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2>(마지막회)

기회의 땅, 유럽에서 마지막 시간들.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했던가. 고향 LA로부터 동쪽으로 4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욕에서 서른을 시작한 에릭 돌피. 에릭 돌피가 생전에 발표한 5장의 리더작 중 4장은 뉴욕 입성 직후부터 2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서른이 공자의 말처럼 뜻을 세우는 나이라면 뉴욕은 돌피의 뜻이 오롯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였던가. 

뉴욕에서 돌피의 음악은 저항에 부딪히곤 했다. 지난 호에 소개했듯 에릭 돌피는 존 콜트레인과 이른바 '뉴-재즈'를 연주하면서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돌피가 뉴욕 입성 후 의욕적으로 연주에 매진하던 시기에 평론가들은  '안티 재즈'라며 비판했고 존 콜트레인에 따르면 이것은 돌피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이미 탑 뮤지션으로 널리 알려진 콜트레인과 달리 뉴욕에서 뉴 페이스였던 돌피는 세상의 평가에 어느정도 민감했던 것 같다. 1961년 11월 23일 <다운비트>매거진은 "소름 끼치도록 (듣기 싫은) 아나키즘 음악"이라고 깎아내렸고 앞서 11월 9일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 연주를 두고는 "인토네이션 트러블, 동물 사운드, 뒤틀린 새소리"라 표현하면서 이날 출연한 웨스 몽고메리와 비교하며 폄하했다. 이외에도 <다운비트>는 이들의 공연을 꾸준히 추적하면서 "뮤지컬 넌센스를 팔아댄다(peddle)"고 혹평하곤 했다. 1961~1962년 사이에 콜트레인-돌피의 음악에 대한 찬반 레터가 <다운비트>로 집중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다운비트 매거진과 콜트레인과 돌피의 동시 인터뷰(축약)를 잠시 보자. 다운비트가 이들은 안티 재즈라고 혹평한 뒤에 이들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주자는 차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였다. 콜트레인이 돌피를 향한 애정은 물론, 세상의 평가에 대한 이들의 섭섭함도 잘 드러나 있다.

 

다운비트: 당신들은 왜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연주하는 것인가? (길게 연주하는 것도 당시 비판의 요인이었음)

▶콜트레인: 솔로이스트 각각 그 곡이 허용하는 모든 길을 탐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솔로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보여줄 것이 많다. 내가 연주할 때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게 있고 에릭이 할 때는 에릭이 하고 싶은 게 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어진다. 

 

다운비트: 도대체 당신들은 뭘 하려는 것이냐?

(30초간 침묵)

▶돌피: 좋은 질문이다. 어떤 영감을 느낄 때를 즐길 뿐이다. 항상 자발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있다. 존이 연주할 때 나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해낼 때가 있고 맥코이가 할 때도 그렇고 엘빈 존스, 지미 개리슨이 솔로를 할 때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곤 한다. 그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콜트레인: 에릭과 나는 54년부터 지금까지 깊이 교류하며 음악을 관찰하고 음악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달 전에 에릭이 뉴욕에 왔다. 에릭이 우리 쿼텟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점을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에릭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쿼텟으로서만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돌피가 참여하니까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돌피가 참여한 뒤 음악이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보자고 했다.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나는 전부터 돌피와 얘기만 나누었던 바로 그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에릭이 들어와서 우리 음악은 더 넓어졌고 예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표현되고 있다. 에릭이 계속 우리 밴드에 편안하게 있으면서 계속 성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주의 아름답고 좋은 것들에 대한 그림을 청중에게 선사하고 싶다. 놀랍고 포괄적인 우주의 한 면을, 한 예를 드는 것이 우리의 음악이다. 음악과 삶, 음악과 우주에 대한 철학을 어떤 이들은 젊을 때 터득하지만 나는 때가 지나서 이해했다. 아마 57년경이었을 것이다. 음악적으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알았어야 할 때보다 더 늦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음악의 새로운 면을 또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릭 돌피와 함께 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운비트: ‘안티 재즈’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콜트레인: 당신들이 말하는 안티 재즈가 도대체 뭔지 설명을 해달라. 

 

다운비트: 당신들이 스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콜트레인: 우리가 스윙을 안한다고?

▶돌피: 우리는 스윙을 한다. 실은 하도 스윙을 많이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존도 알고 싶다. 안티 재즈라는 뜻이 뭔가? 우리는 스윙도 하고 재즈도 하는데.

▶콜트레인: 스윙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든 그룹은 각기 서로 다른 스윙이 있다. 우리 밴드도 마찬가지 있다. 스윙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답하기 참 힘들다.

▶돌피: 평론가들은 새로운 음악이 나타났고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있다면 연주한 뮤지션을 인터뷰를 해봐야 한다. 그러지도 않고 무조건 혹평을 하면 뮤지션은 놀랄 수밖에 없다. 기분이 몹시 상한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는다. 혹평을 받으면 피해가 크다. 뮤지션은 자신의 음악도 하지만 또한 밥벌이도 해야하는데 평론가가 뮤지션을 나쁘게 쓰면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멀리하게 된다. 

▶콜트레인: 평론가들은 이해하고 동참하고 그 뒤에 써라. 우리를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이해가 먼저이다. 나는 제대로 분석도 못 하면서 무조건 좋게 쓴 글도 봤다. 얄팍한 내용밖에 안되는 평론도 봤다. 내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이 말이다.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하라. 물론 평론가든 뮤지션이든 100% 음악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나도 노력하고 평론가도 노력해야 한다. “이해(understanding)”.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 베네핏을 누린다. 

 

'정리된 혼란' 돌피의 걸작, Out To Lunch. 

 


1964년은 재즈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한 해이다. 이노베이터들의 걸작 행진이 이어지던 해였다. 앤드류 힐의 Point of Departure (3월 21일, 에릭 돌피 참여), 앨버트 아일러의 Spiritual Unity (7월 10일),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12월 9일)이 녹음된 해였다. 무엇보다도 1964년 2월 25일, 에릭 돌피의 Out To Lunch 음반 녹음은 그 해의 가장 빛나는 소득일 것이다. 

1964년 에릭 돌피의 창의성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토니 윌리엄스, 바비 허쳐슨, 리처드 데이비스,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Out To Lunch. 이 미래지향적인 음반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정리된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셀로니어즈 몽크의 이미지를 제목으로 단 첫 곡 Hat and Beard는 시작부터 베이스 클라리넷, 비브라폰, 베이스, 드럼의 특색있는 스카타토 조합으로 듣는 이를 대단히 불안정한 세계로 이끌어간다. 18세에 불과한 드러머 토니 윌리암스의 연주는 경이롭다. 그는 이듬해 윌리암스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우리도 안티 뮤직을 연주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창의적이었는데 Out To Lunch에서 이미 그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Hat and Beard에서 하이햇의 쓰임은 무척 감동적이다. 비브라폰 주자 바비 허쳐슨도 이 음반에서 대단히 특색있는 연주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비브라폰 연주자들은 서스테인 페달을 적극 이용해서 음이 초인종 소리처럼 울리게 하는데 허쳐슨은 페달을 쓰지 않고 비브라폰을 세게 내리쳐서 거친 쇠소리 사운드를 내고 있다. 셀로니어즈 몽크처럼 오픈 스페이스를 많이 두고 멜로디를 빗겨가듯 연주하면서 돌피의 솔로를 푸시하기도 한다. 허쳐슨은 비프라폰의 음역 범위 전체를 적극 이용하면서 다른 솔로이스트의 보조를 넘어선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리처드 데이비스의 베이스도 훌륭하다. 그는 보우를 많이 쓰면서 카운터포인트로 연주하는데 모던 베이스 기술의 축소판을 보여주는듯 자기 영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음반에서는 프레디 허바드가 상대적으로 덜 모험적인 것 같다. 그의 프리 재즈 연주는 조금 경직되어 있으며 전통의 틀로 되돌아오려는 조짐이 있는데 돌피는 허바드의 불편한 점을 잘 매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내 소견상 돌피가 왜 콜트레인 그룹에서 왜 나왔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돌피는 분명 보다 진보적인 리듬 섹션을 원했던 것 같다. 구성면에서도 콜트레인과 스타일이 다른 부분이 있다. 콜트레인의 음악은 큰 틀에서 주제를 갖고 있으며 그의 솔로는 하나의 주제로 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반면, 돌피는 하나의 긴 주제를 갖는다기보다 분열된 멜로디가 반복되고 여러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져서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논리적인데 (그래서 나는 '정리된 혼란'이라고 했다) 타이밍에 대한 엄청난 센스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테크닉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은 지금 들어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이 없다. 아방가드 최첨단 음반은 아니지만, 돌피는 그 시대의 문법을 넘어선 미래지향적이고 이상적인 연주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음반이 후대의 프리 재즈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 동쪽으로, 동쪽으로.

 

Out To Lunch 녹음을 마치고 돌피는 찰스 밍거스 섹스텟 멤버로서 유럽 투어를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지난 호에 언급했듯 그가 소장해온 음악 자료와 짐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맡겼다. 돌피는 이번에 유럽에 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돌피는 발레리나인 약혼녀 조이스 모데카이와 파리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 밍거스에게 그의 뜻을 알렸다. 이번 유럽 투어를 끝낸 뒤에 당신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돌피는 밍거스에게 "미국은 내 음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한다. 얼마 뒤 돌피는 독일의 평론가 와킴 배랜트에게도 같은 이유를 토로했다. 돌피에게 유럽은 인종차별 없고 새로운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6천 킬로 동쪽으로…. 돌피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밍거스는 자신의 밴드를 떠나는 돌피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섭섭함을 평소 돌피와 함께 연주했던 블루스곡에 "So Long Eric"이라고 제목을 붙여 돌피와 함께 유럽 투어 내내 연주했다.

 

굿바이, 에릭 (So Long Eric)

 

1967년 6월 27일. 에릭 돌피는 '탕전트 재즈 클럽' 첫 무대에 서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 직후 몸이 아프다고 주변에 호소했다. 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무대에서 두 세트만 연주하고 내려와야 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이미 의식불명이었다. 치료 과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인슐린 주사 쇼크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의사가 지레짐작 흑인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흔한 마약 과용을 원인으로 보고 마약 성분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느라 살릴 기회를 놓쳤다는 설이 있다. 여러 증언과 상황을 보았을 때 후자가 유력하다. 그의 사망 원인은 혈당상승으로 인한 심장 발작이었다. 에릭 돌피는 심각한 당뇨였다. 에릭 돌피 자신도 자신의 병을 모른 것으로 추정된다. 돌피는 의식불명 이틀 뒤인 6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에릭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의사가 피검사만 했어도 당뇨인 것을 알았을 텐데, 마약 성분을 떨어뜨리는 엉뚱한 약을 주었다. 에릭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돌피의 측근이었던 트럼펫터 테드 컬슨의 말이다.

돌피는 이렇듯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하게 떠났다. 베이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발전시킨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많은 프로젝트를 남긴 채 그렇게 허망하게.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에 온 지 불과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밍거스와 헤어진 후 뉴욕에 처음 왔을 때처럼 돌피는 성실하게 그의 음악적 목표를 하나둘씩 이룩해나가고 있었다. 미사 멩겔버그, 한 베니크, 자크 스콜스 등 네덜란드 뮤지션들과 만나 녹음한 음반은 그의 유작(Last Date 음반)이 되고 말았다. 돌피는 세실 테일러와도 연주할 일정을 가지고 있었고 우디 쇼, 빌리 히긴스와도 밴드를 구상 중이었다. 'Love Suite'라 이름 붙여진 스트링 쿼텟 작품도 작곡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으면 죽은 자의 좋은 점만 부각하고 얘기하게 된다. 그런데 에릭은 진정 좋은 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는 오로지 좋은 것만 있는 사람이었다." (찰스 밍거스)

겨우 서른 여섯, 새의 꿈을 닮은 착한 남자 돌피는 안타깝게 그렇게 떠났다. 

 

소울 메이트, 콜트레인. 슬픔을 삭이다.

 

에릭 돌피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한 사람은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이었다. 돌피가 떠난 후 돌피의 어머니는 돌피의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존 콜트레인에게 선물했다. 콜트레인이 이례적으로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부는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돌피의 악기로 녹음된 것이다. 콜트레인의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는 각각 To Be (Expression, Impulse!, 1967)과 Reverend King (Cosmic Music, Impulse!, 1968)곡에서 들을 수 있다.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마틴 루터 킹을 표상하는 Reverend King에서는 돌피의 혼을 담은 듯 콜트레인의 열정적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제, 존 콜트레인의 추모 메세지로 에릭 돌피의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1964년 8월 27일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마련한 <다운비트>가 콜트레인의 이 메세지로 끝을 맺은 것처럼. 

"내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지 간에 불충분하다. 그를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뿐이다. 에릭을 알고부터 내 삶은 훨씬 풍요로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친구로서 뮤지션으로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실은 1964년 8월 27일자 <다운비트>. 존 콜트레인의 메세지는 짧지만 중요했던 돌피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에릭돌피 사후 돌피의 부모가 선물한 플루트를 불고 있는 존 콜트레인.


 1964년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 투어를 떠난 시절. 투어가 끝나고 두달 여 뒤에 돌피는 사망했다.


 

양수연의 에릭 돌피 베스트송 (녹음일순)

 

▶베스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


Serene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Green Dolphin Street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Miss Toni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When Light Are Low (1960년 8월 30일 녹음. <Berling Concerts>, Enja 수록)

Spiritual (1961년 11월 1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India (1961년 11월 2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God Bless the Child (1963년 3월 10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The Illinois Concert>, Blue Note 수록)

Epistrophy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Fontana 수록)

 

▶베스트 '플루트' 연주


17 West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Sunday Go Meetin’ (Latin Jazz Quintet + Eric Dolphy, <Caribe>, Prestige 수록)

Ode to Charlie Parker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New Jazz 수록)

Inner Flight No.2 (1960년 11월 7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Other Aspects>, Blue Note 수록)

Glad to Be Unhappy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Stolen Moments (1961년 2월 23일 녹음, Oliver Nelson의 <The Blues and the Abstract Truth>, Impulse! 수록>

Don’t Blame Me (1961년 9월 6일 녹음 (코펜하겐), <In Europe, Vol.2>, Prestige 수록)

My Favorite Things (1961년 11월 18~11월 29일 녹음.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수록)

You Don’t Know What Love Is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Limelight Records 수록)

Gazzelloni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베스트 '알토 색소폰' 연주

 

Dolphy-N (1960년 11월 (?)녹음. Ron Carter와 듀엣곡 <Other Aspect>, Blue Note 수록)

Miss Ann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 New Jazz 수록)

Round Midnight (1961년 5월 8일 녹음, George Russell의 <Ezz-thetics>, Riverside Records 수록)

Aisha (1961년 5월 25일 녹음, John Coltrane의 <Ole Coltrane>, Atlantic 수록)

Hot House (1961년 8월 30일 녹음, <Berlin Concert>, Enja Records 수록)

Tenderly (1960년 12월 21일 녹음. 에릭 돌리 솔로곡. <Far Cry>, New Jazz 수록)

Out To Lunch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Jim Crow (1962년 녹음 날짜 및 돌피를 제외한 연주자 불분명. 돌피 전 악기 사용. Other Aspect, 1987년, Blue Note)

 


▶기타: Out To Lunch 녹음 50주년을 맞아 후대 뮤지션들이 새롭게 각색한 트리뷰트 음반. Out To Lunch의 곡들과 에릭 돌피의 대표작들을 수록한 멋진 앨범들이다.



Aki Takase, Alexander Von Schlippenbach <So Long, Eric! Homage To Eric Dolphy>, Intakt Records, 2014


Russ Johnson, <Still Out To Lunch>, Enja, 2014 

; Russ Johnson (t), Roy Nathanson (saxophones), Orrin Evans (p), Brad Jones (b), George Schuller (d)


 




posted by jazzlady

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

새를 쫓던 천재 소년, 그가 남긴 유산.


(에릭 돌피 1928.6.20 ~ 1964.6.29)


서울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던 1986년. 내가 살던 지역의 학생들은 성화 봉송을 위한 매스 게임 연습에 동원되었다. 반나절 이상을 카드 섹션이나 집단 무용 따위를 연습해야 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에게 국가가 강요한 유희(遊戱)는 버거웠다. 탈주를 꿈꾸었다. 나에게 다른 세상으로 이끈 사람은 에릭 돌피였다. 돌피를 듣는 것은 비밀스러운 나만의 놀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돌피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나서야 처음 느끼게 되었다. 여태껏 경험한 적 없는 실로 기묘한 소리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낯선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려 따라가다 강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던 아이들처럼 나는 돌피의 음에 유괴된 채 재즈의 강으로 빠져 버렸다. 1961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는 '아주 멀리 떠난다'는 제목의 뜻처럼 돌피 역시 탈주와 도약을 꿈꾸는 듯 느껴졌다. 돌피의 연주가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새를 쫓고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처럼 연주하고 비상하기를 갈망했다.

“나는 항상 새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연습하곤 했습니다. 새 소리를 녹음한 뒤 느리게 재생해봤더니 플루트와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플루트를 느리게 연주하는걸 녹음해서 빨리 돌려보았더니 역시 새 소리 같았구요. 새들은 음과 음사이에 또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F와 F#사이에 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이지요. 인도 음악이 쿼터 톤을 가지고 있듯이 새는 아주 특이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운비트, 1962년 4월 12일 인터뷰)


에릭 돌피는 나의 히로우면서 동시에 미스테리였다. 그가 불현듯 다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에릭 돌피 사망 50주년을 맞아 에릭 돌피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있었던 가운데 에릭 돌피의 유품을 미 의회 도서관이 확보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박스 다섯 분량에 달하는 돌피의 유품은 대부분 그의 음악 문서와 테이프였는데 돌피의 친구인 헤일스 스미스 부부를 거쳐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뉴튼이 보관해온 것이었다.

찰리 파커, 스트라빈스키, 바흐의 작품을 채보한 문서, 특히 바흐의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Bach's Cello Suite No.1과 플루트를 위한 Partita In A Minor For Flute의 채보는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임프로비제이션의 기반으로 쓰려고 작곡한 많은 노트도 있었고 새소리를 채보한 문서도 있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이 새소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역작 "새의 카탈로그" 작품이 완성된 해가 1958년이니 아마 돌피는 메시앙과 비슷한 시기에 새를 연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돌피의 유품은 그가 얼마나 음악의 구조에 대해 면밀히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에릭 돌피는 여러 음악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 음악, 특히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 인들의 노래도 차용하고 있었다. 유품에는 발표되지 않은 곡들도 다수 있었으며 기존과 다른 편곡의 Hat and Beard, Gazzelloni, The Prophet 작품도 있었다. 

에릭 돌피는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이 물건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남기고 1964년 미국을 떠났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돌피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연습만 하는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연습을 끝내고도 집에서 더 하려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했죠. 그와 만나려면 그가 연습을 끝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요. 저 녀석은 언젠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모든사람이 생각했지요." 에릭 돌피의 중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1928년생 캘리포니아주 LA에서 태어난 에릭 돌피는 중학교 2학년 때 남가주 대학 음대의 장학금을 얻을 만큼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리었다. 부모와 학교 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초중고를 거치면서 심도 있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돌피의 부모는 외동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집 마당에 연습실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서 음악을 전공할 때에는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를 음악적 멘토로 삼게 된다.

돌피는 알토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이 주악기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실력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존 콜트레인을 포함해 LA에 공연하러 오는 타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면서야 그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졌다. 그에게 뉴욕에서 연주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피는 무척이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같은 선생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았던 여섯 살 위의 친구 찰스 밍거스도 50년에 이미 뉴욕에 정착해 찰리 파커와 연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돌피 역시 비상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완벽히 준비됐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거처에서 연구하고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닦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돌피가 서부에서 미대륙을 횡단하여 동부로 온 것은 치코 해밀턴 퀸텟의 멤버로서 활동했던 1958년이었다. 치코 해밀턴 퀸텟의 돌피가 1958년 7월 4일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Jazz on Summer’s Day>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동부의 섬에서 돌피의 플루트 연주는 뜨거운 한여름 밤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 치코 해밀턴 밴드로서 돌피는 음반을 여럿 녹음했고 이듬해 1959년에는 뉴욕의 버드 랜드 클럽에서 연주하고 방송도 탔다. 드러머 치코 해밀턴은 훌륭한 연주자이고 밴드 리더였으나 돌피는 “제한된 음악적 자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돌피는 치코 해밀턴 밴드를 떠나 자기의 음악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정착한다. 그의 옛 친구 찰스 밍거스가 돌피를 환영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콜트레인과도 교류를 이어나간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그러나 돌피는 강한 몰입도로 그의 음악 세계를 펼쳐보인다. 


에릭 돌피는 프레스티지사와 계약하고 1960년 한 해만 리더로서 세 장의 음반을 위해 녹음했다. 1960년 4월 1일 첫 리더작 <Outward Bound>를 녹음한다. 프레디 허버드, 재키 바이어드, 조지 투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전형적인 비밥 퀸텟 구성이다. 돌피의 룸메이트였던 22세의 프레디 허버드는 첫 리더작 <Open Sesame>를 녹음하기 직전의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돌피가 베이스 클라리넷으로 연주한 On Green Dolphin Street은 압권이다. 나의 돌피 패이버릿 중 하나인 Glad To Be Unhappy곡도 이 음반에 담겨있다. 라이브로 이 곡을 들었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체념조의 노래를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8월 15일에는 쿼텟 구성으로 2번째 음반 <Out There>를 녹음했다. 이 음반의 독특한 사운드를 위해 첼로가 등장한다. 첼로는 치코 해밀턴 밴드에서 만나 돌피와 통했던 론 카터가 맡았다. 두 사람은 그해 11월 듀엣으로 Dolphy'N과 Triple Mix라는 곡을 녹음했는데 에릭 돌피 사후에 각각 <Other Aspect>(1987), <Naima >(1987) 음반으로 나뉘어 발매된 바 있다. 실로 귀한 음원이 아닐 수 없다. <Out There>에는 찰스 밍거스에 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를 위한 곡 The Baron (밍거스는 LA에서 Baron Mingus라는 예명을 썼다.)과 밍거스의 곡 Eclipse도 연주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녹음된 돌피의 세 번째 음반, <Far Cry>에서는 찰리 파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재키 바이어드의 곡 두 개를 담았다. 론 카터와 재키 바이어드, 로이 헤인즈가 다시 참여했고 클리포드 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22세의 트럼펫 천재 부커 리틀과의 짧지만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부커 리틀이 이듬해 10월 요독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사망 석 달 전 FIve Spot 클럽에서의 라이브 <At The Five Spot>은 Far Cry와 더불어 에릭 돌피와 부커 리틀이 남긴 명작이다.

“재즈는 내 삶의 모든 것이다. 걷고 보고 듣고 내 감각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나는 음악으로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한 감정을 내 연주에 쏟아 부으려 한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앞으로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시도해야 할 것도 많다.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색다른 것들을 항상 듣게 된다. 그러면 늘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내가 음악가로서 더 성장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운드를 영원히 발견해 나갈 것이다.” (에릭 돌피)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과 논란에 휩싸이다.


1961년 5월에 녹음된 존 콜트레인의 음반 <Ole>의 오리지널 LP에는 George Lane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 프레스티지사와의 계약을 고려해 에릭 돌피가 가명으로 참여한 것이다. 

앞서 약간 언급했지만 존 콜트레인은 에릭 돌피의 LA 시절에 처음 알게 됐다. 1954년 존 콜트레인이 색소포니스트 조니 호지스와 공연하기 위해 LA에 왔을 때 콜트레인은 돌피 연주를 듣고 반하는데, 콜트레인 전기를 보면 마약을 사기 위해 돌피에게 돈을 빌린 것이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는 설을 소개한다. 돌피는 마약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콜트레인은 동부에 오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콜트레인은 조니 호지스 공연을 위해 1954년에 여러 번 LA를 왔고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LA에서 공연하러 왔을 때도 돌피와 시간을 가졌다. 돌피는 콜트레인과 잼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 얘기를 하느라 밤을 새울 정도로 깊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돌피는 콜트레인 전 인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콜트레인은 돌피에게 재즈의 메카 뉴욕에서 연주하기를 원했고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두 사람은 멀리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전화로 음악 얘기를 나누며 끈끈한 우정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에릭 돌피가 콜트레인 밴드에 참여한 것은 돌피가 세 장의 리더작 녹음을 끝낸 1961년이었다. 에릭 돌피는 오네트 콜맨과 비견되며 재즈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논란을 만들던 중이었다.  콜트레인도 Blue Train(1957), Giant Steps(1959), My Favorite Things(1960) 등을 비롯해 많은 작품으로 재즈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고 새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었다. 돌피와 콜트레인의 만남은 사건이었다. 특히 1961년 여름의 공연부터  11월 1일부터 5일간 연린 뉴욕 빌리지 뱅가드의 연속 공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공연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도 11월 23일 <다운비트> 잡지는 이렇게 혹평한다.

“최근에 커지고 있는 안티 재즈(Anti-jazz) 트렌드 성향, 즉, 아방가드 뮤직이라는 이름 아래 성장하고 있는 이 안티 재즈의 두 리더, 존 콜트레인과 에릭 돌피의 연주를 몸소 체험했다. 소름 끼치고 몸서리쳐진다. 두 개의 혼이 만드는 니힐리즘적인 운동(다운비트는 ‘연주’라는 말도 쓰기 싫어서 ‘exercise’라고 표현했다)이 그 밴드의 좋은 리듬 섹션을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콜트레인과 돌피는 의도적으로 스윙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안티 재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나키적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다운비트>의 혹평은 독자들의 상반된 뜨거운 반응으로 나타났다. 뉴욕 재즈신이 마치 혼란에 휩싸인듯했다. 

다운비트의 혹평으로 에릭 돌피는 크게 상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릭 돌피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조롱을 받았다. 콜트레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들은 우리가 음악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양 비판했다. 돌피가 마음이 상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상했다.” 

다행히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에게 ‘해명’의 기회를 줬다. 62년도 4월 12일에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의 공동 인터뷰를 진행한다. 콜트레인과 돌피의 서로를 향한 애정과 재즈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인터뷰의 내용은 지면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관련해서 독자께 숙제를 드린다면 당시 논란의 정점이었던 돌피 & 콜트레인의 빌리지뱅가드 공연이 다행스럽게도 1997년 콜트레인 탄생 71주년을 기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점, 그래서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을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2001년 파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61년~63년까지 존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를 담은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7장 박스 셋에서는 콜트레인 유럽 투어에 참여한 돌피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이 박스 셋에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이 포함되었고 특히 My Favorite Things에서 돌피의 플루트 솔로는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돌피를 포함해 콜트레인, 그리고 프리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터트리고 싶어서 참으로 근질근질하다. 다음 호에는 재즈 사에 길이 남을 역작 <Out To Lunch>와 돌피의 마지막 음악 여정을 이어가겠다. 

(다음 호에 계속)


에릭 돌피와 존 콜트레인의 공연. 다운비트 매거진이 '안티 재즈'라 혹평했던 1961년 경이다.


<프레스티지 시절 발매된 돌피의 앨범들>

Outward Bound (1960)

Out There (1960)

Far Cry (1961)

At the Five Spot, Vol. 1 (1961)







<콜트레인과 1961년 11월에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을 담은 박스셋,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돌피의 연주를 담은 2001년 출시된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 박스 셋,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Records)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