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클래식, 두 연인을 한번에 얻은 행복한 사나이.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를 그리며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Gunther Schuller (1925. 11. 22 ~ 2015. 6. 21)


드러머 조지 슐러를 처음 본 것은 색소폰 연주자 리 코니츠와 연주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이햇을 두드리며 무심히 청중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하도 깊고 강렬해서 그 눈은 세트에 더해진 하나의 드럼 심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형형색색 조약돌이 한데 부딪히듯 밀도 있고 섬세한 멜로딕 드러밍에 취해버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연주는 오십이 넘은 재즈 연주자들의 무르익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2년 전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추모 세미나에서 조지 슐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 재즈의 현주소에 관한 그의 역동적인 연설에 전율했다. 조지의 연설은 이 시대 위대한 작곡가 건서 슐러가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협회에서의 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부전자전이구나....그날 비로소 나는 조지가 풍겼던 ‘사뭇 다른 느낌’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슐러가(家)에 흐르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마일스 데이비스의 정신과 그들 혈통에 내려오는 음악 유전법칙의 외연이었음을.

지난 6월 21일 건서 슐러가 훌륭한 두 연주자 아들, 조지와 에드를 남기고 8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에 나는 슐러를 통해 연구해야 할 음악 계보학이 얼마나 방대한지 그리고 그 작업에 매료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 그는 생전에 200여 곡을 작곡했고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이중 살림을 꾸렸으며 두 장르를 혼합하여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 이라고 불렀다.

건서 알랙산더 슐러는 1925년 11월 22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1936년까지 독일에서 사립 학교를 다녔고 뉴욕으로 건너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뉴욕 필하모닉의 바이올린주자였다. 어려서 프렌치 혼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슐러는 불과 열다섯 살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대타로 연주했으며 열여섯에는 신시네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린치 혼 주자로 발탁되었다. 클래식 분야 촉망받는 연주자였지만 그 시절 슐러는 재즈에 푹 빠져있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에게 듀크 엘링턴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이라고 말하자 그는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셨다. 엘링턴이 베토벤만큼 위대하다는 발상은 클래식 세계에서는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


Birth of the Cool 녹음으로 전설을 만들다.


재즈를 향한 슐러의 애정은 재즈 연주자들과의 교류를 이끌었다.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젊은 백인의 뉴욕 필하모닉 혼 주자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었다. 1949년 초 9인조 빅밴드라는 야심찬 구성으로 쿨 재즈의 탄생을 알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역작 <Birth of the Cool>에 건서 슐러가 프렌치 혼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은 주니어 콜린스의 대타로 슐러를 추천한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덕분이었다. 이날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될 예정인 Moon Dreams 곡이 까다로워서 녹음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A토널로 연주되는 코다 부분은 여러 번의 리허설을 해도 악기 밸런스가 맞지 않고 리듬도 왔다갔다 했고 녹음을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녹음 시간을 남겨두고 곡이 포기되기 직전 슐러는 마일스에게 자신이 지휘를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Birth of the Cool 연주자들은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아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하는 슐러를 따르며 Moon Dreams의 녹음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슐러가 혼 부분에 집어넣은 손을 떼면 피치가 1/4음 올라가기 때문에 손을 혼에 넣을 수 없는 지휘 시에는 입술로 1/4음을 낮게 조정하며 불었다는 ‘슐러의 전설’이 전해진다. 사운드가 비슷한 어두운 저음 악기들의 구성, 비밥의 전성기였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이 9인조 컨셉은 클루드 톤힐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렇듯 슐러의 재즈 외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 쿼텟, 에릭 돌피, 찰스 밍거스, 오네트 콜맨, 짐 홀 등 최고의 임프로바이저들과 함께 작업했다. 

슐러의 ‘본바닥’ 클래식에서도 그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은 지속되었고 작곡가로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195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뮤직 디렉터가 슐러의 곡 Music for Brass를 연주하였고 방송을 탔다. 서른살의 프렌치혼 연주자이자 천부적인 작곡가, 지휘자인 슐러에 대한 평단의 호평이 이어졌다. 사무엘 바버와 아론 코플란드등 위대한 현대 작곡가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슐러는 전도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클래식 세계에서 오롯이 섰다. 슐러의 뛰어난 작품들 중에는 서로 잘 결부시키지 않는 악기들의 조합, 또는 많이 쓰지 않는 악기들을 차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초기 작품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In the Symphony for Brass and Percussion (1950)은 현악기나 관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1960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Spectra는 오케스트라를 7개 그룹으로 나누어 매 그룹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하고 혼합해서 들을 수도 있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다섯개의 혼을 위한 Five Pieces for Five Horns(1952), 네 개의 더블 베이스 작품(1947), 네 개의 첼로를 위한 작품(1958) 등 획기적인 작품들도 있다. 콘체르토도 20개 이상 작곡했는데 더블 베이스가 솔로를 하는 콘체르토(1968), 콘트라바순(1978), 알토 색소폰(1983) 등 상대적으로 드물게 등장하는 악기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슐러는 거칠고 독특한 작품 외에도 한편의 시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많았다. 92년에 사망한 아내 마조리에게 바치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1993)이나 챔버곡 Impromptus and Cadenzas(1990)는 거친 하모니가 예측하기 어려운 무드와 톤의 변화에 따라 따듯한 느낌을 주는 멋진 곡들이다. 슐러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로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슐러의 평생에 걸친 야심은 클래식과 재즈의 따로 살림을 합치는 것이었다. 1957년 무렵부터 슐러는 클래식과 재즈의 결합을 스스로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재즈 클럽에 콘서트홀을 들여놓고 콘서트홀에 재즈 클럽을 옮겨다 놓을 작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을 화나게 했다. 촉망받는 작곡가에게 비판이 이어졌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이 나에게는 논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이런 두 장르의 위대한 음악이 서로 나누어져 있고 얘기도 안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대 쪽을 욕하고 있으니 나는 합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재즈와 클래식을 결혼시킬 유능한 사람들을 물색했다. 같은 목표를 위해 제자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를 합류시켰다

“써드 스트림 운동은 서로 다른 취향의 작곡가, 연주가, 임프로바이저들을 같이 일하게 하고 여러 다른 장르의 음악을 결혼시키는 일이다. 이 운동이 멜팅팟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써드 스트림 개념으로 청중에게 다가간 중요한 기점은 써클 인 더 스퀘어 씨어터에서 컨템포러리 스트링 쿼텟, 빌 에반스 트리오, 배리 갈브레쓰, 에릭 돌피, 오네트 콜맨 등이 함께 슐러의 써드 스트림 작품이 선보였던 1960년 5월 17일이었다. 슐러는 써드 스트림 개념을 반영시킨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써드 스트림에 주력하면서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를 실감했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끝내고 밤새 작곡을 하는 등의 연주와 작곡이 병행되는 생활을  십오년 이상 지속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스케쥴이 계속되자 그는 과감히 프렌치혼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연주자의 생활이 사라지자 그는 저술과 교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혼 주자들의 교과서 격이자 92년도에 재판된 <혼 테크닉>(1962)이 나온 것도 이맘때였다. 1963년에는 카네기 홀의 새 음악 시리즈인 <20세기 이노베이션>을 기획 감독했다. 그 해 여름에는 ‘탱글우드’ 대리 학과장으로, 65년에는 정식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70년부터 84년까지는 클래식, 재즈 음악의 전당인 버슈어 뮤직 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다. 세계적인 음악제 탱글우드에서 건서 슐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84년 탱글우드의 모든 직에서 은퇴한 후 아이다호주 샌드포인트의 여름 페스티벌을 시작했고 미국내 여러 앙상블과 교류하면서 클래식과 재즈 오케스트라들의 게스트 컨닥터와 디렉터를 맡았다. 1950년도에 맨해튼 스쿨 어브 뮤직에서 시작되었던 교육 경력은 예일 대학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음악 대학인 권위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이었다. 슐러는 NEC에 써드 스트림 전공을 만들고 이후 총장 재직 10년 동안 재즈와 써드 스트림 음악을 NEC의 주력 분야로 키워냈다. 써드 스트림 과(科)의 학장은 슐러의 제자이자 동료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였다.

건서 슐러 이전에도 조지 거슈인, 라벨, 바르톡 등 여러 작곡가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지만, 건서 슐러의 위대함은 재즈-클래식 결합을 개인의 작업을 넘어서 ‘써드 스트림’이라는 음악계에 하나의 조류를 형성케 하였고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 안으로 써드 스트림을 가져와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재즈를 클래식과 학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르로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클래식과 재즈, 두 장르의 음악을 완벽히 이해해야 훌륭한 써드 스트림 음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써드 스트림이란 재즈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클래식과 재즈의 전통의 비율을 반반으로 가장 좋은 혼합 상태로 만들어야한다. 재즈, 클래식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더 깊게 혼합될수록 더 좋은 써드 스트림이다. 나는 클래식에서 조금, 재즈에서 조금 섞는 얄팍한 교배를 싫어한다. 이상적인 써드 스트림을 만들려면 클래식과 재즈 각각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최고의 전통과 업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건서 슐러는 클래식 명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총장을 지내고 클래식 분야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정작 본인은 제도권 교육은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비록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 오케스트라에 합류했으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사사받는 스승을 두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그의 스승은 음악과 악보였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 협회’ 연설을 통해 슐러는 공개적으로 독학에 대한 자부심을 처음 드러냈다. 음대 교육자들을 앞에 둔 이 아이러닉한 명연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슐러는 남들 하는데로 하기보다 튀는 성향이 짙었다. 항상 음악계에 대해 독설을 쏟았으며 청중을 향해서도 음악 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건서 슐러의 발언은 이율배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작곡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정작 본인은 청중을 잃어버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빠져있었다. 탱글우드 디렉터였던 79년에는 공부하러온 학생들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음악 노조 등 모든 음악인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너희들이 잘못해서 오늘날 연주자들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무관심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슐러의 음악계를 향한 날센 비판은 그의 저서 <묵상: 건서 슐러의 음악 세계>(1986), <완벽한 지휘자>(1997) 등 그의 저서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건서 슐러는 독학으로 작곡을 터득했지만 음악 가계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지휘자였고 부친은 무려 42년간이나 뉴욕 필하모닉에서 연주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려서부터 악보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고 부친이 그의 멘토였다. 현악기 연주자보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프렌치 혼을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다. 77년도 뉴욕 타임즈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듯 음악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슐러에게는 진정 행운이었다.

건서 슐러가 창설했던 뉴잉글란드 음악원의 ‘써드 스트림’과는 몇 년 전 ‘컨템포퍼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다 재즈적인 느낌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다. NEC에서 건서 슐러와 함께 써드 스트림을 일구었던 랜 블레이크 전 학장으로부터 본인은 물론 슐러 역시 명칭 변경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때 동거했던 재즈와 클래식의 한집 살림이 끝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비록 이름은 달라졌더라도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 배합을 추구했던 건서 슐러의 엄중했던 써드 스트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주자들은 물론 많은 청중이 어찌보면 클래식과 재즈라는 두 연인을 함께 얻기를 꿈꿔 왔기 때문이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와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좌). 두 사람은 각각 총장과 학장 신분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써드 스트림'의 조류를 만들고 후학을 양성했다.



posted by jazzlady

월간 재즈피플 2014년 3월호


"어느 겨울, 위험한 외출"

카쓰 자렛, 카네기홀 솔로 콘서트를 고백하다.






우리 삶의 여정의 중간에서 나는 어두운 숲 안에 던져진 나를 발견했다. (단테 '신곡)


오늘의 이 글은 오직 감성의 고백일 뿐이다. 이것은 일기장에 쓰여야 마땅하다. 나는 2월 5일 카네기홀 이삭 스턴 오디토리엄을 떠올리고 있다. 


#.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고서 민첩한 동작으로 카네기홀 로비로 들어선 그녀는 예약증과 표를 바꾸기 위해 줄을 선 무리를 제치고 곧장 공연장 객석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1층 정중앙 좌석 넘버 P108로 향했고 먼저 앉아 있던 P106과 P105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들은 그녀가 들어가기 쉽도록 기꺼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그들에게 “땡큐”라고 했고 그들은 미소를 지었는데 저도 모르게 감추었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터져 나올 듯 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키쓰 자렛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동질감, 그리고 이 공연이 가져올 감동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여유의 미소가 그들에게 번졌다. 그녀가 눈인사를 끝내고 좌석에 앉는 순간, 그녀는 이제 오직 청중 넘버 P108으로만 존재한다. 그녀는 P108로 명명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공연이 시작되면 그녀의 신체 활동은 제한되고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있는 상념들도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 그녀는 이날 아침, 올해 들어 가장 막강하게 불어 닥친 눈보라를 뚫고 보스턴 사우스 스테이션에서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맨해튼 중심부에 도달할 때까지도 폭풍은 멈추지 않았고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열차처럼 기차 밖 풍경은 그저 황량하기만 했다. 그녀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콘체르토 No.1을 귀에 꽂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이 얼어붙은 정경과 더없이 잘 어울렸으며 그녀의 열정을 북돋워 줄 엑스터시로써 가슴에 꽂혔다. 기차가 코네티컷 주를 통과할 무렵 그녀는 격정에 휩싸였던 마음을 잠시 거두고 키쓰 자렛 솔로 연주들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발라드를 떠올렸다. 매끄럽게 물결치는 바다 위의 배, 그 위에 누워있는 듯한 요동침이 그의 발라드에 담겨 있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듯 지속적으로 표출되는 루바토. 그의 루바토는 프레이즈 끝에 어떤 감동이나 뉘앙스를 제시하기 위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곡 전반에 걸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73년 솔로 콘서트의 Bermen에서와 같은 운동성을 몹시도 사랑했다. 그 느릿한 호흡이 만들어내는 리듬의 변화들, 4/4, 3/8, 3/4 다시 4/4와 2/4로, 그리고 7/8, 5/6으로.  그  비트는 밤의 호흡처럼 긴장과 이완으로 요동치는 것이며 종국에는 물결처럼 잔상으로 남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운동성에 미치도록 연루되고 싶었다. 그 판타시에서 그녀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경계해왔으며 설령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마냥 질주하고 싶었다. 그 질주를 위해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것을 조금씩 비우기로 했다. 즉, 허가되지 않은 뺌샘, 즉 <인간Home -이성 Logos = 짐승>. 짐승으로 허락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조금씩만 천천히 빼면 될 것이었다. 키쓰 자렛은 음악을 찾아 더할 것이고, 그녀는 뺄셈을 시작할 것이다. 뺄셈은 하강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키쓰 자렛과 교감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 공연이 시작되기 2시간 전 그녀는 카네기홀 건너편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롱 아일랜드산 프레시 오이스터와 마크햄 샤르도네 와인을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카네기홀 건물은 맨해튼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보수를 위한 철기둥이 처마를 이루고 있었다. 앙상하게 붉은 뼈마디를 드러내고 있는 구조물 뒤로 오늘의 공연을 말해주는 키쓰 자렛의 포스터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저 가는 철골들은 지금 그녀의 설렘과 환희를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일종의 잔해로 느껴질 것이다. 질척한 속살을 내뱉은 오이스터 껍질처럼.



#. 청중은 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다른 연주자들보다 나에게는 청중이 필요하다. 다만 청중이 이 일을 하기만을 원할 뿐이다. Try to concentrate.

청중 넘버 P108, 그녀는 무대를 응시했다. 자렛식 음향 무대는 그녀의 이차적 쾌락이다.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자 그녀의 기관들은 침묵한다. 그녀는 어둠의 숲 절벽 위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며 그녀의 앞 뒤, 좌우는 오직 낭떠러지일 뿐이다.  



#. P108은 선율의 윤곽을 그려본다. 키쓰 자렛은 결코 토널 센터로 진입하지 않는다. 그는 일련의 아이디어를 끝내기가 무섭게 새 아이디어를 등장시켰다. 그는 패턴 없는 무조를 즐긴다. 종국은 없을 듯 음들을 연기시켜 나가다가 마침내 파열시켜 버린다. 내부의 음들이 안정적인 탐험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P108은 긴장감에 잠시 몸을 떤다. 10여 분 간의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이 끝난 뒤 키쓰 자렛은 가스펠적으로 Pt.2에 진입했다. 명료하게 스타일을 부여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P108은 잠시 이론적 레퍼런스들을 떠올리고 싶은 유혹에 빠졌지만, 계속 로고스 뺄셈을 이어가려 노력한다.

Pt.2가 끝난 뒤 키쓰자렛은 무대를 잠시 거닐다가 좁은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잠시 세운 것을 깜빡한 사람처럼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섭게 질주한다. 비현실적인 속도감이 P108의 억눌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미궁 속으로 빠지려 하기 직전에 그는 느닷없이 연주를 끝내버린다. 2분간의 질주는 애를 태웠다. P108은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곡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그는 거세게 발리듬으로 탭하며 그루브를 만들었고 그녀는 멜로디에 짓밟히는 느낌 마저 들었다. 그녀 대신 자렛이 신음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그가 눈부시게 로맨틱한 멜로디로 Pt.5를 시작하자 P108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부상당한 그녀의 몸을 누군가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몹시도 슬퍼졌다. 그 음악적 마조히즘이 섬뜩해서, 그녀는 어서 빨리 어둠의 절벽 위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 단지 피아노 한 대와 내가 무대에 있을 때, 나의 육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연스레 알고 있다. 내 왼손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꿈꾸는 더 나은 플레이를 위해서, 내 손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에너지와 인스퍼레이션, 이것은 과도한 인풋이 되어 내 육체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내가 연주할 때 왜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 아웃풋이 필요해서이다. 음악에 심취하면 열정이 나를 끌고 갈 뿐이다.

키쓰 자렛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뒤 길게 손을 뻗어 피아노를 치곤 한다. 프레이즈를 날렵하게 순식간에 해결할 때, 주술을 읊듯 반복적인 뱀프로 리듬의 모멘텀을 만들어 낼 때에도 이 몸짓을 보인다. 어깨 밑으로 깊게 떨구어진 머리는 그 어떠한 것도 응시하지 않는다. 오직 스트레칭 하듯 길게 뻗은 팔이 독특한 보이싱을 이루는 손가락을 지탱하고 있다. 이윽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면 변화 없는 뱀프를 그만두고 몸을 주욱 끌어올린다. 그리고 천천히 길게 호흡을 내뱉고 들이마시면서 새로운 음들을 꺼내 보인다. 그에게 그루브는 육체적 경험이다. 



#.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그녀는 비로소 어두운 사위를 돌아다 본다. 펭귄처럼 긴밀하게 붙어있던 개별자의 군상이 사라지고 있다. P106이 멋진 공연이 아니었냐고 말을 걸어온다. 그녀는 미소 짓는다. P106은 친구와 함께 뉴욕과 반대편 콜로라도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왔다. 그는 일본인으로 생각했다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의 말대로 키쓰 자렛을 좋아하는 아시안은 거의 일본 사람들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공연 전 32번가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순두부를 먹었다. 또 다른 개별자 P109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다는 듯 말없이 앉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진을 찍기 위해 일어나자 그녀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건넨다. 그들 모두 중년의, 더 이상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향유할 줄 아는, 파국적 경험을 가진, 거리낌 없는 탐험이 가능한, 강박적 열정에 관대한 존재.

P108. 그녀에게 주어진, 쾌락을 위한 외출의 시간이 이제 끝나가고 있다. 



#. 음악은 허공에 있는 것을 찾던지 못 찾는 것이다. 쏟아지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 일은 그 감정을 다 풀어내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몰랐었다. 내가 연주하면 내 손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저절로 알고 있다. 나는 머리로 지시하지 않는다. 내 본능에 나를 맡길 뿐이다. 나는 무의식으로 음악의 경지를 이룬다. 

자렛은 왼손으로 아르페지오 하며 코드를 깨어낸다. 그러다 5th로 10th로 루트를 명시해가며 클래시컬 레퍼토리를 끌어들린다. 선정성은 격조 있는 패턴들로 가장한다. Pt. 8, Pt.10, Pt.11에서 그의 번민이 느껴진다. 그는 두 개의 곡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 한다. 프레이징에 대한 센스를 남용하며 완결되지 못하는 시도를 감추기도 한다. 그의 실연(失戀)은 P108 그녀에게 조용히 간파된다. 그녀는 그가 쏟아내는 하모니 뭉치의 끝단을 주르륵 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독단적인 그를 벗기고 해체하고 그의 순진성을 가늠하고 싶어진다. 그의 과잉된 본능이 한낱 장식으로 무마되기도 할 때 그녀는 오히려 희열을 느낀다. 기교에 완전히 도달하지 않은 악기로 인해 그녀를 심란케 했던 앨범 No End를 떠올리며, 그가 확신 받고자 다가올수록 복종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 그러나 결국 P108은 그로부터 이식된다. Over the Rainbow로 앙코르곡을 마무리할 때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결국, 그 인간적인 멜로디는 무조성에 대한 그의 사유와 샤먼적 본능을 강조시키는 장치이다. 그는 그녀에게 결여된 것을 상기시켜 주었고, 그녀는 자렛에게 이 청명한 카네기홀이라는 지정학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녀는 노회하나 그녀보다 더 오래 영원히 살아남을, 그 육체에 위탁된 멜로디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걸려들었지만 세속의 뺄셈으로는 규범의 논리와 완전히 결별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온전히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녀 존재의 본질적인 허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초연히 무대 뒤로 사라진 뒤에도 우물 밑바닥 물빛처럼 축축해진 어둠의 객석에서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좌석에 앉는 순간, 그녀는 이제 오직 청중넘버 P108으로만 존재한다. 그녀는 P108로 명명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공연이 시작되면 그녀의 신체 활동은 제한되고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있는 상념들도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키쓰 자렛은 결코 토널 센터로 진입하지 않았다. 그는 일련의 아이디어를 끝내기가 무섭게 새 아이디어를 등장시켰다. 키쓰자렛의 2006년 카네기홀 솔로 콘서트의 모습. 


맨해튼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보수를 위한 철기둥이 처마를 이루고 있는 카네기홀. 이 붉은 철골들은 지금 그녀의 설렘과 환희를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일종의 잔해로 느껴질 것이다. 


2월 5일 카네기홀에서 열린 키쓰 자렛의 솔로 콘서트. 자렛식 음향 무대는 그녀의 이차적 쾌락이다. 


*상기 언급된 키쓰자렛의 코멘트는 지난 달에 열린 NEA재즈 마스터스 어워드에서 키쓰자렛의 인터뷰를 인용한 것임.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