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전자 회로가 귀로 진입하는 듯 난해한 재즈가 있는가 하면,


러스틱한 티포트의 내음처럼 노스탤지어의 재즈가 있는가 하면,

봄날 아침 여인의 향기처럼 관능적인 재즈가 있는가 하면.......


만일 당신이 낡은 레코드 속 옛 여가수가 바스르르 떨며 부르는 노래를 듣기 소망한다면, 본인을 죽은 싱어의 사회의 이탈자로 자각하길 나는 바란다. 만일 당신이 어느 날 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그 바스르르 떨리는 곡조와 애절한 노랫말에 몸을 한껏 맡기기를 원한다면, 죽은 싱어의 사회 이탈자로서 본인을 대견하게 생각하길 나는 바란다. 옛가수의 음성처럼 슬픈 진동과 슬픔의 노래들은 청승맞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된 세상. 유행과 첨단기술과 피상적 기교를 앞세운 싱어들이 주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직도 낡은 레코드판 앞에서 숙연해지는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 역시 그 슬픈 떨림의 노래들을 듣기 위해 낡은 레코드를 꺼내곤 한다. 바디 앤 소울(Body and Soul)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는 곡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명연주를 남겼지만, 나는 리비 홀맨의 ‘바디 앤 소울’을 특별히 생각한다. 그녀는 1930년 미국에서 처음 ‘바디 앤 소울’을 부른 가수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가사는 무대 위 리비 홀맨의 실크 나이트 가운 속으로 파고들듯 애절하기만 하다. ‘바디’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당시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되기도 했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동시에 원한다는 갈망의 노래이다. 


1920대~30년대에 그렇게 바스르르 떨며 울듯 노래하며 사랑을 갈망하고 실연의 슬픔을 불렀던 가수, 즉, 리비 홀맨, 루쓰 에팅, 헬렌 모간과 같은 가수를 ‘토치 싱어(torch singer)’라고 한다. 그들은 블루스의 감성을 빌렸지만, 대부분 백인 여인들이었고 유대인이었다. 그녀들은 갱들이 운영하는 뉴욕의 나이트클럽이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인기를 누렸다. 몸에 붙어 흐르는 얇은 드레스를 입고 넋 빠진 듯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들의 낡은 사진은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다. 그녀들은 배우이자 가수이자 댄서이기도 했고 아름다운 몸과 목소리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재즈 스탠다드들이 그런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토치송들이다. "Can't Help Lovin' Dat Man" (1927), "Lili Marlene" (1938), "One for My Baby" (1943), "Cry Me a River" (1953), The Man That Got Away (1954), "Here's That Rainy Day" (1959), Don’t Explain(1946), Glad to be Unhappy(1936), Just A Friend(1931), The Man I Love(1924), Stormy Weather(1933), Night And Day(1932), Skylark (1941), Angel Eyes(1946)……


사랑에 대한 슬픔은 사랑에 대한 찬미와 다른 말이 아니다. 토치송은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음악이다. 그 중심에는 치명적인 로맨티시즘이 있다. 보답이 없어도 좋으니 떠나지만 말아 달라는 그 구차함, 사랑 앞에서 무방비가 될 수밖에 없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의 간절함을 그 백인 여인들이 아니었으면 자본과 물질의 단맛 쓴맛을 톡톡히 맛보고 있던 그 시대에 누가 주류 미국인들의 애간장을 단숨에 녹일 수 있었을 것인가? 이후의 애니타 오데이, 페기 리, 줄리 런던이 국민 가수로서 로맨티시즘의 한 자락을 꿰어잡을 수 있었던 것도 초기의 토치 싱어들의 공로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토치 싱어계의 숨은 여왕은 따로 있다. 백인이 아니었다. 어둡고 탁한 세계에서 엄청난 감성으로 토치송을 업그레이드시킨 그 여인. 토치송을 재즈 스탠다드로 만드는데 기여한 여인. 그녀가 없었더라면…….빌리 홀리데이,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은 떠올리기 싫다. 토치송은 그녀의 부름으로 인해 더욱 깊고 고결해졌다. 그녀가 부른 Mean To Me는 성숙하고 깊어서 그녀가 스물 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 한다. 루쓰 에팅이 1928년 처음 불렀던 Love me or Leave me가 그저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라면 홀리데이는 이별을 통보받기 직전 이제야 속내를 꺼내 보이는 냥 비장하기만 하다.


(1930년, '바디 앤 소울'을 처음 노래한 리비 홀맨)


비련의 노래들은 결백을 주장한다.


비련의 노래들은 결백을 주장한다. 노래의 이면에는 내가 희생자임을 주장한다. 삶의 고통 한복판에 놓여왔던 홀리데이가 평생을 두고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떨림 하나하나는 영혼을 울린다. 그녀의 노래는 문장처럼 음으로 발언하고 회화처럼 풍경을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유산은 로맨티시즘의 패러다임을 배우라는 것이다. 비애는 창법으로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삶을 다해 통째로 그 비애를 받아들이고 맞서야 한다. 빌리 홀리데이는 상처로 점철되었으나 전사적인 기질을 동시에 가진 강한 토치 싱어이다. 그녀가 Cry Me A River를 부를때의 비장함을 보라. 내가 당신보다 더 흐느껴 울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냐, 나보다 더 울어봐라……. 홀리데이의 비통이 절절히 느껴진다. 유년기의 창녀 생활, 결혼의 실패, 마약……. 불우한 그녀의 삶이 노래 곳곳에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랑에 목말라했으나 사랑을 획득하지 못했던 홀리데이는 분명 결백한 희생자이다. 


'바디 앤 소울'을 처음 불렀던 리비 홀맨 역시 격정의 삶을 살았다.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녀 스스로 선택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세 번의 결혼, 그중에 한번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했고,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그녀들은 결핍된 어떤 것들을 비련의 노래로 표현했다. 그녀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숙제를 줬다. 토치송을 제대로 부를 수 없다면 그대는 과연 훌륭한 싱어인가? 토치송을 한 곡이라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과연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윤리의 잣대로 빌리 홀리데이와 리비 홀맨의 삶의 여정을 평가절하시킬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낸 숙제에 관한 우리의 답이 과연 윤리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봐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비애를 아는 사람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한적이 없는가? 우리는 피상적인 쾌락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정 낭만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진정 사랑을 추구하는가?


초기의 토치 싱어들은 1938년을 기점으로 인기를 잃어갔다. 전국에 스윙의 열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비련의 노래들보다 빠른 템포의 춤곡들이 인기를 얻었다. 토치송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많이 연주되고 작곡되었다. 재즈클럽에서는 비밥 연주자들에 의해 본연의 템포인 발라드로 혹은 아주 빠르게 연주되었다. 비밥 연주자들은 고난도의 빠른곡들을 창조해냈지만 토치송들도 절절하게 연주하곤 했다. 찰리 파커가 연주한 ‘안아주고 싶은 당신(Embraceable You)’, ‘당신을 잃는다면(If I should lose you)’을 떠올려보라. 불행을 기꺼이 받아들인(Glad to be unhappy)’ 같은 곡은 몇몇 탁월한 연주자들에 의해 더욱 완성도 높은 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에릭 돌피의 플루트로 연주된 Glad To Be Unhappy는 바스르르 떨리는 초기 토치 싱어들의 버전처럼 심금을 울린다.



키쓰 자렛의 '토치' 사용법.


요즘 나는 키스 자렛으로부터 옛 토치 싱어의 그 비애로움을 느끼곤 한다. 키스 자렛과 찰리 헤이든의 듀오 앨범 <Jasmine>(2010, ECM)은 키쓰 자렛이 작정하고 비련의 미학을 쏟아낸 작품이다. 이 앨범의 ‘바디 앤 소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외에도 굿바이, 날 떠나지 말아요(Don’t Ever Leave me), 당신없이 내가 어딜 가겠어요(Where Can I Go Without You) 등 주옥같은 토치송들이 관능미까지 내뿜는다.  키스 자렛은 복잡한 화성이나 리듬 대신 70여년 전 토치 싱어들이 노래했던 그 방식대로 곡 본연의 애잔함과 슬픔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키스 자렛의 향수 어린 토치송 연주 컨셉은 페기 기의 노래로 히트했던 대표적인 토치 송 “열정(Fever)”을 연주했을 때 그 내막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연주를 2013년 12월 11일, 카네기 홀에서 들었다. 코드 시퀀스가 없는 단순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이 곡을 자렛은 거의 변형하지 않고 화려한 기교없이 반복을 거듭하며 스케일을 연습하는 학생처럼 마이너 팬터토닉 안에서 충실하게 연주했다. 그는 벗어나지 않았고 넘어서지도 않았다. 청승맞음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는 그 촌스러움을 그대로 살렸다. 청중들은 자렛이 엉덩이를 비틀며 열정을 연주할 때 음악적 조크로 받아들이는 듯 어딘가에서 폭소도 흘렸으나 그것은 분명 실례였다. 자렛은 정말이지 진지했다. “열정”은 이런 대중 음악을 색다르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 위한 레파토리가 아니었다. 키스 자렛은 그가 “열정”을 연주한다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기를 원하는 듯 했다. 그는 후렴구를 거듭 반복하며 주문을 외우듯 변형없이 곡을 오랫동안 연주했다. 나는 이 곡의 가사를 상기하며 무릎을 쳤다. 


"열정"의 노랫말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와 개척시대의 캡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블루스처럼 후렴구에 아는 사랑의 이야기를 붙이면 이 노래는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젊은 베르테르가 들어갈 수도 있고 춘향이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의 손가락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캡틴 스미스와 포카 혼타스, 클레오 파트라와 안토니오,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베르테르와 롯테……자렛은 세상의 많은 치명적인 러브 스토리들을 그 안에서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날 키스 자렛으로부터 “열정”노래 사용법을 배웠다. 언어로 노래되지 않은 연주 음악에서 내 안의 언어를 끊임없이 담아낼 수 있었다. 듣는 이가 그걸 하기를, 그렇게 반복하기를 키쓰 자렛은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스 자렛은 반주했고 나는 노래를 했다. 그 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담아서. 순수한 사랑, 절절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시대에서 그는 청중 모두가 그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나는 이날부터 죽은 싱어 사회의 이탈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열정(Fever) 


           - 키스 자렛 연주 (2013년 12월 11일, 카네기홀 연주에서 

/ 음반으로는 나와있지 않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에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를 거에요

당신이 나를 감싸줬을 때

나는 참기 힘든 열정을 느꼈어요




당신은 나를 달아오르게 만들어요

당신이 내게 키스를 했을 때


열정! 나를 꽉 껴안았을 때

열정! 아침에도, 열정! 밤새도록

해가 낮을 환하게 하고


달빛이 밤을 밝게 해요.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설래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한다는 걸 알지


(……)


모든 사람이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당신도 아는 사실일 거에요.

열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열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거에요.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했어요.

줄리엣 그녀도 똑같이 느꼈고

그녀를 안았을 때 로미오는 이렇게 말했죠.

줄리엣 베이비, 당신은 내 불꽃이에요




캡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는 아주 열정적인 사랑을 했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고할때

그녀는 말했어요

아버지, 안돼요! 죽이기만 해봐요!

그는 내게 열정을 줘요


그의 키스로 열정을 느껴요 그가 나를 가득 안았을때

열을 느껴요, 나는 그의 연인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 그에게 잘 대해주세요




이제 당신은 내 이야기를 모두 들었어요

이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이거에요.

여자들은 당신에게 열정을 주기 위해 태어났어요

화씨로나 섭씨로나.




그들은 당신에게 열정을 줘요.

당신이 그들에게 키스 했을때

열정! 당신이 살아서 배우면

열정! 당신이 지글지글 타오를 때까지

얼마나 사랑스럽게 타오르나요…




             


<양수연이 추천하는 Tory Song들>




Mean To Me (작곡: 프레드 E. 아라트 / 작사: 로이 터크 / 1929년)


Billie Holiday, 1937년 5월 11일 녹음 (Columbia 35926)


앨범: Lady Day- The Complete Billie Holiday on Columbia 1933–1944


실연의 슬픔을 담은 Mean to Me는 아네트 한쇼가 1929년 처음 녹음했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버전을 추천한다.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감성적 성숙함, 스물 두살 빌리 홀리데이의 처연한 음성이 매력적이다.





Love me or Leave me (작곡: 월터 도날드슨 / 작사: 거스 칸 / 1928년)

Nina Simone


앨범: Little Girl Blue, 1957년 12월 녹음 (Bethlehem, 1958)


토치 싱어 루쓰 에팅이 1929년에 처음 녹음한 Love me or Leave me는 이별 통보를 앞둔 여인의 슬픔을 그린 아름다운 발라드곡이다. 니나 사이몬이 20대 중반에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한 Little Girl Blue앨범에서는 빠른 스윙과 소울을 한껏 느낄 수 있다.




Body and Soul (작곡: 자니 그린 / 작사: 에드워드 헤이만, 로버트 사워, 프랭크 입튼 / 1930년)


Libby Holeman


앨범: Moanin’ Low - Early Recordings 1927-1934 (Take Two Records – TT415CD, 1995)


바디 앤 소울은 1930년 작곡된 후 영국에서 발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리비 홀맨이 처음 선보였다. 대표적인 토치 싱어로서 그녀는 이 노래의 히트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청초하고 우수에 가득한 음색, 리비 호울맨의 영원한 클래식으로 남을 연주.





Stormy Weather(작사 작곡: 해롤드 아렌, 데드 콜러 /1933년)

Lena Horne


앨범: Stormy Weather (56~57년 녹음/ RCA Victor – LPM-1375, 1957년)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 엘라 핏제럴드를 비롯해 여러 연주자들이 Stormy Weather를 훌륭하게 연주했지만 1943년 영화 <Stormy Weather>의 사운드 트랙 버전도 유명하다. 레나 혼 그녀 자신이 출연했고 노래했다.





Glad to be Unhappy (작곡:리차드 로저스 /작사: 로렌즈 하트 / 1936년)


Eric Dolphy


앨범: Outward Bound (1960년 4월 1일 녹음/ New Jazz-NJLP 8236, 1960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으로 프레디 허버드, 재키 브리드, 조지 터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걸작. 수록곡 중 Glad To Be Unhappy에서 섬세하고 처연한 돌피의 플루트 연주가 일품이다. 가장 좋아하는 Glad to be Unhappy 버전.

                                                       (월간 재즈피플 2016년 9월호)











posted by jazzlady


글: 양수연 (재즈 비평가) - 재즈피플 2018년 11월호


맨해튼에 오면 저녁은 거의 일정하다. 블루노트 혹은 빌리지 뱅가드, 재즈 스탠다드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블루노트에서 정형화된 어메리칸 메뉴로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일. 저녁 공연이 끝나면 스몰스에서 밤의 충만함을 이어가거나 반대편 업타운으로 달려가 스모키 재즈 클럽에 들른다. 연주자를 확인하고 그들이 내 감성과 어떻게 화학작용을 할 것인지 미리 가늠하는 일은 항상 설렌다. 시장기를 느끼면서 레스토랑 메뉴를 읽는 것처럼 내 뇌가 먼저 음악의 맛과 멋을 감지한다. 재즈 클럽은 늘 혼자 다녔다. 재즈를 같이 들을 사람을 찾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다. 음악과 내가 직접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하고 온전하다. 심지어 벅차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재즈를 같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뉴욕에 있다. 오래전 재즈로 만났고 여전히 재즈적 삶을 사는 그 사람, 이기준 씨(49). 그를 불러냈다. 그는 고맙게도 할렘의 중심부에서 달려왔다. 그는 재즈와 삶을 깊이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나에게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는 지금 목사가 됐다. 음악인 이기준이 목사 이기준이 되었을 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음악과 신앙이 하나로 연결된 사람이라는 걸 느껴왔으니까.

뜨거운 공기가 맨해튼 빌딩 사이에 꽉 채워진 7월, 우리는 스몰스 재즈 클럽 만났고 이런저런 장소에서 수다를 이어갔다. 그와의 시간이 즐거운 것은 단지 재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와는 음악과 영적인 세계, 삶의 본질과 치유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키쓰 자렛 전문가이자 열정의 재즈 리서쳐인 목사 이기준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수개월, ‘재즈 피플’의 커버 스토리가 됐던 키쓰 자렛,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빌 프리셀, 비제이 아이어 등의 인터뷰는 그의 작품이다. 그 인터뷰 기사들에서 상당한 노고와 진중함을 느꼈다. 그는 뮤지션의 주변부터 야금야금 그 심장 깊은 곳까지 적극 파고드는 대화를 한다. 음악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일진대, 좋은 인터뷰는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허점을 다독거리며 행간을 읽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어의 장악 능력이 몹시도 중요한데, 이기준은 어떤 음악가를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간과 열정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어서 어지간한 애정가지고는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오래전 재즈 잡지 편집장으로서 ‘뉴욕 통신원’ 이기준을 겪어봤기에 그 열정을 감지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뜨거운 열정. 더 깊어진 통찰력. 물론, 열정과 통찰력만으로 연주자의 마음을 다 열 수는 없다. 이기준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뉴욕 스몰스 재즈 클럽에서. 이기준 목사/ 사진 Ernest Gregory)


1998년, 이기준 씨는 뉴욕 한복판에서 내가 운영하는 잡지사 <재즈 힙스터>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뉴욕에서 내 재즈 잡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좀 전까지 어떤 대단한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처럼 고양된 목소리로 세세하게 뉴욕 재즈의 현장을 묘사했다. 그때는 ‘뉴욕’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레일 때였다. 재즈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도서관을 뒤지고 해외 서적이 있는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는 나는 영락없는 ‘서울 촌사람’이었다. 그래서 권위있고 신선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운비트 매거진과 스윙저널과 제휴를 맺을 방법도 모색하고 있던 차였다.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잡지를 만들었지만, 고민으로 한가득이었다. 사소한 재즈 정보 하나에도 밤잠을 설치며 설레는 열정만 가득했다. 내 열정을 이기준이 건드렸다. 이기준은 현재 어떤 연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뉴욕에서 쿨하게 연주를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처럼 거대한 서사시로 나에게 나가왔다. 나는 이기준의 매력 서사시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 당시 그는 뉴스쿨을 졸업하고 루이스 포터가 가르치는 재즈 리써치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 키쓰 자렛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브레드 멜도우와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조슈아 레드맨 등 당시 급부상하던 재즈의 신예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 뒤 기사를 보내줬다. 다운비트가 99년에 브레드 멜도우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 1년 전, 재즈 힙스터는 브레드 맬도우를 커버스토리로 내보내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런 음악을 알아보는 사람이 이기준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도 실감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뉴욕의 신예 주자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깊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참으로 멋지고도 멋진 일이었다. 맨해튼의 미슐렝 3 스타 ‘르 버나딘’의 캐비어를 맛본 것과 같다는 걸, 한참 후에야 느꼈다.


이기준은 거침없이 연주자들을 사로잡는다. 그가 달려들면, 연주자들은 그의 매력에 함께 빠져든다. 그는 연주자의 뒷조사를 샅샅이 해놓는다. 연주자들의 이웃, 가족 관계(심지어 연주자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어떤 삼촌 이름까지), 함께 연주했던 연주자들 족족을 연구한 뒤 만난다. 이런 것까지 어떻게 알지? 연주자들은 탐복한다. 재즈를 들어온 사람들은 연주자들을 만나면 그럭저럭 얘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편일률적인 질문을 하고 말지만, 이기준은 다르다. 그는 모호한 재즈의 이야기들을 연주자의 삶을 끌어내 구체화시켜 놓는다. 연주자와 함께한 테이블에서 그는 여러 맥락을 소화하고 연주자가 더 본질적인 부분을 쏟아내도록 유도한다. 재즈 주변부의 수많은 재즈 키즈를 만나온 연주자들은 이기준의 남다름에 마음을 활짝 연다. 이기준이 달려들면 엄청난 걸 건진다. 순간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람 중심부로 들어간다. 그래서 키쓰 자렛이 공연장에서 서성이던 그를 백스테이지로 불렀던 것 아닌가? 키쓰 자렛이 만성피로증후군을 극복하고 수년 만에 처음 대중과 만났던 1998년 11월, 뉴왁의 바로 그 공연장에서 말이다. 그때 이기준은 키쓰 자렛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논문을 쓰고 있었다. 키쓰 자렛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키쓰 자렛을 연구하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동양 청년이 자렛에 대해 논문을 쓴다던데? 아, 그 친구? 나에게도 연락이 왔더군. 그 사람 지금 밖에서 서성대고 있다구. 이걸 들은 키쓰 자렛이 이기준을 들어오라고 했다. 키쓰 자렛의 첫 마디는 이랬다.


 “오늘 내 공연이 당신의 논문을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빈둥거림의 승리다.


(사진 Ernest Gregory )

깨달음을 얻는 빈둥거림의 미학.


우리는 스몰스 재즈 클럽에서 트럼펫터 듀우웬 유뱅스 퀸텟의 공연을 봤다. 유뱅스의 연주가 딱히 궁금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히 실력 있고 정렬적인 그룹이고, 우리는 그걸 안다. 스몰스는 그저 집처럼 친근할 따름이다.

“공연 재미 있었나요?”

“재미 없었어요.”

“저도 재미없었어요.”

웃음이 나왔다.


“이젠 그런 것들이 단번에 보인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해요.”

“진실한 음악이란 정직한 음악인 것이죠.”

그에게 ‘정직한’ 음악은 키쓰 자렛이고 빌 프리셀 같은 음악을 말하는 것이리라. 빌 프리셀은 테크닉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들의 음악에는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다. 이기준이 말하는 순간의 충실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이나 생각을 파고드는 깊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그 끝에 영적인 세계까지 건드릴 능력이 있는 연주자들이죠”

목사 이기준이 단번에 알아보는 깊이의 음악에 공감한다. 

“요즘 무슨 음악 들어요?”

“음악 잘 안 들어요.”

“그럼 뭘 하시나요?”

“전 빈둥대는 걸 좋아해요.”

“어려운 걸 하시는군요.”

그의 예사롭지 않은 빈둥댐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순간에 정직한 음악’에 대해서 그는 얘기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요즘 들었던 앨범 몇 장을 얘기한다. 소니 스틱의 Shangri-La와 Personal Apperance 앨범도 있다. 피터 케이틴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과 폴 데스먼드 쿼텟의 East Of The Sun,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래리 골딩스의 In My Room 앨범도 있다. 훑어듣다가 꽂히면 집중 몰입으로 듣는다고 한다. 

“예전엔 센티멘틀한 음악을 좋아했고 누군가를 좋아하면 사이드맨까지 샅샅이 찾아봤는데 이제는 형식적인 것보다 음악을 들을 때 왜 이 사람이 이렇게 했을까? 영감의 소스가 뭘까를 생각하게 돼요.”

이기준이 재즈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건 피아니스트 임인건 씨 때문이었다. 조동진,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같은 언더그라운드 포크 록 밴드들을 좋아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하덕규 씨와 연이 닿아 그들의 세계에 기웃거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임인건 씨를 만나게 됐다. 1회 유재하 경연대회 게스트 연주자가 임인건이었는데 그의 연주를 보고 홀딱 반해버렸다. 임인건 씨를 통해 재즈의 감성이 뭔지 느낄 수 있었고 키쓰 자렛과 ECM 작품들을 접하게 됐다. 그리고 92년 뉴욕 매니스 칼리 어브 뮤직으로 유학을 왔고 나중에 뉴스쿨로 통합되면서 뉴스쿨 학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년을 ‘빈둥대다’가 루이스 포터의 재즈 리써치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하지만 졸업 후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또 몇년간 빈둥대다 할렘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도 빈둥거리고 있다.

“재즈 피아노 전공자로 입학했지만, 제대로 잘 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라구요. 여기는 자기가 일주일을 예약한 연습실이니 자리를 비켜달라더군요.”

자리만 비켜주면 될 걸 이기준은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당신이 연습하는 걸 구경해도 되냐고 부탁했다. 그리고 연습실 구석에서 그 남자의 피아노 연주를 한참을 지켜봤다. 마침내 건반에서 손을 뗀 남자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제 연주 구경하러 안 올래요?”

이기준은 남자의 초대로 빌리지 뱅가드에 갔다. 도대체 뭘하기에?

이기준의 열렬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 멋진 남자는 베니 그린이었고 그날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녹음됐다. 바로 베니 그린 트리오의 명작 <The Benny Green Trio – Testifyin'!: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앨범이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칼 알랜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이기준 주변에선 “네가 베니 그린을 만났다고?” 경악을 했다. 

오호, 이런 식이다. 이기준과 대가들과의 만남은 하나하나가 우연과 드라마틱함으로 가득하다. 

이기준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나는 그가 인간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호기심과 열정이 습관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준 은혜일 것이지만. 

만약 그가 빈둥대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생산적인 빈둥거림은 키쓰 자렛을 파고들게 했고 빌 프리셀, 브레드 멜도우, 베니 그린, 애비 링컨, 크리스챤 맥브라이드를 비롯해 수많은 대가들과 오랫동안 깊은 교류를 하게 했다. 

베니 그린은 그의 스승인 월터 비샵 주니어를 이기준에게 소개해줬다. 그와 공부하면서 이기준은 재즈에 바짝 다가갔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스승이고 얼마만큼 중요한 재즈 레전드인지도 몰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가를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 있을 뿐이었다. 이기준은 야무지고 차근차근히 전략을 짜는 사람이 아니었다. 휩쓸릴 때조차 진실의 탯줄이 그를 매달고 있었다. 그런 직통의 교감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 탯줄이 연결된 곳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이리라.

“순간에 정직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해요.”

인도의 철학자, 크리스챤 나무르티의 화두를 목사 이기준 입에서 듣고 있다. 이기준은 그걸 재즈 연주자에게 투사한다. 시간의 예술 음악, 순간 순간 그 음악에 정직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연주자, 이기준을 감동하게 하는 음악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깨어있는 자만이 깨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스몰스 재즈 클럽 앞에서, 필자와 이기준 목사. 사진 Ernest Gregory )

키쓰 자렛의 매력.

“처음 들었던 키쓰 자렛 앨범은 Staircase (1976) 솔로 앨범이었죠.”

“키쓰 자렛의 어떤 점이 좋아서 논문까지 쓰게 된 거죠?”

“키쓰 자렛은 30년 동안 같은 멤버와 연주했잖아요? 보통 재즈 연주자들은 매너리즘을 탈피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과 많이 연주하려고 하는데 키쓰 자렛은 다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고 지루하지 않아요.

같은 맥락에서 키스 자렛은 자기 곡을 연주하지 않았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곡을 표현하고 발표하기 위해 활동하는데 키쓰 자렛은 그렇지 않았어요. 비슷한 레퍼토리를 새롭게 큰 역량을 가지고 연주를 합니다. 그는 다만 임프로비제이션을 할 뿐이죠. 대단한 임펙트예요. 그건 키쓰 자렛이 깨어있는 연주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발표하기 위한 연주와 음악을 자체를 위한 연주가 다르다는게 이기준의 생각이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말처럼 모두 자기 것 하기 바쁜 세상이잖아요. 음악 자체를 정직하게 연주하는 깨어있는 연주자들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창조의 빛이 관통할 때

“재즈가 가장 훌륭한 음악일까요? 예전에 아프리카 젬베를 배운 적이 있어요. 말리에서 온 선생은 자기는 재즈가 지루하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 리듬은 몹시 복잡한데 재즈는 끽해야 12/8, 7/4박자 정도라는 거죠. 중요한 건 음악을 들을 때 창조의 빛이 나를 관통하느냐 아니냐인 것 같아요.”

내 존재가 정말 신비하고 기이하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였던가? 나무와 풀과 공기와 물이 진정 신비롭고 경이롭게 다가올 순간은? 이기준의 말처럼 당연한 것처럼 지나치고 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서 음악도 예술도 무감각해기 마련이다

“20대에 들은 마일스와 50대에 듣는 마일스가 다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음악은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예술이잖아요. 어떤 음악을 듣던 어떻게 접근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창조의 빛이 나를 통과할 때 그 눈이 떠집니다. 그 빛이 나를 통과하는 순간 그것이 들리는 거죠.”

이기준은 미국에 이민 온 후 할렘 토박이가 됐다. 할렘이 주는 깊은 가스펠 에너지, 할렘에서 목사가 된 독특한 이력이다. 

한국 영화 <블랙 가스펠>촬영팀이 할렘에 왔을 때, 이기준은 할렘에 살고 있는 가스펠 피아니스트 위다 하딩 목사를 알게 됐다. 내친김에 하딩 목사에게 가스펠을 배우고 싶다고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냈다.

“잊고 있었는데 일년 2개월만에 지금 메세지 봤다고 하딩 목사로부터 연락이 오더군요.” 

하딩 목사와의 음악적 영적 교제가 진행되던 가운데 하빙 목사는 이기준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줬다. 이기준에게 목사 안수를 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풀어놓으라고.”

그래서 빈둥거리던 이기준은 ‘말도 안되게’ 2016년 5월, 할렘의 목사 단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할렘의 자택에서 소규모 그룹 모임과 예배를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기준은 교회 언어로 말하면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사다. 


최근에 그는 스승이었던 루이스 포터의 솔로 앨범을 제작했다. 존 콜트레인의 권위자인, 바로 그 위대한 재즈 비평가이자 재즈 히스토리안, 루이스 포터 말이다. 그는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은퇴한 뒤 남은 삶을 피아니스트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면서 비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 반대로 위대한 비평가가 창조해 낸 음악이라니. 그래서 루이스 포터의 이번 앨범은 나로서도 큰 관심이 있다. 창작곡과 스탠다드 곡으로 채워진 진솔한 작품이다. 


루이스 포터로부터 진정성의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이기준은 그와 1년여간 끝없이 대화하고 토론 했다. 


이기준의 삶은 빈둥거림을 타고 지금껏 흘러왔다. 그의 빈둥거림은 휴지기나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도 꾸리지만, 세속적인 경력 자체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사람과 신령한 사람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세속적인 삶에서 신령한 걸 찾는 사람이다. 창조의 빛을 느끼는 감수성과 온화한 덕으로 가득찬 그의 빈둥거림 앞에서 음악은, 연주자들은 무장해제된다. 빈둥거림은 하나님이 이기준이라는 사람에게 준 놀라운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목사로 풀어줬고 그는 양떼처럼 창조의 빛을 느끼는 자유인이 됐다. 


이기준 목사: 이기준은 재즈 리써쳐이자 목사이다. 92년 뉴욕의 ‘뉴 스쿨’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뒤, 1999년에 재즈학자 Dr.루이스 포터의 지도 하에 재즈 히스토리와 리써치로 Rutgers 대학에서 석사를 마쳤고 2007년 보스턴 대학에서 뮤직 에듀케이션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 과정 당시 키쓰 자렛을 전공하여 키쓰 자렛에 관한 방대한 자료 수집, 음악 듣기에 몰두했다. 2011년, 이기준은 재즈연주자이자 리써쳐로서의 삶을 잠시 뒤로하고 뉴욕의 ATS; Alliance theological seminary 신학 대학원에 입학, 졸업후 목사 안수를 받아 현재 뉴욕 할렘에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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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른한 오후,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 특별한 방법.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의 피아니시즘.

1961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의 맨해튼 빌리지 뱅가드. 빌 에반스, 스캇 라파로, 폴 모션 - 세 명의 젊은이, 빌 에반스 트리오는 어둡고 담배 연기 뿌연 지하의 이곳에서 다섯 세트에 달하는 긴 하루를 시작한다. 첫 번째 세트, Gloria’s Step, Alice in Wonderland에 이어 세 번째로 연주된 곡은 빅터 영 작곡, 네드 워싱턴 작사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 보통 발라드는 분당 60~70비트로 연주되곤 하는데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보통과 달리 분당 50비트로 훨씬 느리게 연주했다. 이날 몇 안 되는 오후 관객들은 심장 박동수 보다도 느린 그 곡을 들으며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운지 음악을 즐기듯 편안하고 무덤덤했던 청중과 달리, 그날 오후 이후 빌 에반스라는 이름은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투명하고 고결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빌 에반스가 아니었다면 그 시절 누가, 특히 59년~62년 사이에 누가 이렇게 모던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가. 에반스는 재즈 피아노 모더니티의 핵심이고 시작이었다.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각별히 사랑했다. 64년 코펜하겐에서도, 이듬 해 파리와 런던에서도, 그리고 1980년 여름 빌리지 뱅가드에서 다시 연주할 때까지, 말년에 이르러까지도 열 번 이상 라이브 레코딩으로 남겼다. 

사랑스러운 멜로디 같은 밤이 되었어요.

조심해야지요, 내 어리석은 마음이여.

영원히 변함없이 하얗게 빛나는 달이여,

나의 이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주세요.

사랑과 매혹, 두 개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그 간격을 알아보기 힘들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가왔던지.

사랑인지, 매혹인지, 그러나 느껴지는 감각은 비슷하거든요.

그의 입술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어요.

아, 어리석은 내 마음이여, 조심해야 해요.

열망하는 두 입술이 맞닿아지는 순간, 

이제 불꽃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건 더 이상 매혹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랑이랍니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여. 

나에게 다가오는 존재, 나에게 한눈에 매혹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비슷한 이 감정의 간극을 분별하려 애쓰는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 그러나 많은 상처가 있었던 여인은 머뭇거린다.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탓하고 독려한다. 변별하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주려는 듯, 빌 에반스는 느린 호흡으로 노래에 숨을 쉬게 만들고 있다. 

본디, 빅터 영이 1949년 영화 <My Foolish Heart> 사운드 트랙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영화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못잊는 여인 엘루이즈의 심정을 중심으로 다룬다. 에반스의 느리면서 차갑고 세련된 연주는 위스키 잔에 얼음을 떨어뜨리는 차가운 낯빛 그녀의 어떤 씬을 연상시킨다. 빌 에반스는 토니 베넷과의 듀엣으로도 이 곡을 남겼다. 1975년 캘리포니아 팬타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나의 어리석은 마음’은 에반스와 토니의 애정어린 밀착 교감으로 한편의 로맨스 단편 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빅터 영(1900-1956)은 내면에 멜로디가 너무 많아 일찍 산화된, 한편의 풍경 같은 사람이다. 그가 남긴 그 숱한 아름다운 곡들, My Foolish Heart, Love Letters, Stella By Starlight, Beautiful Love……나는 빌 에반스야말로 빅터 영과 감성적 궁합이 맞은 최초의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에반스 자신이 쇼팽의 팬이었듯, 인상주의 어법으로 피아니시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멜로디와 리듬의 긴장과 이완, 드럽 보이싱, 대체 코드, 크로매틱 어프로치 등 테크닉적으로도 진보적이고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면서 빅터 영의 옛스러움을 고풍스럽게 현대화켰다. 이후 그 어떤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에반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빅터 영의 많은 작품 중에 유난히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 내 감성이 꽂히고 만 것은 멜로디와 가사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딜레마의 뉘앙스 때문이다. 매혹과 사랑, 구분하기 모호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지만 본질은 다른 것이고 딜레마적이다.  빅터 영이 주린 배를 참으며 폴란드에서 고된 음악 훈련을 받았던 어린 시절, 그는 밀수품 음식과 그 내면에 넘쳐나는 멜로디를 그 주린 배에 함께 채워 넣어야 했던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작곡가 호기 카마이클의 명곡 ‘Stardust’의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선택 되었던 순간에도 그는 고향 시카고와 성공 가도 헐리우드의 환희를 두고 숱한 딜레마에 잠식 되었을 것이다. 빌 에반스가 모든 음을 조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서정시의 슬픈 아이러니였던 것처럼.


빌 에반스 이후 여러 재즈 연주자들이 빅터 영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녹음 했지만, 나에게 압권은 키쓰 자렛이었다.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키쓰 자렛 연주에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발라드로 주제부를 이끌다가 어느덧 자신의 이야기로 훅 바꾸어버렸다. 안그래도 그토록 아름다운 주제를 더욱 품격있고 신비로운 멜로디로 확장시키면서 중요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가 생산해 내는 음에 밀착된 나의 영민한 감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화음과 멜로디를 미묘하게 변화시키면서 동기를 부여하고 흐름을 끝까지 유지시켰다. 


키쓰 자렛은 빅터 영 이상으로 한없이 멜로디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에반스가 재즈 피아노의 현대 문학이었다면 키쓰 자렛은 철학이었다. 스피리츄얼한 키스 자렛의 멜로디 조합은 헤쳐졌다 다시 모여 군집하고 하나의 방향성과 맥락을 이루면서 지향점있는 고결한 악풍을 이루는 것이니. 키쓰 자렛 ‘나의 어리석은 마음’의 그녀는 연약한 수동적 여인이 아니라, 그 어떤 상처도 감내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승격되었다.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들을 때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을 낳는다. 지금 우리가 재즈 스탠다드라고 부르는 곡들의 상당수는 주로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작곡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재즈 연주자들에 의해 주요 레퍼토리가 됨으로써 ‘재즈 스탠다드’로 불리게 된 것들이다. 옛날 곡인 경우, 뮤지컬, 클럽 쇼,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경우가 많았고 작곡 당시부터 본유의 노랫말과 함께 짝을 이루었다. 재즈 연주자들은 가사와 노랫말이 서로 의지하는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주제 삼아 본유의 어법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발전시켰는데, 익숙하게 듣고 자란 아름다운 노랫말은 연주자에게도 창의성의 영감이 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비영어권 연주자들도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할 때 본래의 노랫말을 음미해 볼 것을 나는 권장한다.)

노랫말을 음미한다는 것은 문학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며 리스너로서는 보컬 없는 연주곡일지라도 심미적 내러티브와 무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최고 수준의 연주일 경우 카타르시스나 초월적 상태까지도 이를 수 있다.   

키쓰 자렛은 고대 중동 음악의 엑스터시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왔다. 원시 주술의 세계에선 가상과 실재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예술이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 행위였다. 사냥을 많이 해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동물 그림을 벽에 그렸고 종족 보존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인의 가슴과 배, 엉덩이를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그렸다. 곡소리 같은 주술적인 보이스를 반복적으로 내어 실제 세계 너머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었고 그들이 믿는 한 그것은 실재가 되었다. 우리가 믿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실재와 가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는 자신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술, 특히 미술에서는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판타시가 존재한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실제이며 어리석은 마음의 여인은 가상이다. 나는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진 재즈 스탠다드와 최상의 연주가 만났을 때, 리스너의 상상력과 감성을 파고드는 문학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초월적 상태로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쓰 자렛의 표현으로는 ‘엑스터시’이고 나의 표현으로는 ‘에로티시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는 리스너와 진정한 인터렉션을 할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관계 미학을 창출해 낼 수 있다.

나는 키쓰 자렛이야말로 문학적 맥락을 자신의 음악에 끌어들일 수 있는 시인이요, 철학가라고 여긴다. 2005년에 발매된 키쓰 자렛의 다큐멘터리 <The Art of  Improvisation>에서 음악 외의 어떤 것에 영향 받느냐는 질문에 “음악은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기가 아기로부터 나온다는 말과 같다.”라고 잘라 대답한다. 키쓰 자렛에게 영감을 주는 비음악적 요인들, 문학, 철학, 그리고 인간의 삶. 키쓰 자렛이 테크닉을 너머 미학적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인은 여기에 있다. 키쓰 자렛이 쓰는 관용구들 조차 멜로디 윤곽을 선명하게 하기 위한 트렌지션 장치로 보이는 것도 그가 스탠다드 재즈를 연주할 때 그 곡의 전통과 심미적 요소 모든 것을 통렬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서의 여인의 욕망은 우리가 아는 맹목적인 육체적 욕망을 넘어 선 것이다. 그녀는 매혹과 사랑이 같은 성적 강도로 어프로치된다는 것을 알고 분별하려는 여인이며, 육욕을 넘어선 지순한 사랑을 꿈꾸는 여인이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리스너의 그러한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우리가 피하려고 할 수록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이 주는 교훈 아니던가.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이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왜 욕망하는 지는 모르고 살아간다. 욕망의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느 나른한 한낮에 듣는 옛날 재즈 스탠다드 한 곡만으로도 우리는 감성의 힘을 빌려 간접적으로 나마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의 어리석은 마음이 욕망의 작동 장치일진대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욕망의 매커니즘을 그 곡을 통해 주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즈 곡 하나 듣는데 왜 이렇게 쓸모없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가?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예술은 쓸모 없는 것이어야 한다. 편하거나 실용이 되어버리는 순간 예술은 예술이 되지 않는다. 예술은 한없이 어리석어야 한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 내 마음을 울렸던 피아니시즘 앨범.

빌 에반스의 My Foolish Heart가 수록된 앨범.

(빌 에반스는 My Foolish Heart를 열 네차례 앨범으로 남겼다. 이 중 추천 앨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 (Riverside, 3RCD-4443-2, 2005)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 전체를 담은 세 장의 박스 셋, 같은 곡이 <Waltz for Debby>(Riverside, RLP-399, 1962)에도 수록되어 있다.

빌 에반스 (p), 스캇 라파로(b), 폴 모션(d)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Fantasy, F-9489, 1975)

보컬 토니 베넷과 빌 에반스의 듀엣 앨범. 두 사람의 밀착된 애정어린 교감의 My Foolish Heart을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 트리오의 My Foolish Heart

<My Foolish Heart>(ECM, ECM 2021/2022, 2007)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최상의 My Foolish Heart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p), 개리 피콕(b), 잭 드죠넷(d)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빌 에반스 트리오의 모습



(재즈피플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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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zzlady

나에게 음악은, 때때로 폭력이다. 거리에서, 마켓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원치 않은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조르쥬 바따이유가 말했던 비천함(abjection)에 몸을 떤다. 나는 그 음악을 거부하기 위해 감각의 환각을 동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 귀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한편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화하는 나를 느낀다. 또한, 동시에 내 귀의 사용가치가 쾌락을 향한 감각적 확신임을 느끼면서 섬뜩해진다. 사적인 공간을 벗어난 내 쾌락의 욕망이 불손하여 다시 비천함을 느낀다. 공공장소에서 나의 쾌락은 배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만큼 특정 부분을 과장되게 그리는 아이처럼 내가 그리는 그림 역시 커다란 귀를 갖은 무언가일 것이다. 나에게 귀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공공장소에서, 혹은 어떤 이미지를 두고 갈팡질팡한다면 그것은 아마 귀로 형상화되지 못한 ‘에로티시즘’을 향한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에로티시즘. 이것은 성행위라고 말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초감각적인 경험이다. 쾌락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유한한 내 신체와 귀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비밀의 세계이다. 그 비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나에게는 음악만큼 좋은 도구는 없는 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문을 열기 위해 형이하학적인 내 몸을, 내 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내가 토마스 차핀의 음반을 걸어놓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에로티시즘이 작동한다. 존 콜트레인의 오리지널 LP를 사기 위해 이베이를 기웃거릴 때도 그 에로티시즘은 작동한다. 키쓰자렛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 눈길을 헤치고 수백 마일을 달려갈 때도 그 에로티시즘이 꿈틀댄다. 쾌락을 향한 에너지가 뒤숭숭하게 일상에 섞이고 말 때, 마치 사이렌의 아름다운 소리를 거부하기 위해 제 몸을 기둥에 묶어버리는 오디세이처럼 비장해진다. 오디세이가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제 몸을 묶은 것은 그 쾌락의 끝에 있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파멸로 이끄는 사이렌의 소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그것은 곧 심오한 쾌락이고 죽음이다. 에로티시즘은 죽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디세이처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
"감각의 정신으로의 추상이 에로티시즘"


나에게는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다.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재즈인가? 클래식인가? 유행가요인가? 이른바 장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나에게 릴랙스를 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인가? 예민하고 영민한 나의 감각을 일깨우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말인가? 

좋은 음악이란 감각과 그 감각이 느끼는 쾌락과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하는 음악이다. 에로티시즘으로 가기 위해서는 감각을 ‘추상(抽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적인 편안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관념화하고 정신적으로 추상시킬 수 있어야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흔히 말해지는 감각적 일차 단계, 섹스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영원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측면이다. 관념화된 쾌락, 이것이 에로티시즘이다. 우리의 귀는 정신적인 것에 닿으므로 감각기관인 귀를 발전시킬 때 고차원적인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악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느낄 것인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재즈와 같이 임프로비제이션 음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임프로바이저의 창의성, 유동성, 노마드적 요소, 반-토널리티, 테크닉…. 재즈는 타부를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던 에로티시즘 그 자체와도 유사하다. 임프로비제이션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하모니, 리듬, 형식 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소규모 재즈 캄보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변증법은 우리를 충분히 깊은 재즈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서로 코멘트하기도 하고 백업도 하는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을 보며 각각 독립적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연주자의 자기희생을 응시하게 된다. 뛰어난 임프로바이저는 분석적이고 창의적이며 기술적인 테크닉을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가. 응시와 집중으로 그러한 연주의 사이클에 참여하여 유동적이고 효율적으로 감각의 협상을 진행하여야 한다. 리스너는 각자 다른 식으로 음악에 어프로치하게 되는데. 따라서 리스너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그루브와 무드만 지닌 채 챌린지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듯, 리스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루브와 무드만 느끼며 재즈의 본질을 다 아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로티시즘으로 가려는 동기를 가졌다면, 단기적,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좋은 음악을 수집하고 집중하고 챌린지하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음악을 오래 들었다고 반드시 ‘에로티시즘’ 훈련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어떻게 듣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진지한 집중과 탐구 없이 수집 그 자체에 골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발랜스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공연장에서 재즈를 감상할 때 연주자가 간혹 과장된 스킬로 청중을 순간 무아지경으로 이끌려고 하는 수준 낮은 경우를 보곤하는데 훌륭한 음악은 스킬과 챌런지 사이의 밸런스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재즈 공연에서 많이 행해지는 작풍 자체도 청중의 음악 수요와 뉘앙스 적으로 펼쳐지는 음악 자체의 수요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변증법적으로 합류된 방식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음악작품은 계획과 짜임새의 논리적인 면과 즉흥적이고  듣는 현지 상태의 논리가 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주로부터 전해지는 그 무아지경의 상태가 밸런스를 통해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로티시즘은 안정적인 쾌락의 상태인 것이다.

에로티시즘이 감각의 관념화, 정신 추상의 상태라고 말해질진대, 그렇다면 이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유용한 방식을 선택해볼 수 있다. 시각화된 이미지가 그것이다. 트럼보니스트 커티스 풀러는 임프로바이징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도 “그래픽적인 방법을 통해 음악을 보라”로 이미지화를 강조하곤 했다. 음악의 시각화에 대한 허쉬의 생각은 명료하다. “멜로디를 들을 때 어떤 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을 상상하라. 올라갔다 내려가고 비틀고…추락하려할 때는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려보라. 나는 이미지화시키는 것을 늘 생각한다” [폴 베르니너 저, Thinking in Jazz: The Infinite Art of Improvisation 중)

청각을 시각화시켜 추상하는 작업을 몸소 현실화하는 대표적인 연주자는 앤써니 블렉스톤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편의 추상화 양상으로 악보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공항 터미널을 영감으로한 그의 작품 Composition No. 377의 악보를 보라.  

앤써니 블렉스톤과 같이 청각에서 시각으로, 다시 시각에서 정신 추상을 하는 방법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시각 이미지 외에도 맛을 탐구하는 요리 연구가로서 나는 미각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일상에 나의 감각 기관으로 상상할 수 있는 다채로움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감각의 추상화는 그 자체가 새로운 감각기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다시 추상으로 발전해나가는 변증의 속성이 된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죽음과 하나로 보았다. 에로티시즘을 죽음의 축소판으로 보는 ‘작은 죽음’의 세계로 본 것이다. 절정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 암컷에게 잡아먹힐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수컷처럼.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이 존재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므로 삶을 포함한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갈 줄 알면서 영위되는 것처럼 삶 역시 죽음을 포함한다. 죽음을 말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기 위함이고 삶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출발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과정에 생성과 파괴가 있다. 죽음은 삶을 본질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며 죽음과 삶의 통로에 에로티시즘이 있고 좋은 음악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은 죽음을 표상하는 음악이며 동시에 삶을 표상하는 음악이다. 성행위와 달리 에로티시즘은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정상에는 에로티시즘이 존재하고 있을진대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독과 대면하고 극단, 다시말해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리스너는 이를 체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로틱의 영역인 섹스는 하나의 재료이자 단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섹스를 통해 합일과 연속성을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섹스는 개별자의 안정적된 감각을 저해하고 다시 우리를 위협한다. 섹스는 하나로 합일되고자 하는 개별 본성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좌절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장치이다. 리스너는 음악의 ‘몸’성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집중과 훈련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법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은 일주일 단위로 구성된다. 워밍업 / 집약과 집중 / 발전 / 성숙의 사이클로 구성해둔다. 

1) 워밍법 : 워밍업은 말 그대로 워밍업이다. 최근 나온 음반일 수도 있고 옛날 음악일 수도 있다. 포인트나 무드로 선택되기도 한다. 내가 식사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할 때 들을 수도 있는 BGM으로 내버려둘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BGM이라도 종일 틀어두지는 않는다. 집중의 시간을 위해 귀를 아낀다. 

2) 집약과 집중 : 집중해서 들어야 할 음악을 평소 골라둔다. “탐미용”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탐미를 하라는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사정이 조금 다르겠지만) 리스너는 제대로 탐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케일을 연구하는 등 굳이 재즈 이론을 공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국문학자나 작가가 아니어도 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듯 탐미를 제대로 하다 보면 재즈의 언어가 제대로 들린다. 재즈의 본성이 느껴진다. 

집중해야 할 음악의 선곡은 오래 하다 보면 자체 발전하여 자기 스스로 꾸미는 경우가 많지만(이것 역시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어느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리뷰나 전문지를 참고해볼 만 하다. 제대로된 리뷰를 읽고 재즈 음반을 구입하여 라이너 노트를 읽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약과 집중도 귀를 아껴야 한다. 아무리 애정이 깊다 하여도 일반적으로 30분을 혼신으로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상을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능력자이거나 건성으로 듣는 것이다. 듣지 않거나 공기의 허무 속으로 음들을 날려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집중할 곡은 10분 내외로도 충분하다. 아니 2-3분짜리 중요한 솔로를 몇 번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10분~30분을 투자할 수 있어야 진지한 리스너가 될 수 있다. 음반 전체를 다 듣지 못하더라도 나누어서 들어도 좋다. 집중과 집약을 할 수 있으면 나와 관계 맺은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음악이 형성되는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정기적인 텀으로 근육을 발전시켜 나간다. 에로티시즘의 훈련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나의 정신의 근육을 발전시키는 위해서는 정기적인 양질의 훈련이 필요하다. 리스너는 자신의 피상적인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할 줄 알아야 한다. 달콤한 디저트만 맛보려한다면 진정 좋은 음식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리스너는 감상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어야 한다. 음악은 감상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콤하고 편안 음악만 듣다보면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같은 공연료를 내고도 그 묘미의 극히 일부만을 겉핧기로 알고 갈 뿐이다. 오픈 마인드하고 집중하라.

3) 발전: 책 한 권을 읽어도 그 감동은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 텍스트가 주는 영향력을 음악에서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집약과 집중으로 자기화된 음악을 통해 내 일상에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진지한 리스너는 일상의 삶도 진지할 수밖에 없다. 음반 수집에만 골몰할지언정 그 물리적 음반에 대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 정리정돈하는 습관이라도 갖게 된다. 발전의 단계는 음악을 내 삶 속으로 끌어들여 그 음악의 체계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음악이 단지 듣고 있는 그 순간으로만 끝나버린다면 음악의 중요한 효과를 우리는 놓쳐버리는 꼴이 된다. 우리가 시간을 애써 써가며 듣는 음악을 그렇게 순간으로 날려보낸다는 것은 정말 아깝지 않은가. 강조하건대 음악은 정신의 영역에 존재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의 정신은,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감각의 경험을 기억한다. 좋은 재즈 음악을 통해 우리는 삶을 유동적이고 긍정적이고 소통하는 세계로 이끌 수 있다. 겸손과 비천과 위대함을 일상에서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발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소개하겠다.


4) 성숙 : 감각을 추상하는 단계, 즉 에로티시즘의 단계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하고 많은 음들을 체험하면서 쾌감에 이르는 어떤 공통분모를 산출하고 총체화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본능은 자연스럽게 데이터베이스화시켜 축적한다. 에로티시즘은 단편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아폴로적인 양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뮤즈의 어머니가 “기억”이라는 뜻의 므네모시네로 명명되는 것처럼 우리는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발전시켜야 한다.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의 2010년 저서 <Primacy of The Ear>에서 강조된 ‘뮤지컬 메모리’ 훈련도 도움이 된다. 감각의 기억력이 모여져 관념으로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닿을 때 새롭고 견고한 음악의 세계가 뮤즈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니까.


< 양수연의 추천 음반 >

추천 음반에는 재즈 언어의 법칙 안에서 형식을 파괴한 아방가드 음반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해하게 느껴지는 아방가드의 추상적 속성이 감각의 관념화를 더 용이하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꿔 말하면 용이하다는 것이지, 아방가드나 프리 재즈 음악이 다른 스타일의 음악보다 작품적으로 반드시 더 훌륭하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별의 작품들이 그 수준을 말해준다. 어떤 음악이든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나의 예와 같이 나름의 훈련이 필요하다.



The Art Ensemble of Chicago, [Bap-Tizum], Atlantic, 1998

시카고 아트 앙상블은  1966년 12월 시카고에서 색소포니스트 로스코 미첼(1940~)을 중심으로 레스터 보위(트럼펫), 마라치 패버스(베이스), 필립 윌슨(드럼)이 주축이 되어 처음 조직되었다. [Bap-Tizum]은 앤 마버 블루스&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괴성과 다채로운 악기들을 활용하여 급직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낸다. 신경질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자유분방하며 기괴한 면이 있지만, 혹사당한다고 느낄 만큼 분투하는 음악의 몸성이 느껴지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느린 호흡으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색소폰과 베이스 듀엣 곡 Unanka, 음을 가루처럼 흩뿌리는 다채로운 칼러와 무한한 혼란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작 Ohnedaruth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Albert Ayler Trio, [Spiritual Unity], ESP-Disk, 1965

1960년대 프리 재즈의 클래식이 된 음반, 제목 그대로 ‘영적인 합일’로 향하려는 알버트 아일러(색소폰), 게리 피콕(베이스), 서니 머레이(퍼커션)-개별자의 몸부림이다."Ghosts: First variation,” "The Wizard,” “Spirits,” “Ghosts: Second variation” 총 30분이 안되는 4곡으로 프리재즈에 새로운 혁신성을 던져주었다. 알버트 아일러보다 수년 앞선 1959년 오네트 콜맨이 막강한 프리재즈의 역량을 과시한 바 있다. 콜맨의 ‘파괴’와 ‘혼란’이라는 프리 재즈의 언어가 형식만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던 존 폴락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면, 알버트 아일러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어찌 보면 날 것과 같은 음을 영적인 조합으로 이끌며 보다 디테일 있는 아티스틱한 표현으로 감동을 준다. 본작은 존 콜트레인의 혁신적 음반 [Love Supreme]보다 5개월 전인 1964년 7월에 녹음되었다. 6년 뒤 34세를 일기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알버트 아일러, 그의 시신이 발견됐던 이스트 리버를 지날 때마다 나는 ‘영적인 합일’을 생각하곤 한다.



Mal Waldron & Steve Lacy, [Live at Dreher, Paris 1981], Hat Hut, 1981

최고의 색소폰-피아노 듀오 앨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81년 8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파리의 클럽에서 녹음된 피아니스트 말 왈드론과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랙시의 멋진 교감. 이 라이브는 1996년에 볼륨 1과 2로 나뉘어 각각 두 장의 더블 시디로 나왔었고 2003년에는 볼륨 1 & 2, 총 4장으로 합쳐 발매됐다. 재키 바이어드와 셀로니어즈 몽크의 어법을 연상시키는 말 왈드론은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의 감각성을 촘촘하게 조각한다. 평생 오직 소프라노 색소폰에 몰입했던 스티브 랙시는 그의 긴 연주 경력 동안 알려지지 않은 보석같은 곡이 많아 스타일을 캐내는 기쁨을 준다. 재즈의 본질의 특성을 잘 살리는 듀오 편성은 감각의 교미와 표현의 성실함을 직접 감지하기 쉽고 리스너에게 오픈된 상상의 공간을 제시한다. 돌발성의 우연이 심연 깊은 곳으로 직행한다.


Paul Bley, [Annette], hatOLOGY, 1992

폴 블레이의 연주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재즈 탐미 미학을 제공한다. 읊조리듯 느껴지나 동시에 무척이나 분명하고 독특하여 움직임 자체가 율동의 챌린지와 같다. 본작 대부분은 블레이의 첫째 부인 애니트 피콕(앨범 사진)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한 곡 한 곡이 표상적이며 라인 사이의 짧은 침묵은 미끄러져 내린 벌거벗은 음들이 숨죽이는 긴장의 공간이다. “Touching” 곡은 미니멀리즘이다. 피부에 간신히 닿아 떨리며 매만지듯, 또한 감성의 표피를 간절하게 벗겨내듯, 그렇게 ‘닿는’ 음악이다. 간절하기에 한없이 고독하다. 센스가 센서빌리티로 형성되는 교착점에서 끊임없이 리스너를 추궁한다. 감각의 세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고. 



Dave Liebman [Lookout Farms], ECM, 1974

이 음반은 노스탤지어를 향한 끝없는 여정을 상상하게 한다. 계획된 여정이다. 어래인지먼트가 주는 감동이 임프로비제이션의 맛깔스러움을 압도할 지경이다. 존 애버크롬비, 리치 바이락, 프랭크 투사, 제프 윌리암스를 비롯해 10명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프로그레시브 모던 재즈 앨범으로 Pablo's Story, Sam's Float, M. D. / Lookout Farm 등 세 곡으로 구성되었다. 24분간 연주되는 마지막 곡 M.D./Lookout Farm은 치밀하게 구성된 여러 패턴을 통해 다양한 텍스쳐와 칼러를 선사하는데, 본 음반의 구성과 컨셉을 설명하기 위해 리브맨이 동명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이다. 리브맨은 훌륭한 임프로바이저이자 개념론자(conceptualist)라 할 수 있다. 본작이 발표되기 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혁신적인 [On The Corner]앨범을 녹음했었으므로 리브맨의 이른바 ‘뉴 사운드’에 대한 실험력이 물이 올랐을 때이기도 하다. 본작은 데이브 리브맨의 ECM 데뷔 음반이다. 리브맨은 ECM을 통해 본작과 이듬 해 [Drum Ode] 총 두 장의 앨범을 냈다. [Lookout Farms]는 숨죽이고 한번에 들을 수 있는 음반이다. 장황한 Farm의 숲속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Don Cherry [Blue Lake], BYG, 1971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한 음반이다. 이 음반을 듣고 네이티브 어메리칸 인디언 플룻을 사서 연습했을 정도였으니까. 광활한 뉴멕시코주의 타오족 거주 지역의 블루 레이크. 야생의 세계에서 존재의 확고함을 실감하기 위해 분투해야했던 투쟁의 인디언 역사. 돈 체리의 본 악기 트럼펫 외에도 인디언 플룻으로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저항하는 인디언, 그들의 삶 한복판으로 잡입해 새로운 음 족(族)을 창출해낸 것 같다. 보이스로 주술 하는 돈 체리는 가히 새 음족의 추장이다. 음들을 흩뿌리고 감성을 건드린다. 존재가 추구하는 합일의 세계로, 또한 그것을 방해하는 내 안의 저항을 매만진다. 탐미는 매만짐이다.



Julius Hemphill [Fat Man and the Hard Blues], Black Saint. 1991

줄리우스 헴필(1938~1995)은 나에게 있어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가 오랜기간 누적된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그 화석을 연구할수록 또 새롭고 신비스러운 것들이 쏟아져서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존재. 줄리우스 헴필의 리스너라면 전작들, [Dogon A.D.](1972)나 [Coon Bid’ness](1975)만으로도 충분히 매료됐겠지만 헴필의 다른 양상의 혁신적 앨범들은 World Saxophone Quartet 이후의 줄리우스가 섹스텟을 구성하면서부터 본격화됐으므로 살펴볼 만하다. 듀크엘링턴이 색소포니스트였다면 분명 이러한 그룹을 꿈꾸지 않았을까? 한 명의 알토(줄리우스 헴필), 두 명의 소프라노(마르티 에이를리히, 칼 그럽스), 두 명의 테너(제임스 카터, 앤드루 화이트), 바리톤(샘 퍼니스), 여섯 명 멤버 모두가 섹소포니스트라는, 대단히 독특한 구성의 섹스텟이 아닌가. 줄리우스는 색소폰 섹스텟으로 두텁고 깊은 하모니의 수준 높은 극 하나를 완성한 것만 같다. 블루스, 가스펠 등 흑인의 뿌리와 감성을 캔버스 위에 논리적으로 배열한 뒤 창의적인 또 다른 감성의 구조를 쌓아놓았다. 색소폰이 닿으려는 에로티시즘의 세계, 바로 이것이 아닐까.



Thomas Chapin [Menagerie Dreams], Knitting Factory, 1994

토마스 차핀(1957-2005)은 라산 롤랜드 커크와 에릭 돌피를 합쳐놓은 것 같은 숨은 천재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치코 해밀턴 밴드와 활동했고 재즈 클럽 '니팅 팩토리'가 만든 니팅 팩토리 레이블의 간판 연주자였으며 존 존, 안토니 블랙스톤과 많이 협연했다. [Menagerie Dreams]에도 존 존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본작은 차핀 트리오의 역량이 집결된 음반 중 하나로 차핀 작곡의 “Bad Birdie”의 2분부터의 솔로와 듀크 엘링턴 곡 Daydream의 인상적인 형식에 집중해볼 만 하다. 차핀이 그려내는 세계는 역동적 몽환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몽상가였고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에릭 돌피처럼 새소리를 탐구하고 자아화시켰다. 차핀의 몽상에 동참해보자. 사후에도 그의 몽상을 쫓는 리스너들이 그를 기념하고 있다. 몽상을 낳은 천재. 그 몽상을 에로티시즘으로 연결하는 것은 리스너의 몫이다.


Keith Jarrett [Radiance], ECM 2005

키쓰 자렛은 늘 전작의 명반들과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걸출함은 워낙 독보적이고 이슈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여러 명반을 차치하고 [Radiance]의 각별함 역시 별개의 운명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 언급되지만 몹시도 탐미적이다. 이전의 키쓰 자렛과 관련한 나의 글에서 나는 키스 자렛 음악의 몸성과 옴짤달싹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지고 마는 수동적 리스너로서의 나에 대한 한탄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다. 신체적 병약함을 극복하고 솔로이스트로서 다시 무대에 오른 키스 자렛이 음악의 몸성에 힘겹게 분투하고 자기화하고 그런 음악적 자아가 표출하는 음악적 팡세를 [Radiance] 음반으로 구성하였다. 진실을 담은 간결한 아포리즘이다. 유명세를 타는 키쓰 자렛에게 리스너는 소수의 참여자와 다수의 관찰자로 구성된다. 그의 새 앨범은 비참을 포함한다. 키쓰 자렛은 분투하는 만큼 존엄을 갖는다. 존엄을 갖는 만큼 키쓰 자렛은 소진된다. 키쓰 자렛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인가? 오만한 것은 키쓰 자렛이 아니라 리스너일 수 있다. 그는 멜로디 그 자체이다. 그는 에로티시즘 그 자체이다. 빛남, 광명의 의미가 있는 Radiance의 솔로 ‘단편집’(기존의 긴 솔로 트랙들을 떠올려보라)을 통해서 무한함과 허무의 중간 상태에서, 광명과 비참의 중간 상태에서 리스너는 비로소 심연의 질서 속으로 키쓰 자렛이 이끌어가는 에로티시즘의 단계로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John Coltrane, [Love Supreme], Impulse!, 1965

재즈가 스피리추얼의 세계로 올라섰다면 단연 그 시작과 중심에는 존 콜트레인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명반 중 명반으로 꼽고 있지만, 대중적인 음반은 아니다. 나는 이 음반이 시디장 구석에서 빠져나와 모두의 리빙룸에서 끊임없이 자주 재생되는 것을 꿈꾼다. 음반에서처럼 나는 “Love Supreme” 보이스를 주술처럼 19번 읊조리곤 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 작품의 의도와 정신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과 평행선을 이루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 꿈틀대는 물결은 잔잔하되 심연에 들끓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는 삶을 압도할 지경이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고 하였는가. 이 음반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에로티시즘의 세계는 그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히 흐르고 마르는 법이 없다.



<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1>은 <재즈피플> 2015년 3월호를 통해 소개했다. 본 글은 후속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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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카리스마에게 시련은 없다. 찰스 밍거스.

(양수연의 재즈탐미 -재즈피플 2016년 5월호)



뉴햄프셔로 향하는 보스턴 북쪽 1번 도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나올법한 투박한 시골 정경이 펼쳐진다. 한적한 도로에 띄엄띄엄 서 있는 백 년 넘은 집들은 목공소, 골동품 가게, 잡화점으로 채워져 있다. 누가 찾아올까 싶은 한적한 곳이지만 반세기 전엔 유명한 재즈 클럽이 있었다. 레니 소고로프가 운영했던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Lennie’s-on-the-Turnpike). 지금의 풍경처럼 허름하고 낡은 재즈 클럽이었다. 천장이 주저앉을 듯 낡았고 비좁고 여자 화장실도 없어서 니나 사이먼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러나 재즈의 인기가 록으로 대체된 그 시절에 내로라하는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은 이 먼 곳까지 올라와서 안식을 얻곤 했다. 그중에는 찰스 밍거스도 있었다. 

토마스 리치만이 연출한 1968년 작품 찰스 밍거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밍거스의 연주 장면들은 바로 이곳,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에서 촬영된 것이다. 그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찰스 맥퍼슨(알토 색소폰), 존 길모어(테너 색소폰), 로니 힐리어(트럼펫)과 함께 All the Things You Are, Take the ‘A’ Train, 그리고 Peggy’s Blue Skylight를 연주한다. 밍거스의 둔탁한 손은 과도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어 보는 이를 짓누를 것만 같다. 공격적인 터치, 엄청난 하모닉 센스, 괴성을 지르며 스캣하는 밍거스는 음악과 인생을 달관한 도인과 같다.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는 71년에 화재로 문을 닫았다. 밍거스는 79년에 죽었다. 

재즈 워크샵, 프리재즈와 모달.

1951년 5월, <다운비트> 매거진은 샌프란시스코의 블랙 호크 클럽에서 열린 비브라폰 주자 레드 노보 트리오 공연을 취재하던 중 놀라운 귀재를 발견한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실력의 베이스 주자가 바로 여기 있다. 그는 연주하면서 미소짓고 행복해 한다….” 비평가 랄프 글리슨은 6월 1일자 다운비트에 스물 아홉살 그 베이스 연주자를 소개하는데 이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 한다. 타이틀을 “찰스 밍거스, 생각하는 뮤지션”이라고 뽑았다. 나는 그 어떤 무엇보다 이 기사가 초기 찰스 밍거스의 진가를 대중에게 알린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밍거스는 레드 노보(비브라폰)와 기타(탈 팔로우)와 함께 활동 하고 있었다. 다운비트는 클래식 음악 배경을 갖추고 재즈의 크리에이션을 갖춘 밍거스를 극찬하는 것도 모자라 “진정한 재즈는 예술”이라며 그의 어깨에 예술과 혁신이라는 짐을 얹어 주었다. 밍거스의 ‘생각’이란 재즈의 미래이고 재즈의 발전 가능성으로 치환되었다. 그해 말 레드 노보 트리오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리고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그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이듬해 52년에는 맥스 로치와 함께 공동으로 독립 레이블인 데뷔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음악 비즈니스에도 발을 내디뎠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맥스 로치가 함께한 비밥의 걸작 <The Quintet, Live at Massey Hall>앨범도 이 데뷔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생각하는 뮤지션, 찰스 밍거스. 그의 혁신성은 그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샵’ 프로젝트로 표상된다. 재즈 워크샵은 말 그대로 연구 모임 이름이자 그룹 이자 나중엔 회사 이름이기도 했다. 53년에 첫 재즈 워크샵 때는 한동안 작곡된 음악을 했다. 그러나 밍거스는 이내 이런 악보화된 재즈가 연주자의 즉흥연주와 창의력을 구속한다고 생각하고 56년에 새로운 재즈 워크샵을 시작했을 때는 악보 자체를 폐기했다. 그 어떤 멜로디 악보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악보없는 연주는 밍거스와 고등학교 밴드에 같이 참가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학교 밴드에서 엘드리지가 악보를 거부하자 밍거스는 의아해했다. 

 “내 악기를 봐. 나는 내가 느끼는 걸 연주해. 그것이 재즈야. 너도 악보를 버리고 너의 것을 발견해봐. 스스로 터득해보라고. 그러면 넌 언젠가 나에게 고마워할거야.” 


많은 연주자들이 재즈 워크샵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자아를 발견하고 떠났다. 그러나 악보가 없으므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새로 들어온 멤버들은 기존의 창작곡들을 악보없이 배워야 했고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는 기존 멤버들에게도 타격이 됐다. 그런데도 밍거스는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이 가장 진솔한 방법임을 주장하였고 언젠가 멤버들이 떠날 것을 알면서도 각 연주자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작곡했다. 이런 면에서 밍거스는 그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듀크 엘링턴과 비슷했다. 악보 없이 진행되는 재즈 워크샵 리허설 공연에서 밍거스는 청중을 향해 이 곡은 새로 작곡된 것이라서 몇 번 다시 연주해봐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청중은 같은 곡을 그 자리에서 여러 번 들으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완성이 되면 박수를 쳤다. 

밍거스는 연주자가 진솔하게 즉흥연주하는 것과 시늉만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재즈 워크샵에서 이루어진 집단 즉흥 연주에서 프리 재즈에 관한 밍거스는 입장은 완고했다. 밍거스는 프리 폼에 대해서 우려의 말을 종종 했는데 색소폰이 프리 재즈를 연주할 때 뭐가 나올 줄 모르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누르는 것일 뿐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밍거스는 청중에게는 음악을 보여야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실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밍거스의 음악에는 분명 프리 폼이 들어있다. 재즈 워크샵에서는 프리 폼에 관현 실험이 이루어졌고 이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다. 솔로 주자는 익숙한 구성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밍거스는 본인의 주장들에 반하는 내용을 직접 라이너 노트에 쓰기도 했다. “나는 우리 그룹이 ‘토널’(조성)로 즉흥 연주를 하기를 바라지만 프리 폼의 불협화음으로도 나아갈 의향이 있다” (Jazz Composer’s Workshop, Savoy, 1954) 밍거스 재즈 워크샵은 오네트 콜맨, 알버트 아일러, 세실 테일러에 수년 앞선 50년대 중반 프리 재즈 요소를 담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밍거스가 원하는 것은 자기 능력 한계에 벗어난 실험을 청중 앞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프리 폼은 어떤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선견지명과 혁신성은 모달 재즈에 관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모달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으로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거론되지만, 찰스 밍거의 56년 작품 <Pithecanthropus Erectus>(Atlantic)의 마지막 수록곡 Love Chant에서 모달 재즈가 시도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는 블루스를 구성하는 3개 코드를 더 줄여서 주문(Chant)의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가 모달 재즈를 연주할 때 밍거스는 모달이 이미 20년대 젤리 롤 모튼이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밍거스의 시련, Epitaph.

89년 6월 3일,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는 군터 실러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찰스 밍거스가 작곡한 2시간 30분에 이르는 모음곡 ‘Epitaph’가 18년 만에 청중에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Epitaph는 1962년 10월 2일 찰스 밍거스가 뉴욕 타운홀에서 초연한 뒤 연주되지 않았다. 69년 초연 당시 청중석에 앉아있던  군터 실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밍거스의 역할은 떠오르는 신예 크리스챤 맥브라이드가 맡았다.

62년 초연 무대는 밍거스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무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연주자들은 20악장에 달하는 대곡을 소화하지 못해 갈팡질팡했고 밍거스는 무대에서 불같이 화를 내었으며 악보를 쓰는 기보자 세 명이 무대에 올라 다음 연주되어야할 노트를 즉석에서 그린 뒤 연주자들에게 전해주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공연에 앞서 Epitaph 악보를 놓고 토론하던 중 밍거스는 57년부터 그와 함께 해온 트럼본 주자 지니 네퍼를 폭행해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는 참극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네퍼는 공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공연은 심지어 라이브 레코딩까지 되었는데 이 재앙의 연주를 엿보고 싶으면 The Complete Town Hall Concert (United Artists UAJ 14024, 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잊혀진 Epitaph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음악학자 앤드류 혼즈였다. 그가 미망인 수 밍거스 자택에서 Epitaph를 발견했을 때 베토벤 10번 교향곡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순서도 뒤죽박죽, 희미해진 500페이지 분량의 악보를 퍼즐처럼 맞추어 복원에 성공했다. 그러나 20개 악장 중 7번째 악장 ‘Inquisition’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89년 공연도 악장 하나가 빠진 채 연주되었으니 완벽한 복원 공연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다시 18년이 흘렀고 2007년에야 할레너드사에 의해 온전한 Epitaph 악보가 출판될 수 있었다. 사라진 악보는 다름아닌 89년 복원 공연이 열린 바로 그 뉴욕 링컨 센터, 그곳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찰스 밍거스가 링컨 센터 도서관에 돈 받고 팔았다는 것을 미망인이 뒤늦게 기억해낸 탓이었다.

찰스 밍거스의 시련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어려웠던 순간들이 레코딩이나 영상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리라. 재앙과 같은 타운홀 라이브 레코딩 보다 더욱 가슴 아픈 건 앞서 말했던 토마스 리치만의 찰스 밍거스 다큐였다. 이 다큐는 1966년 11월 22일, 밍거스가 자신의 보금자리, 맨해튼 그레이트 존스가 5번지에서 퇴거 명령을 받고 짐을 싸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블렛 준 여자가 렌트비를 안 냈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살 난 밍거스의 딸 캐롤린이 사방에 흩어진 박스와 잡동사니 사이를 뛰어다니고 때론 피아노를 치고 있는 밍거스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딸을 보는 밍거스의 얼굴이 어찌나 다정하고 자애로운지 마음이 짠하다. 밍거스의 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퇴거 당일, 그는 느닷없이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집에서 주사기와 약들이 발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두 명의 경찰이 밍거스의 팔을 한쪽씩 껴 잡고 경찰차로 걸어가는 동안 기자들이 나타나 그의 모습을 촬영하고 인터뷰한다. “당신 헤로인 했나? 왜 체포되는건가?”

마약을 하지 않은 밍거스는 떳떳하다. 그는 흑인이고 흑인 재즈 뮤지션이기 때문에 의심을 산 것임에 분명하다.

그의 집에서 나온 주사기와 약은 의사 처방을 받은 치료용 약물이었다. 밍거스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고 카메라는 수 밍거스의 얼굴과 길가로 쏟아진 짐 중에서 밍거스의 콘트라베이스에 고정된다. 

찰스 밍거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던가? 위대한 찰스 밍거스, 그의 콘트라베이스가 쓰레기 차에 실린다. 그가 힘들었을 이후 수년간의 암흑기를 암시하면서. 그는 1972년,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를 발표하며 그의 카리스마스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찰스 거스가 경찰에 체포되는 실제 장면 (찰스서스 1968년 다큐멘터리 화면 캡쳐)


<양수연의 추천 앨범>


1. Pithecanthropus Erectus / Atlantic / 1956

원시 인류 종인 ‘직립 원인’을 제목으로 한 독특한 구성의 앨범, 진화하고 멸망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오네트 콜맨 이전의 프리 재즈적인 요소와 마일스 데이비스 이전의 모달 재즈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아틸란틱 레코드 데뷔작. 재키 맥린, 주니어 몬테로즈, 말 왈드론, 윌리 존스 참여.

2. The Clown / Atlantic / 1957

아이티 민중의 독립 투쟁을 그린 Haitian Fight Song, 찰리 파커를 위한 Reincarnation Of A Lovebird이 담긴 밍거스 역작. 지미 네퍼(tb), 샤피 해디(s), 웨이드 레게(p),대니 리치먼드(d)참여

3. Mingus Ah-Um / Columnia / 1959

레스터 영을 위한 ‘Goodbye pork pie hat, 인종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ubus 등이 녹음된 콜럼비아 데뷔작. 존 핸디(as), 부커 어빈(ts), 샤피 해디(ts), 윌리 데니스(tb), 지미 네퍼(tb), 호레이스 파란(p), 대니 리치몬드(d)가 참여했다. 

4. Mingus Dynasty / Columnia / 1959

듀크 엘링턴 영향이 느껴지는 동시에 다양한 스타일의 밍거스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콜롬비아사에서 발매된 두번째 앨범. 기존 고정 멤버 외에 비브라폰, 첼로, 보컬을 더 넣어 풍부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더했다. 

5. Blues & Roots / Atlantic / 1960

블루스, 가스펠, 뉴올리언즈 등 흑인 음악의 뿌리와 초심을 담은 밍거스의 명작. 슬로우 블루스, 열정적인 스윙, 집단 즉흥 연주 등 고전적인 재즈, 블루스의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담아 냈다.

6. Oh Yeah / Atlantic / 1961

재즈계 기인, 라산 롤랜드 커크 영입 이후 발표한 수작. 밍거스는 베이스 대신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베이스는 더그 와트킨스가 연주했다. 전통 어법을 기반으로 역동적이며 다소 기괴하고 유쾌한 사운드가 시종 펼쳐진다.

7.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 / Impulse! / 1963

타운홀 콘서트 ‘재앙’후 석달 뒤 녹음된 발레 스타일의 6개 악장으로 채워진 기념비적인 작품. 빅밴드 리더이자 작곡가로서 듀크 엘링턴 이상의 면모를 보여준, 재즈사에 길이 남을 오케스트레이션 앨범. 

8.Cornell 1964 / Blue Note / 2007

1964년 3월 18일 코넬 대학에서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 라이브. 미망인 수 밍거스에 의해 발견되어 2007년 <블루노트>에서 처음 발표됐다. 에릭 돌피, 자니 콜, 클리포드 조던, 재키 바이어드, 데니 리치몬드가 참여했다. 유럽 투어를 앞둔 최상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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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6년 2월호




샌프란시스코의 ‘소살리토’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이다. 나는 그 작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제법 잘 알고 있다. 아스라한 노을이 펼쳐진 해변에 누워 서핑하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오순도순 모인 빅토리아풍 집 정경이 펼쳐진 카페에서 우유 맛 나는 북태평양 굴의 비릿함에 취하기도 했다. 폴 블레이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소살리토가 떠올랐다. 몇해 전 나는 그곳에서 폴 블레이의 음악에 취해있었다. 소살리토에선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포근하고 나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아마 그때 들었던 음악에 54년 블레이 데뷔 앨범 [Introducing Paul Bley]도 있었을 것이다. 찰스 밍거스와 아트 블레이키, 특히 폴의 피아노가 무척 아름다웠던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곡도.


폴 블레이는 그즈음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살리토에서 칼라 블레이와 그림 같은 결혼식을 올렸다. 숲 속에서 은둔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던 칼라의 아버지도 왔고 향연을 즐기며 행복한 순간을 소살리토에서 누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왠지 칼라 블레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인들이 있다. 자유롭고 고집스럽고 재능있는 여자들. 아티스트거나 히피의 후예이거나 어떤 무엇인 여인들. 나는 어린 칼라가 헐벗게 자랐을지언정 행복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샌프란스시코의 자연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같다." 폴 블레이는 그 점에 반했을 것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했고 그 자연의 돌봄을 받은 칼라를 사랑했다. 칼라는 해변에서 수영복이 없으면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브래지어를 만들어 척하니 걸치고 있는 여인이었다. 너무나 멋있어서 폴도 그녀와 진짜 사귀기로 마음 먹었다. ‘썸타는 사이’가 된지 하루가 안 된 시점이었다. 둘은 맨해튼의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이 만난 정경은 폴이 자서전에 묘사해 놨다.


1956년 여름, 버드랜드에서 연주할 때였다. 뒷문 옆 평소 내가 주로 서 있는 자리에 키 크고 마른 여자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서 있었다. 담배 파는 여자였다.  담배를 담은 쟁반을 목에 걸고 서 있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었다.

“당신 문제는 뭐요?”

그녀의 고민은 길었다. 이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클럽 사장이 치근덕대고 피곤하다……어쩌고저쩌고.

그때 그녀는 칼라가 아니라 캐런이라고 불렸다. 폴은 조언했다. 

“해법은 간단하죠. 지금 당장 담배통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걸어나가세요, 그리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요.”

그러자 그녀는 담배통 쟁반을 내려놓았고 나랑 같이 문밖으로 나갔다.


폴 블레이의 앨범 [Annette] 수록곡 ‘Cartoon’처럼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카툰의 다음 장면은 이것이겠다. 


LA에 머물고 있는데 칼라가 나랑 살고 싶다고 뉴욕에서 왔다. 그녀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결혼은 내 인생 우선순위에서 최하위에 있는 사안이었다. 뮤지션은 대부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라에게 말했다. “시간을 줘요, 우리 잠시 떨어져 있어요. 고민해 볼게요.” 칼라는 뜻밖의 내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 길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버렸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칼라가 있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흥분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모든 사람과 수다를 떨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니 한 남자가 나왔다. 어떤 아티스트가 칼라랑 살고 있었다. 칼라는 그 남자 옆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 누구지? 이름이 뭐지? 이런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밖으로 불러냈다. 난 칼라랑 결혼하려고 이곳에 왔소. 당신은 혹시 칼라랑 결혼할 생각이 있나요? 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칼라에게 이제 결혼할 준비 됐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비꼬듯 대답했다 “오, 리얼리?”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결혼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나에게 쏘아붙였다. 나는 칼라에게 맘이 바뀌면 전화하라고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후, 칼라의 전화를 받았다. 폴, 당신에게 가겠다고…..

 칼라 블레이와 폴 블레이, 1957년 결혼 초기 무렵


폴 블레이는 저도 모르게 열정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곤 했다. 여인들은 적극적으로 폴에게 다가와 그의 지순한 사랑을 얻어냈다. 두 번째 아내, 아네트 피콕도 그러했다. 그녀도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고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의 아내로서 이미 교류가 있던 여인이었다. 1966년 게리 피콕과 별거 중인 아네트가 몇 년 만에 폴에게 느닷없이 전화했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친구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위험한 상황에서 폴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떨어진다구요. 제가 갈께요!” 

세번째 부인, 비디오 작가 캐롤 고스는 폴의 하우스 파티에서 만났다. 이번엔 폴도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캐롤은 재능이 있고 지적이며 배려심도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을 함께 했다.  


 아네트 피콕. 그녀는 칼라 블레이와 더불어 폴 블레이에게 음악적인 교감과 영향을 주고 받은 여인이었다.



폴에게 여자란 어떤 존재였을까. 폴은 그녀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으려 노력했다. 어려서도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여인에게 익숙했으니, 폴의 어머니 베티 얘기이다.

폴은 다섯 살 때 본인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인생을 두고 큰 영향을 끼쳤다. 폴이 받은 두 번째 충격은 어머니 베티가 어느 날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한 뒤 집을 떠난 일이었다. 부모가 부부동반으로 극장에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는 우연히 첫사랑과 마주친 뒤 아버지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이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폴을 데리고 첫사랑과 재혼을 했다. 사춘기 폴은 갑자기 새 아버지가 생긴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에 더욱 정진했다. 어머니는 폴이 음악 공부를 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거금 500불을 쥐여주며 뉴욕으로 가라고 말했던 화끈한 여인이었다.


세 번째 충격은 시간이 흘러 1992년, 폴의 나이 60세에 일어났다. 클럽에서 한세트 연주하고 쉬고 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 블레이. 폴에게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신은 입양되었지만, 당신 아버지가 생부 맞아요, 생모는 당신의 유모, 루시였어요.” 

폴은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가장 행복하다고 여겨졌던 유년 시절의 기억에 유모 루시가 있었다는 점이 상기됐다. 그러나 폴은 청년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2년 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 갔다가 라디오 호스트 랜 도빈의 소개로 폴은 93세 되는 노인을 만나게 됐다. 그 노인은 폴의 입양문제를 처리한 당시 변호사였다. 폴은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 노인과 점심을 먹으며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 베티가 아이를 못 낳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루시라는 여인과 바람이 났고 폴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인에게 그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고, 베티가 그 아이를 선택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베티는 원래 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으나 베티에게 다가와 ‘마마’라고 부르는 폴을 베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절대 바닥에 다시 내려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생모 루시는 유모로 들어와 5년여 간 폴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60세 폴은 성경에서 모세와 모세의 유모로 들어간 생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폴 블레이.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허둥지둥 마음이 급해졌다. 뭔가 빨리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예전에는 어린 아이의 속도로 느리게 살고 있었는데 충격을 받은 후 시간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역사가 없고 백그라운드가 부족하다는 허탈감. 음악만이 그 공허를 메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총알같이 달렸다.


그 총알 같이 달려온 시간 중 아름다운 몇 장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58년 어느 날 폴은 매사추세츠주의 그 유명한 ‘레녹스 스쿨 어브 재즈 나잇’에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LA의 힐크리스 클럽에서 찰리 헤이든과 빌리 히긴스와 고정적으로 연주했고 오네트 콜맨, 돈 체리도 불러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레녹스에 가는 건 이스트 코스트 재즈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경험할 좋은 기회였다. 이미 그곳엔 ‘써드 스트림’의 중심인물들, 존 루이스, 랜 블레이크, 조지 러셀을 비롯해 찰스 밍거스, 지미 쥐프리 등이 있었다. 폴은 칼라를 데리고 반대편 동부인 레녹스까지 삼일 밤낮을 운전했다. 그들이 가까스로 레녹스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밤 11시. ‘스쿨 어브 재즈 나잇’의 마지막 날의 마지막 곡이 소개되던 참이었다. 마지막 곡을 연주하려던 랜 블레이크에 다가갔다. “같이 연주해도 되요?”

폴의 향후 4년간의 연주 생활은 그날 연주한 마지막 한 곡에서 비롯됐다. 폴은 그 마지막 곡이 진정 인생 마지막 곡인 것처럼 온 에너지와 열정을 집중해서 연주했다고 술회했다. 그 공연 이후 찰스 밍거스, 조지 러셀, 지미 쥐프리, 랜 블레이크를 비롯해 많은 연주자가 폴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서 요청을 해왔으니 말이다. LA에서 레녹스까지 운전하면서 만일 단 한 곳에서라도 신호등이 초록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면 아마 그날 무대에 서지 못했겠지? 폴은 이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날 만난 랜 블레이크와는 인연이 깊어갔다. 스티브 스왈로우를 폴에게 소개해준 것도 랜 블레이크였다. 랜은 폴에게 그가 몸담고 있던 바드 칼리지에서의 공연을 주선하면서 폴의 양해 하에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를 데려왔다. 스티브는 당시 명문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수재였다. 폴은 스티브의 연주에 반해서 같이 연주하러 다니자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스티브는 결국 예일대를 중퇴한 뒤 폴이 마련해준 거처로 옮겼다. 스티브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 졌다. 스티브가 학업을 포기하자 부모의 충격이 몹시 컸다고 한다. 폴은 뉴욕의 자기 집 옆 6애버뉴의 빈 다락방에 방을 마련한 뒤 전등을 끌어와 스티브가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차후 스티브 스왈로우와 평생 연인이 될 폴의 아내 칼라도 이때 처음 스티브를 만나게 된다. 폴과 스티브는 그 뒤 2년간 듀오로 소호의 블리커 스트릿에 있는 작은 커피샵에서 연주했다. 폴은 그 당시 지미 쥐프리에게 스티브를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었다. 폴은 지미에게 조금씩 스티브의 실력에 대해 풀어내며 함께 연주하게 되면 절대 음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할 따름이었다. 폴은 한달 가까이 이렇게 신신당부만하며 지미의 애간장을 태워놓았고 지미가 정말 베이스 주자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 더 기다렸다. 지미가 결국 스티브 좀 보자고 사정사정하는 시점이 되자 폴은 아끼는 친구 스티브를 데려왔다.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로 이루어진 전설적인 지미 쥐프리 트리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89년, 프랑스 재즈 매거진에서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재결성을 제안했고 지미, 폴, 스티브는 1990년에 다시 모여 <The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를 녹음했다.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세 장의 앨범 Fusion, Thesis,Free Fall이 나온 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폴 블레이는 평생 사랑에 빠져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랑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랑했던 여인들과 음악적으로 함께 성장해 갔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평생 존경을 잃지 않았다. 칼라, 아네트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었던 아내 캐롤,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 게리 피콕과 그밖의 많은 뮤지션 친구들, 어머니 베티, 아버지 조, 유모 루시까지도. 그들을 향해 평생 사랑이 넘쳤던 폴 블레이,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빈다. 



(*본 칼럼에 등장하는 인용문은 1999년에 발간된 폴 블레이 자서전 <Stopping Time: Paul Bley and the Transformation of Jazz>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양수연이 뽑은 폴 블레이 앨범 10>




1.[Barrage] (ESP DISK, 1965)

칼라 블레이의 곡으로 이루어진 프리재즈 앨범으로 오네트 콜멘의 [Free Jazz] 앨범과 비견되는 수작. 선 라 밴드의 색소포니스트 마샬 알랜과 이듬해 존 콜트레인의 프리 재즈 걸작 [Ascension]에 참여한 트럼펫터 드위 존슨의 참여가 눈에 띈다. 

Paul Bley(p), Dewey Johnson(tp), Marshall Allen(as), Eddie Gómez(b), Milford Graves(perc)


2. [Closer] (ESP-Disk, 1966)

트리오로 녹음된 ESP에서의 두 번째 앨범. 수록곡 각각이 2-3분 내외로 짧으나 개성이 강하고 깔끔한 연주가 일품이다. 프리 재즈적 접근, 라틴 음악의 감각, 전통적 색채의 서정적 발라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짧은 곡들에 핵심적인 요소를 담았다. 칼라 블레이의 클래식 Ida Lupino을 비롯해 총 7곡의 칼라의 작품과 아네트 피콕, 오네트 콜맨의 곡도 한 곡씩 연주되었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Barry Altschul(perc)




3. The Paul Bley Synthesizer Show (Milestone, 1971)

폴 블레이는 일렉트릭 신디사이저 사용에 있어서도 선두주자였다. 아내 아네트 피콕의 작품들을 담은 퓨전 앨범으로 아네트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요소를 담은 실험성이 돋보인다. 

Paul Bley(p, syn, ep-p),Glen Moore/Frank Tusa/Dick Youngstein (b), Steve Hass/Bobby Moses (d)




4. [Open, To Love] (ECM, 1972)

폴 플레이의 솔로 앨범으로 칼라 블레이 작품 세 곡(Closer, Seven, Ida Lupino), 아네트 피콕의 작품 두 곡(Open, to Love, Nothing Ever Was, Anyway)과 폴 블레이 작품 두 곡(Started, Harlem)이 하나의 큰 스토리를 들려주듯 아름답게 배치되고 연주되었다. 블루지한 슬픔과 서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Ida Lupino’를 비롯해 모든 곡들이 빼어나다.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최고의 솔로 앨범 중 하나.

Paul Bley(p)




5.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

폴 블레이,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가 ‘지미 쥐프리 트리오’ 이름 하에 30년 만에 만나 녹음한 앨범. 1989년 12월 16일 토요일과 17일 일요일 양일간에 걸쳐 두 장의 앨범으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각 연주자의 개성이 절제와 내적 융합으로 오묘하고 깊은 사운드를 만들어낸 수작이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Jimmy Giuffre(ss, cl)



6. Plays Carla Bley (Steeplechase, 1991)

전 아내 칼라 블레이에 대한 경외를 담은 또 다른 컨셉의 앨범. Seven, Ida Lupino 등 폴이 즐겨 연주하는 칼라 블레이 주요 레파토리 외에도 Vashja, Floater, Around Again 등 칼라의 대표작 12곡이 스윙, 아방가드, 밥의 이디엄으로 연주되었다. 

Paul Bley(p), Marc Johnson(b), Jeff Williams(d)




7. [Annette] (hat ART, 1993)

아네트 피콕. 그녀를 주제로 한 이 앨범을 위해 전 남편들 게리 피콕과 폴 블레이가 함께 했다. 아네트의 대표곡Touching과 Blood는 take 1, 2로 나뉘어 연주되었고 애니타에게 바치는 Annette, Mister Joy 등 총 12곡의 수록곡은 생략적, 그야말로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미니멀리즘 미학이라 불릴만하다.

Paul Bley(p), Gary Peacock(b), Franz Koglmann(tp, flgn)




8. [Chaos] (1998, Soul Note)

피아노 솔로곡 -베이스 솔로곡 - 드럼 솔로곡- 트리오의 순서로 곡을 배치하였으며 독특한 감각과 아이디어로 색다른 칼러를 내뿜는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걸작이다. 

Paul Bley(p), Furio Di Castri(b), Tony Oxley(d)



9. [Sankt Gerold] (ECM, 2000)

폴 블레이, 애반 파커, 배리 필립스가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중턱의 장크트 게롤트 수도원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12곡의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풀어낸 수작. 

Paul Bley(p), Evan Parker (ts, ss), Barre Phillips (b)



10. [Play Blue Oslo Concert](ECM,2014)

2008년 ECM의 에릭 콩쇽과 만프레드 아이어가 기획한 노르웨이의 ‘오슬로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솔로 라이브 실황으로 폴 블레이의 유작으로 남게 됐다. 폴 블레이의 작품 4곡(Far North, Way Down South Suite, Flame, Longer)과 소니 롤린스의 ‘Pent-up House’가 연주되었다. 노장 폴 블레이의 연륜이 집약된 더없이 열정적이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다운 솔로 앨범. 




posted by jazzlady

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며


지난 여름 서울의 한 재즈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청중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십수 년 전 그곳은 분명 중년층들 대다수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날 본 청중은 대부분이 20대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상당수가 몇 시간 전 처음 맞선 본 사람처럼 격식을 갖춘 옷차림으로 데이트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음식을 주문하고 칵테일이나 와인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솔로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괄 박수를 쳤고 파트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날 특별히 시간을 내어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그들 나이 또래의 연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 나는 그곳 청중이 어떤 이유나 계기로 왔는지를 떠나서 먼저 그들의 젊음이 새삼스러웠다. 설령 재즈 클럽을 찾는 이유가 재즈라는 음악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본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재즈를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즈를 소비하는 사람, 재즈를 소비하는 청중. 재즈팬의 한 사람으로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재즈를 들으러 즐겨 방문하는 보스턴 혹은 뉴욕의 공연장이나 재즈 클럽은 상당수의 청중이 중장년층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의 보스턴 레가터 바 공연에선 청중의 70%가 60대 이상이었다. 그 이상의 노인들도 대단히 많았다. 느닷없이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존 스코필드는 일렉트릭 기타로 퓨전 재즈계의 거목이 된 연주자니 만큼 젊은 청중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와 로바노가 나란히 무대에선 건 2008년 이후 7년 만이었으니 귀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러 온 것은 대부분 옛날 팬들,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팬들이었다. 63세의 존 스코필드와 62세의 조 로바노, 그들은 [Past Present] 앨범 출시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노인 청중 앞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미국의 많은 재즈 비평가들이 재즈 청중의 감소를 우려하고 있고 그 현상으로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지적하고 있다. 1987년 미국 정부의 ‘재즈는 미국의 유산’이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재즈는 미국에서 죽어가는 예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즈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청중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듀크 엘링턴과 데이브 브루백이 타임 표지를 장식하곤 했던 1950년대였다.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30~40년대를 풍미했던 듀크 엘링턴은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입장에서 구세대 연주자일지언정 변화를 모색하고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새로운 청중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Kind of Blue]를 발표하고 데이브 브루백이 [Time Out]을 발표했던 1959년은 얼마나 찬란했던 한 해였던가? 어디서나 재즈가 들리고 누구나 재즈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곧 재즈의 시대는 갔고 록의 시대가 열렸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베스트셀링 연주자, 재즈의 거장도 시대에 발맞추어 록을 차용했다. 찰스 밍거스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를 버렸다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재즈 연주자들은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즈의 파격적인 스타일 변화 역시 재즈의 긍정적인 면모이고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재즈를 보여주는 양상이었다. 

최근의 몇몇 통계는 미국에서조차 재즈가 일부 매니아의 장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국립 예술 기금(NEA)의 미국 국민들의 예술 참여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SPPA, Survey of Public Participation in the Arts)를 보면 2008년 한 해 동안 한 차례 이상 재즈 공연을 봤다고 응답한 성인은 7.8%에 불과했고 이는 2002년 10.8%에 비해 3% 줄어든 수치였다. 재즈 청중의 평균 연령은 1982년에 29세였음에 비해 2008년에는 평균 연령이 46세로 크게 높아졌다. 재즈 청중의 노령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중장년층 중에서도 매년 재즈를 소비하는 비율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45세에서 54세 사이의 성인 중 재즈 공연을 보는 비율은 2002년 13.9%에서 2008년엔 9.8% 줄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30%나 감소한 수치이다.

2014년 넬슨 리서치의 앨범 시장 조사는 재즈 청중의 급격한 감소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넬슨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한해 미국 전체 인구의 1.4%만이 재즈 앨범을 소비했다. (클래식 음악 청중 감소도 재즈 못지않게 심각한데 클래식 앨범 판매량도 1.4%로 재즈 쪽과 사정이 같다.)이는 또한 종교 음악(3.1%), 라틴 음악(2.6%)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지는 치수이다. 강세는 역시 록 (29%)와 R&B/힙합 (17.2%), 팝 (14.9%), 컨트리 음악(11.2%)이었다.

미국에서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는 의미심장한 보고서로 1999년 비평가 윌리아드 제킨스의 아티클을 들 수 있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아야 하고 정규 교육에서 재즈를 보다 광범위하게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비평가 스튜어트 니콜슨은 도발적인 제목의 ‘재즈는 죽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재즈의 중심이 미국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예술 보호에 힘쓴다고 기대되는 유럽으로 이동하는 것이 재즈의 미래를 봤을 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니콜슨은 또 현재 미국의 재즈 교육이 40년대 후반의 모던 재즈 언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이 변화해야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역설한다. ‘링컨 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총감독인 윈튼 마샬리스가 니콜슨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클은 비평가 티치 아웃의 2009년 ‘월 스트리트 저널’ 기고문 ‘재즈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국의 위대한 예술 형식의 청중이 사라져가고 있다’일 것이다. 저자는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우려하며 재즈 프로듀서와 연주자들이 젊은 청중을 끌어들일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즈 청중의 감소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른바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재즈 청중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의 재즈 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95년을 전후로 재즈 청중이 반짝 늘었다가 사그라진 상태이다.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법은 글 말미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재즈를 듣는가? 왜 들어야하는가?


우리는 왜 재즈를 들어야 하는가? 


이제 나의 주장을 하겠다. 당신은 왜 재즈를 듣는가? 당신은 왜 재즈 앨범을 사고 <재즈피플>을 구독하는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다. 본인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는 일, 그리고 그 이유가 널리 퍼지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재즈 청중도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음악은 본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니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그 음악이 쉽게 좋아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칫하다가는 막연한 저항감에 휩싸인다.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이 들어오면 우리의 뇌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재즈가 난해해서 다가오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사람에게 오픈 마인드하고 그 저항감, 내면의 요동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팬, 재즈 소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앤드리슨 이론의 예술 수용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보았다. 재즈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정신이 자라고 영혼이 풍만해지는 경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영혼의 충만함. 내가 재즈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1단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이제 나는 재즈를 들어보겠다)

2단계) 앨범을 사던 공연을 보던 들으려는 ‘시도’ (재즈를 소비하겠다) 

  - A. 저항감이 덜한 음악 시도 B. 도전의 음악.

3단계) 오픈 마인드 (그 음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4단계) 받아들이기 (그 음악을 온전히 깊게 느끼려 노력하고 수용하기)

5단계) 확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만족감, 음악에 대한 만족감, 다시 들어야 하겠다는 확신)


1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활 양식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특유의 쿨한 이미지 때문에 재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서 접했던 사운드 트랙이 좋아서 재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릴렉스 하기 위해 재즈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 짓기>(1979)에서 광범위하게 소개된 바와 같이 문화 계급 상승을 위해 재즈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부르디외는 <구별 짓기>에서 소비와 생활 양식에서 선호, 취향, 관행이 특정 직업과 계급 진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례로 재즈를 등장시켰다.)

일단, 1단계로 진입하면 2단계 - 공연을 보고 앨범을 사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2단계부터는 사회경제학적 변수가 등장한다. 공연을 보고 앨범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어떤 앨범, 어떤 공연이 적절한지 정보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단계를 즐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방대한 재즈 명반의 양에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구입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내 정신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저항감이 덜한 음악을 편하게 구입할 것.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훌륭한 재즈 작품 중에서 듣기에 난해한, 도전이 필요한 음악을 구입할 것. 도전이 필요한 음악은 우리를 훈련하게 해주고 귀를 섬세하게 길들여 준다. 여러 음식을 맛보아야만 미각이 발달하듯 도전적인 음악은 내 귀를 발전시킬 수 있다. 저항감이 덜한 편한 음악(상당수의 명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은 디저트와 같은 것이다. 저항감이 덜한 음악만 들으면 듣는 수준이 발전하기 어렵다. 왜 굳이 듣는 수준을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본 칼럼 ‘재즈 탐미’를 쓰는 탐미주의자로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 맛의 범위를 넓혀야 쾌락이 극대화된다고. 위의 다섯 단계 모두는 따지고 보면 인간의 욕망 충족 단계와 같은 것이다. 나의 정신적 쾌락의 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재즈를 소비하는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 ‘오픈 마인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뿐, 음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애써 분석할 필요는 없다. 오직 오픈 마인드와 집중. 두 가지면 충분하다. 나를 도전하게 하는 음악을 존중하는 습관을 지녀 본다. 그만큼 내 정신과 마음이 자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운드 자체의 질감과 칼러에 집중하고 연주되는 곡 안에서의 뮤지션 쉽도 감지해 본다. 어떤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고 영혼을 느껴 본다. 오픈 마인드를 했다면 4단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마지막, 확신의 단계에 들어서면 깊은 만족감과 영혼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귀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사운드를 통한 만족감이 반복되면 진정 예술의 묘미의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지고 못 하고 퇴보하기도 하고 3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여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5단계까지 충족되면 매번 이 단계는 재즈를 대할 때마다 반복되고 그 충만함도 골이 깊어진다.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재즈 매니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 청중의 확대를 위해선 이러한 재즈 매니아들의 적극적인 음악 추천도 필요하다. 재즈 매니아는 잠재적인 재즈 청취자들의 좋은 모델이자 전도사이다. 공연장에 그들의 연인이나 친구, 가족을 데려갈 수도 있는 안내자가 된다. 재즈 비평가는 아니지만, SNS나 블로그를 통해 자유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추천할 수 있고 이는 재즈계에 좋은 활력이 된다.


청중 확대를 위한 고민, 카네기홀 예술감독과 함께. 


2014년 2월 나는 뉴욕의 한 프라이빗 모임에서 저녁을 먹으며 카네기홀 총책임자인 클라이브 길린슨 예술감독과 클래식과 재즈 음악의 미래에 관해서 허심탄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날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이날 모임 후 길린슨 예술 감독이 기획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전 주에는 키쓰 자렛의 솔로 공연을 카네기 홀에서 감상했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 공연은 훌륭했지만, 객석은 텅 빈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키쓰 자렛 솔로 공연은 매진이었다. 카네기 홀 정문에 서서 ‘티켓 구함’을 사인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을 정도였다. 길린슨 예술 감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 보다 키쓰 자렛 한 사람의 솔로 공연이 카네기 홀 입장에서는 더 큰 수익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명성과도 걸맞고 품격있는 키쓰 자렛과 같은 재즈 스타가 있으니 재즈계는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재즈나 클래식 음악 소비가 높았던 과거에는 음악 비평가들의 역할도 중요했고 신뢰도 엄청났다. 비평가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된다 치면 가차 없이 찍어 내려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린슨 감독은 비평가는 잠재적 음악 애호가를 고려하여 논하는 음악에 대해 적절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비평은 비평다워야 하지만 청중을 성장시키기 위해 적절하게 그런 무기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론은 이러했다. 음악비평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음악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음악 애호가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요지를 잘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글에는 분명한 주제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감상문이어서는 안된다. 예술 감독으로서 길린슨 씨가 실천하고 있듯 청중에게 익숙한 음악,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도전적인 공연을 올리고 때론 키쓰 자렛의 공연을 기획하는 것처럼 수익 창출과 변신을 꿰하는 능력도 청중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재즈 매니아, 기획자, 연주자, 교육자, 비평가 각자 모두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는 훌륭한 재즈 잡지와 비평가와 연주자와 매니아들이 존재한다. 거품일지언정, 일시적일지언정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점잖게 앉아 비싼 값을 치르며 재즈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9월 19일, 보스턴 레가터 바에서 열린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 공연. 이달 상당수의 청중들이 60대 이상 노년층이었다.>



< 2014년 넬슨 리서치가 조사한 2013년 장르별 앨범 판매량>




2014년 초, 카네기홀 예술 총감독 클라이브 길린슨씨와 함께 음악 청중 확대에 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월간 재즈피플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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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듀크 엘링턴의 “Black, Brown and Beige”가 초연되던 날.


어느덧 밤 열두 시. 사람들이 일제히 문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1월의 야심한 토요일, 거리로 쏟아진 일련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수군거렸다.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듣고 나온 거지?” 좀 전까지 카네기 홀의 청중이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세 시간을 넘긴 참으로 긴 공연이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도 있었지만 몇몇 곡은 몹시 길고 내용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월요일 아침,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신년을 맞아 카네기 홀이 야심 차게 준비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공연이 총체적인 실패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허세로 가득 찬 음악, 조잡하고 산만한 음악, 지루하고 요점 없는 음악……평론가 상당수가 이런저런 매체에 혹평했다. 백인의 세계에서 오롯이 빛났던 검은 천재, 당대 최고의 재즈 스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더없이 혹독한 비판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45분짜리 대작 “Black, Brown and Beige”가 세상에 처음 공개된 이 날, 댄스 홀을 벗어나 인생 처음으로 카네기 홀 무대에 섰던 이 날, 듀크 엘링턴에게 1943년 1월 23일 이날은 최악의 매서운 날로 기록되려 하고 있었다.

Black, Brown and Beige는 아메리칸 흑인의 애환을 담은 긴 오케스트라 작품을 만들겠다는 듀크의 염원으로부터 출발한다. 듀크는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들어오면서 시작된 아메리칸 흑인의 역사를 Black / Brown / Beige 라 명명된 세 개의 악장에 나누어 담았다. 1930년대 스윙 시대를 이끌어온 주역이었지만 듀크는 일개 밴드 리더나 송 라이터가 아닌,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에 비견될 만한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파퓰러 작곡가로 출발해 큰 무대에서 뜻을 펼치고 평단의 인정을 받은 조지 거슈인처럼 듀크는 흑인 작곡가로서 흑인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점치는 음악적 예지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이를 위한 듀크의 첫 도전은 이미 1931년 Creole Rhapsody로 시작되었다. 단편 영화로도 나온 Symphony in Black (1934년), 어머니의 사망 후 예술적인 자각에 힘입어 완성된 Reminiscing in Tempo(1935년)도 그 일환이었다. 특히 네 개 파트로 이루어진 Reminiscing in Tempo은 78rpm 두 장에 나누어 담길 만큼 긴 작품이었다. 그러나 듀크의 예술적 시도는 번번이 평단의 외면을 받았다. 댄스 홀에서는 거물로 인정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 듀크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작곡가에 불과했다. 듀크를 코튼 클럽에 연결해주고 재즈의 스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매니저 어빙 밀러도 Reminiscing in Tempo가 발매된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듀크와 멀어졌다. 어빙 밀러는 듀크와 재정적으로 반반의 수익을 나누어 갖기로 계약된 관계였고 악보 출판업자로서 듀크의 작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밀러가 보기에 Reminiscing in Tempo와 같이 복잡한 긴 오케스트라 작품 따위가 수익을 안겨줄 리 만무했다. 결국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두번 째 유럽 투어 길에 오른 1939년 듀크와 어빙은 완전히 결별한다. 

1942년, 듀크 엘링턴의 새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카네기 홀 무대에 올릴 긴 작품을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듀크는 전율했다. 클럽 청중의 입맛에 맞춘 댄스곡이 아닌 진정한 예술 작품을 작곡할 명분이 주어진 것이었다. 1943년 1월 23일 토요일, 카네기 홀은 전쟁 중인 러시아 주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위해 특별한 신년 콘서트를 발표한다. 흑인 재즈 작곡가를 위한 최초의 무대. 아카데믹하고 섬세한 청중이 기다리는 카네기홀 입성을 위해 듀크는 고도의 몰입으로 작품에 매진한다.

1943년 1월 역사적인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 홀 데뷔 공연은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음반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장의 LP로 차곡차곡 담긴 그 날의 무대를 반세기 이상 흐른 지금에 와서 듣노라면 그저 감개무량하고 감사할 뿐이다. 듀크 엘링턴의 멘트는 침착을 가장하지만 다소 격양되어 있다. 그가 이날을 위해 작곡한 A Tone Parallel to the History of Negro in America라는 부제가 달린 흑인의 서사시 <Black, Brown, Beige>는 매 악장이 연주될 때마다 그 의미에 대해도 설명되었다. 흑인의 고난을 다룬 22분짜리 1악장 “Black”. 강한 베이스 라인은 흑인의 비극을 암시한다. 12분 50초 부분에서 등장하는 조니 호지스의 처연한 색소폰 솔로는 다름 아닌 Come Sunday이다. 비통에 찬 이 극도로 아름다운 멜로디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간판 멤버 조니 호지스를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아름답고 슬픈 Come Sunday가 끝나면 다소 혼란스러운 새로운 국면의 리듬과 멜로디로 악장이 채워져 간다. Come Sunday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공연 후 가장 혹평이 쏟아졌던 첫 악장에 대한 평가를 일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산만함에 대한 지적은 그릇되다 할 수 없다. 짧은 곡들이 꼬리를 물며 등장하기에 전체적인 조화나 통일성을 찾기가 어려운 면도 분명 보인다. 그러나 평론가 헨리 사이먼의 혹평은 과도하다 “1악장 Black이야말로 거의 망가진다. 2악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분산되면서 망가진다”라고 썼다. 월드 텔레그램 신문은 “너무 길다, Black, Brown and Beige를 가지고 24개의 짧은 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을 심포니로 만들어놓았다.” 뉴욕 포스트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데 쓸데없이 45분이나 걸렸다”고 비아냥거렸다. “과연 듀크가 오케스트라 작품을 쓸 능력이 되는가? 듀크가 재즈를 버렸는가?” 따위의 힐난은 새해 벽두부터 듀크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무엇보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폴 바울스의 리뷰는 직격탄이었다. 듀크는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한동안 작곡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듀크 엘링턴은 악장이 시작되기 전에 거창한 내용에 관해서 설명을 했지만 결국 속된 댄스 음악과 기교 부리는 솔로가 내용의 전부였다. 조잡스러운 원곡을 조잡스럽게 인용했다. 전체의 곡 진행을 방해하는 반복적인 클라이맥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심포니를 흉내 내지만 템포는 들어 맞지 않는다. 템포를 방해하려는 위험한 성향이 무척이나 많이 보인다. 규칙적인 비트가 없다면 싱코페이션도 없을 수밖에 없고 텐션도 없으며 결국 재즈도 없다. 

재즈를 예술 음악(클래식)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재즈와 클래식은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르게 존재하며 둘 다 동시에 초점을 맞추기 힘들다. 재즈와 클래식은 다른 주파수로 존재하는 음악이다. 조율은 불가능하다.”

듀크의 꿈, 듀크의 소명.

모두가 희망을 말하는 신년, 그래서인지 나도 2016년 첫 호부터 누군가의 실패와 절망을 다루는 것이 유감스럽다. 신년 벽두부터 상심에 가득 찬 사람이 다름 아닌 영화배우처럼 근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신사 듀크 엘링턴이라는 점이 애석하다. 그는 카네기 홀에서 화려하게 데뷔식을 치르고 진정한 현대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는 위치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24년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가 그러했듯 그 누구의 영향이 아닌 오직 블랙 스윙의 요소로 훨씬 젊은 나이에 예술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듀크 엘링턴은 1936년 7월 다운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음악적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숲 속에서 스윙하며 흔들거리는 덩굴의 소리를 아직 잡아본 적이 없어요. 그 덩굴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나뭇잎을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가볍게 스칠 때의 그 순간을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음악 역사의 획기적인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듀크 엘링턴은 화려한 무대 매너와는 달리 매우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다정다감하고 시적이었으며 혼자 고민하기를 즐겼고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지만 특별히 누군가와 깊게 지내지는 않았다. 문학적이었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20년 장기 단원들이 있는 이유도 그의 좋은 성품 탓도 한몫했다. 그는 자존심이 셌지만 느긋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네기 홀 공연의 혹평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서서히 스스로 치유를 해 나갔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책임도 있었다. 듀크는 빌리 스트레이혼이라는 젊고 유능한 작곡가와 재능있는 단원들이 있었다. 빌리 스트레이혼은 Take A Train 곡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선사한 듀크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듀크 엘링턴은 Black, Brown and Beige에 대한 평단의 혹평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판의 요소들을 면밀히 살펴 그 곡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보통 작곡가라면 그저 내버려둔 채 후세의 다른 평가를 기대할 법도 한데 듀크는 가슴을 후벼 파는 비난을 수용하면서 일일이 고쳐나갔다. “조잡한 짧은 곡들의 긴 나열”이라는 부분을 깊게 염두에 두었다. 듀크는 곡의 구성에 큰 변화를 줬다. 조화로움을 위해 Come Sunday의 멜로디를 주제로써 극대화하였다. 이윽고 1958년, 듀크 엘링턴은 십 오 년 전 카네기 홀 무대에 올랐던 Black, Brown and Beige 새로이 각색하여 녹음하게 된다.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Black, Brown and Beige>(Columbia-CS 8015)는 Part I (Work Song - Full Orchestra) - Part II (Come Sunday Instrumentally) - Part III (Work Song And Come Sunday) - Part IV (Come Sunday) - Part V (Come Sunday Interlude) - Part VI (23rd Psalm)로 전격구성되었다. 초연 당시 조니 호지스의 솔로로 연주된 Come Sunday는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로 부활했다. 조니 호지스가 로맨틱하고 처연하게 Come Sunday를 연주했다면 마할리하 잭슨은 파워풀한 가스펠로 신을 향한 애절한 기도를 담았다. 

1958년의 < Black, Brown and Beige>는 50년대 초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침체기를 벗어나 이들의 부활을 알렸던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 직후 야심차게 추진된 것이었다. 50년대 초반, 듀크 엘링턴은 큰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조니 호지스, 로렌스 브라운, 소니 그리어 등 주요 멤버들이 밴드를 떠났고 청중은 로큰롤이나 프랑크 시내트라와 같은 보컬 음악으로 쏠렸다. 게다가 듀크는 한 매체의 잘못된 인용으로 큰 낭패를 봤다. 듀크가 흑백인종 분리정책에서 흑인이 벗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이 말은 흑인의 공분을 샀고 흑인 청중이 듀크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을 계기로 명실상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권위가 회복되었다고 평가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의미의 듀크 재탄생은 바로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에 기인한다. 이 앨범 속에는 듀크가 바랐던 음악적 소명, 쓰라렸던 1943년, 실패와 좌절 그리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니까 말이다.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은 온전히 평가받았으며 비로소 위대한 작곡가 듀크 엘링턴의 지위를 확고히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60-70년대에 발표된 스피리츄얼한 <Sacred Concert>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듀크가 바르톡처럼 스트라빈스키처럼 조지 거슈윈처럼 인정받으려 했던 욕망은 결코 허세로 치부될 수 없다. 덩굴의 미세한 스윙,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고 싶다는 그의 말, 그 시절 그 누구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순수하고 내밀한 그의 감성이 만들어낸 그 시절 그 누구도 쉽게 꿈꿀 수 없는 아름다운 소망이었다.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1977 발매된 1943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1943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사진설명

1. 1943년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2. 1977년 발매된 1943년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4.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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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피플 1월호

Jazz Column 2016.01.07 07:23

월간 <재즈피플> 1월호는 존 콜트레인의 Love Supreme 발매 50주년 기념 특집입니다.

<양수연의 재즈탐미>는 듀크 엘링턴의 그의 역작“Black, Brown and Beige”가 초연되던 날을 출발점으로 듀크 엘링턴의 좌절, 꿈과 희망을 다룬 "1943년,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입니다.

재즈피플 1월호, 많이 성원해주세요.


월간 재즈피플 2016년 1월 vol. 116핫 이슈08 | 벤 몬더 [Amorphae]09 | 사라 맥켄지 [We Could Be Lovers]10 | 런던, 메더, 프레이먹 & 로스 [Royal...

Posted by 월간 재즈피플 on Wednesday, December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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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5년 12월 vol. 115핫 이슈12 | 칙 코리아 & 벨라 플렉 [Two]13 | 송영주 [Reflection] 14 | 김성수 일렉트릭 밴드 [Drifter]15 | 토마스 스트로...

Posted by 월간 재즈피플 on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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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와 클래식, 두 연인을 한번에 얻은 행복한 사나이.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를 그리며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Gunther Schuller (1925. 11. 22 ~ 2015. 6. 21)


드러머 조지 슐러를 처음 본 것은 색소폰 연주자 리 코니츠와 연주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이햇을 두드리며 무심히 청중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하도 깊고 강렬해서 그 눈은 세트에 더해진 하나의 드럼 심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형형색색 조약돌이 한데 부딪히듯 밀도 있고 섬세한 멜로딕 드러밍에 취해버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연주는 오십이 넘은 재즈 연주자들의 무르익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2년 전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추모 세미나에서 조지 슐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 재즈의 현주소에 관한 그의 역동적인 연설에 전율했다. 조지의 연설은 이 시대 위대한 작곡가 건서 슐러가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협회에서의 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부전자전이구나....그날 비로소 나는 조지가 풍겼던 ‘사뭇 다른 느낌’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슐러가(家)에 흐르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마일스 데이비스의 정신과 그들 혈통에 내려오는 음악 유전법칙의 외연이었음을.

지난 6월 21일 건서 슐러가 훌륭한 두 연주자 아들, 조지와 에드를 남기고 8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에 나는 슐러를 통해 연구해야 할 음악 계보학이 얼마나 방대한지 그리고 그 작업에 매료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 그는 생전에 200여 곡을 작곡했고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이중 살림을 꾸렸으며 두 장르를 혼합하여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 이라고 불렀다.

건서 알랙산더 슐러는 1925년 11월 22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1936년까지 독일에서 사립 학교를 다녔고 뉴욕으로 건너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뉴욕 필하모닉의 바이올린주자였다. 어려서 프렌치 혼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슐러는 불과 열다섯 살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대타로 연주했으며 열여섯에는 신시네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린치 혼 주자로 발탁되었다. 클래식 분야 촉망받는 연주자였지만 그 시절 슐러는 재즈에 푹 빠져있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에게 듀크 엘링턴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이라고 말하자 그는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셨다. 엘링턴이 베토벤만큼 위대하다는 발상은 클래식 세계에서는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


Birth of the Cool 녹음으로 전설을 만들다.


재즈를 향한 슐러의 애정은 재즈 연주자들과의 교류를 이끌었다.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젊은 백인의 뉴욕 필하모닉 혼 주자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었다. 1949년 초 9인조 빅밴드라는 야심찬 구성으로 쿨 재즈의 탄생을 알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역작 <Birth of the Cool>에 건서 슐러가 프렌치 혼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은 주니어 콜린스의 대타로 슐러를 추천한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덕분이었다. 이날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될 예정인 Moon Dreams 곡이 까다로워서 녹음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A토널로 연주되는 코다 부분은 여러 번의 리허설을 해도 악기 밸런스가 맞지 않고 리듬도 왔다갔다 했고 녹음을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녹음 시간을 남겨두고 곡이 포기되기 직전 슐러는 마일스에게 자신이 지휘를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Birth of the Cool 연주자들은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아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하는 슐러를 따르며 Moon Dreams의 녹음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슐러가 혼 부분에 집어넣은 손을 떼면 피치가 1/4음 올라가기 때문에 손을 혼에 넣을 수 없는 지휘 시에는 입술로 1/4음을 낮게 조정하며 불었다는 ‘슐러의 전설’이 전해진다. 사운드가 비슷한 어두운 저음 악기들의 구성, 비밥의 전성기였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이 9인조 컨셉은 클루드 톤힐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렇듯 슐러의 재즈 외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 쿼텟, 에릭 돌피, 찰스 밍거스, 오네트 콜맨, 짐 홀 등 최고의 임프로바이저들과 함께 작업했다. 

슐러의 ‘본바닥’ 클래식에서도 그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은 지속되었고 작곡가로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195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뮤직 디렉터가 슐러의 곡 Music for Brass를 연주하였고 방송을 탔다. 서른살의 프렌치혼 연주자이자 천부적인 작곡가, 지휘자인 슐러에 대한 평단의 호평이 이어졌다. 사무엘 바버와 아론 코플란드등 위대한 현대 작곡가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슐러는 전도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클래식 세계에서 오롯이 섰다. 슐러의 뛰어난 작품들 중에는 서로 잘 결부시키지 않는 악기들의 조합, 또는 많이 쓰지 않는 악기들을 차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초기 작품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In the Symphony for Brass and Percussion (1950)은 현악기나 관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1960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Spectra는 오케스트라를 7개 그룹으로 나누어 매 그룹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하고 혼합해서 들을 수도 있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다섯개의 혼을 위한 Five Pieces for Five Horns(1952), 네 개의 더블 베이스 작품(1947), 네 개의 첼로를 위한 작품(1958) 등 획기적인 작품들도 있다. 콘체르토도 20개 이상 작곡했는데 더블 베이스가 솔로를 하는 콘체르토(1968), 콘트라바순(1978), 알토 색소폰(1983) 등 상대적으로 드물게 등장하는 악기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슐러는 거칠고 독특한 작품 외에도 한편의 시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많았다. 92년에 사망한 아내 마조리에게 바치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1993)이나 챔버곡 Impromptus and Cadenzas(1990)는 거친 하모니가 예측하기 어려운 무드와 톤의 변화에 따라 따듯한 느낌을 주는 멋진 곡들이다. 슐러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로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슐러의 평생에 걸친 야심은 클래식과 재즈의 따로 살림을 합치는 것이었다. 1957년 무렵부터 슐러는 클래식과 재즈의 결합을 스스로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재즈 클럽에 콘서트홀을 들여놓고 콘서트홀에 재즈 클럽을 옮겨다 놓을 작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을 화나게 했다. 촉망받는 작곡가에게 비판이 이어졌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이 나에게는 논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이런 두 장르의 위대한 음악이 서로 나누어져 있고 얘기도 안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대 쪽을 욕하고 있으니 나는 합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재즈와 클래식을 결혼시킬 유능한 사람들을 물색했다. 같은 목표를 위해 제자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를 합류시켰다

“써드 스트림 운동은 서로 다른 취향의 작곡가, 연주가, 임프로바이저들을 같이 일하게 하고 여러 다른 장르의 음악을 결혼시키는 일이다. 이 운동이 멜팅팟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써드 스트림 개념으로 청중에게 다가간 중요한 기점은 써클 인 더 스퀘어 씨어터에서 컨템포러리 스트링 쿼텟, 빌 에반스 트리오, 배리 갈브레쓰, 에릭 돌피, 오네트 콜맨 등이 함께 슐러의 써드 스트림 작품이 선보였던 1960년 5월 17일이었다. 슐러는 써드 스트림 개념을 반영시킨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써드 스트림에 주력하면서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를 실감했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끝내고 밤새 작곡을 하는 등의 연주와 작곡이 병행되는 생활을  십오년 이상 지속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스케쥴이 계속되자 그는 과감히 프렌치혼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연주자의 생활이 사라지자 그는 저술과 교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혼 주자들의 교과서 격이자 92년도에 재판된 <혼 테크닉>(1962)이 나온 것도 이맘때였다. 1963년에는 카네기 홀의 새 음악 시리즈인 <20세기 이노베이션>을 기획 감독했다. 그 해 여름에는 ‘탱글우드’ 대리 학과장으로, 65년에는 정식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70년부터 84년까지는 클래식, 재즈 음악의 전당인 버슈어 뮤직 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다. 세계적인 음악제 탱글우드에서 건서 슐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84년 탱글우드의 모든 직에서 은퇴한 후 아이다호주 샌드포인트의 여름 페스티벌을 시작했고 미국내 여러 앙상블과 교류하면서 클래식과 재즈 오케스트라들의 게스트 컨닥터와 디렉터를 맡았다. 1950년도에 맨해튼 스쿨 어브 뮤직에서 시작되었던 교육 경력은 예일 대학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음악 대학인 권위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이었다. 슐러는 NEC에 써드 스트림 전공을 만들고 이후 총장 재직 10년 동안 재즈와 써드 스트림 음악을 NEC의 주력 분야로 키워냈다. 써드 스트림 과(科)의 학장은 슐러의 제자이자 동료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였다.

건서 슐러 이전에도 조지 거슈인, 라벨, 바르톡 등 여러 작곡가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지만, 건서 슐러의 위대함은 재즈-클래식 결합을 개인의 작업을 넘어서 ‘써드 스트림’이라는 음악계에 하나의 조류를 형성케 하였고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 안으로 써드 스트림을 가져와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재즈를 클래식과 학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르로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클래식과 재즈, 두 장르의 음악을 완벽히 이해해야 훌륭한 써드 스트림 음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써드 스트림이란 재즈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클래식과 재즈의 전통의 비율을 반반으로 가장 좋은 혼합 상태로 만들어야한다. 재즈, 클래식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더 깊게 혼합될수록 더 좋은 써드 스트림이다. 나는 클래식에서 조금, 재즈에서 조금 섞는 얄팍한 교배를 싫어한다. 이상적인 써드 스트림을 만들려면 클래식과 재즈 각각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최고의 전통과 업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건서 슐러는 클래식 명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총장을 지내고 클래식 분야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정작 본인은 제도권 교육은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비록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 오케스트라에 합류했으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사사받는 스승을 두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그의 스승은 음악과 악보였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 협회’ 연설을 통해 슐러는 공개적으로 독학에 대한 자부심을 처음 드러냈다. 음대 교육자들을 앞에 둔 이 아이러닉한 명연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슐러는 남들 하는데로 하기보다 튀는 성향이 짙었다. 항상 음악계에 대해 독설을 쏟았으며 청중을 향해서도 음악 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건서 슐러의 발언은 이율배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작곡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정작 본인은 청중을 잃어버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빠져있었다. 탱글우드 디렉터였던 79년에는 공부하러온 학생들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음악 노조 등 모든 음악인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너희들이 잘못해서 오늘날 연주자들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무관심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슐러의 음악계를 향한 날센 비판은 그의 저서 <묵상: 건서 슐러의 음악 세계>(1986), <완벽한 지휘자>(1997) 등 그의 저서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건서 슐러는 독학으로 작곡을 터득했지만 음악 가계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지휘자였고 부친은 무려 42년간이나 뉴욕 필하모닉에서 연주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려서부터 악보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고 부친이 그의 멘토였다. 현악기 연주자보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프렌치 혼을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다. 77년도 뉴욕 타임즈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듯 음악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슐러에게는 진정 행운이었다.

건서 슐러가 창설했던 뉴잉글란드 음악원의 ‘써드 스트림’과는 몇 년 전 ‘컨템포퍼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다 재즈적인 느낌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다. NEC에서 건서 슐러와 함께 써드 스트림을 일구었던 랜 블레이크 전 학장으로부터 본인은 물론 슐러 역시 명칭 변경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때 동거했던 재즈와 클래식의 한집 살림이 끝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비록 이름은 달라졌더라도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 배합을 추구했던 건서 슐러의 엄중했던 써드 스트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주자들은 물론 많은 청중이 어찌보면 클래식과 재즈라는 두 연인을 함께 얻기를 꿈꿔 왔기 때문이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와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좌). 두 사람은 각각 총장과 학장 신분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써드 스트림'의 조류를 만들고 후학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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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에 자유를 부여하라.

마일스 데이비스의 꿈, 모달을 만나다.     

-월간 재즈피플 6월호


탐미주의자로서 나는, 창작을 위한 영감(靈感),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고통을 헤아려야 함을 안다. 그 영감을 위해, 천재적인 예술가의 행위가 설령 도덕의 잣대를 비켜갈 경우에도 이를 만류하고 비난할 용기가 없을 수도 있음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창작의 영감을 얻는, 소설 <광염 소나타>의 주인공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움을 갖은 적이 있다. 천재적 예술가의 특수함이 광인의 퇴행적 병리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다행히 나의 재즈 탐미 세계에서 실제로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수의 재즈 연주자들이 과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를 독창성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마일스 데이비스, 그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적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된 진보의 화신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 이 일곱 음절은 내 탐미 여행의 주요 정박지요, 어슴푸레한 안개 너머로 서서히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잉카 제국처럼 일종의 문명이 되었다. 마일스가 받은 영감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공부했는지에 대해서 나는 탐험가가 된 양 언제나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안개를 헤치며 화려하게 솟구쳐오른 문명의 자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러니 56년 전 오늘을 마주하게 된다. 4월 22일, 뉴욕의 콜롬비아 스튜디오. 마일스 데이비스는 <Kind of Blue>를 위한 마지막 녹음에 열중하고 있다.


마일스는 번영된 도시를 이룩하려는 제국의 황제처럼 근엄한 얼굴로 “멜로디에 자유를 선사할 것”을 지시한다. 이 지상 과제를 이루기 위해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캐논볼 애덜리, 폴 챔버스, 지미 콥 등 선택된 참여자들은 기본 설계도만 손에 쥔 채 기존에 없는 창의적인 건축물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를 위해 그들이 사용해야 하는 도구는 '모달리티(modality)'였다. 그들은 자신의 솔로에서 이 도구를 사용하여 임프로비제이션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공간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했다. 코드에 의존하는 수직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드 혹은 선법이라 불리는 수평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했다. 모든 연주자는 코드톤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다만 코드와 연관된 스케일의 콤비네이션을 통해 새롭게 멜로디를 창조해야만 했다. 그러면 이윽고 멜로디는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멜로디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Kind of Blue>는 모달리티를 대표하는 획기적인 첫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고심 끝에 선정한 멤버들의 이야기, 즉 참가 연주자들이 어떤 과정으로 만나서 이날 스튜디오에까지 왔는지에 관한 에피소드는 최근 재발간된 마일스 데이비스 평전 (김현준 역, 그책, 2015년 / 원저:존 스웨드의 So What : The Life of Miles Davis)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의 탐미여행은 마일스가 받은 영감과 <Kind of Blue> 연주에 사용된 모달리티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의 마일스를 설명해주는 이 앨범의 핵심이니까.


<Kind of Blue>에서 사용된 모달리티의 아이디어는 마일스 고유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지 러셀(1923-2009)을 기억해야만 한다. 마일스는 조지 러셀의 모달리티 개념에 무릎을 쳤다. 마일스는 러셀이 발견한 재즈 화성에서 미래를 보았다. 우리는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황제는 알지만 병약한 몸으로 뒷방에 앉아 이론에 골몰했던 황제의 멘토, 조지 러셀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만약 내가 <Kind of Blue>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청년 조지 러셀이 결핵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입원 중에도 음악 연구에 열중하는 이 젊은 학자의 시선에서 마일스를 그릴 것이다. 병문안을 온 마일스가 자신의 음악적 갈망을 러셀과 토의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러셀이 연구하는 과정을 결국 마일스의 음악으로 보여줄 것이다. 번득이는 카리스마로 당대 최고의 밴드를 이끌며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에게도 호령하는 마일스였지만 동년배나 다름없는 조지 러셀 앞에서는 예외였다. 러셀의 모달 재즈 컨셉을 마일스는 <Kind of Blue>를 기획하기 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1953년, 새로운 재즈 화성 이론을 제시한 조지 러셀의 역작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이 발표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탐구했던 사람은 마일스였기 때문이다. 러셀의 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재즈 이론서였으며 마일스 외에도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에릭 돌피 등 당대 진보적인 재즈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모달 재즈를 몸소 실현하고 개척한 마일스에게 러셀의 컨셉은 든든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


조지 러셀의 기념비적 저서,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

최초의 재즈 이론서. 재즈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옛날 재즈곡을 들으면 화성을 재분배하는 느낌이 있다. 기본 코드 속에서 서로 포개어져 있던 음들이 멜로디로 나열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모달 어프로치(선법적 접근)에서는 즉석에서 의미 있는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코드 체인지를 재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한 개의 하모니가 지속될 때 솔로이스트가 모드를 기반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하는 이 상황을 모달 재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달 재즈는 어떤 장르가 아니라 임프로비제이션을 하는 접근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모달 재즈곡들은 코드는 단순한 편이고 코드에서 비롯되는 스케일을 임프로바이즈하는데 쓰는 하나의 원료로 여겨 스케일 위에 또 다른 스케일을 겹치게 권장하고 그래서 곡이 토널 센터는 있되 결국 한 키(key)가 아니라 여러 키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59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기존과는 다른 파격적인 접근 방법이었다. 

러셀은 자유로운 임프로비제이션을 위해서 유럽의 조성 체계와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였고 리디안 모드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러셀은 '도'로 돌아가려는 음의 현상을 '중력(gravity)'개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중력이 완전 5도 간격으로 음을 잡아 내려가면 C, G, D, A, E, B, F#로 7개 음으로 나열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리디언 스케일이 된다. 러셀은 리디언 스케일을 통해 완벽한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러셀의 저서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은 재즈의 기념비적 저서이지만, 이 지면을 통해 화성에 관한 고급 지식이 요구되는 러셀의 복잡한 이론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진보적인 재즈 연주자들은 러셀의 컨셉을 바탕으로 비밥 혁명 이후 점점 복잡해지는 코드 체인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모드로 접근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그 의의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러셀의 컨셉은 연주자들에게 분명 화성적 돌파구가 되었다.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을 코드 패턴에 기대는 브로드웨이 송 방식에서 이탈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고 재즈를 유럽의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되는 학문으로써 지성의 가치를 얻게 하였다. 


조지 러셀, 재즈의 판도를 바꾸다.


조지 러셀은 1923년 6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출생했다. 그는 본래 재즈 드러머로 연주자의 길을 걸었지만, 결핵으로 일 년 이상 장기 입원하는 바람에 연주 경력이 끊겼다. 그는 밴드 리더가 되기보다는 이론가의 길을 택했다. 1946년, 병상에서 회복한 뒤 뉴욕으로 가서 길 에반스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졌던 진보적인 연주자 서클에 합류했다.

1947년에 조지 러셀이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를 위해 작곡한 유명한 Cubana-Be/Cubana-Bop곡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재즈와 아프로 쿠반 스타일을 접목시킨 모달 오케스트라 작품에 몰입하던 러셀의 결실이기도 했다. 1949년 클라리넷주자 버디 디프랭코를 위해 작곡한 “A Bird in Igor's Yard”도 찰리 파커와 스트라빈스키를 개입시킨 클래식과 재즈의 내재적 접합체이자 러셀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1950년대에 러셀은 자신의 이론을 음악으로 완성하기 위해 여러 앙상블을 조직했다. 1956년 아트 파머, 빌 에반스, 폴 모션, 할 맥쿠식, 배리 갈브래이스 등이 참여한 조지 러셀 스몰텟의 <The Jazz Workshop>앨범은 러셀의 컨셉을 집대성한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들로 채워진 러셀의 명작 중 하나이다. 러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Ezz-Thetic이 수록되어있는데 이 곡은 1961년 동명 앨범 <Ezz-Thetic>으로 출시된 바 있다. 돈 엘리스, 데이브 베이커, 에릭 돌피, 스티브 스왈로우, 조 헌트가 참여한 이 앨범도 획기적인 작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몽크의 Round Midnight에서 에릭 돌피의 솔로는 심금을 울린다. 모든 곡이 독창적이며 매우 진보적이다.

브랜다이즈 대학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된 All About Rosie (1957) 역시 재즈사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10분 45초짜리 이 곡은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있는데, 주 멜로디는 첫 번째 파트에서, 블루스적 느낌을 살린 두 번째 파트를 지나 세 번째 파트에 닿으면 젊은 빌 에반스의 보석 같은 솔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에반스 역시 러셀로부터 배우고 그의 이론적 컨셉에 매료된 연주자였다. All About Rosie에서의 에반스의 솔로는 에반스의 전 곡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솔로 중 하나로 기록될 만 하다. 우리는 또 1958년에 녹음된 에반스의 Peace Piece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음을 최대한 절제하며 느린 발라드로 연주된 이 곡 역시 러셀의 컨셉을 도입한 에반스식 모달 재즈 피스이다.

조지 러셀은 교육자로서 그의 전 생애를 바친다. 진보적인 뮤지션들이 모여들었던 ‘레녹스 매사추체스의 스쿨 오브 재즈’에서 가르쳤고 이곳에서 오네트 콜맨과 칼라 블레이도 가르쳤다. 1964년 러셀은 유럽으로 건너가 스웨덴 룬튼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스웨덴 라디오와 계약해서 미사 음악과 발레 음악 등을 작곡했고 이 시기에 얀 가바렉이 러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69년,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NEC)의 교수로 임용되면서였다.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1986년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인터네셔널 리빙 타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14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영국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러셀은 1989년에 맥아더 파운데이션 그랜트, 1990년 어메리카 NEA재즈 마스터, 가디언 어워드, 구겐하임 펠로우십,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의 개정판(볼륨1)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2007년 알츠하이머로 사망할 때까지 재즈계의 지성, 선구자, 멘토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사망으로 말년에 준비하던 <리디언~>볼륨 2는 발간되지 못해서 무척 아쉽다.


무한 공간에 홀로 서서.


마일스 데이비스. 그는 모달 재즈를 통해 "창조적으로 영원히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32마디가 지나면 끝나 버리는 코드를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 체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시작도 끝도 없이 원하는 만큼 의미 있는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Kind of Blue>에서 So What의 프레이즈가  흑인들의 '아멘'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을 나 역시 동의한다. 멜로디와 리듬의 자유, 영원히 연주될 수 있는 음의 가능성이 '아멘'으로 기원 되고 응답하는 듯하여 감흥을 배가시킨다. 

안개 너머 어슴푸레 다가온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찬란한 문명, 그가 꿈꾸었던 것은 자유였다. 다만 그 자유는 1959년 콜롬비아 스튜디오에 모인 선각자들처럼 오로지 고도로 숙련된 자들의 것이다. 음의 체계와 변화, 그 모든 것을 터득한 자들의 몫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선사하는 자유의 무한 공간을 거닐다 행여 길을 헤매게 된다면, 나는 별을 보며 음을 생각했던 피타고라스와 조지 러셀과 마일스 데이비스와 여러 음악의 선구자들을 떠올리며 게오르그 루카치를 읊을 것이다. 밤하늘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말이다. 


(끝)

1953년에 발행된 조지 러셀의 기념비적 저서, 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



<조지 러셀이 리디언 컨셉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초기 걸작들>

The Jazz Workshop (RCA Victor, 1956)

아트 파머, 빌 에반스, 조 해리스, 폴 모션, 오시에 존슨, 배리 갈브라스, 밀튼 히튼, 테디 코틱 등이 참여한 초기 명작.


New York, N.Y. (Decca,1959)

아트 파머, 밥 브룩메이어,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맥스 로치 외 다수의 연주자들이 참여했고 존 렌드릭스가 나레이션을 맡은 독특한 앨범


Jazz in the Space Age (Decca,1960)

빌 에반스를 비롯한 초기 멤버들이 참여한 오케스트라 앨범. 


 Stratusphunk (Riverside, 1960)

 데이브 베이커, 데이브 영, 척 이스라엘, 알 카이거, 조 헌트가 참여.


Ezz-thetics (Riverside Records, 1961)

돈 엘리스, 데이브 베이커, 에릭 돌피, 스티브 스왈로우, 조 헌트가 참여한 역작.


 <1959년 모달 재즈의 역사적인 앨범, <Kind of Blue>의 녹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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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2>(마지막회)

기회의 땅, 유럽에서 마지막 시간들.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했던가. 고향 LA로부터 동쪽으로 4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욕에서 서른을 시작한 에릭 돌피. 에릭 돌피가 생전에 발표한 5장의 리더작 중 4장은 뉴욕 입성 직후부터 2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서른이 공자의 말처럼 뜻을 세우는 나이라면 뉴욕은 돌피의 뜻이 오롯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였던가. 

뉴욕에서 돌피의 음악은 저항에 부딪히곤 했다. 지난 호에 소개했듯 에릭 돌피는 존 콜트레인과 이른바 '뉴-재즈'를 연주하면서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돌피가 뉴욕 입성 후 의욕적으로 연주에 매진하던 시기에 평론가들은  '안티 재즈'라며 비판했고 존 콜트레인에 따르면 이것은 돌피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이미 탑 뮤지션으로 널리 알려진 콜트레인과 달리 뉴욕에서 뉴 페이스였던 돌피는 세상의 평가에 어느정도 민감했던 것 같다. 1961년 11월 23일 <다운비트>매거진은 "소름 끼치도록 (듣기 싫은) 아나키즘 음악"이라고 깎아내렸고 앞서 11월 9일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 연주를 두고는 "인토네이션 트러블, 동물 사운드, 뒤틀린 새소리"라 표현하면서 이날 출연한 웨스 몽고메리와 비교하며 폄하했다. 이외에도 <다운비트>는 이들의 공연을 꾸준히 추적하면서 "뮤지컬 넌센스를 팔아댄다(peddle)"고 혹평하곤 했다. 1961~1962년 사이에 콜트레인-돌피의 음악에 대한 찬반 레터가 <다운비트>로 집중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다운비트 매거진과 콜트레인과 돌피의 동시 인터뷰(축약)를 잠시 보자. 다운비트가 이들은 안티 재즈라고 혹평한 뒤에 이들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주자는 차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였다. 콜트레인이 돌피를 향한 애정은 물론, 세상의 평가에 대한 이들의 섭섭함도 잘 드러나 있다.

 

다운비트: 당신들은 왜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연주하는 것인가? (길게 연주하는 것도 당시 비판의 요인이었음)

▶콜트레인: 솔로이스트 각각 그 곡이 허용하는 모든 길을 탐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솔로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보여줄 것이 많다. 내가 연주할 때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게 있고 에릭이 할 때는 에릭이 하고 싶은 게 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어진다. 

 

다운비트: 도대체 당신들은 뭘 하려는 것이냐?

(30초간 침묵)

▶돌피: 좋은 질문이다. 어떤 영감을 느낄 때를 즐길 뿐이다. 항상 자발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있다. 존이 연주할 때 나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해낼 때가 있고 맥코이가 할 때도 그렇고 엘빈 존스, 지미 개리슨이 솔로를 할 때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곤 한다. 그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콜트레인: 에릭과 나는 54년부터 지금까지 깊이 교류하며 음악을 관찰하고 음악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달 전에 에릭이 뉴욕에 왔다. 에릭이 우리 쿼텟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점을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에릭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쿼텟으로서만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돌피가 참여하니까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돌피가 참여한 뒤 음악이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보자고 했다.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나는 전부터 돌피와 얘기만 나누었던 바로 그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에릭이 들어와서 우리 음악은 더 넓어졌고 예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표현되고 있다. 에릭이 계속 우리 밴드에 편안하게 있으면서 계속 성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주의 아름답고 좋은 것들에 대한 그림을 청중에게 선사하고 싶다. 놀랍고 포괄적인 우주의 한 면을, 한 예를 드는 것이 우리의 음악이다. 음악과 삶, 음악과 우주에 대한 철학을 어떤 이들은 젊을 때 터득하지만 나는 때가 지나서 이해했다. 아마 57년경이었을 것이다. 음악적으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알았어야 할 때보다 더 늦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음악의 새로운 면을 또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릭 돌피와 함께 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운비트: ‘안티 재즈’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콜트레인: 당신들이 말하는 안티 재즈가 도대체 뭔지 설명을 해달라. 

 

다운비트: 당신들이 스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콜트레인: 우리가 스윙을 안한다고?

▶돌피: 우리는 스윙을 한다. 실은 하도 스윙을 많이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존도 알고 싶다. 안티 재즈라는 뜻이 뭔가? 우리는 스윙도 하고 재즈도 하는데.

▶콜트레인: 스윙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든 그룹은 각기 서로 다른 스윙이 있다. 우리 밴드도 마찬가지 있다. 스윙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답하기 참 힘들다.

▶돌피: 평론가들은 새로운 음악이 나타났고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있다면 연주한 뮤지션을 인터뷰를 해봐야 한다. 그러지도 않고 무조건 혹평을 하면 뮤지션은 놀랄 수밖에 없다. 기분이 몹시 상한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는다. 혹평을 받으면 피해가 크다. 뮤지션은 자신의 음악도 하지만 또한 밥벌이도 해야하는데 평론가가 뮤지션을 나쁘게 쓰면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멀리하게 된다. 

▶콜트레인: 평론가들은 이해하고 동참하고 그 뒤에 써라. 우리를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이해가 먼저이다. 나는 제대로 분석도 못 하면서 무조건 좋게 쓴 글도 봤다. 얄팍한 내용밖에 안되는 평론도 봤다. 내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이 말이다.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하라. 물론 평론가든 뮤지션이든 100% 음악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나도 노력하고 평론가도 노력해야 한다. “이해(understanding)”.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 베네핏을 누린다. 

 

'정리된 혼란' 돌피의 걸작, Out To Lunch. 

 


1964년은 재즈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한 해이다. 이노베이터들의 걸작 행진이 이어지던 해였다. 앤드류 힐의 Point of Departure (3월 21일, 에릭 돌피 참여), 앨버트 아일러의 Spiritual Unity (7월 10일),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12월 9일)이 녹음된 해였다. 무엇보다도 1964년 2월 25일, 에릭 돌피의 Out To Lunch 음반 녹음은 그 해의 가장 빛나는 소득일 것이다. 

1964년 에릭 돌피의 창의성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토니 윌리엄스, 바비 허쳐슨, 리처드 데이비스,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Out To Lunch. 이 미래지향적인 음반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정리된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셀로니어즈 몽크의 이미지를 제목으로 단 첫 곡 Hat and Beard는 시작부터 베이스 클라리넷, 비브라폰, 베이스, 드럼의 특색있는 스카타토 조합으로 듣는 이를 대단히 불안정한 세계로 이끌어간다. 18세에 불과한 드러머 토니 윌리암스의 연주는 경이롭다. 그는 이듬해 윌리암스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우리도 안티 뮤직을 연주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창의적이었는데 Out To Lunch에서 이미 그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Hat and Beard에서 하이햇의 쓰임은 무척 감동적이다. 비브라폰 주자 바비 허쳐슨도 이 음반에서 대단히 특색있는 연주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비브라폰 연주자들은 서스테인 페달을 적극 이용해서 음이 초인종 소리처럼 울리게 하는데 허쳐슨은 페달을 쓰지 않고 비브라폰을 세게 내리쳐서 거친 쇠소리 사운드를 내고 있다. 셀로니어즈 몽크처럼 오픈 스페이스를 많이 두고 멜로디를 빗겨가듯 연주하면서 돌피의 솔로를 푸시하기도 한다. 허쳐슨은 비프라폰의 음역 범위 전체를 적극 이용하면서 다른 솔로이스트의 보조를 넘어선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리처드 데이비스의 베이스도 훌륭하다. 그는 보우를 많이 쓰면서 카운터포인트로 연주하는데 모던 베이스 기술의 축소판을 보여주는듯 자기 영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음반에서는 프레디 허바드가 상대적으로 덜 모험적인 것 같다. 그의 프리 재즈 연주는 조금 경직되어 있으며 전통의 틀로 되돌아오려는 조짐이 있는데 돌피는 허바드의 불편한 점을 잘 매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내 소견상 돌피가 왜 콜트레인 그룹에서 왜 나왔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돌피는 분명 보다 진보적인 리듬 섹션을 원했던 것 같다. 구성면에서도 콜트레인과 스타일이 다른 부분이 있다. 콜트레인의 음악은 큰 틀에서 주제를 갖고 있으며 그의 솔로는 하나의 주제로 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반면, 돌피는 하나의 긴 주제를 갖는다기보다 분열된 멜로디가 반복되고 여러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져서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논리적인데 (그래서 나는 '정리된 혼란'이라고 했다) 타이밍에 대한 엄청난 센스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테크닉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은 지금 들어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이 없다. 아방가드 최첨단 음반은 아니지만, 돌피는 그 시대의 문법을 넘어선 미래지향적이고 이상적인 연주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음반이 후대의 프리 재즈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 동쪽으로, 동쪽으로.

 

Out To Lunch 녹음을 마치고 돌피는 찰스 밍거스 섹스텟 멤버로서 유럽 투어를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지난 호에 언급했듯 그가 소장해온 음악 자료와 짐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맡겼다. 돌피는 이번에 유럽에 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돌피는 발레리나인 약혼녀 조이스 모데카이와 파리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 밍거스에게 그의 뜻을 알렸다. 이번 유럽 투어를 끝낸 뒤에 당신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돌피는 밍거스에게 "미국은 내 음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한다. 얼마 뒤 돌피는 독일의 평론가 와킴 배랜트에게도 같은 이유를 토로했다. 돌피에게 유럽은 인종차별 없고 새로운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6천 킬로 동쪽으로…. 돌피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밍거스는 자신의 밴드를 떠나는 돌피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섭섭함을 평소 돌피와 함께 연주했던 블루스곡에 "So Long Eric"이라고 제목을 붙여 돌피와 함께 유럽 투어 내내 연주했다.

 

굿바이, 에릭 (So Long Eric)

 

1967년 6월 27일. 에릭 돌피는 '탕전트 재즈 클럽' 첫 무대에 서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 직후 몸이 아프다고 주변에 호소했다. 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무대에서 두 세트만 연주하고 내려와야 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이미 의식불명이었다. 치료 과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인슐린 주사 쇼크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의사가 지레짐작 흑인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흔한 마약 과용을 원인으로 보고 마약 성분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느라 살릴 기회를 놓쳤다는 설이 있다. 여러 증언과 상황을 보았을 때 후자가 유력하다. 그의 사망 원인은 혈당상승으로 인한 심장 발작이었다. 에릭 돌피는 심각한 당뇨였다. 에릭 돌피 자신도 자신의 병을 모른 것으로 추정된다. 돌피는 의식불명 이틀 뒤인 6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에릭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의사가 피검사만 했어도 당뇨인 것을 알았을 텐데, 마약 성분을 떨어뜨리는 엉뚱한 약을 주었다. 에릭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돌피의 측근이었던 트럼펫터 테드 컬슨의 말이다.

돌피는 이렇듯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하게 떠났다. 베이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발전시킨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많은 프로젝트를 남긴 채 그렇게 허망하게.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에 온 지 불과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밍거스와 헤어진 후 뉴욕에 처음 왔을 때처럼 돌피는 성실하게 그의 음악적 목표를 하나둘씩 이룩해나가고 있었다. 미사 멩겔버그, 한 베니크, 자크 스콜스 등 네덜란드 뮤지션들과 만나 녹음한 음반은 그의 유작(Last Date 음반)이 되고 말았다. 돌피는 세실 테일러와도 연주할 일정을 가지고 있었고 우디 쇼, 빌리 히긴스와도 밴드를 구상 중이었다. 'Love Suite'라 이름 붙여진 스트링 쿼텟 작품도 작곡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으면 죽은 자의 좋은 점만 부각하고 얘기하게 된다. 그런데 에릭은 진정 좋은 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는 오로지 좋은 것만 있는 사람이었다." (찰스 밍거스)

겨우 서른 여섯, 새의 꿈을 닮은 착한 남자 돌피는 안타깝게 그렇게 떠났다. 

 

소울 메이트, 콜트레인. 슬픔을 삭이다.

 

에릭 돌피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한 사람은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이었다. 돌피가 떠난 후 돌피의 어머니는 돌피의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존 콜트레인에게 선물했다. 콜트레인이 이례적으로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부는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돌피의 악기로 녹음된 것이다. 콜트레인의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는 각각 To Be (Expression, Impulse!, 1967)과 Reverend King (Cosmic Music, Impulse!, 1968)곡에서 들을 수 있다.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마틴 루터 킹을 표상하는 Reverend King에서는 돌피의 혼을 담은 듯 콜트레인의 열정적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제, 존 콜트레인의 추모 메세지로 에릭 돌피의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1964년 8월 27일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마련한 <다운비트>가 콜트레인의 이 메세지로 끝을 맺은 것처럼. 

"내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지 간에 불충분하다. 그를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뿐이다. 에릭을 알고부터 내 삶은 훨씬 풍요로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친구로서 뮤지션으로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실은 1964년 8월 27일자 <다운비트>. 존 콜트레인의 메세지는 짧지만 중요했던 돌피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에릭돌피 사후 돌피의 부모가 선물한 플루트를 불고 있는 존 콜트레인.


 1964년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 투어를 떠난 시절. 투어가 끝나고 두달 여 뒤에 돌피는 사망했다.


 

양수연의 에릭 돌피 베스트송 (녹음일순)

 

▶베스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


Serene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Green Dolphin Street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Miss Toni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When Light Are Low (1960년 8월 30일 녹음. <Berling Concerts>, Enja 수록)

Spiritual (1961년 11월 1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India (1961년 11월 2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God Bless the Child (1963년 3월 10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The Illinois Concert>, Blue Note 수록)

Epistrophy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Fontana 수록)

 

▶베스트 '플루트' 연주


17 West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Sunday Go Meetin’ (Latin Jazz Quintet + Eric Dolphy, <Caribe>, Prestige 수록)

Ode to Charlie Parker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New Jazz 수록)

Inner Flight No.2 (1960년 11월 7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Other Aspects>, Blue Note 수록)

Glad to Be Unhappy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Stolen Moments (1961년 2월 23일 녹음, Oliver Nelson의 <The Blues and the Abstract Truth>, Impulse! 수록>

Don’t Blame Me (1961년 9월 6일 녹음 (코펜하겐), <In Europe, Vol.2>, Prestige 수록)

My Favorite Things (1961년 11월 18~11월 29일 녹음.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수록)

You Don’t Know What Love Is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Limelight Records 수록)

Gazzelloni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베스트 '알토 색소폰' 연주

 

Dolphy-N (1960년 11월 (?)녹음. Ron Carter와 듀엣곡 <Other Aspect>, Blue Note 수록)

Miss Ann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 New Jazz 수록)

Round Midnight (1961년 5월 8일 녹음, George Russell의 <Ezz-thetics>, Riverside Records 수록)

Aisha (1961년 5월 25일 녹음, John Coltrane의 <Ole Coltrane>, Atlantic 수록)

Hot House (1961년 8월 30일 녹음, <Berlin Concert>, Enja Records 수록)

Tenderly (1960년 12월 21일 녹음. 에릭 돌리 솔로곡. <Far Cry>, New Jazz 수록)

Out To Lunch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Jim Crow (1962년 녹음 날짜 및 돌피를 제외한 연주자 불분명. 돌피 전 악기 사용. Other Aspect, 1987년, Blue Note)

 


▶기타: Out To Lunch 녹음 50주년을 맞아 후대 뮤지션들이 새롭게 각색한 트리뷰트 음반. Out To Lunch의 곡들과 에릭 돌피의 대표작들을 수록한 멋진 앨범들이다.



Aki Takase, Alexander Von Schlippenbach <So Long, Eric! Homage To Eric Dolphy>, Intakt Records, 2014


Russ Johnson, <Still Out To Lunch>, Enja, 2014 

; Russ Johnson (t), Roy Nathanson (saxophones), Orrin Evans (p), Brad Jones (b), George Schuller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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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

새를 쫓던 천재 소년, 그가 남긴 유산.


(에릭 돌피 1928.6.20 ~ 1964.6.29)


서울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던 1986년. 내가 살던 지역의 학생들은 성화 봉송을 위한 매스 게임 연습에 동원되었다. 반나절 이상을 카드 섹션이나 집단 무용 따위를 연습해야 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에게 국가가 강요한 유희(遊戱)는 버거웠다. 탈주를 꿈꾸었다. 나에게 다른 세상으로 이끈 사람은 에릭 돌피였다. 돌피를 듣는 것은 비밀스러운 나만의 놀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돌피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나서야 처음 느끼게 되었다. 여태껏 경험한 적 없는 실로 기묘한 소리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낯선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려 따라가다 강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던 아이들처럼 나는 돌피의 음에 유괴된 채 재즈의 강으로 빠져 버렸다. 1961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는 '아주 멀리 떠난다'는 제목의 뜻처럼 돌피 역시 탈주와 도약을 꿈꾸는 듯 느껴졌다. 돌피의 연주가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새를 쫓고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처럼 연주하고 비상하기를 갈망했다.

“나는 항상 새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연습하곤 했습니다. 새 소리를 녹음한 뒤 느리게 재생해봤더니 플루트와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플루트를 느리게 연주하는걸 녹음해서 빨리 돌려보았더니 역시 새 소리 같았구요. 새들은 음과 음사이에 또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F와 F#사이에 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이지요. 인도 음악이 쿼터 톤을 가지고 있듯이 새는 아주 특이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운비트, 1962년 4월 12일 인터뷰)


에릭 돌피는 나의 히로우면서 동시에 미스테리였다. 그가 불현듯 다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에릭 돌피 사망 50주년을 맞아 에릭 돌피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있었던 가운데 에릭 돌피의 유품을 미 의회 도서관이 확보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박스 다섯 분량에 달하는 돌피의 유품은 대부분 그의 음악 문서와 테이프였는데 돌피의 친구인 헤일스 스미스 부부를 거쳐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뉴튼이 보관해온 것이었다.

찰리 파커, 스트라빈스키, 바흐의 작품을 채보한 문서, 특히 바흐의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Bach's Cello Suite No.1과 플루트를 위한 Partita In A Minor For Flute의 채보는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임프로비제이션의 기반으로 쓰려고 작곡한 많은 노트도 있었고 새소리를 채보한 문서도 있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이 새소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역작 "새의 카탈로그" 작품이 완성된 해가 1958년이니 아마 돌피는 메시앙과 비슷한 시기에 새를 연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돌피의 유품은 그가 얼마나 음악의 구조에 대해 면밀히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에릭 돌피는 여러 음악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 음악, 특히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 인들의 노래도 차용하고 있었다. 유품에는 발표되지 않은 곡들도 다수 있었으며 기존과 다른 편곡의 Hat and Beard, Gazzelloni, The Prophet 작품도 있었다. 

에릭 돌피는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이 물건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남기고 1964년 미국을 떠났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돌피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연습만 하는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연습을 끝내고도 집에서 더 하려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했죠. 그와 만나려면 그가 연습을 끝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요. 저 녀석은 언젠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모든사람이 생각했지요." 에릭 돌피의 중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1928년생 캘리포니아주 LA에서 태어난 에릭 돌피는 중학교 2학년 때 남가주 대학 음대의 장학금을 얻을 만큼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리었다. 부모와 학교 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초중고를 거치면서 심도 있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돌피의 부모는 외동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집 마당에 연습실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서 음악을 전공할 때에는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를 음악적 멘토로 삼게 된다.

돌피는 알토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이 주악기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실력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존 콜트레인을 포함해 LA에 공연하러 오는 타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면서야 그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졌다. 그에게 뉴욕에서 연주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피는 무척이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같은 선생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았던 여섯 살 위의 친구 찰스 밍거스도 50년에 이미 뉴욕에 정착해 찰리 파커와 연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돌피 역시 비상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완벽히 준비됐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거처에서 연구하고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닦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돌피가 서부에서 미대륙을 횡단하여 동부로 온 것은 치코 해밀턴 퀸텟의 멤버로서 활동했던 1958년이었다. 치코 해밀턴 퀸텟의 돌피가 1958년 7월 4일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Jazz on Summer’s Day>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동부의 섬에서 돌피의 플루트 연주는 뜨거운 한여름 밤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 치코 해밀턴 밴드로서 돌피는 음반을 여럿 녹음했고 이듬해 1959년에는 뉴욕의 버드 랜드 클럽에서 연주하고 방송도 탔다. 드러머 치코 해밀턴은 훌륭한 연주자이고 밴드 리더였으나 돌피는 “제한된 음악적 자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돌피는 치코 해밀턴 밴드를 떠나 자기의 음악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정착한다. 그의 옛 친구 찰스 밍거스가 돌피를 환영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콜트레인과도 교류를 이어나간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그러나 돌피는 강한 몰입도로 그의 음악 세계를 펼쳐보인다. 


에릭 돌피는 프레스티지사와 계약하고 1960년 한 해만 리더로서 세 장의 음반을 위해 녹음했다. 1960년 4월 1일 첫 리더작 <Outward Bound>를 녹음한다. 프레디 허버드, 재키 바이어드, 조지 투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전형적인 비밥 퀸텟 구성이다. 돌피의 룸메이트였던 22세의 프레디 허버드는 첫 리더작 <Open Sesame>를 녹음하기 직전의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돌피가 베이스 클라리넷으로 연주한 On Green Dolphin Street은 압권이다. 나의 돌피 패이버릿 중 하나인 Glad To Be Unhappy곡도 이 음반에 담겨있다. 라이브로 이 곡을 들었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체념조의 노래를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8월 15일에는 쿼텟 구성으로 2번째 음반 <Out There>를 녹음했다. 이 음반의 독특한 사운드를 위해 첼로가 등장한다. 첼로는 치코 해밀턴 밴드에서 만나 돌피와 통했던 론 카터가 맡았다. 두 사람은 그해 11월 듀엣으로 Dolphy'N과 Triple Mix라는 곡을 녹음했는데 에릭 돌피 사후에 각각 <Other Aspect>(1987), <Naima >(1987) 음반으로 나뉘어 발매된 바 있다. 실로 귀한 음원이 아닐 수 없다. <Out There>에는 찰스 밍거스에 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를 위한 곡 The Baron (밍거스는 LA에서 Baron Mingus라는 예명을 썼다.)과 밍거스의 곡 Eclipse도 연주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녹음된 돌피의 세 번째 음반, <Far Cry>에서는 찰리 파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재키 바이어드의 곡 두 개를 담았다. 론 카터와 재키 바이어드, 로이 헤인즈가 다시 참여했고 클리포드 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22세의 트럼펫 천재 부커 리틀과의 짧지만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부커 리틀이 이듬해 10월 요독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사망 석 달 전 FIve Spot 클럽에서의 라이브 <At The Five Spot>은 Far Cry와 더불어 에릭 돌피와 부커 리틀이 남긴 명작이다.

“재즈는 내 삶의 모든 것이다. 걷고 보고 듣고 내 감각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나는 음악으로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한 감정을 내 연주에 쏟아 부으려 한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앞으로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시도해야 할 것도 많다.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색다른 것들을 항상 듣게 된다. 그러면 늘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내가 음악가로서 더 성장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운드를 영원히 발견해 나갈 것이다.” (에릭 돌피)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과 논란에 휩싸이다.


1961년 5월에 녹음된 존 콜트레인의 음반 <Ole>의 오리지널 LP에는 George Lane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 프레스티지사와의 계약을 고려해 에릭 돌피가 가명으로 참여한 것이다. 

앞서 약간 언급했지만 존 콜트레인은 에릭 돌피의 LA 시절에 처음 알게 됐다. 1954년 존 콜트레인이 색소포니스트 조니 호지스와 공연하기 위해 LA에 왔을 때 콜트레인은 돌피 연주를 듣고 반하는데, 콜트레인 전기를 보면 마약을 사기 위해 돌피에게 돈을 빌린 것이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는 설을 소개한다. 돌피는 마약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콜트레인은 동부에 오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콜트레인은 조니 호지스 공연을 위해 1954년에 여러 번 LA를 왔고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LA에서 공연하러 왔을 때도 돌피와 시간을 가졌다. 돌피는 콜트레인과 잼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 얘기를 하느라 밤을 새울 정도로 깊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돌피는 콜트레인 전 인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콜트레인은 돌피에게 재즈의 메카 뉴욕에서 연주하기를 원했고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두 사람은 멀리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전화로 음악 얘기를 나누며 끈끈한 우정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에릭 돌피가 콜트레인 밴드에 참여한 것은 돌피가 세 장의 리더작 녹음을 끝낸 1961년이었다. 에릭 돌피는 오네트 콜맨과 비견되며 재즈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논란을 만들던 중이었다.  콜트레인도 Blue Train(1957), Giant Steps(1959), My Favorite Things(1960) 등을 비롯해 많은 작품으로 재즈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고 새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었다. 돌피와 콜트레인의 만남은 사건이었다. 특히 1961년 여름의 공연부터  11월 1일부터 5일간 연린 뉴욕 빌리지 뱅가드의 연속 공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공연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도 11월 23일 <다운비트> 잡지는 이렇게 혹평한다.

“최근에 커지고 있는 안티 재즈(Anti-jazz) 트렌드 성향, 즉, 아방가드 뮤직이라는 이름 아래 성장하고 있는 이 안티 재즈의 두 리더, 존 콜트레인과 에릭 돌피의 연주를 몸소 체험했다. 소름 끼치고 몸서리쳐진다. 두 개의 혼이 만드는 니힐리즘적인 운동(다운비트는 ‘연주’라는 말도 쓰기 싫어서 ‘exercise’라고 표현했다)이 그 밴드의 좋은 리듬 섹션을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콜트레인과 돌피는 의도적으로 스윙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안티 재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나키적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다운비트>의 혹평은 독자들의 상반된 뜨거운 반응으로 나타났다. 뉴욕 재즈신이 마치 혼란에 휩싸인듯했다. 

다운비트의 혹평으로 에릭 돌피는 크게 상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릭 돌피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조롱을 받았다. 콜트레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들은 우리가 음악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양 비판했다. 돌피가 마음이 상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상했다.” 

다행히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에게 ‘해명’의 기회를 줬다. 62년도 4월 12일에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의 공동 인터뷰를 진행한다. 콜트레인과 돌피의 서로를 향한 애정과 재즈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인터뷰의 내용은 지면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관련해서 독자께 숙제를 드린다면 당시 논란의 정점이었던 돌피 & 콜트레인의 빌리지뱅가드 공연이 다행스럽게도 1997년 콜트레인 탄생 71주년을 기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점, 그래서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을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2001년 파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61년~63년까지 존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를 담은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7장 박스 셋에서는 콜트레인 유럽 투어에 참여한 돌피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이 박스 셋에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이 포함되었고 특히 My Favorite Things에서 돌피의 플루트 솔로는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돌피를 포함해 콜트레인, 그리고 프리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터트리고 싶어서 참으로 근질근질하다. 다음 호에는 재즈 사에 길이 남을 역작 <Out To Lunch>와 돌피의 마지막 음악 여정을 이어가겠다. 

(다음 호에 계속)


에릭 돌피와 존 콜트레인의 공연. 다운비트 매거진이 '안티 재즈'라 혹평했던 1961년 경이다.


<프레스티지 시절 발매된 돌피의 앨범들>

Outward Bound (1960)

Out There (1960)

Far Cry (1961)

At the Five Spot, Vol. 1 (1961)







<콜트레인과 1961년 11월에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을 담은 박스셋,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돌피의 연주를 담은 2001년 출시된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 박스 셋,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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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즈가 아니다”

영적인 세계로 이끄는 존 콜트레인의 음악.

1967년 템플 대학 공연 실황 속으로.

존 콜트레인 (1926.9.23 – 1967.7.17) 


1966년 10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시. 황량한 도시가 가을 풍경을 아련하게 만들고 있는 흑인 주택가 교회에 젊은이 몇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가지고 온 악기를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재밍(Jamming)이었다. 동네에서 연주 좀 한다는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이곳에서 만났다. 퍼커션이 텅 빈 교회에 공명의 에너지를 주고 천장을 뚫을 듯한 색소폰 소리가 서로 뒤섞이는 풍경, 이를 홀로 지켜보는 낯선 자가 있었다. 음들의 행방을 쫓고 있는 동공은 흑빛 얼굴에 묻혔지만 그를 받친 흰자위는 시리도록 맑았다. 낯선 자가 다가섰다. “같이 연주해도 될까요?” 젊은이들은 그가 색소폰을 꺼내들고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그가 음반 자켓에서 봤던 전설적인 그 사람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존 콜트레인. 그는 지금 고향 필라델피아에 있다.


그들의 우상, 존 콜트레인.


“처음에 그는 우리 분위기에 맞추려 했어요. 그러다 우리가 평생 들어보지 못한 연주를 하기 시작했죠. 색소폰을 마치 드럼인 양 연주하는 거였어요. 우리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죠.” 그날 교회에 있었던 퍼커션 주자 로버타 켄야타는 말한다. 

존 콜트레인은 어머니가 사는 고향 필라델피아를 불쑥 찾곤 했다. 마침 고향집과 가까운 템플 대학에서 공연이 잡혀 있었다. 이 대학 학생 단체가 콜트레인을 초청했다. 콜트레인은 고향의 자랑이었으며 뮤지션들의 우상이었다. 콜트레인은 교회에서 만난 고향 젊은이 몇을 자기 무대에 세울 생각이었다. 그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을 즐겼다. 한편, 콜트레인의 템플 대학 공연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또 다른 젊은이가 있었다. 콜트레인의 연주를 직접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한 남자, 고등학생 마이클 브레커였다. 

“어느 날 한 클럽에 콜트레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어요. 콜트레인의 사촌인 칼과 얼이 연주하기 때문에 아마 콜트레인도 찬조 출연하지 않을까 예상한 거죠. 미성년자라서 클럽에 몰래 들어가야만 했어요. 누가 색소폰 스트랩을 매고 나타났는데, 혹시 저 사람이 콜트레인? 그러나 키가 작았고 사운드도 달랐죠. 결국 콜트레인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무척 실망했죠.” 

이번 호 '재즈 탐미'는 지금부터 49년 전 1966년 11월 11일 존 콜트레인의 공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날 공연을 따라가 볼 수 있는 것은 최근 발매된 음반 덕분이다. 콜트레인의 템플 대학 공연 실황이 담긴 레코딩이 발견되어 지난해 9월 Impulse!레코드를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후기 존 콜트레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음반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을 따라 49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템플 대학 '미튼 홀' 청중석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콜트레인을 애타게 기다렸던 소년 마이클 브레커도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다. 교회의 잼세션 젊은이들과 콜트레인의 친척과 친구들도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존 콜트레인, "뉴 띵"을 연주하다. 

예고없이 등장한 불청객 뮤지션들.


1966년은 콜트레인의 전설적인 클래식 쿼텟, 즉 맥코이 타이너, 앨빈 존스, 지미 개리슨 조합은 끝난 뒤였다. 콜트레인은 새로운 라인업과 음악적 아이디어로 변화하고 있었다. 베이스 주자로는 지미 개리슨을 계속 기용했으나 피아노엔 맥코이 타이너 대신 콜트레인의 두번째 아내 엘리스 콜트레인을 합류시켰다. 엘빈 존스의 바통은 래시드 알리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몇몇 젊은 혼주자들도 함께 무대에 섰다. 1964년 녹음된 <Love Supreme>을 기점으로 콜트레인은 이른바 ‘뉴 재즈 아방가드’ 스타일을 개척한다. 하지만 콜트레인의 프리 재즈는 분명히 체계와 구조가 있었다. 평론가 루이스 포터는 ‘셀(Cell)’이라고 표현했다. 음 몇 개의 그룹을 모티브 삼아 곡 전체를 심포니처럼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콜트레인은 가장 논란이 되는 음악, 괴상하고 거북하며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음악에서조차 과거의 여러 '구조'들을 리사이클하고 있었다. 템플 대학 미튼 홀 무대에서는 그러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음악은 난해하다 못해 종교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존 콜트레인은 자기 음악을 "뉴 띵(New Thing)"이라 불렀다. 이날은 지미 개리슨 대신 소니 존슨이 베이스를 쳤고 엘리스 콜트레인이 피아노를, 래쉬드 알리가 드럼을, 파로아 샌더슨이 또 다른 테너 색소폰을 맡았고 로버타 켄야타 등 교회 잼세션의 연주자 몇이 참여했다.

콜트레인은 공연할 때 연주할 곡목들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이날 연주도 그러했지만, 그의 역사를 압축한 듯 시기적 흐름을 느낄 수 있게 곡이 배치된 느낌이다. 

첫곡이 Naima라는 걸 알아볼 수 있겠는가? 프레이징은 더 깊어졌고 대단히 에너제틱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콜트레인은 달리기 시작한다. 음의 구조는 계속 확장되고 저돌적으로 치장하는 탓에 주멜로디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엘리스 콜트레인은 왼손으로 맥코이 타이너처럼 명료하고 화려한 콤핑을 하면서 큰 제스처와 긴 호흡으로 하프를 두드리듯 건반을 마사지한다. 

Naima를 향한 박수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테너 색소폰이 우리가 들은 바 있는 뚜렷한 멜로디를 연주한다. Crescent. 마이너 키에서 콜트레인의 ‘뉴 띵’이 등장한다. 불협화음, 비명인 듯 끓고 으르렁대는 소리로 급하게 달려간다. 드럼, 통가, 바타 등 퍼커션이 솟아나듯 등장하고 격정의 뉴 띵은 더욱더 명료해진다. 그런데 엘리스의 피아노 솔로가 끝나고 갑자기 생소한 알토 색소폰 소리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무려 5분간 솔로를 하는데, 가만 보니 무대에 초청받지 않은 자이다. 콜트레인이 연주한다고 해서 찾아온 고향 친구 아놀드 조이너가 갑자기 무대에 등장해 솔로를 한 것이다. 그가 솔로를 끝내자 누군가 다가가서 그에게 주의를 준다. "이봐요, 당신까지 연주할 시간은 없어요. 지금 뭐하는거요?" 그러나 콜트레인은 조이너의 솔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주를 이어간다. 존 콜트레인이 얼마나 오픈 마인드한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스피리츄얼한 분위기의 멜로디를 보여주며 그 혼(horn)이 가진 풀 레인지를 쏟아낸다. 여러가지 모티브들이 꼬리를 문다. 셀(cell)이다. 서정적 아이디어들과 영혼을 뒤흔드는 격정적인 울림으로 테너 색소폰의 절정을 보여준다. 26분 12초의 장대한 임프로비제이션이 끝이 난다.


가슴을 치며 노래하는 콜트레인은 처음.


이어서 등장하는 곡은 Leo. 스카타토 테마가 매력인 이 곡을 알아보는 것은 콜트레인 매니아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곡은 이듬해 67년 2월, 존 콜트레인의 마지막 스튜디오 듀엣 앨범 Interstellar Space에 처음 녹음되었다. 콜트레인은 다양한 프레이즈 비명을 지르듯 연주한다. 그러다 5분 35초가 지났을 때 갑자기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 없이 목소리로 색소폰을 연주하듯이 노래를 한다. 그리고 다시 테너 색소폰으로 돌아가서 방금 노래한 프레이즈를 재차 에코한다. 파로아 샌더스가 테너 색소폰으로 진입하자 이번에 콜트레인은 플루트를 불면서 주 멜로디로 마감한다. 알리의 드럼 솔로는 대단하다. 무려 6분간을 몰입한다. 다양한 리드믹 아이디어가 멜로디와 같이 펼쳐진다. 콜트레인은 이런 종류의 드럼 사운드를 멀티디렉셔널 리듬(Muiti-directional Rhythms)이라 지칭한 바 있다. 드럼 솔로에 고취된 콜트레인이 다시 노래하기 시작한다. 곡 초반에 보여준 백그라운드적 사운드로서가 아니라 모티브를 가지고 스캣을 한다. 그는 있는 힘을 주어 풀 볼륨으로 노래한다. 테너 색소폰의 셀이 보이스로 옮겨온 듯하다. 그리고 트레몰로 효과를 내기 위해 가슴을 치기 시작한다. 이런 콜트레인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콜트레인은 얼마안되어 다시 테너 색소폰으로 되돌아간다. 솔로를 이어가는데 있어 Leo의 멜로디에 짧은 프레이즈를 더해 멜로디를 연장하고 부각한다.

1,800 객석의 미튼 홀은 반도 차지 않았지만 청중들은 열심히 콜트레인의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경직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트레인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 믿을 수 없어 한다. 그의 노래가 처음 등장하는 Leo가 끝나고 Offering 곡이 시작되자 청중은 잠시 안도한다. 긴장감이 덜해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사색적인 곡이니 말이다.

그리고 청중들이 기다렸던 곡, 콜트레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해준 명곡, My Favorite Things가 연주된다. 이 곡은 소니 존슨의 베이스 솔로로 시작된다. 콜트레인은 수개월 전부터 My Favorite Things을 연주할 때 베이스 솔로로 시작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한음 한음 천천히 튕기다가 고유의 프레이즈를 스냅하면서 답하는 식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예전의 지미 개리슨의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5분 3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콜트레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소프라노 색소폰이다.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My Favorite Things는 처음이 아닌가. 여러 마이너 키 프레이즈로 연주하다가 인식할 수 있는 주 멜로디를 선사한다. 몹시도 화려하고 강렬한 연주. 테너, 소프라노 할 것 없이 색소폰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단계에 이른 자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엘리스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자 또다시 생소한 색소폰 사운드가 들린다. 스티브 노블락이라는 젊은 알토 색소포니스트이다. 그는 얼떨결에 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공연을 보기 위해 일찍 도착했는데 주최한 학생들이 그가 혼 케이스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이날 연주자인 줄 착각해 드레싱룸으로 안내했다. 매니저가 쫓아내려고 하자 콜트레인이 "그냥 놔두라"고 했다. My Favorite Things 연주 도중 콜트레인은 엘리스가 솔로할 때를 틈타 그에게 다가가 "너도 솔로 한번 할래?"물어본다. 아방가드 재즈에 현혹되었던 이 열 여덟살 청년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에너지로 연주했다. 솔로하면서 껑충껑충 점프까지 해댔다. 샌더스가 피콜로 솔로를 할 때 콜트레인은 다시 악기를 내려놓고 노래를 시작한다. 30초간 다시 색소폰으로 표현했던바 그대로를 보이스로 노래한다. 다시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가 노래를 시작할 때는 청중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로버트 켄야타의 표현을 빌면 “모두 체면에 걸린듯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쥐새끼가 솜털에다 오줌싸는 소리도 들렸을 만큼 조용했다.”

콜트레인은 이날 템플 대학 공연에서 처음으로 가슴을 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추후 여러 해설서에는 이날 콜트레인의 노래가 얼마나 경이적이었는가를 언급한다. 여러 가설이 나왔다. 가장 로맨틱한 가설은 색소폰의 달인으로서 색소폰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얘기인 것 같다. 색소폰으로 할 것이 없으니 목소리를 썼다는 얘기다. 1977년 래쉬드 알리의  <롤링 스톤: 더 식스티> 저서에 따르면 콜트레인은 말년에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다. 콜트레인은 불교에서 염불 할 때 가슴을 치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고 애초 색소폰에서 이를 구현하고자 했으나 잘 안되자 가슴을 치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콜트레인이 아방가드를 하더니 드디어 조금 돈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 악기를 가지고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을 하는데 노래까지 하니까 사람들은 대단히 괴상쩍게 생각을 했다.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콜트레인의 아들인 색소포니스트 라비 콜트레인의 추정이 가장 납득되게 들린다. 

“색소폰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색소폰의 연장선이다.” 

엘리스 콜트레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남편이 보이스를 쓰는 것은 신이시어, 신이 우리 모두에게 악기(보이스)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이 창조한 보이스를 통해서 신을 찬양할 것입니다."라는 뜻이라고.

물론 콜트레인이 보이스를 쓴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다. 64년도에 Love Supreme을 녹음할 때도 이 타이틀을 노래했고 65년 “테너 색소폰의 거장들”이라는 뉴욕 공연에서도 불교식 챈트를 한 적이 있다. 또한, Om레코딩에서도 보이스가 나온다. 그러나 템플 대학 라이브에서의 보이스는 전과 달리 계획된 어떤 단어들이 나열되는 보이스가 아닌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대단히 스피리츄얼한 효과를 내는 보이스였다. 이 템플 대학 라이브는 가까운 가슴까지 치며 힘껏 노래하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레코딩일 것이다. 

이날 공연이 녹음되었던 것은 템플 대학 방송의 학생들 덕분이다. 마이크를 무대 아래 하나만 두었기 때문에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은 크게 들리지만 다른 악기들은 솔로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볼륨이 매우 낮다. 커튼이 올라가자마자 연주가 시작되어서 녹음 버튼을 허둥지둥 누르는 바람에 첫 음부터 온전히 녹음되지는 못했다. 테잎을 갈아끼는 도중에 연주가 끊어지기도 한다. 

공연 광고는 시간이 잘못 게재되어 있어서 혼선이 있었다.  1,800석 관람석에 700석밖에 못 채워서 대학 신문에는 "콜트레인 쇼의 관람객수가 적어서 학생 단체가 금전적 손실을 보았다"는 헤드라인이 달렸다. 그 학생 단체는 천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이만 달러 이상일 것이다. 또 그 기사에 따르면 대다수 청중들이 그날 연주에 불만이 있었으며 학생 단체의 금전적 손실은 다음에 열릴 가수 디온 워윅의 공연에서 만회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되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프리 스타일의 괴상하지만 아주 강렬한 공연이었어요.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콜트레인의 음악을 통해 진정한 삶의 목표를 얻었습니다." 마이클 브레커의 회상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후에 평론가 마이클 씨겔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날 콜트레인 공연을 보고서야 비로소 재즈 뮤지션이 되기로 확고히 결심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마이클 브레커에게는 삶의 행보를 바꾸게 된 공연이었다. 그는 콜트레인에게 너무나 감사해서 테너 색소폰을 택했노라 말하기도 했다.

이날 공연을 보았던 여러 사람의 증언들이 생생히 남아있다. 당시 템플대학 영문학 학부생이었던 저널리스트 프란시스 데이비스는 “무슨 정치인 전당대회와 같은 느낌이었다. 콜트레인의 지지자들이 서로 다른 걸 기대하면서 모여있었다.”

이날 얼떨결에 연주자 대기실에 들어갔다가 솔로를 하게된 스티브 노블락에게도 큰 추억을 남겼다. "공연이 끝나고 작별인사를 하러 콜트레인에게 다가갔는데 나를 획 잡아서 힘있게 안아주셨어요. 콜트레인과 허그하면서 어깨너머 엘리스 콜트레인을 보았는데 그녀도 환하게 나를 보고 웃고 있었죠. 콜트레인이 롱 아일랜드에 있는 자기 집에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해주셨어요. 마치 교회에 초대된 듯 성스러운 느낌이었어요." 열여덟 스티브 노블락에게는 일생일대의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는 음악을 포기하고 나중에 정신건강으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 다른 불청객 알토 색소폰 주자 아놀드 조이너는 공연 후 집으로 걸어가며 몹시 불안해졌다. 갑자기 무대에 올라서서 솔로를 했으니 콜트레인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 느꼈다. "길을 건너려고 서 있는데 콜트레인의 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그런데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거였어요. 그래서 난 무척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놀드 조이너가 본 콜트레인의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니, 템플 대학 공연의 청중들 대다수가 아마 콜트레인의 마지막을 보았을 것이다. 콜트레인은 8개월여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세. 콜트레인의 죽음은 재즈신의 충격이었다. 아마 템플 대학 공연 때에도 그는 이미 아팠을 것이었다. 고향의 한 교회의 잼세션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신체는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의 사람 같지 않았다.  1967년 11월 11일 그는 그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보여주고 있었고 차세대의 우상으로서 영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새 이정표로 우뚝 서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음반 레코딩을 맡았던 학생 둘이 속닥거림이 덩달아 녹음되었는데 이날 공연의 핵심을 말해주는 듯 하다.

"방금 이 음악을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니? 난 공연 같은 걸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콜트레인이 공연 전에 이렇게 말하던데? 이것은 재즈 콘서트가 아니라 영적 부활이라고"

(이 글에 등장하는 팩트들은 라이너노트와 존 콜트레인 전기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Offering: Live At Temple University, (Impulse!, 2014)


John Coltrane (tenor and soprano saxophone, flute, vocals), 

Pharoah Sanders (tenor saxophone, piccolo), Alice Coltrane (piano), Sonny Johnson(bass) Rashied Ali (drums), Arnold Joyner (alto sax), Steve Knoblauch (alto sax), Umar Ali & Robert Kenyatta & Charles Brown (conga), Algie DeWitt (bata drum)

Impulse!, 2014


이 앨범의 요점은 이러하다. 

1. 가슴을 치며 노래하는 콜트레인의 영적인 보이스를 최초로 들을 수 있다.

2. 콜트레인이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my favorite things을 솔로를 최초로 들을 수 있다.

3. 최초로 Offering을 라이브로 레코딩했다.

4. 불청객이 두명이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는데 새로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콜트레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5. 영적이고 열정적이며 보다 깊이 있는 콜트레인의 "뉴 띵"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솔로는 진화를 거듭해왔으며 중요하고 새로운 프레이즈들이 많이 등장한다. 

6. 콜트레인의 진정한 팬이어야 이 음반을 진정 즐길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jazzlady

조지 거슈인의 꿈에서 오늘을 읽다.

융합이라는 예술의 절정을 위하여.


*이윽고 스물 두 번째 곡이 연주되기 시작되었을 때 많은 청중이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얼어붙은 듯 정지하고 말았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매우 독특한 클라리넷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기개 넘치는 소리, 라흐마니노프와 래그타임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새로운 매혹의 늪 속으로 청중을 이끌고 가는 듯했다.* 빼어나게 화려한 폭스트롯(foxtrot)을 타고 멜로디는 오감의 세세한 부분으로 내려앉았다. 곡이 끝나자 청중은 더 연주해달라며 아우성을 쳤고 여러 차례 고개 숙여 인사하던 지휘자는 끊이지 않는 기립 박수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을 일으켜 세웠다. 청중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준 바로 이 곡,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였다.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던 1924년 2월 12일, 뉴욕의 이올리언 홀 무대에 선 스물 다섯살 청년 조지는 과연 느끼고 있었을까?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던 이날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 거슈인의 작품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많이 들어왔을 것이고 거슈인이 음악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여다볼 기회는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재즈탐미는 거슈인의 삶에 대한 것이다. 

                     조지 거슈인 (1898.9.26 –  1937.7.11)


나는 조지 거슈인의 평전을 읽으면서 소름 돋을 정도로 전율을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가 시대의 한 획을 그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그러니까 1차대전이 끝나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미국을 대표할 새로운 음악이 필요하며 그것을 이루어낼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휘자 폴 화이트는 시대에 걸맞은 참다운 미국 음악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현대 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색 공연을 기획했다. 그리고 이 공연의 말미에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선보였다. 관중석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해 야샤 하이페츠,  프리츠 크라이슬러도 앉아 있었다. 이 위대한 음악인들은 무엇이 미국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이 말하길, 미국만의 홈그라운드 뮤직은 클래식 현대 음악처럼 이해하기 어려워서도 안 되었고 흑인이나 사창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재즈처럼 품위가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날의 진정한 해답은 '랩소디 인 블루'였다. 16분에 걸쳐 연주되었던 이 오케스트라 곡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거슈인은 3주 만에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했고 편곡할 시간도 촉박해서 데뷔하는 날엔 피아노 솔로 부분이 비워져 있었다. 악보에는 단순히 'Wait for nod', 피아노의 고개 신호 후 합주를 시작하라는 사인이 있었을 뿐이었다. 재즈교향곡이라는 틀 안에 여러 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어야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라고 거슈인은 생각했다. 1926년에 거슈인이 '씨어터'잡지에 발표한 글을 보자. 그는 재즈를 의식한 듯 "미국의 영혼은 흑인이 아니라 흑색과 백색이 다 섞여 있는 것이다. 모든 인종과 영혼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날 폴 화이트만의 야심찬 기획 공연에는 Livery Stable Blues외에는 흑인 작곡가의 작품은 연주되지 않았으며 단 한 명의 흑인 연주자도 없었다.  백인이 주도하는 미국 음악, 미국 음악은 백인만이 정의할 수 있다고 암시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조지 거슈인 그 자신도 주류의 백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미 여러 음악 사학자가 공감했듯이 나 역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형제와 함께 뉴욕의 서른 군데 아파트를 전전하며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던 일개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이 어찌 (감히) 미국의 보이스를 담을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많은 주류의 백인 음악가들이 추구해오던 작업이 무색할 정도로 '랩소디 인 블루'는 대부분  매체로부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미국 음악"이라는 찬사를 얻었고 거슈인은 일약 음악계의 파이오니아로 발돋움했다. 


빈민가 천재적인 소년의 시련, '블루 먼데이'와 '뉴욕 협주곡'

거슈인은 1898년 9월 26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의 형 아이라와 두 살 어린 남동생 아써, 그리고 8살 터울의 여동생 프란시스가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몇 해 전 러시아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이민을 온 아버지는 미국 사회의 여러 가능성에 도취되어 거의 매년 새로운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여 가족은 빈민가를 전전해야 했다. 유대인들의 계율에 엄격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문화적 다양성은 늘 열려있었다. 유태인 성(姓)인 '거쇼비츠'도 쉽게 발음될 수 있게 거슈인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거슈인이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를 회상하는 부분은 다소 신화적인 면모가 있다. 피아노 레슨을 단 한번도 받지 못했던 거슈인이 12살이 되던 해 자기 집에 들어온 낡은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 뒤 4년간 드뷔시, 리스트, 쇼팽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그의 피아노 선생은 거슈인은 천재이며 절대 재즈를 시키지 말라는 편지를 그의 부모에게 보냈다. 1916년 재즈 피아노의 파이오니아 중 한 명인 제임스 P. 존슨이 "피아노를 손에 댄지 4년밖에 안됐는데 묘기를 부리는 대단한 아이가 있다"며 거슈인을 언급하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거슈인의 천재성은 당대에 많이 회자된 것임은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거슈인은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음악 교육은 열심히 음악을 듣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다. 

"피아노는 빈민가의 나쁜 소년을 좋은 소년으로 변화시켰다. 나는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음이 손가락 사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거슈인은 말한다. 거슈인은 이미 10대부터 야망에 찬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고 Swanee라는 곡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시련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1922년, 스물셋에 작곡한 재즈 오페라 '블루 먼데이(Blue Monday)'는 대실패였다. '뉴욕 월드'잡지는 "제일 한심하고 바보같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성 없는 흑인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며 비판했고 결국 단 한번 연주하고는 바로 막을 내려야 했다.  청년 거슈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강한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믿음이란 서두에 언급한바, 바로 자신이 역사의 전환기에서 큰일을 해낼 바로 그 사람이라는 믿음이었다. 미국이라는 커다란 땅에 여러 갈래의 음악 스타일이 있고 그 위에 존립할 수 있는 통합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염원, 이 긴장의 시대에서 대표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그 욕망을 스스로 달래었다.  

2년 뒤 '블루 먼데이'의 실패를 딛고 발표한 '랩소디 인 블루'는 크게 호평받았지만 심드렁하거나 부정적인 평가 중에서도 의미심장한 면이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당시 뉴욕 타임즈의 올린 다운즈 평론가는 "구조적으로 분명하지 않고 기술적으로도 개발되어 있지 않은 곡이다. 미국의 전통이 있으나 문학적인 측면이 좀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허점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썼다. 

거슈인은 유대인 특유의 강인한 콧날이 무색하게 부드러운 눈매와 입술, 턱을 지녔다. 늘 단정히 옷을 입었으며 말이 없었으며 순진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여성편력도 없었다. 그저 유부녀들 사이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녀들 사이에서는 불필요한 연애를 할 필요가 없이 안전함과 안락함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20대 중반의 거슈인은 명성과 재산을 얻으면서 호화 파티를 많이 열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저 피아노 앞에 오롯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윽하게 쳐다보았지만 거슈인은 늘 자신이 외롭고 고독했음을 토로했다. 그는 이미 그 시대의 영웅으로 묘사될 만큼 파이오니아로서 대우받고 있었지만 그만큼 세상의 시선과 비평에도 큰 압박을 받았다.   

거슈인은 '랩소디 인 블루'를 이을 대곡을 쓰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후계곡에 '뉴욕 협주곡(New York Concerto)'이라는 가제목을 달았다.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F 장조 (Concerto in F)'로 개명되어 1925년 12월 카네기홀에서 초연된다.  '랩소디 인 블루'가 발표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던 시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브람스가 나타났어도 이 정도의 열기는 없었을 것"이라며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도했지만, 혹평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협주곡으로서의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의 내용도 없다.” 

피아노 협주곡 F 장조를 작곡하는 동안 거슈인은 마감의 압박에 시달렸으며 음악 공부를 심도 있게 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가 아놀드 쇤베르크나 헨리 코웰, 윌링퍼드 리거 등과 같은 작곡가에게 하모니 훈련을 받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악장 알레그로 - 2악장 아다지오 - 3악장 알레그로아지타토로 구성된 피아노 협주곡 F 장조는 참신한 멋이 있었고 피아노 테크닉도 빼어났다. 피겨 스케이트 여왕 김연아는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이 곡을  편곡하여 배경음악으로 썼다.  많은 국내 언론이 거슈인의 '숨은 명곡'을 김연아가 꺼내 들었다며 열광했다. 피아노 협주곡 F 장조 초연 당시 혹평을 가했던 뉴욕 타임즈도 찬사를 보냈다. 복합 예술로 연출된 거슈인이 전 세계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거슈인은 피아노 협주곡에 실망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설 자리가 위축되고 있음을 느꼈다. 1924년 가을, 그러니까 피아노 협주곡 F 장조가 발표되기 얼마 전 뉴욕의 음악계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행보가 있었다. 다름아닌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가 파리 유학에서 귀국한 것과 루이 암스트롱이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의 클래식 음악과 재즈가 그 나름의 선봉에 선 파이오니어들에 의해 각자 고유의 길을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행보였다. 거슈인이 꿈꾸는 멜팅 팟(melting pot) 으로서의 음악, 클래식과 재즈가 융합되고 인종이 융합되는 음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거슈인이 바라던 융합(synthesis)이라는 이상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발상이 오히려 그를 어중간한 위치에 놓는 것은 아닌가? 거슈인이 설 자리는 클래식도, 재즈도 아닌 듯하였다. 그는 팝스여야(만)했다. 

거슈인은 교향곡을 구상하는 와중에도 많은 파퓰러 보컬 곡들을 작곡했다. 그의 형 아이라 거슈인이 작사를 도맡았다. 1924년 말에 나온 브로드웨이 뮤지컬 Lady Be Good은 형 아이라와의 첫 공동 작품이다. 이 작품의 Fascinating Rhythm은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가 노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슈인의 곡들은 다양한 보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보컬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창법이 다듬어지고 보컬 테크닉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재즈 뮤지션들이 앞다투어 그의 곡을 녹음했다. I Got Rhythm은 작곡 후 12년 동안 무려 79개의 레코딩 버전이 있었다. 그러나 거슈인은 피아노협주곡의 실패 이후에도 오케스트라 작품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고 브로드웨이에 몸담으며 쉴 새 없이 뮤지컬곡을 쓰는 동안에도 ‘An American in Paris’(1928), ‘Second Rhapsody’(1931) 등 여러 개의 오케스트라 작품을 내놓았다.  


희비가 엇갈렸던 '포기와 베스'

거슈인이 평생을 통해 인정받고 싶었던 장르는 오페라였다. 첫 오페라 작품 ‘블루 먼데이’의 실패 이후 오페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그래서 브로드웨이와 필름을 통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하모니와 대위법 공부를 했고 마침내 그가 오페라화하고 싶은 스토리를 찾아냈다. 거슈인은 '포기(Porgy)'라는 대중 소설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 소설은 남부의 시골 마을 절음발이 흑인 거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1926년 거슈인은 '포기'의 작가 뒤보스 헤이워드에게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고 문의하였으나 이미 연극으로 각색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거절당했다가 1932년도에 이르러서야 오페라로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소설 '포기'는 거슈인이 말하고 싶은 모든 것, 즉 '멜팅 팟'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스토리였다. 절음발이 거지인 포기가 다른 남자(크라운)의 애인인 베스와 사랑에 빠진다. 베스의 애인 크라운은 살인자였고 포기는 베스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크라운을 살해한다. 그러나 정작 베스는 포기가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또 다른 남자의 꾀에 넘어가 뉴욕으로 떠나고 만다. 결국, 포기는 절음발이 몸을 이끌고 그녀를 찾으러 뉴욕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작은 시골을 배경으로 흑인들 간의 치정, 도박, 마약 등 밑바닥 흑인의 삶을 담고 있으며 다채로운 대사들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슈인이 열광할만한 모든 요소가 있는 작품이었다. 

저자인 헤이워드는 지역 신문에서 포기를 연상시키는 한 흑인의 이야기를 발견했었고 이를 소설화시켰다. 그는 백인었지만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린 경험이 있어 주인공 포기에 완전히 감정 이입될 수 있었다고 한다. 거슈인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는 동안 헤이워드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이들은 극의 배우들이 모두 흑인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당시만 해도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나와 연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흑인이 오페라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들은 오페라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거슈인과 헤이워드는 한 가지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거슈인은 흑인들의 대사에 레치타티보(말하듯이 노래하는 창법)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 반면 헤이워드는 반대했다. 거슈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산문을 읽는 캐릭터와 시를 읽는 캐릭터로 구분되듯이 흑인과 백인의 대화가 차별화되도록 흑인은 레치타티보로 대사를 읊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결국, 거슈인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문제는 오페라 경력을 충분히 가진 흑인 가수들을 찾는 일이었다. 결국, 포기 역은 바리톤 토드 덩컨(Todd Duncan)이, 베스 역은 소프라노 앤 브라운(Anne Brown)이 맡게 되었다. 정식으로 오페라 교육을 받았던 토드 덩컨은 대중음악을 무시했고 흑인은 영가를 불러야 한다는 공식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거슈인이 오디션을 볼 때에 18세기 이탈리아 아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덩컨에게 포기 역을 부탁하자 그는 되려 거슈인의 작곡된 곡들을 들은 뒤에 결정하겠다고 한 발짝 물러섰다. 거슈인은 '포기와 베스'에서 불릴 곡들을 들려주었고 덩컨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하였다고 한다. "백인인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영감을 받았기에 이토록 절절한 흑인의 감성을 담은 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일까" 

포기와 베스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Summertime"은 1933년 12월에 작곡되었다. 11개월간 모든 작곡을 끝냈고 이후 9개월간 오케스트라 편곡을 했다. 한 두 시간이면 노래 몇 곡을 작곡하는 그로서는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할애한 나날이었다. 거슈인은 '포기와 베스'야말로 자신의 일생일대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푸가(fugue)를 작곡하다니,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리라…"

1935년 8월에 보스턴의 콜로니얼 씨어터에서 리허설겸 초연되었다가 정식 데뷔를 위해 뉴욕으로 이동했다. 뉴욕에서는 총 세 시간짜리 작품이 많이 단축되었다. 마침내 1935년 10월 10일 뉴욕의 알빈 씨어터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극장에는 거슈인의 새 오페라를 보러온 청중들로 대만원이었다. 뉴욕의 평론가들은 1924년부터 거슈인을 벼르고 있었다. '랩소디 인 블루'이후에 나오는 대작들은 신통치 않았기에 그들은 더는 거슈인을 파이오니아로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브로드웨이쇼에 어울리는 팝스 작곡가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에 대한 문화적 기대감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랩소디 인 블루'때와 같이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인들은 청중석에서 보이지 않았다. 미국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던 아론 코플란드도 거슈인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연극 평론가와 음악 평론가 두 명을 보냈다.  

                                영화, 포기와 베스의 한 장면


첫 장면은 캐피쉬 로우라 불리는 흑인들의 아파트 정원이다. 빠르고 힘찬 서주가 끝난 뒤 주제를 피아노가 이어받아 블루스로 연주한다. 이어 여러 흑인 커플들이 등장하여 춤을 추며 낮은 톤으로 다-두-다를 반복하며 주술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때 무대 한편의 조명과 함께 등장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클라라)이 소프라노로 '섬머 타임'을 노래한다.  이 아름답고 절절한 노래가 끝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포기와 베스'에 등장하는 명곡들을 우리는 여러 경로로 들어왔을 것이다. 1막 1장에 서두에 등장하여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Summertime, 1막 2장의 My Man's Gone Now,  2막 3장에 등장하는I Loves You, Porgy, 3막 3장의O Lawd, I'm on My Way 등을 말이다.  특히 세리나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부르는 아리아 My Man's Gone Now는 소프라노 루비 엘지(Ruby Elzy)의 몫이었는데 관객을 압도할 만큼 잘 불러서 갈채를 받았다. 후에 이 세리아 역할을 부탁받았던 빌리 홀리데이는 My Man's Gone Now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 곡을 매일 밤 불러야 한다는 것은 가슴이 메어지는 일"이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My Man's Gone Now는 엘라 핏제랄드, 빌 에반스, 허비 핸콕, 마일스 데이비스, 빌 프리셀 등 많은 뮤지션들이 레코딩 했다. 

루비 엘지를 비롯해 '포기와 베스'의 가수들은 맡은 역할을 잘 했지만, 결론적으로 거슈인의 두번 째 오페라 작품이며 그가 일생 일대의 심혈을 기울였던 '포기와 베스'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한 마디로 대실패였다. 뉴욕타임즈 연극 평론가는 오페라 스타일의 레치타티보를 쓰는 것을 비판했고 음악 평론가는 오페라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 불평했다. 무엇보다 거슈인은 버질 톰슨의 비평에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 "거슈인은 지속적인 음악 개발 능력에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거슈인은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훌륭한 클래식 작곡가는 물론 아니거니와 제대로 된 작곡가도 아니다. 비판적인 사고 없이 '멜팅 팟'에만 중점을 줬다. 다양한 인종의 음악적 전통만 수용하려고 여기저기에서 퍼왔다. 포기와 베스는 생동감은 있으나 엉터리 전설에 기반을 둔 가벼운 오케스트레이션이다."  

흑인들 사이에서는 '포기와 베스'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도 가해졌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흑인들은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았으며 미신을 잘 믿는다. 주인공 남자는 절음발이고 여자는 마약중독자였다. 흑인 스스로 발언권이 없는 당시 상황에서 백인이 흑인의 상황과 감정을 세세히 묘사한 것은 인종차별과 다를바 없다는 주장이었다. 듀크 엘링턴도 거슈인의 노골적인 흑인 묘사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포기와 베스'는 결국 백인 상류층의 잘못된 계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공연은 석달만에 막을 내렸고 거슈인은 투자한 모든 금액을 잃었다.  여러 백과사전들이 '포기와 베스'를 당대에 성공한 오페라로 잘못 기술하고 있는데 거슈인 생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실패하자 거슈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1936년 할리우드로 떠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평가받았던 사람에게 시련이 닥쳤다. 할리우드는 그를 특별히 반기지 않았다. '포기와 베스'에 몰입하느라 거슈인은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낸 지도 오래되어가고 있었다. 유명 영화 제작자인 샘 골드윈은 거슈인에게 "당신은 왜 어빙 벌린처럼 히트곡을 못 내놓느냐"며 빈정거렸다.  

거슈인은 매일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거슈인은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에 휴식이 약이라는 충고 외에는 의사조차 그의 질병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베벌리 힐스에서 그의 형 아이라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집에서 식사하는데 거슈인이 음식을 쏟았다. 아이라의 아내가 거슈인에게 당장 식탁에서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고 거슈인은 형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으로 힘없이 올라갔다고 한다. 형 아이라는 그 모습이 가장 마음이 아팠노라 회상한다. 그들은 작사가, 작곡가로서 좋은 동반자 관계였다. 아이라는 이날 이후 거슈인을 근방의 작은 집으로 이사 보냈다.  거슈인은 햇볕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아팠고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았다. 피아노는 더 이상 칠 수 없었다. 그러던 1937년 7월 9일, 할리우드로 온 지 1년여 만에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 다음 날 뇌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치의가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뇌수술 전문가를 주선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늦었고 거슈인은 사망했다. 1937년 7월 11일, 불과 서른 여덟의 나이였다. 그의 시신은 뉴욕으로 되돌아갔고 장례식날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지만 그를 추모하는 참석객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해 가을, 할리우드 볼 풋볼 스타디움에서 추모식이 열렸는데 프레드 어스테어가 거슈인 곡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를 불렀고 '포기와 베스'의 루비 엘지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 My Man’s Gone Now를 열창했다. 


 ( 거슈인의 음악 동반자인 형, 아이라 거슈인. 그는 조지 거슈인의 작품에 노랫말을 달았다.)


포기와 베스, 논란은 계속되다. 


거슈인 사후에도 '포기와 베스'는 찬사와 혹평을 오락가락하였다. 거슈인이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942년 '포기와 베스'는 뉴욕에서 리바이벌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평론가들은 성공의 주된 이유를 레치타티보를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초연 당시 가혹한 비평으로 거슈인을 아프게 했던 평론가 버질 톰슨까지 이번에는 찬사를 보내었다. 그러나 1953년에 리바이벌된 '포기와 베스'는 다시 비난에 휩싸였다. 줄리아드를 막 졸업했던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가 주인공을 맡았던 이 작품에 대해 제인스 힉스 평론가는 “흑인에 대한 가장 모욕적이고 가장 명예훼손적이며 가장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가혹한 행위”라며 악담을 했다. 1960년대의 리바이벌 작품에 대해서도 가혹한 평가가 있었다. 비평가 헤롤드 크롤스는 "거슈인은 1920년대 할렘 나이트 클럽에서 훔쳐온 음악으로 명성을 얻었다"며 독설을 내뿜었고 모든 흑인 음악가들은 '포기와 베스'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슈인의 이상에 걸맞은 '포기와 베스'를 부활해낸 사람은 다름아닌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었다. 1986년 사이먼 래들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포기와 베스’는 거슈인이 고집했던 레치타티보를 부활시키는 등 거슈인의 품위와 그의 음악적 목표를 완벽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악가 하롤린 블랙웰, 윌러드 화이트, 신시아 헤이몬, 데이먼 데반스, 신시아 클라레이, 브루스 허버드, 마리에타 심슨, 그레그 베이커가 참여했으며 글라인드본 합창단이 합창을 맡았다. 사이몬 래틀의 '포기와 베스'는 같은 캐스팅으로 1988년 2월, 스튜디오에서도 녹음되었다. 흑인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조지 거슈인에게 이제 평론가들은 '화이트 니그로'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융합의 음악을 이룬다는 거슈인의 꿈은 그의 삶을 이끌어온 주요한 힘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분명 성공한 작곡가였지만 진정한 멜팅 팟의 도시 뉴욕과 아브라함 링컨에 대한 이야기,  그토록 원했던 발레 작품에 대한 열망은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그가 죽은 뒤 공개된 재산은 당시로는 엄청난 40만 불 이상이었다. 이 중 '랩소디 인 블루'는 20,125달러 가치로 측정되었고 '포기와 베스'는 250불로 제일 가치 없는 곡으로 감정되었다. 예술도 경제적 가치로 재단시킬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미국의 속성일진데 '포기와 베스'가 거슈인이 떠나고 한참 후에야 찬사를 받은 것을 보면 거슈인의 꿈은 자본과 통속이 범람했던 시대가 감히 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친 비평과 오해의 칼날 속에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고독과 비애의 딱지 속으로 숨어들어간 꿈. 아니 도처에서 500여 개가 넘는 그의 작품들을 들어오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그의 꿈을 헤아려본 적이 있었던가? 인종적 융합으로 표출되는 예술의 절정에 그만큼 다가선 음악가가 있었던가? 거슈인의 그 꿈이 오늘날에도 이리 설레는 건 아직도 품어보아야할 시대의 과제로서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서두의 **부분은 거슈인 평전George Gershwin: An Intimate Portrait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왔다 /이 글에 등장하는 팩트들은 거슈인의 글과 메모들을 세세히 기록한 거슈인 평전들과 -The George Gershwin Reader(로버트 와이엇 외, 2004년), George Gershwin: An Intimate Portrait (월터 림러 저, 2009년)- 뉴요커(The New Yorker, 2005년 1월 10일)등 여러 기사에서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추천 앨범

Bernstein Century - Gershwin: Rhapsody in Blue / An American in Paris; Grofe, 1997, Sony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콜롬비아 심포니의 1959년 ‘랩소디 인 블루’를 최고의 레코딩으로 꼽는다. 조지 거슈인 오리지널의 가뿐한 느낌이 번스타인에 와서는 장중하면서 극대화된 기쁨으로 새롭게 각색되었다. 이 곡은 번스타인의 어메리칸 클레식들을 모은 다른 음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George Gershwin: Porgy and Bess (COMPLETE Recording on 3 CD's from 1988 Glyndebourne Festival Production)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과글 라인드본 합창단, 윌러드 화이트(포기 역), 신시아 헤이먼(베스 역) 등이 참여한 1988년 녹음된 스튜디오 음반이다. 거슈인의 품위와 그의 음악적 목표를 완벽하게 표상하고 있는 역사적인 음반으로 각광받는다.


Clara: Paula Ingram(sung by Harolyn Blackwell), The London Philharmonic conducted by Sir Simon Rattle, The Glyndebourne Ch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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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2

아폴로 극장을 빛낸 그녀들.


(지난 호에 이어)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침침한 형광등 아래 표정없는 풍경과 퀴퀴한 실내 공기를 환희로 바꾸어주는 요인은 나에게 있어서는 Take The "A" Train 이였다.

You must take the "A" train

To go to Sugar Hill, way up in Harlem

If you miss the "A" train

You'll find you missed the quickest way to Harlem.


이 곡의 그 유명한 4 마디 인트로에 이어 "할렘의 슈거힐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A 트레인을 타는 것, 서둘러라, 서둘러…." 라 노래하는 엘라 핏제랄드의 경쾌한 음성을 떠올리면 핑거 스냅이 절로 나왔다. 춘천행 기차에서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아련해지듯, 소양강 댐 앞에서 '소양강 처녀'에 문득 미소가 번지듯 장소와 방향이 주는 여행의 감흥에는 음악이 한몫하기 마련이다.


(나는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블랙 뮤직의 중심, 아폴로 극장 앞에 도착했다. 극장 앞에는 행인들로 붐볐지만,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리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코튼 클럽과 비슷한 느낌의 낡고 색이 변한 붉은 카페트, 몇 장의 사진들과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전용 극장처럼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식이나 관리가 잘 된 느낌은 없었다. 협소한 로비 중앙으로 나 있는 통로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이 홀로 앉아 있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은 매일 공연하지 않는다, 주말 혹은 아마추어 나잇이 있는 수요일에 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화를 원했다. 썰렁한 공기가 싫은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곳은 50여 년 전 비틀즈가 미국에 가면 꼭 무대에 서리라 소망했던 바로 그곳, 아폴로였다. 마이클 잭슨이 데뷔했고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제럴드, 듀크 엘링턴, 사라 본, 잭슨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셀 수 없이 많은 유명 가수들이 섰던 소울, 록, 가스펠, 재즈, 블랙 뮤직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블랙 뮤직의 중심이었던 할렘의 아폴로 극장)


한때 내 기억에서 사라졌던 아폴로 극장을 되새기게 된 것은 실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지난 8월, 뉴욕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 제츠의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던 한 소녀. 그녀의 이름은 리에나 산타 아나였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2010년 아폴로 극장이 주최하는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던 패기있고 아리따운 소녀였던 것이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은 1934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재능있는 예비 스타를 뽑는 행사로 아메리칸 아이돌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의 리에나를 보면서 동시에 소녀 엘라 핏제럴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엘라 핏제럴드야말로 아폴로 극장의 원조 '내일의 스타'였기 때문이다. 엘라 핏제럴드가 아마추어 나잇의 내일의 스타로 뽑힌 것은 아폴로 극장이 이 이벤트를 시작한 직후인 1934년 11월 21일이었다. 엘라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엘라는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듀오로 아마추어 나잇에 도전했는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팝가수 보스웰 시스터즈의 Judy, The Object of My Affection을 불렀다고 한다. 친구는 주로 춤을 추고 엘라는 메인 보컬을 맡았다. 아폴로 극장을 가득 채웠던 청중들은 천진난만한 엘라 듀오의 모습에 웃고 손뼉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아폴로 극장의 작은 로비에 앉아 할렘 최고의 무대에 섰던 흑인 여성들의 환희를 공감해보려 노력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그러하지만 1930년대 할렘의 여성들은 지독히도 불우했다. 가난, 마약, 성범죄에 노출되기 에 십상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다. '흑인' 보다 못한 존재는 흑인 여성이었다. 흑인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던 그때, 그러니까 1939년 어느 날. 아폴로 극장의 무대에 Strange Fruits가 울려 퍼졌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무대였다. 제목에 붙여진 '이상한 과일'이란 흑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메세지를 담은 곡이었다. 극장에선 이 곡을 못마땅해 하였으나 빌리는 이미 그 누구도 제어하기 어려운 아폴로 극장의 대스타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깊은 울림에 청중은 압도당했고 숙연해졌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면 희열과 환희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지독히 가난하고 소외된 흑인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두 여성, 서로 다른 빛깔로 아폴로 극장을 비롯한 할렘의 크고 작은 무대들을 누비며 관객을 압도했던 두 여성,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핏제랄드. 그녀들은 할렘을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 용기를 준 존재이기도 했다.

빌리 홀리데이 (출처: goole image)


할렘에 머물면서 코튼 클럽을 찾아가기도 했지만(지난 호 참조) 교회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도 즐거웠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가톨릭 교회에 들어가 보았다. 열 명 남짓의 성가대 멤버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가창력과 흑인 특유의 표현법들이 내 마음을 흠뻑 사로잡았다. 청중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인상 좋은 목사님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분, 빌리 조엘 백 코러스도 했었답니다. 노래 끝내주지 않아요?" 정말 멋있는 보이스였다. 빌리 조엘 코러스를 했던 안 했건 최소한 이 작은 교회 안의 보컬은 동네 사람들이었지만 비범했다. 저 흑인 특유의 소울 필과 가창력은 우리가 아무리 흉내를 낸다 해도 솔직히 '넘사벽'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목사님은 예배 날 다시 오면 훌륭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내가 혹시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잠깐 돕고 싶다고 했더니,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수녀원에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길로 수녀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는 '노크 금지,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쓰여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몸을 벽에 기댔다. 그리고 여러 번 보았던 빌리 홀리데이의 유튜브 영상을 재생시켰다. 나는 그녀가 노래할 때마다 살짝 들려 가볍게 떨리는 윗입술이 너무도 좋다. 뚜렷이 각졌지만 둔탁해서 오히려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턱도 사랑스럽다. 과장되지 않게 들어 올린 까만 머리에 꽂힌 하얀 꽃과 그녀의 자태는 눈이 부시다.

1934년 엘라 핏제럴드가 아폴로 극장의 '내일의 스타'가 되었을 무렵, 빌리 홀리데이는 이름없는 할렘의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의 기획자였던 랄프 쿠퍼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은 곳은 1935년 어느 날 핫 차 바 그릴이란 곳이었다. 랄프 쿠퍼는 빌리의 노래에 홀딱 반해서 아폴로 극장의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에게 흥분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껏 이렇게 질질 끌면서 노래하는 창법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이건 블루스도 아니고…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당신은 반드시 그녀를 들어봐야 합니다." 쉬프만은 안목이 남다른 랄프 쿠퍼의 말을 믿고 1935년 4월 19일 그 주 프로그램에 빌리 홀리데이를 끼워 넣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자신이 부킹된 것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빌리의 아버지 클라란스 홀리데이는 그녀에게 아폴로 극장의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워줬다. 빌리는 행여 뮤지션 아버지의 덕을 본 것이라는 오해를 피하고자 성을 'Halliday'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빌리를 발탁한 랄프 쿠퍼는 그녀의 아폴로 극장 데뷔 무대를 위해서 드레스와 구두도 사줬다. 데뷔의 날, 빌리는 심장이 터질 듯 긴장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대에 나가기 직전에도 떨려서 몸이 굳어있었는데 코메디언인 피그미트 매크햄이 빌리의 등을 떠밀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무대로 나갈 수 있었다. 조명이 그녀를 향하고 청중들이 숨을 죽이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빌리는 Them There Eyes, If The Moon Turns Green을 불렀다. 청중들은 그녀의 노래에 넋을 잃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빌리가 The Man I Love를 앵콜곡으로 부르고 무대를 떠나는 순간 아폴로 극장과 그녀와의 관계는 확고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4개월 뒤에 당시 주가를 올리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와 다시 아폴로 극장에 섰고 그 뒤 승승장구하며 아폴로의 대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수녀원의 문이 열렸고, 수녀님이 내게 용건을 물었다. 나는 이 수녀원에서 매일 아침 빈민들을 위한 무료 음식 제공 시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틀간의 여행 시간, 짧지만 할렘식 사람들과 가깝게 있고 싶고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래 봬도 설거지는 잘한답니다" 수녀님은 활짝 웃었고 부엌을 보여주시더니 다음날 새벽 6시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들의 아침은 몹시 분주했다. 열댓 명의 수녀님들이 바쁘게 부엌을 오갔다. 부엌은 대단히 큰 개수대가 눈에 띌 뿐 조리대는 적었고 썰렁했다. 그래도 백 명 이상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엌 크기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대형 들통에는 오랜 시간 끓였을 슾이 보글거렸고 기부를 받은 음식 봉지와 빵과 음료가 한편에 놓여있었다. 수녀님이 나에게 말했다. "할렘 사람들은 많이 가난하고 아프답니다."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이었고 노인들, 중년의 여성들도 많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음식을 먹었고 다 먹은 뒤에는 아멘 하고 느릿하게 자리를 떠났다. 크디큰 흰자위는 검은 얼굴 위에서 더욱 하얗게 떠 있었는데, 그 눈빛도 그 두꺼운 입술도 아무 말이 없는 이유가 그들은 이미 서로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였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배려, 익숙한 가난, 그들에게 오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란 오직 나라는 동양 여성 하나인 듯싶었다. 바쁘게 설거지를 하고 치우느라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수녀님들은 침묵했고 경건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와 바쁜 걸음들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수녀님은 어려운 할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은 "할렘을 풍요롭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뭉클한 정경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수녀원은 사진 촬영 금지였고 마중해주신 수녀님들이 사진 촬영 금기(?)를 깨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열여섯 처녀 엘라 핏제럴드는 수녀님의 해맑은 웃음을 꼭 빼 닮았다. 나는 어린 엘라 핏제럴드의 플라토닉 러브를 떠올렸다. 드러머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 두 사람의 만남은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서로 용기와 존경을 보내는 깊은 사랑이었다.

엘라가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다고 서두에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선 1934년 시쉬프만스 할렘 오페라 하우스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엘라는 처음 발탁되었다. 청중석에는 티미 로저스라는 코메디언이 있었는데, 엘라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백스테이지로 달려가 내일 당장 사보이 볼룸에 와서 칙 웹을 만나야 한다고 종용했다. 혹시 엘라가 오지 않을까 봐 집 주소를 알아둔 뒤 집으로 데리러 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칙 웹은 드러머이자 할렘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리더였다. 특히 사보이 볼룸에서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의 힘 있고 독특한 드럼 솔로를 듣기 위해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칙은 엘라의 노래를 듣고 “바로 이거다, 나는 진짜 싱어를 만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엘라는 사운드가 모던 했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멜로디와 리듬에 비중을 두었다. 칙 웹 밴드가 연주하는 미디엄 템포의 그저 그런 스윙 곡들도 엘라가 부르면 평범하지 않은 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엘라는 흘리지 않고 또박또박 발음했고 악보도 읽을 수 있었다. (엘라 말기에는 표준 발음을 안하고 뉴욕 액센트가 들리긴 했지만.)

하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외견상으로는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칙 웹은 결핵 환자였고 작고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였다. 척추 이상으로 허리도 구부정해서 큰 드럼 세트에 매달려 있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반면, 엘라는 덩치가 컸고 예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글리 더클링', 세즉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렀다. 칙과 엘라 모두 외모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재능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존중하는 가족애'라고 말하곤 했다. 엘라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자 칙 웹 밴드도 덩달아 전국적 인사가 되었는데 많은 유혹, 특히 베니 굿맨이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라는 칙 웹 밴드를 떠나지 않았다. 칙 웹 밴드는 멤버 중 누구 한 명이 성공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라는 우호적인 가족애가 흐르고 있었다. 엘라는 밴드에서 작곡하기도 했는데 You Showed Me The way라는 곡은 멘토였던 칙 웹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비롯된 첫 작품이었다. 아폴로 극장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칙 웹이 1939년 결핵으로 숨졌을 때 엘라가 칙 웹의 관을 끌어안고 My Buddy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내 아버지는 일생 일대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하셨지요. 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엘라의 그 노래에 감동 받아서 펑펑 울었거든요”

엘라는 칙이 사망한 뒤에도 칙을 대신하여 3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보컬도 에니타 오데이 같이 새로 떠오르는 다른 여성들도 적극 참여시켰다. 

나는 재능있고 의리와 리더십있는 엘라 핏제럴드의 모습에서 흑인 여성의 강인함을 엿본다. 그리고 흑인 여성들이 엘라를 통해 얼마나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엘라 핏제럴드와 칙 웹. 엘라는 칙을 멘토로서 사랑했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NPR.org)


서브 프라임 모게지 파동 이후 아직도 할렘은 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70년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 만큼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렘인들은 1920년대부터 이어져 온 할렘 르네상스의 저력을 되새기고 싶어한다. 아폴로 극장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고 관광객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엘라 핏제럴드처럼 꿈을 이룬 소녀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할렘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걷히고 정화되기를 꿈꾼다.

할렘의 한 흑인 소녀가 썼던 1922년도 3월의 일기를 소개한다. 지금도 할렘 어디선가 세상을 욕망하는 일기를 쓰고 있을 빈곤하나 재능있는 여성들을 위해 나도 기도한다. 

 “내 이름은 루쓰 스미스. 그러나 무대에서 내 이름은 아다 스미스라고 불리길 원해요. 나는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알지요. 엄마에게 매일 백인의 집에서 청소하는 일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백인 집에서 슬쩍 음식을 훔치기도 해요. 엄마는 훔치는 게 아니라 미리 받을 돈을 당겨온다고 생각하래요. 엄마, 나는 떠나고 싶어요. 친구야,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이 고된 일을 벗어나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끝)

할렘의 거리에서 만난 여성들


<추천 음반>

Chick Webb & Ella Fitzgerald Decca Sessions (1934-41) (Mosaic 252)

본문에 소개했던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의 사랑과 우정을 음악으로 듣고 싶다면 이 앨범을 추천한다. 1939년 칙 웹이 사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존경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41년도까지 칙 웹 밴드를 이끌었던 엘라 핏제럴드. 칙과 엘라, 그들의 모든 레코딩이 이 앨범에 담겨있다. 모작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8장 박스 세트로 오리지널 레코딩을 리마스터링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posted by jazzlady

월간 재즈피플 2014년 8월호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스윙 재즈의 메카, 코튼 클럽을 찾아서.



스윙과 비밥의 흔적을 찾아 뉴욕 이곳저곳을 누볐던 지난 5월. 비밥을 태동시켰던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와 한때 비밥의 거리라 불렸으나 지금은 재즈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맨하탄 32번가에 대해서는 본지 6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초여름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체감하며 할렘 한복판을 쏘다녔던 이야기로 그날의 여행을 이어가고자 한다. 

도시란 곳곳에 위험천만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겠지만, 흑인 거주 지역이자 슬램가로도 알려진 할렘을 나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할렘의 가스 폭발로 빌딩이 붕괴되고 사망자가 속출한 사고가 일어난 지 채 두  달이 안된터라 걸음은 보다 조심스러웠다. 노후된 가스관이 문제였던 사고였다. 90년대 이후 새 건물이 많이 증축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노후화된 빌딩과 불결한 시설물이 거리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곳이 할렘이었다.  길거리에 떼를 지어 서 있는 청년들, 온갖 욕설로 난무한 거리의 낙서, 귀가 터져라 강력 우퍼 볼륨으로 힙합 드라이빙을 하는 사람들. 흑인 거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 문득 난감해졌다. ‘흑인 음악’ 재즈를 제외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이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세 집 건너 하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미용실, 가발 가게, 화장품 가게 등은 치장하기 좋아하는 흑인 여성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미국에서 헤어 손질 비용의 30%는 흑인 여성들로 인해 발생한다는 통계가 있다. 미용실에는 오전임에도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가 자라면서 머리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작업으로 머리를 꼬고 있었다. 적게는 세 시간부터 10시간까지도 걸리는 작업이라고 한다. 70년대 한국의 동네 이발관 비슷한 허름한 미용실에서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용실 외관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창문 열린 윈도우 너머로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미용사 한 명이 뛰어 나왔다. 

“당장 여기서 꺼지던가 100불 내고 사진 찍어!”

아프리카 전통 복장과 흡사한 알록달록한 드레스에 머리를 스카프로 꽁꽁 도며맨 이 여성은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그녀의 흙빛 주름진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땀방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누그러트리고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어딨는지 아나요?” 

미용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더니 

“코튼 클럽? 난 그런 곳에 관심 없어”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한 여성이 소리쳤다. 

“거긴 춤추는 곳이잖아. 지금 가봤자 닫혀있을걸.”

그들은 코튼 클럽에 대해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들어가버렸다. 

듀크 엘링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튼 클럽. 그러나 그곳에 가기 전에 벌써 진이 빠지려고 했다. 거리에서 불친절한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로 녹초가 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찬란한 역사는 어디로? 현재의 코튼 클럽


코튼 클럽은 맨해튼 서쪽 마틴 루터킹 주니어 블로바드라고 불리는 125번가에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맑은 하늘에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건너편 카페에서 코튼 클럽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곡을 모은 음반을 귀에 꽂았다. 2011년 발매된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Storyville 1038415). 이 음반은 1938년 4월 17일부터 5월 29일까지 코튼클럽에서 녹음된 방송용 라이브였다. 앨링턴의 음악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코튼 클럽의 전성기가 거의 끝나가던 시기의 녹음이다. 78 RPM판으로 녹음된 47곡이 두 개의 시디로 나뉘어 복원된 것인데 코튼클럽에서의 듀크 앨링턴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든다. 낡고 지글거리는 음질이 강한 빗소리와 함께 운치를 자아내는 듯 하다.

이윽고 비가 개었고 코튼 클럽의 문도 활짝 열렸다. 입구에 놓인 책상 앞에는 티켓을 받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몹시 친절한 말투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는 공연이 시작하려면 멀었으니 들어와서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이곳은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던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77년에 재오픈된 곳이었다. 

럭셔리했던 옛 코튼 클럽과 달리 현재의 코튼 클럽 실내는 몹시 소박했다. 70년대 오픈했을 당시 그대로의 인테리어인 듯 했다. 붉은 색 테이블 위에 깔린 비닐과 밋밋한 플라스틱 의자는 옛날 옛적 빵 가게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빨간색 조명과 네온사인이 시골 선술집을 연상시키는 듯도 했다. 무대는 협소했지만 1층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무대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쏙 들었다. 2층은 보다 프라이빗한 대화가 가능한 곳이었다. 벽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이르는 찬란했던 코튼 클럽 전성기의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오케스트라 편성의 스윙 재즈의 메카,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개의 상징은 다름 아닌 코튼 클럽과 듀크 엘링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코튼 클럽은 외견상은 허름해 보이지만 도쿄에도 2호점을 낼 만큼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코튼 클럽에는 매 주말 열리는 가스펠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과 관광객들이 몰린다. 월요일에는 스윙 댄스 나잇으로 꾸며져서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한다. 빌리지 뱅가드나 버드랜드와 같은 재즈 클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흑인들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댄스 파티가 열리는 장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리지널 옛 코튼 클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옛 코튼 클럽도 스윙 재즈, 즉 춤을 추기 위한 댄스를 연주했고, 코미디라든가 벌레스크 같은 희극 혹은 보드빌과 같은 버라이어티 쇼도 선보였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콜롬비아 대학이 우리 클럽을 포함해 이 지역을 매입하겠다고 덤벼서 절대 안판다고 싸웠어요. 학교 캠퍼스 확장하려고 주민들까지 다 내쫓겠다는 거였죠. 이게 말이 되나요? 코튼 클럽을 없앤다는 건 흑인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건데….결국 우리가 이겼죠.” 코튼 클럽 웨이츄리스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코튼 클럽의 정신, 즉 할렘 컬쳐의 대표라는 자부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 전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할렘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이 궁금했다. 



맨하탄 서쪽 125번가에 있는 현재 코튼 클럽의 모습. 30년대 코튼 클럽의 역사를 이어받아 1977년 재오픈한 곳이다.


 현재 코튼 클럽의 내부. 붉은 색 테이블과 조명이 인상적이다.


 코튼 클럽 입구에서 티켓을 받는 직원. 이들은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했던 코튼 클럽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 앞에서


코튼 클럽은 1920년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인 잭 존슨이 세운 “클럽 딜럭스(Club Deluxe)”가 전신이다. 잭 존슨이 마피아 두목이었던 오웬 ‘오우니’ 매이든에게 클럽을 넘기면서 1923년부터 코튼 클럽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장소는 142번가와 레녹스 애비뉴가 만나는 코너에 자리했다.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다고 할 수 없었다. 택시 운전사가 142번가 어딘가에서 여기 어디쯤 아니겠느냐며 퉁명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차를 세우게 했다. 현재의 코튼 클럽이 맨해튼과 제법 가까운 웨스트 사이드에 있었다면 이 오리지널 코튼 클럽 자리는 업타운, 즉 주거지가 밀집한 ‘진짜 할렘’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8차선 도로를 중앙에 둔 인도, 그러나 상점들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고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드물었다. 언제 비가 쏟아졌느냐는 듯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나는 황량한 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정적이 긴장되어서 나도 모르게 움칫거리고 말았다. 문이 닫힌 상점 앞에서 청년들이 삼삼오오 몰려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들의 시선이 일찍부터 나에게 고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쪽 모퉁이 구석에서도 눈빛들이 느껴졌다. 여자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뭇 불안했다. 아니, 모든 불안은 할렘에 대한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할렘에서는 최대한 관광객티를 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관광객이 아니라 친할렘적인 복장과 말투를 쓰는, 마약을 단속하는 사복 경찰이라는 것이다. 마침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 밖을 나온 노인에게 코튼 클럽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아버지에게 코튼 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코튼 클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20달러를 줬더니 코튼 클럽의 방향을 짚어주었다. 예상했던 장소였다. 그 노인에게 몇 분간 들었던 코튼 클럽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30년대 당시 이 길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장소였는지 과장스럽게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보이는 그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오리지널 코튼 클럽은 진작에 사라졌고 지금은 ‘미니싱크 타운 하우스’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할렘에서 총기범죄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단체 건물이었다. 

1922년, 마피아 두목 오웬이 코튼 클럽이라 이름 지었을 때 이곳이 쇼비즈니스의 정상에까지 올라갈 엄청난 곳이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40년에 문을 닫은 뒤에도 할렘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 공을 세운 장소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2014년 5월.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겠다고 물어물어 찾아온 아시안 여성이 이곳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오웬은 이것만큼은 분명히 예측했을 것이다. 금주령이 떨어진 이 땅에서 백인들이 몰래 술을 마시기 위해 할렘 은밀한 곳까지 반드시 찾아 올라오리라는 것을. 


1923년 142번가와 644 레녹스 애비뉴에 세워졌던 초창기 코튼 클럽의 자리.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있다.


1923년 처음 설립된 코튼 클럽의 모습 (출처: 뉴욕 시티 홈페이지)


코튼클럽 전성기 그리고 듀크 앨링턴


코튼 클럽 출연 당시의 듀크 엘링턴.


1927년 가을, 28세 청년 듀크 엘링턴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밴드에 추가로 다섯 명을 더 영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연주 장소였던 코튼 클럽의 오디션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곳 운영진의 요구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클럽은 최소 11명의 뮤지션을 요구했다. 듀크에게 코튼 클럽에서의 오디션 기회가 온 것은 순전히 킹 올리버와 자신의 매니저 어빙 밀스 덕분이었다. 킹 올리버는 그해 9월 개런티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코튼 클럽의 하우스 밴드 자리를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듀크의 매니저 어빙 밀스가 오디션의 기회를 얻어온 것이었다. 어빙은 듀크의 수입 45퍼센트를 가져가는 계약 관계였고 어빙이 열심히 일을 찾아온 덕분에 듀크는 레코딩 기회도 여럿 얻을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듀크가 고향 워싱턴에서 할렘으로 이주해온 것은 불과 3년 전 일이었으나 워싱턴에서부터 닦아온 기량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에서의 성공을 코튼 클럽을 통해 뉴욕에서도 이어가고 싶었다. 코튼 클럽은 듀크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흡족해했고 1927년 12월 4일 코튼 클럽에서 듀크 엘링턴 코트 클럽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이 열리게 된다.

코튼 클럽은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백인들만 청중으로 받는다는 것 그리고 최소 167㎝의 키와 옅은 피부색을 가진 흑인 여성만 엔터테이너로 고용한다는 것이었다. 지원한 모든 여성은 소위 ‘페이퍼 백(Paper bag)’테스트를 거쳐야 했는데 즉, 물건을 담는 갈색 종이 봉투와 비교했을 때 그보다 옅은 피부색을 가진 여성만이 고용될 수 있었다. 코튼 클럽은 철저히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코튼 클럽이 오픈하게 된 것도 1920년부터 시행되었던 금주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할렘에 클럽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법으로 술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인들이 음지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할렘의 코튼 클럽은 더없이 근사한 장소였다. 198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코튼 클럽’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마피아의 아지트였고 마피아 보스가 운영했던 재즈의 메카가 바로 코튼 클럽이었다. 불법이 자행된다는 점에서 오명(汚名)의 클럽이기도 했지만 듀크 엘링턴과 같은 재능있는 뮤지션들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꿈같은 장소였다. 코튼 클럽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라디오 방송을 위한 라이브 레코딩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듀크의 이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코튼 클럽에서의 주 작곡자는 지미 맥휴였고 작사는 도로시 필즈가 주로 맡았는데 앨링턴도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코튼 클럽 시절 듀크 엘링턴은 1928년 Victor(지금의 BMG)레코드에서 발매된 Black and Tan Fantasy와 Creole Love Call, 두 개의 첫 히트곡을 냈다. 이듬 해에는  The Harlem Footwarmers라는 이름으로 Doin’ the New Low Down, Diga Diga Doo 등이 Okeh레코드 (현 Sony)를 통해 발매되기도 했다.  듀크의 초기 최대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Mood Indigo는 듀크가 코튼 클럽을 떠나기 5개월여 전인 1930년 10월 15일에  Brunswick 레코드에서 녹음되었는데 이 곡은 코튼 클럽에서 연주했던 Dreamy Blues에 가사를 붙이고 발전시켜서 완성된 곡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4년여간의 코튼클럽 하우스 밴드로서의 활동을 끝냈던 1931년 2월, 그는 전국적인 명사가 되어 있었다. 코튼 클럽을 떠난 후 그는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Rockin' In Rhythm, Creole Rhapsody, Sophisticated Lady을 비롯한 많은 명곡을 더 남겼는데, 이후에도 라디오 방송 레코딩을 위해 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코튼 클럽에 서기도 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이어서는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가 1940년 코튼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캡 칼로웨이 시절 코튼 클럽은 수난을 겪었는데 1935년 할렘에 폭동이 일어나자 더 이상 할렘이 백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시각이 팽배했고 이에 코튼 클럽은 1936년 9월 다운타운 쪽 웨스트48가로 이전하게 됬다. 

코튼 클럽의 대표 엔터테이너는 듀크 엘링턴과 캡 칼로웨이 외에도 싱어 에설 워터스, 레나 혼, 댄서였던 빌 보장글스 로빈, 니콜라스 브라더스, 도로시 댄드리지 등이 있다. 레나 혼은 초기 코튼 클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뮤지션인데 16세의 나이에 무대에 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운타운으로 이주했던 코튼 클럽 2기에서는 루이 암스트롱, 베시 스미스, 엘라 핏제럴드, 넷 킹 콜, 빌리 홀리데이도 출연해서 이름을 알렸다. 코튼 클럽은 1940년 높은 렌트비와 나이크 클럽을 대상으로 한 세금 조사 압박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코튼 클럽은 ‘뉴 니그로 운동’이 펼쳐졌던 할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흑인들의 재능이 오직 백인 청중들을 위해서만 펼쳐질 수 있었기에 보통 흑인들에게는 외면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코튼 클럽 말기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과장된 제츠쳐로 노래했던 루이 암스트롱 보다 듀크 엘링턴이 할렘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백인의 광대임을 거부하려했던 그들의 저항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29년 녹음된 루이 암스트롱의 “Black and Blue?”에서 “나의 유일한 죄는 내 피부색”이라 노래하는 루이는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애잔하다. 이 곡은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 보다 10년이나 앞서 인종 차별 문제를 지적한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이 암스트롱의 해맑은 웃음이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직도 미국은 인종 차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루이가 노래했듯 검은 피부가 ‘죄’라는 인식은 드물 것이다. 아니 할렘에서만큼은 검은 피부색이야말로 권위를 가진다. 빈곤할지언정 그들이 쌓아온 저항의 역사를 존중한다. 그들의 피부를 존중한다. 흑인이 만든 재즈가 전 세계에 퍼졌을 지라도 할렘 특유의 컬쳐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다. 


1927년 코튼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할 무렵의 듀크 엘링턴 코튼 클럽 오케스트라.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프레디 젠킨스(Freddie Jenkins, 트럼펫), 투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트럼펫), 소니 그리어(Sonny Greer, 드럼), 아더 웻솔(Arthur Whetsol, 트럼펫), 잔 티졸(Jaun Tizol, 트럼본), 웨랜 브라우드(Wellman Braud,베이스),  해리 카니(Harry Carney, 색소폰), Fred Guy(프레디 가이,벤조) 바니 비가드(Barney Bigard,클라리넷), 조 난튼(Joe Nanton, 트럼본),  조니 호드지스(Johnny Hodges, 색소폰)과 듀크 엘링턴(피아노)


1936년 코튼클럽에서의 캡 칼로웨이 오케스트라와 코튼 클럽 코러스의 공연 모습. 


16세의 나이에 코튼 클럽 무대에 섰던 인기 가수, 레나 혼.


                 초창기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라의 일명 ‘정글 사운드’에 영향을 주었던 트럼펫터 제임스 바버 마일리


추천할 만한 코튼 클럽 라이브 음반.


Duke Ellington Live at the Cotton Club

1927년 12월 29일~1929년 9월 16일 라이브 녹음

2001년 TKO Record. 


듀크 엘링턴이 코튼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던 1927년부터 2년간의 연주를 모은 음반. 특히 그의 오케스트라 초기 트럼펫터였던 바버 마일리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의미가 깊다. 마일리는 그라울(Growl)스타일, 즉 으르렁거리는 사람의 발성 기교를 흉내 낸 거칠고 야성적인 사운드를 선호했고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운드를 그 시대 사람들이 ‘정글 스타일’이라고 불렀던 보다 거칠고 세련된 느낌의 색깔로 변모시키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Duke Ellington At The Cotton Club

1938년 4월 17일~1938년 5월 29일까지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커튼 클럽 라이브.

2011년 Storyville.


후기 듀크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커튼 클럽 라이브로 47곡이 두 장의 시디에 나뉘어 담겨져 있다. 보너스 클립으로 코튼 클럽에서의 듀크 엘링턴의 연주 클립이 담겨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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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4년 7월호


"나는 오케스트럴 피아니스트, 미국 재즈의 미래는 밝다."

- 재즈 스탠다드 클럽에서의 듀엣 시리즈, 그리고 새 앨범 Floating에 대한 이야기 -


                                                                                                                            (Photo by Joanna Stoga)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의 듀엣 시리즈 마지막 날, 그러니까 5월 11일 일요일 늦은 밤에 나는 맨해튼 재즈 스탠다드 클럽의 청중들 속에 있었다. 공연 전 프레드 허쉬는 팬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친절했고 여유가 번졌지만, 피로의 기색도 역력했다. 그는 이번 주 내내 여러 뮤지션들과 번갈아 가며 듀엣 무대를 꾸리고 있었다. 아나트 코헨(클라리넷), 케이트 맥개리와 커트 일링(보컬), 랄프 알레시(트럼펫)등이 함께 했었다. 그리고 듀엣 마지막 이날은 기타리스트 존 애버크롬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Free Flying(2013) 앨범에서 기타리스트 줄리안 라지와의 찰떡궁합 듀엣 연주를 떠올리며 애버크롬비를 기다렸다. 그들은 프리 임프로비제이션, 그리고 몇 곡의 스탠다드 곡들을 연주했다. 이 시대 대가 애버크롬비였지만 줄리안 라지와 프레드 허쉬와의 듀엣만큼 익사이팅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듀엣의 매력이 많이 드러나지 못했던 공연. 앵콜을 요청했을 때 애버크롬비는 백스테이지에서 나오지 않았고 다행히 허쉬의 솔로를 앵콜로 들을 수 있었다.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프레디 허쉬와의 인터뷰는 여러 날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최종 인터뷰를 위해 보스턴 근교에서 이루어진 그의 몇 주간의 명상 프로그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프레드는 7월 초 발매되는 새 앨범 Floating을 선물 보따리로 내놓았으니까. Whirl(2010), Alive at the Vanguard(2012년)에 이어  존 에베르(베이스), 에릭 맥퍼슨(드럼)과 함께하는 세 번째 트리오 앨범이다. 지난 앨범이 빌리지 뱅가드 라이브였다면 이번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Floating은 한 곡을 제외하고는 매 곡들이 누군가를 위해 헌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Floating이라는 앨범 제목처럼 따스한 느낌이다. 본 앨범에 참여한 베이시스트 존 에베르를 위한 곡 Home Fries(홈메이드 감자볶음을 말함)는 존의 고향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다양한 음악처럼 감칠맛이 있다. 피아니스트 케빈 헤이즈(Kevin Hays)의 성(姓)과 발음이 같아 은유가 더욱 돋보이는 Autumn Haze(가을 안개)도 멋스럽고, 2012년 스물 아홉 살에 요절한 이스라엘 출신 여류 피아니스트 쉼리트 쇼스한(Shimrit Shoshan)에게 바치는 Far Away에서는 아련한 슬픔이 느껴진다. Arcata는 노쓰 캘리포니아에 있는 도시인데 숲과 바다가 만나는 절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컬리스트 에스페란자 스팔딩이 그곳과 가까운 오레곤주 출신이어서 이 곡에서는 그녀를 떠올렸다고 한다. 에너제틱하고 세련된 베이스라인이 인상적이다. Floating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마리아(Maaria)를 위한 곡도 있다. 아스라한 어둠 속의 물결과 자연경관을 담은 앨범 커버와 어울리는 제목 A Speech to the Sea이 그것이다. 

프레드 허쉬는 본인을 오케스트럴 피아니스트라고 표현했다. 대단한 칭찬이다. 깊이 있고 창의적이며 복합적인 그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는 자신감에 넘쳤고, 또한 겸손했으며 솔직하고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5월 초 재즈 스탠다드 재즈클럽에서의 듀엣 연주 시리즈는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듀엣을 몹시 즐기는 거 같다. 


나는 듀엣을 대단히 선호한다. 듀엣을 하면 내가 오케스트레이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운드 텍스처를 창조할 수 있고 다이내믹도 만들 수 있다. 듀엣을 할 때는 쉽게 변화를 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도 용이하고 리드하기도 쉽다. 나는 듀엣이야 말로 아주 이상적인 음악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만족스럽고 재미있고 놀랍기도 하고 친밀하다. 둘 간의 직접적인 커넥션을 즐길 수 있다. 

내가 듀엣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NEC)에서 공부할 때였다. 그때는 정말 잘하는 리듬 섹션을 찾기가 어려워서 주로 듀엣으로 연습을 많이 했다. 학교 복도에 지나가는 뮤지션들을 붙잡고 같이 듀엣 하자고 말을 걸었다. 듀엣에 대한 나의 애착은 40년 전 NEC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내 커리어의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즐기지 않는 연주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듀엣 하는 것은 나를 몹시 흥분되게 만든다. 


빌 프리셀과의 듀엣도 말할 것 없었지만, 줄리안 라지의 듀엣 앨범 Free Flying에서도 두 사람의 호흡은 정말 대단했다. 


나는 줄리안 라지와 연주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와 연주할 때 우리는 하나의 매우 독특한 악기를 창조해낸 것처럼 만족스러운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왔다. 줄리안 라지는 그냥 기교 있는 젊은 뮤지션이 아니라 정말 드물고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Old Soul”을 가지고 있다. (성숙하고 깊이가 있다) 또한 그는 모든 재즈 스타일을 편하게 연주한다.

빌 프리셀 역시 듀엣할 때 마음껏 나를 표현할 수 있도록 잘 받쳐준다. 어컴퍼니스트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주는 것이다. 빌은 노트를 적게 쓰지만 풍성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최고의 레이더를 귀에 단 듯 사방의 모든 사운드를 다 알고 있다. 타이밍도 완벽하고 놀라운 뮤지션이다. 


(2013년 5월 11일 맨해튼 재즈 스탠다드 클럽에서 열린 프레드 허쉬와 존 애버크롬비 듀엣 콘서트의 모습)


재즈 스탠더드 듀엣 공연에서 존 애버크롬비와 듀엣 했을 때는 어땠는가?


존 애버크롬비와 연주는 처음이라 어떤 사운드가 나올 지 알 수가 없었다. 연주할 때 즐기긴 했지만…솔직히 다시 하게 될 것 같지 않다. 이날 뭔가 서로 커넥트가 잘 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가 나를 반주해주는 방식 때문에 난감했다. 아시다시피 피아노, 기타 듀엣할 때 문제점이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는 거 아니겠는가. 그는 풀 코드를 많이 쳤다. 그래서 내가 연주하는데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어떤 악기를 다루든지 간에 듀엣 할 때 함께 보완해나가면서 듀엣을 할 수 있는 뮤지션이 좋다. 


당신은 솔로 연주에도 괄목할 실력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 솔로 시리즈를 빌리지 뱅가드 클럽 최초로 하지 않았는가? 이 때를 술회하자면? (빌리지 뱅가드 솔로 씨리즈는  2011에 출시된 Alone at the Vanguard에 담겨있고 이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Best Jazz Album and Best Improvised Jazz Solo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되었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일주일간 솔로 연주를 한 것은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빌리지 뱅가드는 정말 대단한 곳이다. 어쿠스틱 사운드 퀄러티가 다른 아트 센터보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친밀하고 청중의 수준이 대단하다. 청중들은 뭘 들어봐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곳의 청중들은 음악을 아는 사람들이라서 정말 긴장된다. 빌리지 뱅가드에서 연주하면서 긴장하지 않는 연주자가 있을까? 이곳에 가면 그곳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의 역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곳에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빌리지 뱅가드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재즈 클럽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솔로 시리즈의 기회를 얻은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같은 대가가 느끼는 긴장감이 궁금하다.


긴장하면 엑스트라 아드레날린이 나오는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면서 이 긴장감과 아드레날린을 나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즉, 연주하는 데 있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도 풋내기일 때는 긴장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고 초조해했다. 이제는 이 긴장감을 나 역시 즐긴다. 연주를 시작하고 사운드와 리듬에 몰입하면 이 긴장감도 사라진다.


지난해(솔로 공연)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 공연을 했다. 다음 달 출시될 새 앨범 Floating에 참여했던 당신의 트리오 멤버와 함께 하지 않았나? 한국에 간 소감을 듣고 싶다.

일본의 커튼 클럽에서 연주 한 뒤 한국을 갔었는데 한국의 청중들이 환대해줘서 무척 기뻤다. 일본에는 재즈가 활발하고 재즈 뮤지션들도 많은데 한국도 재즈 신이 활발한 것 같았다. 나에게 좋은 연주 경험이었다. 

대학에서 마스터 클래스도 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학생들은 나이스한데 재즈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본 컨셉, 이를테면 스윙도 그렇고. 내가 처음 배울 때는 교재도 없어서 선배에게 배우고 콘서트도 많이 가고 스스로 터득을 많이 했다. 재즈를 배우는 것은 복잡하다. 책에만 의지해서도 안되고 새 언어를 배우듯이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 어찌 보면 한국의 재즈는 조금 경직되어 있다고 할까….뮤지션은 자기 고유의 보이스를 발견해야 한다. 자기의 정체성도 알아야 한다. 유럽이 유니크한 사운드를 많이 내듯이 한국도 언젠가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반영하는 재즈 스타일이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7월 초 발매된 프레드 허쉬 트리오의 새 앨범 Floating)


새 앨범 Floating에 대해서 소개해달라


Floating 이 전의 세 앨범은 모두 라이브 레코딩이었고 이번에 오랜만에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에릭 맥퍼슨과 존 에베르와는 세 번째 앨범이다. 라이브 레코딩이 연극 무대에 오른 기분이라면 스튜디오 레코딩은 영화를 찍는 기분이다. 편집하고 재차 녹음할 기회가 있어서 원하는 연주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평소 라이브 할 때의 레파토리 구조를 따랐다. 스탠다드 곡들도 넣었고 셀로니오즈 몽크 곡 Let's Cool One 으로 끝냈다. 수년 동안 나는 라이브할 때 몽크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해왔다. 그리고 한 곡 빼고는 모두 헌정 곡이다. 나는 곡을 쓰거나 연주할 때 특정 인물들을 떠올리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곡도 쉽게 써진다. 지금까지 30여 개 가량의 헌정 곡이 있다.


이번 앨범에 담은 곡들 중에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곡이 있는가?

많은 곡이 헌정된 인물들을 그리고 있으므로 사연이 있지만, 3번째 수록곡 West Virginia Rose는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위해 작곡했다. 어머니가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이고 어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꽃을 연상하는 이름 즉, 각각 Florett, Roslyn이라서 제목도 ‘웨스트버지니아 장미’라고 지었다. 가족을 위해서 처음 작곡한 곡이라서 뜻이 깊다.


교육자 입장에서 당신은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거 같다. 당신 제자 중에 브레드 맬다우 등 훌륭한 뮤지션도 많지 않나.


나는 1980년부터 6년간 NEC에서 가르쳤고 뉴욕으로 옮겨와서도 여러 대학에서 좋은 학생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나만의 독특한 교수법을 개발해왔고 가르치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브레드 멜다우외에도 이단 아버슨, 댄 태프너, 레이챌 지, 브루스 바쓰 등 지금 활동하고 있는 정상급 뮤지션들도 내 학생이었다. 

브레드 멜다우는 그가 뉴 스쿨 학생이었을 때 만났다. 마약 습관 때문에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가 훌륭한 메이저 아티스트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던 뮤지션이었다. 


NEC 시절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에게서 배우지 않았나? 당신이 재키 바이어드의  Aluminum Baby연주하는 걸 들은 적 있다. 재키 바이어드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NEC시절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다.


70년대 중반의 NEC는 군터 실러가 학교를 이끌었고 훌륭한 뮤지션들과 학생들이 많았다. 그 시절 NEC를 다녔던 학생들은 지금 클래식계나 재즈계에서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다.

1975년에 재키가 NEC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보스턴으로 갔다. NEC 복도에서 재키와 마주쳤는데, 내가 당신에게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딱 10분간 시간 내주겠다고 했고 나는 바로 그 앞에서 즉석 오디션을 치루었다. 연주가 끝난 뒤는 그는 입학을 허가했다. 

재키 바이어드는 아주 체계적인 선생은 아니었지만 재즈 피아노에 관한 한 백과사전과 같았다. 재즈 피아노 역사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야말로 엄청난 피아니스트였다. 괴팍스럽고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어려운 성격 때문에 실력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그를 존경한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였다. 내가 고전적인 옛 스타일을 연주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의 덕분이다. 오하이오주 시골에서 온 어린 내가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 모교 NEC에 대해서 대단한 애정을 품고 있다.


당신의 바쁜 투어 스케쥴을 보면 경이롭다.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병마(HIV)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 당신이 하는 일들은 무엇인가.


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맨해튼 소호에 산다. 무척 혼잡한 동네이다. 그래서 내 파트너와 함께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별장에서 가끔 쉬다 오곤 한다. 그곳에서 작곡도 하고 산책도 한다. 바빠도 최소한 일 년에 한 두 번은 파트너와 휴가를 보내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는 일이다. 비행기 여행에는 짜증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진이 빠진다. 집에 다시 돌아오면 짐 풀고 빨래하고 다시 곧 짐 싸서 비행기 타고 떠나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줄이기 위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노력한다. 명상이 도움되는데 이번에는 매사추세츠 서쪽에 있는 곳에서 침묵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명상하면 집중을 잘하게 된다. 음악과 명상은 미학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집중을 한다는 면에서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미국에서 재즈는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럽의 재즈신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에서 재즈의 미래, 어떻게 보는가 (미국의 재즈를 다루는 나로서는 뮤지션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재즈가 최근에 와서 비로소 체계화된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기획 면에서도 그러하다. 이 체계화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처음 음악 시작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학생으로서 유명 재즈 뮤지션과 접촉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쟁쟁한 뮤지션들과 같은 장소에서 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연주도 해볼 수 있었다. 지금은 유명 뮤지션들과 접촉하는 것이 옛날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포멀한 세팅을 갖추거나 스승-제자 관계가 아니라면, 혹은 매스터 클래스 등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일반 학생들과 유명 뮤지션들과 만나는 것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일이다. 배우고자 하면 공식 경로를 통해서 다가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예전보다 클럽들의 수가 적어서 연주할 기회가 적어졌다고는 하나,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공연할 수 있다. 유튜브나 다른 인터넷 미디어를 활용할 수도 있고 전통 레이블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음반을 낼 수도 있다. 예술적으로 독립성이 생긴다는 좋은 측면이 있고 스스로 아티스틱 컨트롤을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미국에서 많은 재즈 스타일이 나왔고 지금도 미국은 전 세계에 예술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재즈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NEC와 같이 미국의 선진적인 음악 학교들의 역할이 컸다. 미디어 홍수 시대에 뚜렷한 개성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 뮤지션들이 미국에 많이 있다. 미국의 재즈는 결코 죽지 않았다. 아니 미국 재즈의 장래는 너무나 밝다고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후 저와. 블로그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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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4년 6월호


내 마음속의 52번가. 

찰리 파커의 발자취를 찾아서


Charlie Parker (1920–1955)


맨해튼 타임스퀘어는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밤을 뽐내는 장소일 것이다. 빌딩 외벽을 도배하고 있는 거대한 전광판들은 하도 현란해서 밤거리에 익숙한 도시인들도 낯설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곳과 한 두 블록만 멀어져도 어둡고 삭막한 빌딩 숲이다. 나는 지금 한 블록을 거의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멋 없는 빌딩 앞에 서 있다. 이곳이 70년 전 오닉스 재즈 클럽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 텅 빈 거리가 40년대 비밥의 센터였던 52번가라는 것도 믿고 싶지 않다. 오닉스, 야트, 다운비트, 3 듀스, 패이머스 도어, 스팟라이트, 사모아……타임스퀘어처럼 찬란했던 그 많은 재즈 클럽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황량한 이 거리에 나뒹구는 비닐 봉지마냥 나도 쓸쓸해진다. 

52번가 6번과 7번 애비뉴에 있는 재즈 클럽에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셀로니오즈 몽크, 버드 파웰 등 비밥의 혁명가들이 재즈의 새 역사를 만들었다. 1945년, 찰리 파커는 그동안 실험했던 비밥을 완성했으며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본격적으로 비밥 밴드를 만들어 52번가 3듀스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리우드에 비밥을 알리겠다고 뉴욕을 떠났다가 2년 뒤 다시 이 거리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조던, 토미 포터, 맥스 로치와 함께였다. 찰리 파커의 Bird on 52nd St. 음반은 1948년도 오닉스 재즈 클럽에서의 이들의 라이브 연주를 담고 있는데 몹시 낡은 음질 속에서도 이들의 패기 어린 연주가 또렷하게 느껴진다. 52번가 오닉스 재즈 클럽 자리에서 66년 전 그들이 연주한 52번가 주제곡을 듣고 있는 기분이란!

1945년부터 48년까지 찰리 파커는 완성된 비밥 아이디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테크닉이 무르익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사보이 레코드와 다이얼 레코드에서 녹음된 음반들은 찰리 파커의 빛나는 천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49년에는 52번가 서쪽에 찰리 파커의 별명의 딴 ‘버드 랜드’ 재즈 클럽이 세워지기까지 했으니 52번가의 중심에는 단연 찰리 파커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2번가와 함께 비밥의 메카로 기념해야 할 곳은 할렘에 있는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 클럽이다. 52번가에서 비밥이 발전했다면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 클럽은 비밥이 태어난 곳이다. 


비밥이 발전했던 40년대 맨해튼 52번가 6번 7번 애비뉴(위)과 같은 장소 현재의 모습(아래) 40년대 재즈의 메카였던 이 거리의 재즈 클럽들에서 리 파커를 비롯한 천재적인 뮤지션들이 '비밥'이라는 장르를 창조했다. 찰리 파커가 자주 출연했던 3듀스 재즈 클럽과 오닉스 재즈 클럽의 네온사인이 보인다. 지금은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은 간데없고재 황량한 거리로 남아있다.



52번가를 걸으며 들었던 찰리 파커의 음반. 1948년 7월에 녹음된 오닉스 재즈 클럽의 컴플리트 레코딩(2003년 Definitive Records)이다.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조단, 셀로니오즈 몽크, 토미 포터, 맥스 로치, 얼 롤맨 카멘 맥래 등이 참여했다. 


비밥이 태어난 곳.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


52번가의 재즈 클럽들과는 달리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는 아직도 할렘에 자리하고 있었다. 초창기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지만 그 이름 그대로 할렘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민튼스는 1974년에 문을 닫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6년 비교적 최근에야 재오픈 한 것이었다. 

캔자스 시티 출신의 찰리 파커가 부푼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것이 1939년이었는데, 이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는 그 전 해인 1938년에 세워졌다. 주인장 색소포니스트 헨리 민튼스는 뮤지션들에게 공연료를 지급하는 대신 뮤지션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게 했고 공짜로 먹고 마시게 해주었다고 한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문을 열었기 때문에 아폴로 극장 등 근방의 다른 곳에서 연주를 끝낸 뮤지션들이 그곳에 모여들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애프터 아워 잼 세션에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셀로니어즈 몽크, 케니 클락 등이 주축이 되어 실험적인 스타일들을 시도했는데 기존의 빅 밴드처럼 짜임새 있게 편곡된 음악이 아닌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빠르고 복잡한 임프로바이징을 선보이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이들의 실험성으로 인해 민튼스의 잼 세션은 유명해졌다. 알려진 바와 같이 비밥은 춤곡으로서의 재즈가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중심이 된 예술로서의 재즈를 갈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찰리 파커는 기존의 재즈 스탠다드 자곡이나 블루스를 테마로 하여 춤을 출 수 없을 만큼 빨리 연주하거나 반대로 매우 느리게 연주했는데 복잡한 멜로디를 순식간에 부는 통에 그의 연주를 들은 뮤지션들은 충격에 휩싸이곤 했다. 찰리 파커는 스윙 시대의 끝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3년 가까이 제이 맥산 오케스트라의 대표 주자로 연주해왔지만, 싫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이곳 민튼스에서 재즈를 새로운 예술적 위치에 올려놓겠다는 욕망을 다른 비밥 혁명가들과 함께 꿈꾸었고 성공했다.

새롭게 단장한 민튼스는 예전의 선술집 분위기를 벗고, 명품 요리들을 내세우며 할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변했지만 “역사적인 재즈 명소”라는 정문의 팻말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밥 팬들에게 향수를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남자들은 정장을 입어야 하고 정장을 갖추어 입은 민튼스 밴드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오래전 비밥이 꿈틀댔을 당시의 역동성까지 어떻게 재현할 수 있으랴. 찰리 파커와 같은 천재가 돋보일 수 있었던 그 시기로 우리가 돌아갈 수가 없는데.


1974년에 재정악화로 문을 닫았다가 2006년에 재오픈한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 1938년 세워진 이후 비밥의 태어났던 역사적인 할렘의 명소이다. 문이 닫힌채 방치되어 있는 민튼스 플레이 하우스(아래)와 리모델링 된 뒤 고급 재즈 레스토랑으로 바뀐 현재의 모습(위) 


Koko와 Hot House는 재즈계에 떨어진 원자폭탄.


지금 우리가 재즈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많은 재즈 언어들은 찰리 파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 콜트레인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그에게 각별한 애정이나 존경의 태도를 보이는 데는 인색한 면이 있다. 추측하건대, 파커의 스타일은 ‘비밥’이라는 장르 하나에만 국한되어 다양한 음악적 변신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마약으로 스스로 파멸시켜 버린 35년간의 짧은 생애. 그는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너무나 짧고 병든 삶을 살았다. 또한 그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났던 비도덕성, 비인격성도 그를 향한 거부감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파커는 기존 스윙의 클리세를 벗어나 혁신적인 비밥의 언어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의 재즈 주자들이 그의 연주를 표본으로 삼은 탓에 지금 와서 보면 그의 플레이는 또 다른 클리세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는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9,11,13도 음을 도입하여 풍부한 화성을 만들어 냈고 3도 7도를 반음 내려 사용했던 블루스 음계에 반음 내린 5도 음까지 포함시켰다. 또한 두 개의 코드를 겹쳐서 하나의 코드처럼 사용하고 대리코드도 빈번하게 사용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자연스럽지만 당대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비밥의 스타일을 개척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솔로 방식을 제시한 디지 길레스피, 특이하고 풍부한 화성을 보여준 셀로니오즈 몽크, 변화무쌍한 리듬을 전개한 케니 클락이었는데 찰리 파커는 이들이 지닌 모든 요소를 갖추고 비밥 혁명을 이끌었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비밥 곡들 중에는 스윙 시대에 연주되던 재즈곡의 코드를 그대로 인용하여 새로운 코드를 첨가하고 멜로디를 만들어 다른 곡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많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찰리 파커가 스윙 곡 Cherokee를 연주하면서 그 곡을 구성하는 코드의 윗부분을 구성하는 음들로 연주하며 새로운 화성 전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찰리 파커는 Cherokee의 코드를 이용하여 새로운 멜로디의 곡 Koko를 발표했다. 이 곡은 당시 기준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괴상하고 복잡한 화성과 빠른 연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같은 방법으로 What Is This Thing Called Love 도 Hot House라는 새로운 곡으로 거듭났다. 

Koko와 Hot House는 당시 2차 대전 상황에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처럼 재즈계에 투하된 또 다른 두 개의 원자폭탄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비밥의 고전들이 이 두 곡이 만들어진 방식으로 재탄생되었다. 


사보이와 다이얼 세션, 45년-48년 사이의 명연주들.


찰리 파커의 첫 레코딩은 1940년 제이 맥산 오케스트라와 라이도 방송용 녹음이었다. 찰리 파커의 음반 목록을 일목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SP와 10인치 LP 시대를 거친 찰리 파커의 음반은 하나의 공연 실황이나 전집으로 발매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재즈팬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여러 세션의 녹음을 하나로 묶어 놓았거나 같은 녹음을 편집해 여러 음반에 담아 놓은 것들이었 많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1945년~1948년 사이의 사보이 세션과 다이얼 세션 음반에서 그의 주목할 만한 연주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보이와 다이얼에 남긴 찰리 파커의 녹음은 그가 비밥의 이디엄과 테크닉을 갈고 닦아 리더로서 화려하게 등장한 시기부터 마약중독으로 비교적 덜 망가졌던(?) 최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최상의 연주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보이에서의 명연주 마스터 테이크를 모아 놓은 음반인 Bird/The Savoy Recordings (Master Takes)도 소장 가치가 높은데, 이 음반은 The Charlie Parker Story, Charlie Parker Memorial, The Immortal Charlie Parker 등의 음반으로 일부가 공개되거나 리마스터링 음반으로 나오기도 했다. 사보이에서의 녹음된 전체 곡들은 2004년에 The Complete Savoy Sessions으로 출시된 바 있다. 

사보이 세션이 마일스 데이비스 등 트럼페터가 참가한 퀸텟 구성이라면 다이얼 세션은 트럼펫 뿐만 아니라 테너 색소폰, 트롬본 등 다른 여러 악기들이 더 참여했다. 다이얼 레코드는 찰리 파커가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갔을 때 그들로부터 재즈의 미래를 내다 본 로스 러셀이 설립한 레코드사이다.  사보이 세션이 뉴욕에서만 녹음된 반면 다이얼 세션은 L.A 와 뉴욕 두 군데서 녹음 되었으며 장소에 따라 분위기도 조금씩 다르다.  

다이얼 세션의 모든 녹음을 수록한 The Complete Dial Session (Stash)과 마스터 테이크를 모은 The Legendary Dial Master, Vol. 1 & 2 (Stash),  Bird Lives - The Complete Dial Master (Spotlite), Charlie Parker Story on Dial 1 & 2 (EMI) 등으로 나와 있는데 사보이와 다이얼 세션을 합쳐 놓은 The Complete Savoy & Dial Master Takes (Savoy)도 주목할만하다.


The Complete Dial sessions (1999, Definitive)

The Complete Savoy & Dial Master Takes (Savoy)

1945년에서 48년 사이에 찰리 파커는 사보이 레코드와 다이얼 레코드를 통해 명연주를 녹음했다. 사보이에서의 전 녹음을 담은 Complete Savoy Session (2004, Definitive)


52nd Street Theme

From Complete Onyx Recordings, 1948 at the Onyx Club, NYC.

Featuring: Charlie Parker Quintet with Miles Davis (tpt), Duke Jordan (p), Tommy Potter (b), Max Roach (d); Earl Coleman (v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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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4년 5월호


재키 바이어드를 그리며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다”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 후기


모던 재즈의 거장,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1922-1999)


1999년 2월 11일 오후 11시 40분. 뉴욕 주 퀸즈의 한 가정집에서 백발의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총알은 머리를 관통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노인의 두 딸이 그 집에 함께 있었지만 아무도 총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도 없었고 범행에 쓰인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면식범에 의한 소행이 아닐까 추정될 뿐 미제로 남아있는 이 사건. 이른바 모던 크리에이티브를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날 또 한 명의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를 잃어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 리포트는 더는 업데이트 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끔찍한 사고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 같다. 적어도 그를 주제로 지난 4월 13일 열린 "재키 바이어드의 삶과 음악에 관한 심포지엄"에서는 말이다. 


봄볕이 따사로웠던 4월 둘 째주 일요일 오후, 나는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 씨의 브룩클라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약속 시각보다 좀 일찍 도착했지만, 그는 봄날에 어울리지 않은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두른 채 일찌감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안부를 묻자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너무 슬프다"고 짧게 답했다. 노약자용 워커에 몸을 의지하며 힘겹게 집을 나서는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키 바이어드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흘렀지만, 그의 슬픔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슬픔에 잠긴 그와 함께 재키 바이어드의 심포지엄이 열리는 우스터로 향했다. 1시간 남짓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이 백발의 거장을 울게 하는 재키 바이어드는 진정 누구인가. 내가 들어왔고 느꼈던 그를 넘어서 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그를 사로잡고 있단 말인가. 랜 블레이크 씨는 슬픈 목소리로 이따금 “오…재키…."하며 혼잣말로 탄식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 했으므로.


"미 서부 우스터에서 열린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


우스터의 알든 메모리얼 홀에 도착하자 여러 뮤지션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이날의 패널인 조지 쉴러, 쳇 윌리엄스 외에도 랜 블레이크와 오랜 친분이 있는 많은 뮤지션들이 블레이크 씨 주변에 모여들었다. 재키 바이어드는 시간과 장소의 장벽을 거두고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뮤지션들은 올뮤직가이드 등에 실린 짧은 바이오그라피로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바이어드의 삶과 음악의 내밀성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었다. 재키 바이어드의 음악은 여전히 이곳 뮤지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현실적인 범위에 있었는데, 그의 교육자로서의 커리어가 큰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재키 바이어드는 69년부터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NEC)에서 15년간 아프로 아메리칸 뮤직을 가르쳤고 코네티컷주로 옮겨 하트 음대, 그리고 89년부터 사망하기까지 10년간은 뉴욕의 맨해튼 음대에 몸담았다.


2014년 4월 16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열린 모던 크리에이티브의 거장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의 모습.

이날 심포지엄에 함께 동행한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 전학장,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 그는 함께 연주활동을 해온 생전의 바이어드를 그리며 시종 비통해하였다. 랜 블레이크는 재키 바이어드를 위한 헌정곡으로 Only Yesterday를 연주했다. 


“재키의 연주를 듣는 것은 수도꼭지를 틀고 피아노의 모든 물줄기를 듣는 것과 같다. 즉, 제임스 존슨에서 세실 테일러까지 물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린다” 

-1999년 재키 바이어드 장례식에서 평론가 게리 기든스의 추모사 중


재키 바이어드는 자못 생소한 연주자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주는 희열을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뿜을 듯 다소 불만스럽고 퉁명스러운 눈빛을 담은 검은 얼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연주, 때로는 오른손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왼손으로는 색소폰을 부는 이색적인 모습, 대부분의 악기를 고차원으로 다루기에 어렵다고 난색을 보이는 뮤지션에게 호통치는 그의 모습 등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게 배우는 뮤지션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 앞에 가면 얼어버렸다. 혁신적인 작곡가였고 위대한 이론가이자 임프로바이저였던 재키 바이어드는 치팅하는 뮤지션에게는 거짓말쟁이! 라고 화를 내며 가차 없었지만 진실한 연주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는 한 마디로 비밥 혁명 이후에 “어떻게 재즈를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위대한 교육자였다. 1967년 군터 실러, 랜 블레이크, 조지 러셀이 주축이 되어 클래시컬 뮤직의 명문 NEC에 처음 재즈 교육이 시행되고 1969년에는 재키 바이어드에 의해 아프로아메리칸 뮤직과(課)가 개설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재즈 교육의 모델로 평가되어온 NEC. 그 중심에 또한 재키 바이어드가 있었으니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즈 교육의 또 다른 파이오니어 랜 블레이크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십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그토록 슬퍼하고 있는지도 헤아려볼 수 있을 듯하다. 랜 블레이크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재키와 함께했던 날들이 어제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며 Only Yesterday를 연주했다.


모던 재즈에서 아방가드의 영역까지 재키 바이어드의 연주 스타일은 광범위하고 진보적이었다. 그의 바이오그라피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몰아서 정리했다. 그의 음반을 한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유튜브에서 그를 찾아보기를 당부드린다. 유튜브에서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Aaluminum Baby를 타이핑하면 2012년 NEC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빅밴드 곡을 제일 먼저 찾아볼 수 있는데 바이어드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가 얼마나 멋지게 이 곡을 해석하는지도 지켜볼 수 있다. 지금부터는 우스터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가 주최한 재키 바이어드 심포지엄에서 재키 바이어드에 대한 패널들의 회상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다”

“나는 재키가 이끌었던 빅 밴드 아폴로 스톰퍼스(the Apollo Stompers)에 참여했고 그와 트리오를 한 적도 있었다. 모두 두려운 경험이었다. 재키와 함께 연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레슨을 받는 것과 같다. 우리 트리오는 찰리스 탭이라는 아주 비좁은 클럽에서 연주했는데, 재키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차선을 바꾸어 출구로 나가는 사람처럼 종횡무진 연주를 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재키의 아름다움이었다. 재키가 뭘 할지 모르고 어떤 식으로 변화를 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의 모든 연주는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매년 몹시 추운 2월에 노쓰 다코타주의 비스마르크 시에서 연주하곤 했다. 비스마르크 재즈 축제 기획자 로이 앤더슨 씨가 20년 동안 변함없이 재키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95년에 재키와 함께 비스마르크 재즈 축제에서 연주했고 곧이어 파르고 시로 이동해서 트리오로 다시 협연했다. 매일 영하 20도의 기록적인 추위에도 그는 연주를 감행했는데 그 즈음해서 그는 미네소타주 둘러스에서 솔로 콘서트를 하러 떠났다. 그곳은 영하 35도였다. 그는 자신의 연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키가 NEC에서 가르치고 있었을 시절, 나는 MIT방송 WMBR에서 재즈 방송을 진행했는데 어느 주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재키 바이어드 페스티벌을 기획한 적이 있다. 총 15시간이었는데 이 시간 동안 재키의 곡만 틀었다. 웬만한 것은 다 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와인 2병을 들고 재키를 인터뷰하러 갔다. 그때 인터뷰했던 카세트 테이프를 얼마 전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그가 어린 시절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술회하였는데 잊히지 않는 말은 “네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든지 간에 당신이 있는 그곳이 재즈가 태어난 장소이자 원천”이라는 것이다.” 

-조지 쉴러(George Schuler, 드러머, 군터 쉴러의 아들)- 


“의도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스윙이다.”

“NEC에서 재키와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테크닉이 모자라서 재키가 가르칠 수준은 못되었다. 그의 이론교육은 몹시 까다로워서 힘겨웠다. 나는 플루트를 연주했는데 재키는 보이싱을 가르쳤다. 어느 날 레슨을 받으러 갔는데 재키가 드뷔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2초 뒤에 리듬 체인지를 하는 것이었다. 음악적 컨셉과 관련해 나는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재키는 스윙에 여러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스타일로서의 스윙이 있고, 필(Feel)로서의 스윙, 그리고 의도(intend)로서의 스윙이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무슨 종류의 음악이던지 간에 의도가 있으면 그것이 곧 스윙이라고 말했다. 재키는 그 개념을 몸소 실천했는데 그는 클래식과 재즈 모두 똑같은 기쁨이자 똑같은 아름다움으로 생각했다. 재키 바이어드는 재즈계의 찰스 아이브스(모던 클래식의 혁신적인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불과 4마디에서 조차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제이미 바움(Jamie Baum, 플루티스트)-


“재키가 NEC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969년부터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학교의 모델이었고 여러 세대 학생들에게 아직도 그 영향을 느낄 수가 있다. 찰스 아이브스와 같은 음악, 다양한 종류의 곡을 다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스윙은 물론 무조음악을 했고 노래도 했으며 모든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화해내는 뮤지션은 별로 없다. 재키 바이어드는 학교의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해냈으며 NEC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방향을 잡아줬다.”

-켄 쉐포트스 (Ken Schaphorst, NEC 재즈와 학과장)-


재키는 시끄럽게 굴어서 연주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사람들이 너무 떠들면 피아노 위에 채터링 티스(Chattering teeth,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엽기 치아)를 두 개 올려놓고 태엽을 감아 다다다닥 소리를 내게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챗 윌리엄슨(Chet Williamson, WICN 라디오 진행자)-


찰스 밍거스와 에릭 돌피, 재키 바이어드가 함께한 음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와 같이 나도 그렇게 스윙을 하고 싶었다. 재키의 연주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 때가 1975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재즈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많지 않았고 NEC는 선두에 있었다. 재키가 NEC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리고 NEC 복도에서 재키와 마주쳤는데 그에게 “나는 지금 신시내시티에서 보스턴까지 운전해서 왔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에게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좋아, 딱 10분만 시간 내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 앞에서 연주를 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좋아, 입학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보스턴으로 이주해 왔다. 

-프레디 허쉬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의 제자)-

*허쉬의 이 말은 에단 아버슨 씨와의 인터뷰에서 인용한 것임.


<재키 바이어드의 음악 세계>


재키 바이어드는 1922년 6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Worcester)에서 태어났다. 우스터의 마칭 밴드에서 연주하던 아버지,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트럼펫, 색소폰 등 여러 악기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들은 베니 굿맨, 러키 밀린더, 팻츠 월러에 심취했고 뮤지션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커머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가서도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스트라빈스키나 쇼팽을 비롯해 많은 클래시컬 작곡가들과 재즈 하모니를 연구했다. 플로리다에서 군 복무 하던 시절에는 어린 캐논볼 애덜리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46년 군대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이어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보스턴 지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페리(Ray Perry)와 연주하는 것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 고든(Joe Gordon), 샘 리버스 (Sam River)와 함께 보스턴 지역에서 비밥 밴드를 만들어서 투어했고 보스턴 북쪽 린(Lynn) 지역의 뮤직 라운지에서 색소포니스트 찰리 마리아노(Charlie Mariano)와 함께 3년간 정규 공연을 펼쳤다. 비밥이 태동했던 뉴욕과 가깝지만 음악의 변방이었던 보스턴에서 재키 바이어드는 찰리 마리아노, 허브 포메로이(Herb Pomeroy)등과 함께 이른바 '보스턴 비밥'을 태동시켰고 이끌었다. 바이어드는 1952년부터 3년간 색소포니스트 허브 포메로이스 밴드에서 연주했고 재키 바이어드가 참여한 허브 포메로이 밴드의 음반은 1958년 Progressive Jazz 레이블을 통해 Herb Pomeroy and His Orchestra : Band in Bostond와 Life is a Many Splendered Gig 으로 발매된 바 있다. 1959년부터 61년까지는 트럼펫터 메이나드 퍼거슨(Maynard Ferguson)과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바이어드는 솔로 피아노 연주 활동에도 열정을 보인다. 그래서 재키 바이어드가 처음 발표한 리더작도 솔로 연주 앨범인  Blues for Smoke (1960, Candid)였다. 이 앨범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이어드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1962년부터 64년까지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활동하며 밍거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Impulse!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파이브 밍거스)와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를 녹음했으며 밍거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떠난다. 

바이어드는 찰스 밍거스 외에도 에릭 돌피, 부커 더빈, 로랜드 커크, 샘 리버스의 사이드 맨으로서 중요한 레코딩들을 녹음했는데, 이 중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1960, Prestige)는 모던 재즈의 최전선에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 밴드로 유럽 투어를 했고 (1965년) 1967년에는 엘빈 존스와 연주했다. 70년에 들어서 밍거스 밴드에 다시 합류해 유럽 투어를 했다.  

재키 바이어드는 60-70년대에 괄목할 만한 리더작들을 남겼는데  Live! At Lennie's Vol.1 & 2 (1965, Prestige), Freedom Together (1966, OJC), Sunshine of My Soul (1967, OJC), Jaki Byard with Strings (1968, Prestige), The Jaki Byard Experience (1968, OJC)는 60년대에 발표된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재키 바이어드의 데뷔작인 솔로 앨범 Blues for Smoke. 보스턴을 떠나 처음 비밥의 메카 뉴욕에서 녹음했던 작품. 클래시컬 뮤직과 고전적인 재즈의 분위기를 발랄하고 개성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음반은 녹음은 1960년에 되었지만 89년이 되어서야 출시되었다. 


The Jaki Byard Experience. 1968년 프리스티지에서 발표된 음반으로 뉴올리언즈 스타일, 비밥, 프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재키 바이어드 쿼텟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수작이다. 


재키 바이어드와 랜 블레이크, 써드 스트림의 거장들이 함께한 피아노 듀엣 앨범. On Green Dolphin Street 스탠다드 곡부터 여러 자작곡들에서 이들의 깊이 있는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재키 바이어드가 참여한 찰스 밍거스의 64년도 음반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Impulse!). 


 

70년대 들어 바이어드는 솔로, 혹은 듀오 등 소규모 그룹으로 녹음을 많이 했는데 공연할 때는 피아노를 치면서 트럼펫, 색소폰을 불거나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등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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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4년 4월호

진정한 향유가 있는 곳, 그곳엔 재즈 클럽이 있다.

릭(Licks)은 세익스피어 경구처럼 아름다운 것




지금 나는 여행 중이다. 맨해튼 레스토랑 로우(Row)의 한 식당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주문한 애피타이저를 기다리면서 연신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만 동시에 내 귀는 이 식당을 메우고 있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식당이나 카페에서 흐르는 마일스의 음반들은 59년 Kind of Blue라든가 Relaxing, Cooking 내지는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음반 등 주로 50년대 중 후반 이후의 앨범들이 많은 편인데, 지금 이 식당에선 마일스의 40년대의 초기 연주들이 흐르고 있다. 때로는 빅밴드 스타일, 때로는 소규모 편성 속에서 빠르고 흥겹게 그의 연주가 흘러나온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Donna Lee를 콧노래로 따라부를 수 있는 이 기쁨이란! 낡은 음질이지만 어둠 속에서 매처럼 번득이는 마일스의 눈매가 그대로 느껴진다. 무대의 붉은 조명이 그 눈매를 비춘다면 청중은 심장이 멎을 것이다. 조명 속 그의 눈매를 보았던 그 시대 청중이야말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 중 하나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 이곳을 떠나면 나는 재즈 클럽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마일스처럼 강하든 강하지 않던 연주자들의 모습과 연주를 직접 체험할 것이다.


맨하탄 재즈 클럽, 55Bar. 3월 16일, 이날은 기타리스트 빅 주리스의 공연이 열렸다. 작고 허름한, 오직 연주자와 청중을 위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재즈 클럽이다.  


위대한 컨텀포러리 임프로바이저들의 향연, 데이브 리브맨, 마크 코플란드, 리치 바이락.

 

지난 이 주간 나는 몇 군데의 재즈 클럽에서 인상적인 연주를 들었다. 

데이브 리브맨과 마크 코플란드 듀엣, 리치 바이락과 제이미 바움 듀오, 론카터, 도널드 해리슨, 빌리 콥햄 트리오, 빅주리스 트리오와 차세대 신인 트럼페터 암브로즈 아킨시뮤레와 월터 스미스 3세 퀸텟 등 모두 이 시대 내로라하는 재즈 뮤지션들이다. 또 하나의 이 시대 위대한 기타리스트 빅 주리스와 색소포니스트 암브로즈 아킨시뮤레의 음악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다. 

데이브 리브맨과 마크 코플란드의 공연은 3월 15일 케임브리지 시 릴리 패드에서 열렸다. 데이브 리브맨에 대한 나의 애정은 거의 추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음악을 들을 때 마다 금욕적인 태도로서 일체의 음악적 허영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석적으로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음악은 그 자체가 이론이자 그 이론을 벗어나 있다. 나는 그의 79년도에 발매된 Dedlication(헌정) 음반을 특별히 좋아한다. 이 음반에는 리브맨의 음악적 동지 피아니스트 리치 바이락을 위한 “The Code’s Secret Code”과 2차 세계 대전 당시 트리블링카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100만명의 사람들에게 헌정된 “Treblinka”이 수록되어 있다. 무겁게 시작되는 현악기들의 인트로를 지나가다보면 리브맨의 서정적인 멜로디에 이른다. A-B-C-A 구성으로 주멜로디의 변주가 계속 이어지다가 섹션 B에서는 전 악기가 퍼커시브 필링으로 리드미컬한 하모니를 자유분방한 느낌으로, 섹션 C에 이르러서는 리치 바이락과 데이브 리브맨이 인상적으로 교감한다. 리브맨의 곡들은 대단히 치밀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음반에서와같이 무겁고 비극적인, 때로는 서정적인 메세지들이 있다. 이번 마크 코플랜드와의 듀오 역시 탄탄한 짜임새를 바탕으로 재즈가 커뮤니케이션의 음악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최근 발매된 프레디 허버드와 줄리앙 라지의 Free Flying 음반과 같은 일종의 완벽에 가까운 커뮤니케이션처럼. 마크 코플란드의 페달을 많이 쓰는 아르페지오에 내재된 깊은 그루브를 타고 리브맨의 소프라노 색소폰은 좁은 공간을 박차고 나갈 듯 저돌적이면서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그의 음악이 지닌 특유의 지성미, 특유의 칼러는 즉흥 연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며 청중의 귀 속으로 이내 스며든다. 

3월 6일 케임브리지 레가터 바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리치 바이락 콘서트도 리브맨과 같은 맥락 즉, 하모니, 멜로디, 리듬, 톤, 칼러 등에 있어 끊임없는 혁신성을 보여주었다. 이날 리치 바이락의 연주는 불과 열흘 전후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의 공연은 매우 드물었고 따라서 그날 그의 청중이 된 것이 행복했다. 크로매티즘 이론을 집대성한 데이브 리브맨의 저서 A Chromatic Approach to Jazz Harmony and Melody에는 그에게 영감을 준 리치 바이락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사가 고스란히 적혀 있는데 이들 두 사람, 데이브 리브맨과 그의 동지 리치 바이락을 열흘 간격으로 만났던 것은 나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바흐에서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크로매티시즘은 진화를 거듭해왔지만 짧은 재즈의 역사 속에서 임프로바이징의 지평을 넓혀주는 요소로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데이브 리브맨, 리치 바이락과 같은 위대한 컨템포러리 임프로바이저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는 재즈 클럽, 그리고 나의 핫하우스 재즈 클럽.

 

어느 수요일 밤, 빌리지 뱅가드나 55Bar와 같은 재즈 클럽에 혼자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재즈 클럽에 나는 주로 혼자 간다. 공연장은 여럿이 가는 것을 즐기지만 재즈 클럽 만큼은 혼자가 좋다. 진정한 의미에서 무대의 주인공이 재즈 뮤지션이 되는, 오직 퍼포먼스가 중심에선 그러한 재즈 클럽말이다. 이왕이면 테이블 차지가 있는, 그 테이블 차지나 티켓 수익이 뮤지션들에게 돌아가는 그러한 클럽 말이다. 뮤지션이 중심이 되고 청중이 중심이 되는 그곳에서 음식이나 음료 따위를 즐기는 나의 미각은 이차적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 연주는 연주, 음식은 음식. 콘서트홀에서 좋은 연주를 듣고 나이스한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거나 인터미션 때 샴페인을 먹는 것은 기꺼이 즐기지만, 재즈클럽에서 이러한 식감에 대한 교감을 누군가와 나누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저런 재즈 외의 화제들로 분위기를 나누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내가 누군가를 재즈 클럽에 데려왔다면 그 또는 그녀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데 이 상황을 또한 피하고 싶다.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나는 혼자가 좋다. 그 음악이 좋던 아니던 그 누구보다 진지한, 좋은 오디언스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십 오년 전 홍대에서 재즈 클럽 핫하우스를 오픈했을 때를 기억한다. 작은 클럽이었지만 충분한 바가 있었고, 테이블에서도 혼자 앉아 음악을 듣는 청중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때론 테이블을 쉐어 했고 과묵하게 음악에 집중했다. 나는 그러한 청중들을 좋아했다. 나는 그 때 핫하우스의 훌륭한 젊은 뮤지션들과 청중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젊은 뮤지션들은 지금은 쟁쟁한 중견 뮤지션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 때의 청중들 또한 지금의 나처럼 어디에선가 깊이 음악을 즐기고 있으리라. 그때 나는 클럽 구석의 오피스에 조용히 앉아서 무대와 청중을 번갈아 바라보며 음악을 듣곤 했다. 당시 티켓료는 공연에 따라 적을 때는 삼천 원 많을 때는 만 원 정도 했었는데 처음에 반발이 많아서 모 커뮤니티에 ‘안티 핫하우스’가 카페로 개설되기도 했다. 그들은 공연이 중심이 되는 클럽을 도무지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또 다른 챌린지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안티카페는 몇 주가 안되어 사라졌고 청중들은 묵묵히 티켓료를 지불했다. 다행히 그 카페는 몇 주가 안되어 사라졌고 청중들은 묵묵히 티켓료를 지불했다. 좋은 청중들이 클럽으로 모여 들었다. 그것은 나의 챌린지가 성공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내 클럽에서 연주자는 존 케이지 이상의 실험을 할 수도 있었고 스트라빈스키를 연주하는 윈튼 마샬리스처럼 클래시컬 할 수도 있었다. 신인 뮤지션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했고 그래서 낮에는 항상 오디션이 있었다.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 가면 지금처럼 재즈 클럽에 혼자 갈 것이다. 혹시 재즈 클럽에서 혼자 마티니를 마시며 연주를 듣고 있는 묘령의 여인이 보인다면 그녀가 대단히 프라이빗한 재즈 아피시아나다(aficionada)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릭(Licks)은 세익스피어 경구처럼 아름다운 것, 론 카터, 도널드 해리슨, 빌리 콥햄 트리오.

 

도널드 해리슨, 론 카터, 빌리 콥햄 트리오의 연주는 데이브 리브맨의 공연이 열리기 이틀 전인 3월 13일 케임브리지 레카터 바 재즈 클럽에서 열렸다. 이들 트리오는 10년 넘게 투어해왔고 이날도 전통적인 포스트 비밥 튠을 연주했다. 여든을 향해 가는 베이시스트 론 카터는 하얀색 포켓 스퀘어와 블랙 수트를 입고 등장했다. 론 카터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했던 Sorcerer나 E.S.P, Nefertiti 음반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All Alone, Peg Leg를 비롯한 그의 리더작이라던가 소위 포스트 마일스 이후의 활동은 기대에 미흡했던 부분이 있다. 심지어 그가 시도했던 바흐의 곡들이 미흡했노라 그 스스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든 적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론 카터의 전성기를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보기 위해서 300마일을 달려갈 수도 있다. 행여 명성에 기대어진 과장된 평가를 받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가 오랫동안 이 세상에 남아 연주를 들려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을 튕길 때마다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유난히 긴 손가락, 다크 브라운 업라잇 베이스, 블랙 수트, 그의 미소 모두를 사랑한다. 

그는 오랫동안 솔로를 한다. 대다수의 청중들은 중장년층이었는데 그들을 향한 팬서비스, 이를테면 You are My Sunshine 같은 곡을 10여 분 넘게 홀로 연주하는 것은 그의 의도대로 성공적인 팬서비스였다. 그러나 나는 아는 곡이 나온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음악적 조크로 받아들이는 것, 끊임없이 웃는 청중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로 중간에 느닷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조크를 발견했을 때 잠시 웃고 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연주자가 의도하는 한, 그가 괜찮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청중들의 태도 역시 그들 음악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그들의 음악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 

빌리 콥햄, 이 시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로서 그의 명성을 한 번에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와 론 카터는 대단히 잘 어울렸다. 그는 자기의 화려한 드럼 솔로를 한 번만 보여줬지만, 매곡 마다 나는 그가 없었더라면, 없었더라면…이런 생각을 했다. 그와 론 카터는 대단히 잘 어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론 카터는 콥햄의 73년도 데뷔 음반 Spectrum에서부터 함께 했었다. 퓨전 재즈 명반이라고 할 수 있는, 콥햄의 모든 것이 총 망라되어 있는 이 기념비적인 음반에서와 같이 그의 연주는 록과 재즈의 그 모든 보케브러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단히 복잡한 드러밍을 선보인다. 이 날 연주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노장 드러머의 모습에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 뉴올리언즈 출신의 기품있는 색소포니스트 도널드 해리슨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스트라이프 수트에 붉은 색 포켓 스퀘어를 가슴에 꽂고 정중한 태도로 연주를 했다. 그의 연주가 엄청나게 새로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최소한 뉴올리언즈의 전통에서부터 비밥까지 재즈 색소폰이 지닌 향수를 듬뿍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연주는 이제 막 50줄에 들어선 그의 나이만큼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많은 연주자들이 그들의 릭(licks)을 연주한다. 혹자는 클리세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 모든 연주가 릭으로만 이루어졌다면 모르겠지만 솔로에서 적절한 릭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릭을 들을 때 나는 세대와 세대로 이어져가는 전통과, 그것을 만들고 만들어진 것을 연습해왔던 연주자의 땀방울을 고스란히 느낀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 세익스피어의 경구나 적절한 사자성어처럼 효과적이다. 특히 색소폰 주자에게서 이따금 보여지는 찰리 파커의 릭은 눈물나게 아름답다. 콜맨 홉킨스의 아름다운 명 솔로에서 아이디어를 뽑은 릭도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것은 재즈의 랭귀지이고 보케브러리 중 하나이다. 

이 트리오 그룹은 적절한 릭을 사용하면서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이들의 오랜 호흡, 무시할 수 없는 연주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들의 연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로비에 잠시 앉아 있었는데 도널드 해리슨이 내게 다가왔다. “당신이 사진 찍는 것을 보았다. 내게 보내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그의 고향 뉴올리언즈의 재즈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론 카터가 그를 부르며 다음 공연을 상기시킬 때까지 20여분.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나, 미스터 카터, 미스터 콥햄은 우리의 본능으로 교감한다. 예술에 대한 열망이 있는 장소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낸다. 이 재즈클럽의 많은 청중들에게 나는 그 열망을 읽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죽을 때까지.

피아니스트 리치 바이락, 3월 6일 케임브리지 시 레가터 바의 공연. 

데이브 리브맨

데이브 리브맨(우)와 마크 코플란드(좌). 3월 15일 케임브리지 시의 릴리 패드 공연. 이들 음악이 지닌 특유의 지성미, 특유의 칼러는 즉흥 연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론 카터와 도널드 해리슨. 3월 13일 케임브리지 시 레가터 바에서의 트리오 공연. 이들은 무시할 수 없는 오랜 연주 경험에서 비롯된 감동을 청중들에게 선사했다. 

론 카터, 도널드 해리슨과 함께 10년 넘게 투어를 해왔던 드러머 빌리 콥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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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4년 3월호


"어느 겨울, 위험한 외출"

카쓰 자렛, 카네기홀 솔로 콘서트를 고백하다.






우리 삶의 여정의 중간에서 나는 어두운 숲 안에 던져진 나를 발견했다. (단테 '신곡)


오늘의 이 글은 오직 감성의 고백일 뿐이다. 이것은 일기장에 쓰여야 마땅하다. 나는 2월 5일 카네기홀 이삭 스턴 오디토리엄을 떠올리고 있다. 


#.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고서 민첩한 동작으로 카네기홀 로비로 들어선 그녀는 예약증과 표를 바꾸기 위해 줄을 선 무리를 제치고 곧장 공연장 객석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1층 정중앙 좌석 넘버 P108로 향했고 먼저 앉아 있던 P106과 P105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들은 그녀가 들어가기 쉽도록 기꺼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그들에게 “땡큐”라고 했고 그들은 미소를 지었는데 저도 모르게 감추었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터져 나올 듯 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키쓰 자렛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동질감, 그리고 이 공연이 가져올 감동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여유의 미소가 그들에게 번졌다. 그녀가 눈인사를 끝내고 좌석에 앉는 순간, 그녀는 이제 오직 청중 넘버 P108으로만 존재한다. 그녀는 P108로 명명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공연이 시작되면 그녀의 신체 활동은 제한되고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있는 상념들도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 그녀는 이날 아침, 올해 들어 가장 막강하게 불어 닥친 눈보라를 뚫고 보스턴 사우스 스테이션에서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맨해튼 중심부에 도달할 때까지도 폭풍은 멈추지 않았고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열차처럼 기차 밖 풍경은 그저 황량하기만 했다. 그녀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콘체르토 No.1을 귀에 꽂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이 얼어붙은 정경과 더없이 잘 어울렸으며 그녀의 열정을 북돋워 줄 엑스터시로써 가슴에 꽂혔다. 기차가 코네티컷 주를 통과할 무렵 그녀는 격정에 휩싸였던 마음을 잠시 거두고 키쓰 자렛 솔로 연주들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발라드를 떠올렸다. 매끄럽게 물결치는 바다 위의 배, 그 위에 누워있는 듯한 요동침이 그의 발라드에 담겨 있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듯 지속적으로 표출되는 루바토. 그의 루바토는 프레이즈 끝에 어떤 감동이나 뉘앙스를 제시하기 위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곡 전반에 걸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73년 솔로 콘서트의 Bermen에서와 같은 운동성을 몹시도 사랑했다. 그 느릿한 호흡이 만들어내는 리듬의 변화들, 4/4, 3/8, 3/4 다시 4/4와 2/4로, 그리고 7/8, 5/6으로.  그  비트는 밤의 호흡처럼 긴장과 이완으로 요동치는 것이며 종국에는 물결처럼 잔상으로 남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운동성에 미치도록 연루되고 싶었다. 그 판타시에서 그녀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경계해왔으며 설령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마냥 질주하고 싶었다. 그 질주를 위해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것을 조금씩 비우기로 했다. 즉, 허가되지 않은 뺌샘, 즉 <인간Home -이성 Logos = 짐승>. 짐승으로 허락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조금씩만 천천히 빼면 될 것이었다. 키쓰 자렛은 음악을 찾아 더할 것이고, 그녀는 뺄셈을 시작할 것이다. 뺄셈은 하강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키쓰 자렛과 교감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 공연이 시작되기 2시간 전 그녀는 카네기홀 건너편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롱 아일랜드산 프레시 오이스터와 마크햄 샤르도네 와인을 주문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카네기홀 건물은 맨해튼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보수를 위한 철기둥이 처마를 이루고 있었다. 앙상하게 붉은 뼈마디를 드러내고 있는 구조물 뒤로 오늘의 공연을 말해주는 키쓰 자렛의 포스터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저 가는 철골들은 지금 그녀의 설렘과 환희를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일종의 잔해로 느껴질 것이다. 질척한 속살을 내뱉은 오이스터 껍질처럼.



#. 청중은 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다른 연주자들보다 나에게는 청중이 필요하다. 다만 청중이 이 일을 하기만을 원할 뿐이다. Try to concentrate.

청중 넘버 P108, 그녀는 무대를 응시했다. 자렛식 음향 무대는 그녀의 이차적 쾌락이다.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자 그녀의 기관들은 침묵한다. 그녀는 어둠의 숲 절벽 위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며 그녀의 앞 뒤, 좌우는 오직 낭떠러지일 뿐이다.  



#. P108은 선율의 윤곽을 그려본다. 키쓰 자렛은 결코 토널 센터로 진입하지 않는다. 그는 일련의 아이디어를 끝내기가 무섭게 새 아이디어를 등장시켰다. 그는 패턴 없는 무조를 즐긴다. 종국은 없을 듯 음들을 연기시켜 나가다가 마침내 파열시켜 버린다. 내부의 음들이 안정적인 탐험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P108은 긴장감에 잠시 몸을 떤다. 10여 분 간의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이 끝난 뒤 키쓰 자렛은 가스펠적으로 Pt.2에 진입했다. 명료하게 스타일을 부여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P108은 잠시 이론적 레퍼런스들을 떠올리고 싶은 유혹에 빠졌지만, 계속 로고스 뺄셈을 이어가려 노력한다.

Pt.2가 끝난 뒤 키쓰자렛은 무대를 잠시 거닐다가 좁은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잠시 세운 것을 깜빡한 사람처럼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섭게 질주한다. 비현실적인 속도감이 P108의 억눌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미궁 속으로 빠지려 하기 직전에 그는 느닷없이 연주를 끝내버린다. 2분간의 질주는 애를 태웠다. P108은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곡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그는 거세게 발리듬으로 탭하며 그루브를 만들었고 그녀는 멜로디에 짓밟히는 느낌 마저 들었다. 그녀 대신 자렛이 신음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그가 눈부시게 로맨틱한 멜로디로 Pt.5를 시작하자 P108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부상당한 그녀의 몸을 누군가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몹시도 슬퍼졌다. 그 음악적 마조히즘이 섬뜩해서, 그녀는 어서 빨리 어둠의 절벽 위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 단지 피아노 한 대와 내가 무대에 있을 때, 나의 육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연스레 알고 있다. 내 왼손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꿈꾸는 더 나은 플레이를 위해서, 내 손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에너지와 인스퍼레이션, 이것은 과도한 인풋이 되어 내 육체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내가 연주할 때 왜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 아웃풋이 필요해서이다. 음악에 심취하면 열정이 나를 끌고 갈 뿐이다.

키쓰 자렛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뒤 길게 손을 뻗어 피아노를 치곤 한다. 프레이즈를 날렵하게 순식간에 해결할 때, 주술을 읊듯 반복적인 뱀프로 리듬의 모멘텀을 만들어 낼 때에도 이 몸짓을 보인다. 어깨 밑으로 깊게 떨구어진 머리는 그 어떠한 것도 응시하지 않는다. 오직 스트레칭 하듯 길게 뻗은 팔이 독특한 보이싱을 이루는 손가락을 지탱하고 있다. 이윽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면 변화 없는 뱀프를 그만두고 몸을 주욱 끌어올린다. 그리고 천천히 길게 호흡을 내뱉고 들이마시면서 새로운 음들을 꺼내 보인다. 그에게 그루브는 육체적 경험이다. 



#.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그녀는 비로소 어두운 사위를 돌아다 본다. 펭귄처럼 긴밀하게 붙어있던 개별자의 군상이 사라지고 있다. P106이 멋진 공연이 아니었냐고 말을 걸어온다. 그녀는 미소 짓는다. P106은 친구와 함께 뉴욕과 반대편 콜로라도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왔다. 그는 일본인으로 생각했다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의 말대로 키쓰 자렛을 좋아하는 아시안은 거의 일본 사람들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공연 전 32번가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순두부를 먹었다. 또 다른 개별자 P109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다는 듯 말없이 앉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진을 찍기 위해 일어나자 그녀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건넨다. 그들 모두 중년의, 더 이상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향유할 줄 아는, 파국적 경험을 가진, 거리낌 없는 탐험이 가능한, 강박적 열정에 관대한 존재.

P108. 그녀에게 주어진, 쾌락을 위한 외출의 시간이 이제 끝나가고 있다. 



#. 음악은 허공에 있는 것을 찾던지 못 찾는 것이다. 쏟아지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 일은 그 감정을 다 풀어내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몰랐었다. 내가 연주하면 내 손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저절로 알고 있다. 나는 머리로 지시하지 않는다. 내 본능에 나를 맡길 뿐이다. 나는 무의식으로 음악의 경지를 이룬다. 

자렛은 왼손으로 아르페지오 하며 코드를 깨어낸다. 그러다 5th로 10th로 루트를 명시해가며 클래시컬 레퍼토리를 끌어들린다. 선정성은 격조 있는 패턴들로 가장한다. Pt. 8, Pt.10, Pt.11에서 그의 번민이 느껴진다. 그는 두 개의 곡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 한다. 프레이징에 대한 센스를 남용하며 완결되지 못하는 시도를 감추기도 한다. 그의 실연(失戀)은 P108 그녀에게 조용히 간파된다. 그녀는 그가 쏟아내는 하모니 뭉치의 끝단을 주르륵 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독단적인 그를 벗기고 해체하고 그의 순진성을 가늠하고 싶어진다. 그의 과잉된 본능이 한낱 장식으로 무마되기도 할 때 그녀는 오히려 희열을 느낀다. 기교에 완전히 도달하지 않은 악기로 인해 그녀를 심란케 했던 앨범 No End를 떠올리며, 그가 확신 받고자 다가올수록 복종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 그러나 결국 P108은 그로부터 이식된다. Over the Rainbow로 앙코르곡을 마무리할 때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결국, 그 인간적인 멜로디는 무조성에 대한 그의 사유와 샤먼적 본능을 강조시키는 장치이다. 그는 그녀에게 결여된 것을 상기시켜 주었고, 그녀는 자렛에게 이 청명한 카네기홀이라는 지정학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녀는 노회하나 그녀보다 더 오래 영원히 살아남을, 그 육체에 위탁된 멜로디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걸려들었지만 세속의 뺄셈으로는 규범의 논리와 완전히 결별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온전히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녀 존재의 본질적인 허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초연히 무대 뒤로 사라진 뒤에도 우물 밑바닥 물빛처럼 축축해진 어둠의 객석에서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좌석에 앉는 순간, 그녀는 이제 오직 청중넘버 P108으로만 존재한다. 그녀는 P108로 명명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공연이 시작되면 그녀의 신체 활동은 제한되고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있는 상념들도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키쓰 자렛은 결코 토널 센터로 진입하지 않았다. 그는 일련의 아이디어를 끝내기가 무섭게 새 아이디어를 등장시켰다. 키쓰자렛의 2006년 카네기홀 솔로 콘서트의 모습. 


맨해튼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보수를 위한 철기둥이 처마를 이루고 있는 카네기홀. 이 붉은 철골들은 지금 그녀의 설렘과 환희를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일종의 잔해로 느껴질 것이다. 


2월 5일 카네기홀에서 열린 키쓰 자렛의 솔로 콘서트. 자렛식 음향 무대는 그녀의 이차적 쾌락이다. 


*상기 언급된 키쓰자렛의 코멘트는 지난 달에 열린 NEA재즈 마스터스 어워드에서 키쓰자렛의 인터뷰를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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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탐미 <2회>  재즈피플 2014년 2월호


"재즈의 정치로 꿈꾸는 미국"


영웅의 탄생



사막의 메마른 먼지를 뚫고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련의 사람들은 총성과 함께 갈팡질팡 흩어졌다. 뜨겁게 김 오른 아지랑이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총구는 가슴에 흐르는 피를 쥐어 막으며 주저앉은 사내를 향한다. 승자의 처분을 기다리는 이 자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다. "키드, 너였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가쁜 숨을 내쉬는 사내를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긴다. 와중에 다시 모여든 사람들은 총집을 매만지며 뒤돌아선 남자가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준다. 뉴멕시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그 이름은 빌리 더 키드. 주인 없는 초지, 무법의 서부에서 횡포한 권력과 악을 징벌하고 가난한 개척자들을 지키는 자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서부로 몰려든 자들에게 그는 이제 정의의 사도로 불린다.


미국의 전설적인 총잡이 '빌리 더 키드'에 대한 나의 묘사가 우스꽝스럽고 천편일률적으로 느껴졌다면, 이제 미국의 위대한 작곡가 아론 코플란드의 1938년 발레작품 '빌리 더 키드'를 감상하기 바란다. 넓은 대평원, 개척지의 거리, 밤의 카드 게임, 권총 싸움 등 빌리 더 키드의 삶의 장면들이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생기를 얻게 되는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척박한 서부의 땅을 일구는 자들의 삶의 무게를 공감하며 절로 가슴이 먹먹해질 터이다. 총잡이들의 싸움이 묘사되는 작품 'Gun Battle'에 이르러서는 악기들의 긴박함에 마음을 졸이며 21명을 죽였다는 실존했던 이 범법자가 시대의 영웅으로 미화되는 것의 불편함 조차 망각하게 된다. 한낱 총잡이의 이야기는 음악이라는 고차원의 예술과 만나 '아메리칸 스피릿 미학'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개척정신의 유물인 서부의 총잡이들은 미국 사회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영웅 이미지의 원천이다. 미국 사회가 깔끔하게 면도한 단정한 스타일보다는 반대 이미지의 거친 영웅을 선호해 온 것도 과거의 개인주의와 개척 정신이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임을 암시하는 비공식적 찬양이나 다름 없는데 작품 '빌리 더 키드'가 미국의 작곡가에 의해 미국적 소재로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발레극이라는 역사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한 미국의 총잡이에게 주어진 미학적 가치도 계속될 것이다.

(전설적인 서부의 총잡이 빌리 더 키드는 1859~1881년까지 살았던 실존 인물로 미국 문화 예술계에서 시대의 영웅으로 미화되어왔다.)



미국이 요구하는 재즈의 정신


존 콜트레인 탄생 60주년이던 1987년 9월 23일, 미 하원에서는 '재즈는 미국의 국보 (Jazz: A National American Treasure)' 결의안이 통과됐다. 재즈가 미국의 근대 문화유산 가치로 공식화된 것이다. 이 결의안은 민주당 소속 존 콘여스 주니어 의원이 발의했고 같은 당 알랜 크랜스턴 의원의 후원한 것으로 같은 해 12월 4일 상원에서도 채택되었다. 그리고 20년 뒤 영부인 미셀 오바마의 당찬 발언으로 상기된다. 2009년 6월, 오바마는 이례적으로 백악관에서 재즈 워크숍을 개최했고 "재즈는 미국 고유의 예술 형식(Jazz is America's indigenous art form)"이라 강조하며 재즈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재즈가 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미셸 오바마,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에 빠져 있는 버락 오바마. 이들 재즈 애호가 커플이 백악관에 입성해 "재즈야 말로 가장 민주적인 음악"이라 칭송했을 때 미국 재즈계가 얼마나 감동 일색이었는지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집권을 위해 마지막 박차를 다했을 때에도 재즈계는 오바마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12년 10월 9일 뉴욕 심포니 스페이스 극장의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을 보라. 오바마 재선을 위한 기금 모금 콘서트 'Jazz For Obama'에는 짐 홀, 론 카터, 조 로바노, 브레드 멜다우, 캐니 배런, 디디 브리지 워터, 캐니 가렛,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등 내로라한 재즈 뮤지션들이 총 집합해 오바마를 외쳤다. 오바마는 이렇게 응답한다. "재즈는 다양한 목소리와 생각을 담으며 불협화음 조차 그 안에서 예술이 된다."


재즈의 이미지는 국가 내부적으로 9.11사태 이후 위기에 직면한 문화적 다양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복잡한 국제 정략 속에서 초강대국 지위를 지속시켜야 하는 오바마의 과제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진취성과 용기를 상징하는 개척정신이 미국의 전통적 시대정신이었다면 모든 인종과 계급이 사회적 이익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수용 원칙, 이른바 '재즈 정신'은 미국의 새로운 소명이 되었다. 지난해 시리아 내전과 관련한 기자회견 중 오바마의 즉흥 발언에 당혹감을 느낀 세력이 "즉흥은 재즈의 덕목이지 대통령의 자질이 아니다"라며 비아냥거린 것도 '재즈적인 오바마'를 다소 침통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개척정신이 총을 필요로 했다면 재즈의 정신은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필요로 한다. 개척정신이 보수의 이미지로 차용되었다면 재즈정신은 진보의 가치로 표상됐다. 개척정신의 이면에 내포된 탐욕과 파괴를 윤색(淪塞)할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존의 가치. 나는 이것을 미국의 재즈 정신이라 부르고 싶다. 


      

(오바마를 예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패러디 작품들 : 미국 재즈계는 오바마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재즈의 정신은 오바마가 추구하는 국가적 목표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빌 프리셀, 미국 재즈의 지평을 넓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을 주목해야 한다. 그야 말로 미국 정신의 계보를 독창적인 자기 언어로 담아내는 가장 미국적인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빌 프리셀이 추구하는 스타일의 다양성(diverse)과 음악의 뿌리(root)에 대한 탐구는 포크, 컨트리, 블루그래스, 록, 재즈를 포괄하는 이른바 '아메리카나(Americana)'스타일 창출로 이어진다. 장르의 외피를 벗고 미국을 탐미하려는 그의 시도는 92년 작 <Have A Little Faith> 앨범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세기와 20세기,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북부와 남부라는 미국의 다양한 역사, 문화적 층위를 포괄하였으며 앞서 언급했던 총잡이 Billy The Kid 7부작을 비롯하여 스티브 포스터, 찰스 아이브스, 존 필립 수자, 밥 딜런, 머디 워터스, 마돈나, 존 하이아트, 소니 롤린스의 곡을 미국이라는 거대한 주제 속으로 통합시켰다.


(빌 프리셀의 92년 작 Have A Little Faith는 미국 정신의 계보를 빌 프리셀의 독창적인 언어로 담아낸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빌 프리셀의 빌리 더 키드는 작곡가 아론 코플란드의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Mexican Dance and Finale와 Prairie Night에서는 과감하게 임프로바이징을 펼치고 있으며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원곡과는 다른 개성 있고 독특한 질감을 준다. 코플란드가 장엄한 하모니로 스케일 큰 영웅을 표현하려 했다면 프리셀의 빌리 더 키드는 감성적이고 천진난만한 청년의 느낌이다. 빌리 더 키드 외에도 미국의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미국 현대 음악의 아버지 찰스 아이브스의 작품 <뉴잉글랜드의 세 장소>중 첫 번째 "The Saint-Gaudens' In Boston Common(보스턴 코먼에 위치한 성 가우든스)" 를 실었는데 이곳은 남북 전쟁에서 싸웠던 흑인 병사들의 연대기가 새겨진 장소로서 미국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상징한다. 빌 프리셀은 이 곡을 발췌(excerpt)의 형식으로 두 개로 나누었고 양 곡 사이에 밥 딜런의 'Just Like A Woman', 머디 워터스의 'I Can't Be Satisfied', 마돈나의 'Live To Tell'을 배치하여 곡이 주는 메세지 효과를 높였다. 마돈나의 히트곡 'Live To Tell' 은 빌 프리셀에 이르러 역경을 딛고 살아남은 자에 관한 거대한 서사시로 새롭게 태어나는데 클라이막스로 치달아가는 10여 분은 이 앨범의 백미이기도 하다.

'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국가)','God Bless America', 'America, the Beautiful' 등과 함께 미국의 애국심 고취 음악으로 선두에 꼽히는 아론 코플란드의 Billy The Kid와 독립 기념일 퍼레이드의 주 레퍼토리인 존 필립 수자의 행진곡 Washington Post March이 시사하듯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애국의 메타포이다. 애국의 메시지는 웃통을 벗은 채 질주하는 아이들을 담은 앨범 표지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사진은 작가 러셀 리가 1941년 미국 서부 오레건주의 작은 도시에서 열린 미국 독립 기념일 달리기를 찍은 것이다. 창공에는 빌 프리셀의 딸인 모니카 프리셀의 손글씨로 '신념을 지녀라(Have a Little Faith)'는 제목이 달려있다. 이 제목은 존 하이아트의 곡 이름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 중 하나인 'Faith'를 연상시킨다. 이 외에도 리듬 체인지 대표 곡중 하나인 소니 롤린스의 No Moe를 비롯해 When I Fall In Love (빅터 영),  Little Jenny Dow (스티브 포스터), Have A Little Faith In Me (존 하이아트),  Billy Boy 등 지난 125년 미국 음악사의 스타일리시한 포인트를  빌 프리셀의 독특한 사운드로 표현해낸 것이다. 


Have a Little Faith 앨범 이후에도 빌 프리셀은 미국이라는 텍스트를 적극 활용한다. 때론 시골 농부의 일상을 파고 들기도 했고 (Disfarmer, 2009) 서부 영화의 내러티브를 차용하기도 하였으며 (Go West : Music for the Films of Buster Keaton, High Sign/One Week 95년), 컨트리 음악을 모티브로 지역의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Nashville, 1997) 


지난 해 발표된 앨범 빅 서(Big Sur)는 자연과 교감하는 유니크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빅 서는 산타 크루즈와 산타 바바라 사이의 90마일에 달하는 장대한 미 서부 해안으로 1937년 1번 해안 도로가 완성된 이후에도 개발이 제한되어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으로 남아 있다. 빌 프리셀이 몬터레이 페스티벌 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이 아름다운 서부 해안을 음악으로 만들려했을 때의 목표도 순수 그 자체의 자연이었다. 이를 위해 스트링 앙상블인 858 사중주 - 제니 샤인맨(바이올린), 에이빈트 강(비올라), 행크 로버츠(첼로), 루디 로이스턴(드럼)과 함께 빅 서의 자연 속에 머물면서 광활한 해안 절벽의 바람과 동물들의 울음 소리까지 깊이 귀 기울였다. 장엄한 북태평양 바다를 묘사하거나 제압하기 위해 그 어떤 과장된 인위적 사운드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컨트리 포크 느낌의 진솔함으로 담담하게 자연을 풀어내고 있다. 적어도 빌 프리셀의 음악에서 자연은 더 이상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정복되거나 파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공유하고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다. 

빌 프리셀의 진정한 능력은 오랜 수련 과정을 통해 다듬어온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내공의 음악을 보여준다는 것이며, 이는 북미 대륙의 자연적 토양분을 저 심연의 끝에서부터 받아들인 토착민의 영혼을 소유한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빌 프리셀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위대한 스토리텔러이자 미국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태도이다. 그래서 그가 아메리카나와 접합될 때 미국 재즈의 지평은 빅 서처럼 광대무변해진다. 만고 끝에 서부에 다다른 개척자들이 북태평양 빅 서를 앞에 두고 느꼈을 환희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빌 프리셀의 최신작 Big Sur의 모델이 된 미 서부해안 '빅 서'의 모습.  사진: 김홍기 hongkirang.kr




(빌 프리셀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위대한 스토리텔러이자 미국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태도이다.)


posted by jazzlady

재즈 탐미 <1회>  재즈피플 2014년 1월호


 "이 시대 현자들에게 재즈의 길을 묻다”


“재즈의 유령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렉싱턴의 유령’이 출간됐던 1997년. 나는 운명적으로 재즈에 감당해야 할 몫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러 일을 벌였었다. 친구들이 한창 취업 준비에 바쁠 때 나는 하고 싶던 재즈 디렉터와 출판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 속 재즈를 듣는 노인처럼 한없이 고독했다. 노인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수 만장의 재즈 콜렉션을 렉싱턴의 저택에 쌓아두고 있었다. 노인이 없는 저택에서 하루키는 재즈를 들으면서 매일 밤 언뜻언뜻 유령과 조우한다. 재즈와 고독이 만들어낸 유령이다. 나는 지금 그 소설의 무대가 된 렉싱턴 근방에서 살고 있다. 렉싱턴 한복판을 지날 때마다 이따금 그 유령들이 나를 엄습하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재즈를 향한 연민이라는 유령일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 나는 여러 번 재즈의 유령들을 만났었다. 가장 강력했던 것은 8년 전 여름이었다.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가 송두리째 무너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과 찬란한 재즈의 유물들이 속절없이 죽어갔을 때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상흔은 처참한 것이었다. 재난을 맞고 수개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뉴올리언스 사람들은 정신을 차려볼 수 있었다. 퓨너럴 밴드가 고장난 악기들을 고쳐 모아 거리 행진을 하며 뉴올리언스의 부활과 재즈 뮤지션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부르짖었다. 그 날 신들린 듯 연주했던 퓨너럴 밴드는 도시 구석구석 숨어있던 재즈의 유령들을 기어이 불러내고 말았으리라. 8년이 지난 지금도 뉴올리언스는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대공황을 연상시킬 만큼 강력했던 서브프라임 경기 침체 후유증. 재즈 클럽들을 비롯해 많은 비즈니스가 문을 닫고 전 국민이 경제적인 근심에 쌓여 있는 동안에 재즈는 번민하는 불법 체류자들처럼 그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기 힘겨워했다. 미국 대통령이 에스페란자 스팔딩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퇴근길에 NPR 재즈를 듣는다고 해서 미국이 재즈의 천국이 아니라는 것 쯤은 이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충심의 재즈 매니아들은 이런 종류의 사색이 많아졌다. 재즈는 미국이 전 세계에 준 선물이라는 말이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미국에서 재즈가 희망이 있는 것일까? 

나는 유러피언 전통 음악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스타일을 창작해 내는 유럽의 많은 재즈 뮤지션들과 중소 레이블들을 경탄해 마지않는다. 언더그라운드 재즈 뮤지션들이 바르톡의 미크로코스모스를 임프로바이징의 모티브로 삼는다던가 하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재즈 바이올린의 선구자 조 베누티의 후예 답게 이태리 음악 학교의 어린 학생들은 고사리손으로 스트링 재즈를 연주한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메이저까지 필드 곳곳을 골고루 채우고 있는 지적인 청중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프랑스 출신의 클라우드 볼링이 미국의 원조 래그타임을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뉴올리언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듯도 하다. 클라우드 볼링은 듀크 엘링턴 추종자로 지금까지 나온 앨범 60여 장의 거의 절반이 래그타임, 부기우기와 빅밴드 스타일로 채우고 있다. 누가 볼링을 크로스오버 뮤지션이라고 못 박았단 말인가?


이번 ‘양수연의 재즈탐미’ 연재를 통해서 운이 좋으면 미국에서 재즈의 희망에 관한 사색들이 어떤 종착점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내 글에는 재즈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이를테면 공연이나 앨범 감상 소감 따위라든가 뮤지션들과의 인터뷰가 난데없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재즈에 관한 나의 짧은 지식을 늘어놓는다던가 어떤 거창한 주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러분이 재즈 매스터들에 대한 무한 경외를 노골화하는 것에 반감을 갖지 않고 행간을 관통하는 아이러니들을 발견한다면 난 행복할 것 같다. 


지난 몇 주간 나는 훌륭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서로 다른 공연 두 개를 감상했다. 하나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키스 자렛 트리오 공연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보스턴의 소극장 ‘릴리 패드’에서 열린 색소포니스트 제리 버곤지의 쿼텟 공연이었다. 개성이 강한 이 두 공연을 서로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나의 변별된 느낌 만큼은 이러했다. 키쓰 자렛이 득음의 유희가 펼쳐지는 세상 너머 속 비현실적 나를 실감케 했다면, 제리 버곤지는 그의 독창성이라는 맹렬한 무기를 방패할 것인지 파고들 것인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는 역동적인 나를 체험케 했다. 키쓰 자렛이 자연법을 따르도록 정교하게 조각된 신의 창조물이라면 제리 버곤지는 자유와 희망을 논하는 입헌 국가의 수장과도 같았다. 나는 이 두 명의 재즈 매스터들에게 이 시대의 재즈의 길을 묻고 싶었다. 이들은 모두 훌륭한 음악으로 답을 할 터이지만 나의 미흡한 능력이 요구하건대 나는 내 눈앞에 보여질 인품과 적절한 언어의 뉘앙스가 필요했다. 교육자로서도 존경받는 버곤지는 그것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뮤지션이었다. 그렇다면 키쓰자렛은?


“음 2개만 잘 쳐도 좋겠다”

키쓰 자렛 트리오 결성 30주년 공연에서.


(키쓰 자렛 트리오의 30주년 기념 콘서트가 열리기 직전의 무대 모습)



12월 11일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키쓰 자렛 트리오 공연은 트리오 결성 3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지면에서 그들의 긴긴 30년 여정을 풀지 못하고 공연을 잠깐 스케치하고 마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자렛은 이날 말을 많이 했다. 지난 30년간 연주의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고, 팬들이 성원해준 탓에 30년 주택 모게지를 다 갚았다며 우스갯소리들도 늘어놓았다. 처음 공연장에 데리고 왔다는 손녀딸 둘을 위해 첫 곡은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 캐럴로 시작했고 1, 2부에 걸쳐 Answer Me, My Love / Autumn Leaves / I Loves You Porgy / One for Majid / Fever / The Ballad of the Sad Young Men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 God Bless the Child 등의 순서로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연주했다. (자렛이 곡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키쓰 자렛의 팬으로서 어떻게 의미를 두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키쓰 자렛 트리오의 팬이라면 예전에도 연주되었던 이 스탠다드 곡들이 어떻게 카네기홀을 울렸을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매 곡들은 양질의 내용으로 충족되어 있었고 결핍을 찾기 어려웠다. 키쓰 자렛의 개성은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어서 나는 심장에서부터 솟구치는 희열을 자근자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청중들에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자렛이지만 이날 뉴욕에서는 관대해진 것일까. 2008년 보스턴 공연에서도 누군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무대를 박차고 나가서 다시 나오려 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날은 청중들의 태도 따위는 잊은 듯했다.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휴대폰 카메라도 개의치 않았고 곡을 막 끝내어 심호흡을 내뱉기도 전에 실없이 소리 지르는 청중에게도 고개를 획 돌려 관심의 되물음을 건네기도 했다. 많은 커플들이 상대방 어깨에 기대어 편안히 보는 바람에 객석 곳곳이 데이트 공연장처럼 V자 모양이었다. 그래, 재즈의 메카, 자유로운 뉴욕이니까.

인터미션이 끝나고 2부가 시작되자 자렛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우리 점잖고 무뚝뚝한 게리 피콕이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더 마시고 왔는지 조금 흥분해서 저에게 훈계하더군요. 2부 공연에서는 청중들을 그냥 확 보내줘 버릴 연주를 하자고 하면서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나가서 음 2개만 잘 쳐도 좋겠다고 대답했죠”

이 말이 끝나고 연주한 곡이 가수 페기 리의 히트곡 “Fever”였다. 속웃음이 나왔다. Fever는 주 멜로딕 아이디어가 “피, 버!”하는 음 2개가 아니던가. 이 곡은 코드 시퀀스가 없는 지극히 단순한 멜로디로 이루어졌고 다만 베이스 리프와 “피, 버” 음 두 개만이 생동감을 줄 뿐이다. 멜로디 자체는 밀가루 솔틴 크래커처럼 심드렁해서 가사가 들어간 파퓰러 음악이 되어야만 제법 맛있게 들린다. 자렛은 펑키한 리듬에 맞추어 변형 없이 Fever 멜로디를 연주했다. 자렛은 충실하게 스케일을 연습하는 학생처럼 화려한 기교 대신 마이너 팬터토닉 안에서 담백하고 또렷하게 솔로를 이어갔다. 나는 자렛의 지나치게 겸손한 ‘음 두 개(just two notes)’ 발언에서 그의 음을 향한 fever를 읽었다. 자렛이 왜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푸가적인 악곡이나 대위법적 악곡들에도 심혈을 기울이는지 나로 하여금 다시 성찰하게 했다. 키쓰 자렛은 공연 내내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최근 Somewhere 앨범에 불완전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수록되기 바란다고 말했던, 진실한 자아를 보여주고자 하는 자렛의 열망과도 맞닿아진 메시지였다. 음 하나하나의 고유성을 탐미하고 기본을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뮤지션들의 영원한 숙제이며, 음결합의 이치는 다름아닌 자신의 진실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제리 버곤지, “재즈는 진화했지만 청중은 진화하지 않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금빛 악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허름한 자주색 파커를 걸어 놓고 색소폰을 꺼내 들자 비로소 깊고 잘 생긴 제리 버곤지의 눈매가 도드라져 보였다. 적막의 한기를 깨고 몇 호흡 불어 사운드 체크를 끝낸 뒤에야 그의 얼굴에 여유가 번졌다. 10여 명의 청중이 릴리 패드 소극장에 모여 앉았다. 매주 월요일 밤, 드러머 루써 그레이(luther gray), 베이시스트 윌 슬래이터(Will Slater), 트럼펫터 필 그레나디어(Phil Grenadier) 등 젊은 유망주들이 그와 함께 한다. 진보의 임프로비제이션 현장에서 서로의 영혼을 탐색하는 이들이기에 몇 사람이 지켜보던 그 무대는 뜨거웠다. 키쓰 자렛이 청중들에게 개념을 요구한다면 제리 버곤지는 뮤지션들에게 개념을 요구한다. 제리 버곤지는 끊임없이 다양한 뮤지션들을 탐색해왔고 그의 주변에는 늘 젊고 유능한 뮤지션들이 그와 플레이 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 시대 위대한 교육자로서 늘 재즈의 미래를 고민하는 위치였다. 미국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이미 교과서나 다름없는 그의 이론서 <인사이드 임프로비제이션> 시리즈는 진보하는 재즈의 모든 것들이 차근차근 담겨있다. 제리 버곤지의 명성은 일찍이 데이브 브루백 쿼텟에서 활동했던 70년대 (73~75년, 79년~81년)에 전 세계에 알려졌고 2000년 이후에만 그는 스무 장에 가까운 앨범을 발표했다. 최근 앨범 Three For All, Shifting Gears, By Any Other Name은 버곤지의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수작들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감상 풍토에 대해 애석함을 드러냈다. 삶과 재즈는 진화되어 왔지만 청중은 진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예술혼이 안고 가야 할 일종의 비애였다. 공연이 끝난 후 그는 남루한 자주색 파커를 걸친 채 곧장 어둠의 거리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꿈을 꾼 듯 하였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찬란한 광채의 금관(金管)악기였던가, 아니면 이 시대 예술의 영토를 고민하는 금관(金冠)을 쓴 고독한 왕이었던가. 

그와의 일문일답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소극장 릴리 패드의 무대에 선 제리 버곤지.)



-. 당신은 다양한 뮤지션들과 그룹을 만들어왔는데 지금 멤버들을 누구인가.

‘제리 버곤지 쿼텟’은 어디서 연주하느냐에 따라서 멤버가 달라진다. 고정 멤버는 없지만 드러머 안드레아 메첼루티(Andrea Michelutti), 베이시스트 데이브 산토로(Dave Santoro) 등 핵심 멤버가 있고 네 번째 멤버는 달라지는데 필 그레나디어와 같은 훌륭한 트럼펫터도 있고, 내년 3월에는 색소포니스트 딕 오츠(Dick Oatts)와도 연주할 예정이다. 난 앨범 <Shifting Gears>에서처럼 퀸텟 구성을 좋아한다. 나는 내 음악에 방향과 개성을 주기 위해서 최대한 많이 연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앨범 <Any Other Name> 매우 인상적이었다. Giant Steps를 비롯해 여러 스탠다드 곡들을 콘트라팩트로 작곡했는데 느낌이 정말 새롭다. 작곡할 때 어떤 점들은 염두에 두었나?

이런 스타일의 작법에서는 스탠다드 코드 체인지에 이따금 오리지널 튠과 아주 다른 강한 바이브와 멜로디를 작곡한다. 그러면 대단히 새로운 방식으로 임프로바이즈 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듣는 이들도 새롭고 신선하게 들리게 된다. Giant Steps가 원곡과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 당신의 앨범 상당수가 대부분 당신이 작곡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최근 앨범 Shifting Gears나 Any Other Name에는 트럼펫이 있는데 다른 혼의 멜로디도 작곡하는가? 이 두 앨범에 참여한 트럼펫터 필 그레나디어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필 그레나디어는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의 베이시스트 래리 그레나디어와 형제임)

그렇다. 나는 작곡할 때 두 개의 혼(horn)을 위한 멜로디를 각각 작곡한다. 테마 부분 혼 하모니는 임프로바지잉이 아니라 작곡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테너 색소폰과 트럼펫 주자들의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에 트럼펫터와 연주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그래서 두 개의 혼을 위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트럼펫터 필 그라나디어는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사운드를 가진 대단히 훌륭한 뮤지션이고, 그와 연주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사람들이 곧잘 콜트레인과 당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세대의 모든 뮤지션들이 존 콜트레인과 그의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콜트레인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 중에는 음악을 쉽게 쉽게 듣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즉, 내 음악을 제대로 듣지 않고 그냥 자기가 알고 익숙한 뮤지션과 비슷하다고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내 음악을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세계의 고유한 아이디어와 감정을 가지고 연주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 연주할 때 당신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리고 음악적으로 영감을 받는 요인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연주하고 있는 밴드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는다. 물론, 연주자들은 자기 악기만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 홀의 어쿠스틱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모든 연주공간은 다르다. 이것에 대해 정말 할 말이 많다. 사운드 엔지니어들이야말로 뮤지션들의 유일한 적이라고 생각한다.


-. 재즈의 지난 역사를 보았을 때 재즈는 진화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창의적인 음악 작품들은 난해해서 대중의 외면을 받는 경향이 있다. 재즈가 가야 하는 길이 있는 것인가?

삶과 모든 예술이 진화하듯 재즈도 진화했지만, 청중만큼은 진화하지 않았다. 예술을 써포트할 돈이 없는데 어떻게 청중이 진화될 수 있겠나? 청중도 교육되어야 진화가 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아티스트는 뭘 해야 하나? 아메리칸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알아듣기 쉬운 음악을 해야 하나?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때 나는 속으로 웃는다. 그들이 어떻게 이 우주, 이 음악을 이해하겠는가? 우주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느껴야 하는 것이고 본능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수준 낮은 마인드로 고차원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아티스트 수준으로 마인드를 끌어올려야 한다.


당신은 보스턴에서 태어났고 현재 보스턴에 정착해 있는데 이곳은 재즈 환경은 어떠한가.

나는 뉴욕에서 5년간 살았고 77년 내가 태어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데이브 브루백과 1년에 200회를 투어했기 때문에 사는 곳이 별 의미가 없었다. 보스턴은 학생 타운이다. 많은 학생이 음대를 졸업하고 그들의 상당수가 뉴욕이라는 재즈의 진짜 세계로 떠난다. 보스턴은 현실이 아니다. 학생들은 그들만의 거품 생활을 할 뿐이다. 학교에서 인정받는 것과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졸업 후 프로 세계로 뛰어들어야 현실이 보인다.


최근 들어 유럽의 재즈 신에 대한 관심이 높다. 사람들은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예술성 있고 독특한 스타일의 재즈도 각광받는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견해를 듣고 싶다.

유럽에서 예술이 더 각광받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청중의 질도 더 좋다. 일반인들은 뮤지엄에 가기를 즐기고 클래식과 재즈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왜? 그들의 교육에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정부 차원에서 예술을 적극 지원해주는 않는가? 미국은 좋은 무기만 잘 만들고 있다.


-. 당신은 교육자로서도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뮤지션들이 당신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데, 재즈 뮤지션들이 해주고 싶은 말은?

너 자신을 믿어라. 네가 숨만 쉬어도 의미 있다. 음악이 곧 마스터이고 우리는 모두 학생이다. 음악은 너무나 큰 존재이다. 음악은 우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신성한 삶의 원칙을 공부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진심으로 대해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또 상상해라. 예술은 많은 희생이 따른다. 인생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 다른 것을 해서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1월에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 스튜디오에서 7 Rays를 녹음할 것이다. 이 곡은 하나의 테마로 연결되는 여러 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또 3월에는 딕 오츠와 "A Granny Winner”라는 앨범이 새번트 레코드(Savant records)에서 발매될 예정이고, 2015년에는 Riggamaroll의 발매가 예정되어 있다. 



(제리 버곤지는 이 지역 젊은 재즈 뮤지션들의 롤 모델이 되왔다. 트럼펫 유망주 필 그라네디어와 함께.)


(‘릴리 패드’는 보스턴에 몇 안되는 예술 전문 소극장으로 현관문을 열면 바로 무대와 직면한다.)


여러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새로운 멜로디 하모디 구성으로 편곡한 앨범 By Any Other Name, 2012, Savant Records.


드라마틱한 솔로의 진수를 보여 주는 수작, Shifting Gears, 2012, Savant Records.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