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2

아폴로 극장을 빛낸 그녀들.


(지난 호에 이어)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침침한 형광등 아래 표정없는 풍경과 퀴퀴한 실내 공기를 환희로 바꾸어주는 요인은 나에게 있어서는 Take The "A" Train 이였다.

You must take the "A" train

To go to Sugar Hill, way up in Harlem

If you miss the "A" train

You'll find you missed the quickest way to Harlem.


이 곡의 그 유명한 4 마디 인트로에 이어 "할렘의 슈거힐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A 트레인을 타는 것, 서둘러라, 서둘러…." 라 노래하는 엘라 핏제랄드의 경쾌한 음성을 떠올리면 핑거 스냅이 절로 나왔다. 춘천행 기차에서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아련해지듯, 소양강 댐 앞에서 '소양강 처녀'에 문득 미소가 번지듯 장소와 방향이 주는 여행의 감흥에는 음악이 한몫하기 마련이다.


(나는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블랙 뮤직의 중심, 아폴로 극장 앞에 도착했다. 극장 앞에는 행인들로 붐볐지만,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리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코튼 클럽과 비슷한 느낌의 낡고 색이 변한 붉은 카페트, 몇 장의 사진들과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전용 극장처럼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식이나 관리가 잘 된 느낌은 없었다. 협소한 로비 중앙으로 나 있는 통로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이 홀로 앉아 있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은 매일 공연하지 않는다, 주말 혹은 아마추어 나잇이 있는 수요일에 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화를 원했다. 썰렁한 공기가 싫은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곳은 50여 년 전 비틀즈가 미국에 가면 꼭 무대에 서리라 소망했던 바로 그곳, 아폴로였다. 마이클 잭슨이 데뷔했고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제럴드, 듀크 엘링턴, 사라 본, 잭슨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셀 수 없이 많은 유명 가수들이 섰던 소울, 록, 가스펠, 재즈, 블랙 뮤직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블랙 뮤직의 중심이었던 할렘의 아폴로 극장)


한때 내 기억에서 사라졌던 아폴로 극장을 되새기게 된 것은 실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지난 8월, 뉴욕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 제츠의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던 한 소녀. 그녀의 이름은 리에나 산타 아나였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2010년 아폴로 극장이 주최하는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던 패기있고 아리따운 소녀였던 것이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은 1934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재능있는 예비 스타를 뽑는 행사로 아메리칸 아이돌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의 리에나를 보면서 동시에 소녀 엘라 핏제럴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엘라 핏제럴드야말로 아폴로 극장의 원조 '내일의 스타'였기 때문이다. 엘라 핏제럴드가 아마추어 나잇의 내일의 스타로 뽑힌 것은 아폴로 극장이 이 이벤트를 시작한 직후인 1934년 11월 21일이었다. 엘라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엘라는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듀오로 아마추어 나잇에 도전했는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팝가수 보스웰 시스터즈의 Judy, The Object of My Affection을 불렀다고 한다. 친구는 주로 춤을 추고 엘라는 메인 보컬을 맡았다. 아폴로 극장을 가득 채웠던 청중들은 천진난만한 엘라 듀오의 모습에 웃고 손뼉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아폴로 극장의 작은 로비에 앉아 할렘 최고의 무대에 섰던 흑인 여성들의 환희를 공감해보려 노력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그러하지만 1930년대 할렘의 여성들은 지독히도 불우했다. 가난, 마약, 성범죄에 노출되기 에 십상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다. '흑인' 보다 못한 존재는 흑인 여성이었다. 흑인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던 그때, 그러니까 1939년 어느 날. 아폴로 극장의 무대에 Strange Fruits가 울려 퍼졌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무대였다. 제목에 붙여진 '이상한 과일'이란 흑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메세지를 담은 곡이었다. 극장에선 이 곡을 못마땅해 하였으나 빌리는 이미 그 누구도 제어하기 어려운 아폴로 극장의 대스타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깊은 울림에 청중은 압도당했고 숙연해졌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면 희열과 환희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지독히 가난하고 소외된 흑인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두 여성, 서로 다른 빛깔로 아폴로 극장을 비롯한 할렘의 크고 작은 무대들을 누비며 관객을 압도했던 두 여성,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핏제랄드. 그녀들은 할렘을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 용기를 준 존재이기도 했다.

빌리 홀리데이 (출처: goole image)


할렘에 머물면서 코튼 클럽을 찾아가기도 했지만(지난 호 참조) 교회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도 즐거웠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가톨릭 교회에 들어가 보았다. 열 명 남짓의 성가대 멤버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가창력과 흑인 특유의 표현법들이 내 마음을 흠뻑 사로잡았다. 청중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인상 좋은 목사님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분, 빌리 조엘 백 코러스도 했었답니다. 노래 끝내주지 않아요?" 정말 멋있는 보이스였다. 빌리 조엘 코러스를 했던 안 했건 최소한 이 작은 교회 안의 보컬은 동네 사람들이었지만 비범했다. 저 흑인 특유의 소울 필과 가창력은 우리가 아무리 흉내를 낸다 해도 솔직히 '넘사벽'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목사님은 예배 날 다시 오면 훌륭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내가 혹시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잠깐 돕고 싶다고 했더니,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수녀원에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길로 수녀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는 '노크 금지,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쓰여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몸을 벽에 기댔다. 그리고 여러 번 보았던 빌리 홀리데이의 유튜브 영상을 재생시켰다. 나는 그녀가 노래할 때마다 살짝 들려 가볍게 떨리는 윗입술이 너무도 좋다. 뚜렷이 각졌지만 둔탁해서 오히려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턱도 사랑스럽다. 과장되지 않게 들어 올린 까만 머리에 꽂힌 하얀 꽃과 그녀의 자태는 눈이 부시다.

1934년 엘라 핏제럴드가 아폴로 극장의 '내일의 스타'가 되었을 무렵, 빌리 홀리데이는 이름없는 할렘의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의 기획자였던 랄프 쿠퍼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은 곳은 1935년 어느 날 핫 차 바 그릴이란 곳이었다. 랄프 쿠퍼는 빌리의 노래에 홀딱 반해서 아폴로 극장의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에게 흥분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껏 이렇게 질질 끌면서 노래하는 창법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이건 블루스도 아니고…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당신은 반드시 그녀를 들어봐야 합니다." 쉬프만은 안목이 남다른 랄프 쿠퍼의 말을 믿고 1935년 4월 19일 그 주 프로그램에 빌리 홀리데이를 끼워 넣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자신이 부킹된 것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빌리의 아버지 클라란스 홀리데이는 그녀에게 아폴로 극장의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워줬다. 빌리는 행여 뮤지션 아버지의 덕을 본 것이라는 오해를 피하고자 성을 'Halliday'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빌리를 발탁한 랄프 쿠퍼는 그녀의 아폴로 극장 데뷔 무대를 위해서 드레스와 구두도 사줬다. 데뷔의 날, 빌리는 심장이 터질 듯 긴장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대에 나가기 직전에도 떨려서 몸이 굳어있었는데 코메디언인 피그미트 매크햄이 빌리의 등을 떠밀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무대로 나갈 수 있었다. 조명이 그녀를 향하고 청중들이 숨을 죽이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빌리는 Them There Eyes, If The Moon Turns Green을 불렀다. 청중들은 그녀의 노래에 넋을 잃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빌리가 The Man I Love를 앵콜곡으로 부르고 무대를 떠나는 순간 아폴로 극장과 그녀와의 관계는 확고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4개월 뒤에 당시 주가를 올리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와 다시 아폴로 극장에 섰고 그 뒤 승승장구하며 아폴로의 대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수녀원의 문이 열렸고, 수녀님이 내게 용건을 물었다. 나는 이 수녀원에서 매일 아침 빈민들을 위한 무료 음식 제공 시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틀간의 여행 시간, 짧지만 할렘식 사람들과 가깝게 있고 싶고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래 봬도 설거지는 잘한답니다" 수녀님은 활짝 웃었고 부엌을 보여주시더니 다음날 새벽 6시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들의 아침은 몹시 분주했다. 열댓 명의 수녀님들이 바쁘게 부엌을 오갔다. 부엌은 대단히 큰 개수대가 눈에 띌 뿐 조리대는 적었고 썰렁했다. 그래도 백 명 이상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엌 크기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대형 들통에는 오랜 시간 끓였을 슾이 보글거렸고 기부를 받은 음식 봉지와 빵과 음료가 한편에 놓여있었다. 수녀님이 나에게 말했다. "할렘 사람들은 많이 가난하고 아프답니다."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이었고 노인들, 중년의 여성들도 많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음식을 먹었고 다 먹은 뒤에는 아멘 하고 느릿하게 자리를 떠났다. 크디큰 흰자위는 검은 얼굴 위에서 더욱 하얗게 떠 있었는데, 그 눈빛도 그 두꺼운 입술도 아무 말이 없는 이유가 그들은 이미 서로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였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배려, 익숙한 가난, 그들에게 오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란 오직 나라는 동양 여성 하나인 듯싶었다. 바쁘게 설거지를 하고 치우느라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수녀님들은 침묵했고 경건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와 바쁜 걸음들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수녀님은 어려운 할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은 "할렘을 풍요롭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뭉클한 정경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수녀원은 사진 촬영 금지였고 마중해주신 수녀님들이 사진 촬영 금기(?)를 깨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열여섯 처녀 엘라 핏제럴드는 수녀님의 해맑은 웃음을 꼭 빼 닮았다. 나는 어린 엘라 핏제럴드의 플라토닉 러브를 떠올렸다. 드러머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 두 사람의 만남은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서로 용기와 존경을 보내는 깊은 사랑이었다.

엘라가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다고 서두에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선 1934년 시쉬프만스 할렘 오페라 하우스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엘라는 처음 발탁되었다. 청중석에는 티미 로저스라는 코메디언이 있었는데, 엘라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백스테이지로 달려가 내일 당장 사보이 볼룸에 와서 칙 웹을 만나야 한다고 종용했다. 혹시 엘라가 오지 않을까 봐 집 주소를 알아둔 뒤 집으로 데리러 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칙 웹은 드러머이자 할렘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리더였다. 특히 사보이 볼룸에서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의 힘 있고 독특한 드럼 솔로를 듣기 위해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칙은 엘라의 노래를 듣고 “바로 이거다, 나는 진짜 싱어를 만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엘라는 사운드가 모던 했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멜로디와 리듬에 비중을 두었다. 칙 웹 밴드가 연주하는 미디엄 템포의 그저 그런 스윙 곡들도 엘라가 부르면 평범하지 않은 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엘라는 흘리지 않고 또박또박 발음했고 악보도 읽을 수 있었다. (엘라 말기에는 표준 발음을 안하고 뉴욕 액센트가 들리긴 했지만.)

하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외견상으로는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칙 웹은 결핵 환자였고 작고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였다. 척추 이상으로 허리도 구부정해서 큰 드럼 세트에 매달려 있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반면, 엘라는 덩치가 컸고 예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글리 더클링', 세즉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렀다. 칙과 엘라 모두 외모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재능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존중하는 가족애'라고 말하곤 했다. 엘라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자 칙 웹 밴드도 덩달아 전국적 인사가 되었는데 많은 유혹, 특히 베니 굿맨이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라는 칙 웹 밴드를 떠나지 않았다. 칙 웹 밴드는 멤버 중 누구 한 명이 성공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라는 우호적인 가족애가 흐르고 있었다. 엘라는 밴드에서 작곡하기도 했는데 You Showed Me The way라는 곡은 멘토였던 칙 웹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비롯된 첫 작품이었다. 아폴로 극장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칙 웹이 1939년 결핵으로 숨졌을 때 엘라가 칙 웹의 관을 끌어안고 My Buddy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내 아버지는 일생 일대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하셨지요. 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엘라의 그 노래에 감동 받아서 펑펑 울었거든요”

엘라는 칙이 사망한 뒤에도 칙을 대신하여 3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보컬도 에니타 오데이 같이 새로 떠오르는 다른 여성들도 적극 참여시켰다. 

나는 재능있고 의리와 리더십있는 엘라 핏제럴드의 모습에서 흑인 여성의 강인함을 엿본다. 그리고 흑인 여성들이 엘라를 통해 얼마나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엘라 핏제럴드와 칙 웹. 엘라는 칙을 멘토로서 사랑했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NPR.org)


서브 프라임 모게지 파동 이후 아직도 할렘은 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70년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 만큼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렘인들은 1920년대부터 이어져 온 할렘 르네상스의 저력을 되새기고 싶어한다. 아폴로 극장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고 관광객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엘라 핏제럴드처럼 꿈을 이룬 소녀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할렘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걷히고 정화되기를 꿈꾼다.

할렘의 한 흑인 소녀가 썼던 1922년도 3월의 일기를 소개한다. 지금도 할렘 어디선가 세상을 욕망하는 일기를 쓰고 있을 빈곤하나 재능있는 여성들을 위해 나도 기도한다. 

 “내 이름은 루쓰 스미스. 그러나 무대에서 내 이름은 아다 스미스라고 불리길 원해요. 나는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알지요. 엄마에게 매일 백인의 집에서 청소하는 일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백인 집에서 슬쩍 음식을 훔치기도 해요. 엄마는 훔치는 게 아니라 미리 받을 돈을 당겨온다고 생각하래요. 엄마, 나는 떠나고 싶어요. 친구야,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이 고된 일을 벗어나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끝)

할렘의 거리에서 만난 여성들


<추천 음반>

Chick Webb & Ella Fitzgerald Decca Sessions (1934-41) (Mosaic 252)

본문에 소개했던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의 사랑과 우정을 음악으로 듣고 싶다면 이 앨범을 추천한다. 1939년 칙 웹이 사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존경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41년도까지 칙 웹 밴드를 이끌었던 엘라 핏제럴드. 칙과 엘라, 그들의 모든 레코딩이 이 앨범에 담겨있다. 모작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8장 박스 세트로 오리지널 레코딩을 리마스터링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posted by jazzlady

월간 재즈피플 2014년 8월호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스윙 재즈의 메카, 코튼 클럽을 찾아서.



스윙과 비밥의 흔적을 찾아 뉴욕 이곳저곳을 누볐던 지난 5월. 비밥을 태동시켰던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와 한때 비밥의 거리라 불렸으나 지금은 재즈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맨하탄 32번가에 대해서는 본지 6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초여름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체감하며 할렘 한복판을 쏘다녔던 이야기로 그날의 여행을 이어가고자 한다. 

도시란 곳곳에 위험천만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겠지만, 흑인 거주 지역이자 슬램가로도 알려진 할렘을 나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할렘의 가스 폭발로 빌딩이 붕괴되고 사망자가 속출한 사고가 일어난 지 채 두  달이 안된터라 걸음은 보다 조심스러웠다. 노후된 가스관이 문제였던 사고였다. 90년대 이후 새 건물이 많이 증축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노후화된 빌딩과 불결한 시설물이 거리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곳이 할렘이었다.  길거리에 떼를 지어 서 있는 청년들, 온갖 욕설로 난무한 거리의 낙서, 귀가 터져라 강력 우퍼 볼륨으로 힙합 드라이빙을 하는 사람들. 흑인 거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 문득 난감해졌다. ‘흑인 음악’ 재즈를 제외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이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세 집 건너 하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미용실, 가발 가게, 화장품 가게 등은 치장하기 좋아하는 흑인 여성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에서 헤어 손질 비용의 30%는 흑인 여성들로 인해 발생한다는 통계가 있다. 미용실에는 오전임에도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가 자라면서 머리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작업으로 머리를 꼬고 있었다. 적게는 세 시간부터 10시간까지도 걸리는 작업이라고 한다. 70년대 한국의 동네 이발관 비슷한 허름한 미용실에서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용실 외관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창문 열린 윈도우 너머로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미용사 한 명이 뛰어 나왔다. 

“당장 여기서 꺼지던가 100불 내고 사진 찍어!”

아프리카 전통 복장과 흡사한 알록달록한 드레스에 머리를 스카프로 꽁꽁 도며맨 이 여성은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그녀의 흙빛 주름진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땀방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누그러트리고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어딨는지 아나요?” 

미용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더니 

“코튼 클럽? 난 그런 곳에 관심 없어”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한 여성이 소리쳤다. 

“거긴 춤추는 곳이잖아. 지금 가봤자 닫혀있을걸.”

그들은 코튼 클럽에 대해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들어가버렸다. 

듀크 엘링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튼 클럽. 그러나 그곳에 가기 전에 벌써 진이 빠지려고 했다. 거리에서 불친절한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로 녹초가 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찬란한 역사는 어디로? 현재의 코튼 클럽


코튼 클럽은 맨해튼 서쪽 마틴 루터킹 주니어 블로바드라고 불리는 125번가에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맑은 하늘에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건너편 카페에서 코튼 클럽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곡을 모은 음반을 귀에 꽂았다. 2011년 발매된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Storyville 1038415). 이 음반은 1938년 4월 17일부터 5월 29일까지 코튼클럽에서 녹음된 방송용 라이브였다. 앨링턴의 음악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코튼 클럽의 전성기가 거의 끝나가던 시기의 녹음이다. 78 RPM판으로 녹음된 47곡이 두 개의 시디로 나뉘어 복원된 것인데 코튼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든다. 낡고 지글거리는 음질이 강한 빗소리와 함께 운치를 자아내는 듯 하다.

이윽고 비가 개었고 코튼 클럽의 문도 활짝 열렸다. 입구에 놓인 책상 앞에는 티켓을 받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몹시 친절한 말투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는 공연이 시작하려면 멀었으니 들어와서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이곳은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던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77년에 재오픈된 곳이었다. 

럭셔리했던 옛 코튼 클럽과 달리 현재의 코튼 클럽 실내는 몹시 소박했다. 70년대 오픈했을 당시 그대로의 인테리어인 듯 했다. 붉은 색 테이블 위에 깔린 비닐과 밋밋한 플라스틱 의자는 옛날 옛적 빵 가게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빨간색 조명과 네온사인이 시골 선술집을 연상시키는 듯도 했다. 무대는 협소했지만 1층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무대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쏙 들었다. 2층은 보다 프라이빗한 대화가 가능한 곳이었다. 벽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이르는 찬란했던 코튼 클럽 전성기의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오케스트라 편성의 스윙 재즈의 메카,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개의 상징은 다름 아닌 코튼 클럽과 듀크 엘링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코튼 클럽은 외견상은 허름해 보이지만 도쿄에도 2호점을 낼 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코튼 클럽에는 매 주말 열리는 가스펠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과 관광객들이 몰린다. 월요일에는 스윙 댄스 나잇으로 꾸며져서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한다. 빌리지 뱅가드나 버드랜드와 같은 재즈 클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흑인들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댄스 파티가 열리는 장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리지널 옛 코튼 클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옛 코튼 클럽도 스윙 재즈, 즉 춤을 추기 위한 댄스를 연주했고, 코미디라든가 벌레스크 같은 희극 혹은 보드빌과 같은 버라이어티 쇼도 선보였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콜롬비아 대학이 우리 클럽을 포함해 이 지역을 매입하겠다고 덤벼서 절대 안판다고 싸웠어요. 학교 캠퍼스 확장하려고 주민들까지 다 내쫓겠다는 거였죠. 이게 말이 되나요? 코튼 클럽을 없앤다는 건 흑인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건데….결국 우리가 이겼죠.” 코튼 클럽 웨이츄리스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코튼 클럽의 정신, 즉 할렘 컬쳐의 대표라는 자부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 전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할렘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궁금했다. 



맨하탄 서쪽 125번가에 있는 현재 코튼 클럽의 모습. 30년대 코튼 클럽의 역사를 이어받아 1977년 재오픈한 곳이다.


 현재 코튼 클럽의 내부. 붉은 색 테이블과 조명이 인상적이다.


 코튼 클럽 입구에서 티켓을 받는 직원. 이들은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했던 코튼 클럽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 앞에서


코튼 클럽은 1920년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인 잭 존슨이 세운 “클럽 딜럭스(Club Deluxe)”가 전신이다. 잭 존슨이 마피아 두목이었던 오웬 ‘오우니’ 매이든에게 클럽을 넘기면서 1923년부터 코튼 클럽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장소는 142번가와 레녹스 애비뉴가 만나는 코너에 자리했다.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다고 할 수 없었다. 택시 운전사가 142번가 어딘가에서 여기 어디쯤 아니겠느냐며 퉁명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차를 세우게 했다. 현재의 코튼 클럽이 맨해튼과 제법 가까운 웨스트 사이드에 있었다면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는 업타운, 즉 주거지가 밀집한 ‘진짜 할렘’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8차선 도로를 중앙에 둔 인도, 그러나 상점들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고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드물었다. 언제 비가 쏟아졌느냐는 듯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나는 황량한 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정적이 긴장되어서 나도 모르게 움칫거리고 말았다. 문이 닫힌 상점 앞에서 청년들이 삼삼오오 몰려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들의 시선이 일찍부터 나에게 고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쪽 모퉁이 구석에서도 눈빛들이 느껴졌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뭇 불안했다. 아니, 모든 불안은 할렘에 대한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할렘에서는 최대한 관광객티를 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관광객이 아니라 친할렘적인 복장과 말투를 쓰는, 마약을 단속하는 사복 경찰이라는 것이다. 마침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 밖을 나온 노인에게 코튼 클럽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아버지에게 코튼 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코튼 클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20달러를 줬더니 코튼 클럽의 방향을 짚어주었다. 예상했던 장소였다. 그 노인에게 몇 분간 들었던 코튼 클럽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30년대 당시 이 길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장소였는지 과장스럽게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보이는 그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은 진작에 사라졌고 지금은 ‘미니싱크 타운 하우스’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할렘에서 총기범죄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단체 건물이었다. 

1922년, 마피아 두목 오웬이 코튼 클럽이라 이름 지었을 때 이곳이 쇼비즈니스의 정상에까지 올라갈 엄청난 곳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40년에 문을 닫은 뒤에도 할렘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 공을 세운 장소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2014년 5월.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겠다고 물어물어 찾아온 아시안 여성이 이곳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오웬은 이것만큼은 분명히 예측했을 것이다. 금주령이 떨어진 이 땅에서 백인들이 몰래 술을 마시기 위해 할렘 은밀한 곳까지 반드시 찾아 올라오리라는 것을. 


1923년 142번가와 644 레녹스 애비뉴에 세워졌던 초창기 코튼 클럽의 자리.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있다.


1923년 처음 설립된 코튼 클럽의 모습 (출처: 뉴욕 시티 홈페이지)


코튼클럽 전성기 그리고 듀크 앨링턴


코튼 클럽 출연 당시의 듀크 엘링턴.


1927년 가을, 28세 청년 듀크 엘링턴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밴드에 추가로 다섯 명을 더 영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연주 장소였던 코튼 클럽의 오디션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곳 운영진의 요구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클럽은 최소 11명의 뮤지션을 요구했다. 듀크에게 코튼 클럽에서의 오디션 기회가 온 것은 순전히 킹 올리버와 자신의 매니저 어빙 밀스 덕분이었다. 킹 올리버는 그해 9월 개런티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코튼 클럽의 하우스 밴드 자리를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듀크의 매니저 어빙 밀스가 오디션의 기회를 얻어온 것이었다. 어빙은 듀크의 수입 45퍼센트를 가져가는 계약 관계였고 어빙이 열심히 일을 찾아온 덕분에 듀크는 레코딩 기회도 여럿 얻을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듀크가 고향 워싱턴에서 할렘으로 이주해온 것은 불과 3년 전 일이었으나 워싱턴에서부터 닦아온 기량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에서의 성공을 코튼 클럽을 통해 뉴욕에서도 이어가고 싶었다. 코튼 클럽은 듀크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흡족해했고 1927년 12월 4일 코튼 클럽에서 듀크 엘링턴 코트 클럽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이 열리게 된다.

코튼 클럽은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백인들만 청중으로 받는다는 것 그리고 최소 167㎝의 키와 옅은 피부색을 가진 흑인 여성만 엔터테이너로 고용한다는 것이었다. 지원한 모든 여성은 소위 ‘페이퍼 백(Paper bag)’테스트를 거쳐야 했는데 즉, 물건을 담는 갈색 종이 봉투와 비교했을 때 그보다 옅은 피부색을 가진 여성만이 고용될 수 있었다. 코튼 클럽은 철저히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코튼 클럽이 오픈하게 된 것도 1920년부터 시행되었던 금주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할렘에 클럽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법으로 술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인들이 음지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할렘의 코튼 클럽은 더없이 근사한 장소였다. 198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코튼 클럽’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마피아의 아지트였고 마피아 보스가 운영했던 재즈의 메카가 바로 코튼 클럽이었다. 불법이 자행된다는 점에서 오명(汚名)의 클럽이기도 했지만 듀크 엘링턴과 같은 재능있는 뮤지션들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꿈같은 장소였다. 코튼 클럽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라디오 방송을 위한 라이브 레코딩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듀크의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코튼 클럽에서의 주 작곡자는 지미 맥휴였고 작사는 도로시 필즈가 주로 맡았는데 앨링턴도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코튼 클럽 시절 듀크 엘링턴은 1928년 Victor(지금의 BMG)레코드에서 발매된 Black and Tan Fantasy와 Creole Love Call, 두 개의 첫 히트곡을 냈다. 이듬 해에는  The Harlem Footwarmers라는 이름으로 Doin’ the New Low Down, Diga Diga Doo 등이 Okeh레코드 (현 Sony)를 통해 발매되기도 했다.  듀크의 초기 최대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Mood Indigo는 듀크가 코튼 클럽을 떠나기 5개월여 전인 1930년 10월 15일에  Brunswick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는데 이 곡은 코튼 클럽에서 연주했던 Dreamy Blues에 가사를 붙이고 발전시켜서 완성된 곡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4년여간의 코튼클럽 하우스 밴드로서의 활동을 끝냈던 1931년 2월, 그는 전국적인 명사가 되어 있었다. 코튼 클럽을 떠난 후 그는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Rockin' In Rhythm, Creole Rhapsody, Sophisticated Lady을 비롯한 많은 명곡을 더 남겼는데, 이후에도 라디오 방송 레코딩을 위해 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코튼 클럽에 서기도 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이어서는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1940년 코튼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캡 칼로웨이 시절 코튼 클럽은 수난을 겪었는데 1935년 할렘에 폭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할렘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시각이 팽배했고 이에 코튼 클럽은 1936년 9월 다운타운 쪽 웨스트48가로 이전하게 됬다. 

코튼 클럽의 대표 엔터테이너는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외에도 싱어 에설 워터스, 레나 혼, 댄서였던 빌 보장글스 로빈, 니콜라스 브라더스, 도로시 댄드리지 등이 있다. 레나 혼은 초기 코튼 클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뮤지션인데 16세의 나이에 무대에 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운타운으로 이주했던 코튼 클럽 2기에서는 루이 암스트롱, 베시 스미스, 엘라 핏제럴드, 넷 킹 콜, 빌리 홀리데이도 출연해서 이름을 알렸다. 코튼 클럽은 1940년 높은 렌트비와 나이크 클럽을 대상으로 한 세금 조사 압박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코튼 클럽은 ‘뉴 니그로 운동’이 펼쳐졌던 할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흑인들의 재능이 오직 백인 청중들을 위해서만 펼쳐질 수 있었기에 보통 흑인들에게는 외면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코튼 클럽 말기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과장된 제츠쳐로 노래했던 루이 암스트롱 보다 듀크 엘링턴이 할렘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백인의 광대임을 거부하려했던 그들의 저항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29년 녹음된 루이 암스트롱의 “Black and Blue?”에서 “나의 유일한 죄는 내 피부색”이라 노래하는 루이는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애잔하다. 이 곡은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 보다 10년이나 앞서 인종 차별 문제를 지적한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이 암스트롱의 해맑은 웃음이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도 미국은 인종 차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루이가 노래했듯 검은 피부가 ‘죄’라는 인식은 드물 것이다. 아니 할렘에서만큼은 검은 피부색이야말로 권위를 가진다. 빈곤할지언정 그들이 쌓아온 저항의 역사를 존중한다. 그들의 피부를 존중한다. 흑인이 만든 재즈가 전 세계에 퍼졌을 지라도 할렘 특유의 컬쳐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다. 


1927년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할 무렵의 듀크 엘링턴 코튼 클럽 오케스트라.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프레디 젠킨스(Freddie Jenkins, 트럼펫), 투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트럼펫), 소니 그리어(Sonny Greer, 드럼), 아더 웻솔(Arthur Whetsol, 트럼펫), 잔 티졸(Jaun Tizol, 트럼본), 웨랜 브라우드(Wellman Braud,베이스),  해리 카니(Harry Carney, 색소폰), Fred Guy(프레디 가이,벤조) 바니 비가드(Barney Bigard,클라리넷), 조 난튼(Joe Nanton, 트럼본),  조니 호드지스(Johnny Hodges, 색소폰)과 듀크 엘링턴(피아노)


1936년 코튼클럽에서의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와 코튼 클럽 코러스의 공연 모습. 


16세의 나이에 코튼 클럽 무대에 섰던 인기 가수, 레나 혼.


                 초창기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일명 ‘정글 사운드’에 영향을 주었던 트럼펫터 제임스 바버 마일리


추천할 만한 코튼 클럽 라이브 음반.


Duke Ellington Live at the Cotton Club

1927년 12월 29일~1929년 9월 16일 라이브 녹음

2001년 TKO Record.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던 1927년부터 2년간의 연주를 모은 음반. 특히 그의 오케스트라 초기 트럼펫터였던 바버 마일리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의미가 깊다. 마일리는 그라울(Growl)스타일, 즉 으르렁거리는 사람의 발성 기교를 흉내 낸 거칠고 야성적인 사운드를 선호했고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운드를 그 시대 사람들이 ‘정글 스타일’이라고 불렀던 보다 거칠고 세련된 느낌의 색깔로 변모시키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1938년 4월 17일~1938년 5월 29일까지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커튼 클럽 라이브.

2011년 Storyville.


후기 듀크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커튼 클럽 라이브로 47곡이 두 장의 시디에 나뉘어 담겨져 있다. 보너스 클립으로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엘링턴의 연주 클립이 담겨있다.


(다음호에 계속...)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