June 15, 1922 – February 11, 1999)


 Photograph ©1977, Raymond Ross


1999년 2월 11일 오후 11시 40분. 뉴욕주 퀸즈의 한 가정집에서 백발의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총알은 머리를 관통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노인의 두 딸이 그 집에 함께 있었지만 아무도 총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외부의 침입 흔적도 없었고 범행에 쓰인 총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다. 인식범에 의한 소행이 아닐까 추정될 뿐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 이른바 모던 크리에이티브를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재키 비아드의 마지막은 이러했습니다. 

피아니스트 재키 비아드는 에릭 돌피, 찰스 밍거스와 활동했던 전성기 시절의 열정으로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맨하탄 음대의 존경 받는 교수였습니다. 누가 재키를 죽였을까요? 가까운 자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인가요?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누군가가 총을 감춘 것인가요? 가족들은 왜 총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 사건은 잊혀졌지만, 나는 재키 바이어드를 들을 때 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픕니다.


Photograph ©1984, Patrick Hinely, Work/Play


재키 바이어드는 1922년 6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Wor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덕분에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트럼펫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라디오에서 들은 베니 굿맨, 러키 밀린더, 팻츠 월러에 심취했고 뮤지션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커머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가서도 음악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나 쇼팽을 비롯해 많은 클래시컬 작곡가들과 재즈 하모니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대단히 진지한 뮤지션이 되어 있었고 플로리다에서 군 복무 하던 시절에는 어린 캐논볼 애덜리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1946년 군대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바이어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보스턴 지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페리(Ray Perry)와 연주하는 것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조 고든(Joe Gordon), 샘 리버스 (Sam River)와 함께 보스턴 지역에서 비밥 밴드를 만들어서 투어했고 보스턴 북쪽 린(Lynn) 지역의 뮤직 라운지에서 색소포니스트 찰리 마리아노(Charlie Mariano)와 함께 3년간 정규 공연을 펼쳤습니다. 보스턴에 살고 있는 저에게 1950년 초 이들의 행적은 저의 관심의 대상이였습니다. 비밥이 태동했던 뉴욕. 뉴욕과 가깝지만 음악의 변방이었던 보스턴에서 재키 바이어드는 찰리 마리아노, 허브 포메로이(Herb Pomeroy)등과 함께 이른바 '보스턴 비밥'을 태동시켰고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바이어드는 1952년부터 3년간 색소포니스트 허브 포메로이스 밴드에서 연주했고 재키 바이어드가 참여한 허브 포메로이 밴드의 음반은 1958년 Progressive Jazz 레이블을 통해 Herb Pomeroy and His Orchestra : Band in Bostond와 Life is a Many Splendered Gig 으로 발매된 바 있습니다. 

1959년부터 61년까지는 트럼펫터 메이나드 퍼거슨(Maynard Ferguson)과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바이어드는 솔로 피아노 연주 활동에도 열정을 보입니다. 

그래서 재키 바이어드가 처음 발표한 리더작도 솔로 연주 앨범인  Blues for Smoke (1960, Candid)였습니다. 이 앨범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이어드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게 됩니다. 

1962년부터 64년까지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활동하며 밍거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Impulse!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파이브 밍거스)와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를 녹음했으며 밍거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떠납니다.

바이어드는 찰스 밍거스 외에도 에릭 돌피, 부커 더빈, 로랜드 커크, 샘 리버스의 사이드 맨으로서 중요한 레코딩들을 녹음했는데, 이 중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1960, Prestige)는 모던 재즈의 최전선에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 밴드로 유럽 투어를 했고 (1965년) 1967년에는 엘빈 존스와 연주했습니다. 70년에 들어서 밍거스 밴드에 다시 합류해 유럽 투어를 했습니다.  

재키 바이어드는 60-70년대에 괄목할 만한 리더작들을 남겼습니다. Live! At Lennie's Vol.1 & 2 (1965, Prestige), Freedom Together (1966, OJC), Sunshine of My Soul (1967, OJC), Jaki Byard with Strings (1968, Prestige), The Jaki Byard Experience (1968, OJC)는 60년대에 발표된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입니다. 

70년대 들어 바이어드는 솔로, 혹은 듀오 등 소규모 그룹으로 녹음을 많이 했는데 공연할 때는 피아노를 치면서 트럼펫, 색소폰을 불거나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등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69년부터는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를 비롯해 맨하탄 음대, 뉴스쿨, 하버드 음대 등 여러 음악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프레디 허쉬, 제이슨 모간이 재키 바이어드의 대표적인 제자들입니다.

 

저는 그의 솔로 앨범, 특히 첫 작품 Blues for Smoke을 좋아합니다. 보스턴을 떠나 처음 비밥의 메카 뉴욕에서 녹음했던 작품이고 클래시컬 뮤직과 고전적인 재즈의 분위기를 그만의 발랄하고 개성있는 방법으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앨범은 녹음은 1960년에 되었지만 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시되었습니다.

클래시컬 뮤직, 왈츠, 래그타임이 등장하는 Journey / The Hollis Stomp / Milan To Lyon의 소제목이 붙여진 Excerpts From European Episode 는 유럽에서 느꼈던 감정을 모자이크처럼 표현하고 있으며 Jaki's Blues Next의 연주도 귀를 즐겁게 합니다.

재키 바이어드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모던 재즈신의 또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재즈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며 재즈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Jaki Byard, Piano

Recorded at Nola Penthouse Studios, New York City, December 16, 1960

1989 Candid Production


Journey/Hollis Stomp/Milan to Lyon" - 5:57

Aluminum Baby" - 4:32

Pete and Thomas (Tribute to the Ticklers)" - 3:41

Spanish Tinge No 1" - 4:12

Flight of the Fly" - 5:44

Blues for Smoke" - 4:52

Jaki's Blues Next" - 2:07

Diane's Melody" - 5:05

One Two Five"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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