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전자 회로가 귀로 진입하는 듯 난해한 재즈가 있는가 하면,


러스틱한 티포트의 내음처럼 노스탤지어의 재즈가 있는가 하면,

봄날 아침 여인의 향기처럼 관능적인 재즈가 있는가 하면.......


만일 당신이 낡은 레코드 속 옛 여가수가 바스르르 떨며 부르는 노래를 듣기 소망한다면, 본인을 죽은 싱어의 사회의 이탈자로 자각하길 나는 바란다. 만일 당신이 어느 날 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그 바스르르 떨리는 곡조와 애절한 노랫말에 몸을 한껏 맡기기를 원한다면, 죽은 싱어의 사회 이탈자로서 본인을 대견하게 생각하길 나는 바란다. 옛가수의 음성처럼 슬픈 진동과 슬픔의 노래들은 청승맞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된 세상. 유행과 첨단기술과 피상적 기교를 앞세운 싱어들이 주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직도 낡은 레코드판 앞에서 숙연해지는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 역시 그 슬픈 떨림의 노래들을 듣기 위해 낡은 레코드를 꺼내곤 한다. 바디 앤 소울(Body and Soul)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는 곡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명연주를 남겼지만, 나는 리비 홀맨의 ‘바디 앤 소울’을 특별히 생각한다. 그녀는 1930년 미국에서 처음 ‘바디 앤 소울’을 부른 가수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가사는 무대 위 리비 홀맨의 실크 나이트 가운 속으로 파고들듯 애절하기만 하다. ‘바디’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당시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되기도 했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동시에 원한다는 갈망의 노래이다. 


1920대~30년대에 그렇게 바스르르 떨며 울듯 노래하며 사랑을 갈망하고 실연의 슬픔을 불렀던 가수, 즉, 리비 홀맨, 루쓰 에팅, 헬렌 모간과 같은 가수를 ‘토치 싱어(torch singer)’라고 한다. 그들은 블루스의 감성을 빌렸지만, 대부분 백인 여인들이었고 유대인이었다. 그녀들은 갱들이 운영하는 뉴욕의 나이트클럽이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인기를 누렸다. 몸에 붙어 흐르는 얇은 드레스를 입고 넋 빠진 듯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들의 낡은 사진은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다. 그녀들은 배우이자 가수이자 댄서이기도 했고 아름다운 몸과 목소리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재즈 스탠다드들이 그런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토치송들이다. "Can't Help Lovin' Dat Man" (1927), "Lili Marlene" (1938), "One for My Baby" (1943), "Cry Me a River" (1953), The Man That Got Away (1954), "Here's That Rainy Day" (1959), Don’t Explain(1946), Glad to be Unhappy(1936), Just A Friend(1931), The Man I Love(1924), Stormy Weather(1933), Night And Day(1932), Skylark (1941), Angel Eyes(1946)……


사랑에 대한 슬픔은 사랑에 대한 찬미와 다른 말이 아니다. 토치송은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음악이다. 그 중심에는 치명적인 로맨티시즘이 있다. 보답이 없어도 좋으니 떠나지만 말아 달라는 그 구차함, 사랑 앞에서 무방비가 될 수밖에 없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의 간절함을 그 백인 여인들이 아니었으면 자본과 물질의 단맛 쓴맛을 톡톡히 맛보고 있던 그 시대에 누가 주류 미국인들의 애간장을 단숨에 녹일 수 있었을 것인가? 이후의 애니타 오데이, 페기 리, 줄리 런던이 국민 가수로서 로맨티시즘의 한 자락을 꿰어잡을 수 있었던 것도 초기의 토치 싱어들의 공로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토치 싱어계의 숨은 여왕은 따로 있다. 백인이 아니었다. 어둡고 탁한 세계에서 엄청난 감성으로 토치송을 업그레이드시킨 그 여인. 토치송을 재즈 스탠다드로 만드는데 기여한 여인. 그녀가 없었더라면…….빌리 홀리데이,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은 떠올리기 싫다. 토치송은 그녀의 부름으로 인해 더욱 깊고 고결해졌다. 그녀가 부른 Mean To Me는 성숙하고 깊어서 그녀가 스물 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 한다. 루쓰 에팅이 1928년 처음 불렀던 Love me or Leave me가 그저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라면 홀리데이는 이별을 통보받기 직전 이제야 속내를 꺼내 보이는 냥 비장하기만 하다.


(1930년, '바디 앤 소울'을 처음 노래한 리비 홀맨)


비련의 노래들은 결백을 주장한다.


비련의 노래들은 결백을 주장한다. 노래의 이면에는 내가 희생자임을 주장한다. 삶의 고통 한복판에 놓여왔던 홀리데이가 평생을 두고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떨림 하나하나는 영혼을 울린다. 그녀의 노래는 문장처럼 음으로 발언하고 회화처럼 풍경을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유산은 로맨티시즘의 패러다임을 배우라는 것이다. 비애는 창법으로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삶을 다해 통째로 그 비애를 받아들이고 맞서야 한다. 빌리 홀리데이는 상처로 점철되었으나 전사적인 기질을 동시에 가진 강한 토치 싱어이다. 그녀가 Cry Me A River를 부를때의 비장함을 보라. 내가 당신보다 더 흐느껴 울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냐, 나보다 더 울어봐라……. 홀리데이의 비통이 절절히 느껴진다. 유년기의 창녀 생활, 결혼의 실패, 마약……. 불우한 그녀의 삶이 노래 곳곳에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랑에 목말라했으나 사랑을 획득하지 못했던 홀리데이는 분명 결백한 희생자이다. 


'바디 앤 소울'을 처음 불렀던 리비 홀맨 역시 격정의 삶을 살았다.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녀 스스로 선택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세 번의 결혼, 그중에 한번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했고,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그녀들은 결핍된 어떤 것들을 비련의 노래로 표현했다. 그녀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숙제를 줬다. 토치송을 제대로 부를 수 없다면 그대는 과연 훌륭한 싱어인가? 토치송을 한 곡이라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과연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윤리의 잣대로 빌리 홀리데이와 리비 홀맨의 삶의 여정을 평가절하시킬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낸 숙제에 관한 우리의 답이 과연 윤리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봐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비애를 아는 사람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한적이 없는가? 우리는 피상적인 쾌락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정 낭만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진정 사랑을 추구하는가?


초기의 토치 싱어들은 1938년을 기점으로 인기를 잃어갔다. 전국에 스윙의 열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비련의 노래들보다 빠른 템포의 춤곡들이 인기를 얻었다. 토치송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많이 연주되고 작곡되었다. 재즈클럽에서는 비밥 연주자들에 의해 본연의 템포인 발라드로 혹은 아주 빠르게 연주되었다. 비밥 연주자들은 고난도의 빠른곡들을 창조해냈지만 토치송들도 절절하게 연주하곤 했다. 찰리 파커가 연주한 ‘안아주고 싶은 당신(Embraceable You)’, ‘당신을 잃는다면(If I should lose you)’을 떠올려보라. 불행을 기꺼이 받아들인(Glad to be unhappy)’ 같은 곡은 몇몇 탁월한 연주자들에 의해 더욱 완성도 높은 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에릭 돌피의 플루트로 연주된 Glad To Be Unhappy는 바스르르 떨리는 초기 토치 싱어들의 버전처럼 심금을 울린다.



키쓰 자렛의 '토치' 사용법.


요즘 나는 키스 자렛으로부터 옛 토치 싱어의 그 비애로움을 느끼곤 한다. 키스 자렛과 찰리 헤이든의 듀오 앨범 <Jasmine>(2010, ECM)은 키쓰 자렛이 작정하고 비련의 미학을 쏟아낸 작품이다. 이 앨범의 ‘바디 앤 소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외에도 굿바이, 날 떠나지 말아요(Don’t Ever Leave me), 당신없이 내가 어딜 가겠어요(Where Can I Go Without You) 등 주옥같은 토치송들이 관능미까지 내뿜는다.  키스 자렛은 복잡한 화성이나 리듬 대신 70여년 전 토치 싱어들이 노래했던 그 방식대로 곡 본연의 애잔함과 슬픔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키스 자렛의 향수 어린 토치송 연주 컨셉은 페기 기의 노래로 히트했던 대표적인 토치 송 “열정(Fever)”을 연주했을 때 그 내막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연주를 2013년 12월 11일, 카네기 홀에서 들었다. 코드 시퀀스가 없는 단순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이 곡을 자렛은 거의 변형하지 않고 화려한 기교없이 반복을 거듭하며 스케일을 연습하는 학생처럼 마이너 팬터토닉 안에서 충실하게 연주했다. 그는 벗어나지 않았고 넘어서지도 않았다. 청승맞음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는 그 촌스러움을 그대로 살렸다. 청중들은 자렛이 엉덩이를 비틀며 열정을 연주할 때 음악적 조크로 받아들이는 듯 어딘가에서 폭소도 흘렸으나 그것은 분명 실례였다. 자렛은 정말이지 진지했다. “열정”은 이런 대중 음악을 색다르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 위한 레파토리가 아니었다. 키스 자렛은 그가 “열정”을 연주한다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기를 원하는 듯 했다. 그는 후렴구를 거듭 반복하며 주문을 외우듯 변형없이 곡을 오랫동안 연주했다. 나는 이 곡의 가사를 상기하며 무릎을 쳤다. 


"열정"의 노랫말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와 개척시대의 캡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블루스처럼 후렴구에 아는 사랑의 이야기를 붙이면 이 노래는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젊은 베르테르가 들어갈 수도 있고 춘향이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의 손가락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캡틴 스미스와 포카 혼타스, 클레오 파트라와 안토니오,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베르테르와 롯테……자렛은 세상의 많은 치명적인 러브 스토리들을 그 안에서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날 키스 자렛으로부터 “열정”노래 사용법을 배웠다. 언어로 노래되지 않은 연주 음악에서 내 안의 언어를 끊임없이 담아낼 수 있었다. 듣는 이가 그걸 하기를, 그렇게 반복하기를 키쓰 자렛은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스 자렛은 반주했고 나는 노래를 했다. 그 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담아서. 순수한 사랑, 절절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시대에서 그는 청중 모두가 그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나는 이날부터 죽은 싱어 사회의 이탈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열정(Fever) 


           - 키스 자렛 연주 (2013년 12월 11일, 카네기홀 연주에서 

/ 음반으로는 나와있지 않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에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를 거에요

당신이 나를 감싸줬을 때

나는 참기 힘든 열정을 느꼈어요




당신은 나를 달아오르게 만들어요

당신이 내게 키스를 했을 때


열정! 나를 꽉 껴안았을 때

열정! 아침에도, 열정! 밤새도록

해가 낮을 환하게 하고


달빛이 밤을 밝게 해요.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설래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한다는 걸 알지


(……)


모든 사람이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당신도 아는 사실일 거에요.

열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열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거에요.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했어요.

줄리엣 그녀도 똑같이 느꼈고

그녀를 안았을 때 로미오는 이렇게 말했죠.

줄리엣 베이비, 당신은 내 불꽃이에요




캡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는 아주 열정적인 사랑을 했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죽이려고할때

그녀는 말했어요

아버지, 안돼요! 죽이기만 해봐요!

그는 내게 열정을 줘요


그의 키스로 열정을 느껴요 그가 나를 가득 안았을때

열을 느껴요, 나는 그의 연인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 그에게 잘 대해주세요




이제 당신은 내 이야기를 모두 들었어요

이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이거에요.

여자들은 당신에게 열정을 주기 위해 태어났어요

화씨로나 섭씨로나.




그들은 당신에게 열정을 줘요.

당신이 그들에게 키스 했을때

열정! 당신이 살아서 배우면

열정! 당신이 지글지글 타오를 때까지

얼마나 사랑스럽게 타오르나요…




             


<양수연이 추천하는 Tory Song들>




Mean To Me (작곡: 프레드 E. 아라트 / 작사: 로이 터크 / 1929년)


Billie Holiday, 1937년 5월 11일 녹음 (Columbia 35926)


앨범: Lady Day- The Complete Billie Holiday on Columbia 1933–1944


실연의 슬픔을 담은 Mean to Me는 아네트 한쇼가 1929년 처음 녹음했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버전을 추천한다.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감성적 성숙함, 스물 두살 빌리 홀리데이의 처연한 음성이 매력적이다.





Love me or Leave me (작곡: 월터 도날드슨 / 작사: 거스 칸 / 1928년)

Nina Simone


앨범: Little Girl Blue, 1957년 12월 녹음 (Bethlehem, 1958)


토치 싱어 루쓰 에팅이 1929년에 처음 녹음한 Love me or Leave me는 이별 통보를 앞둔 여인의 슬픔을 그린 아름다운 발라드곡이다. 니나 사이몬이 20대 중반에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한 Little Girl Blue앨범에서는 빠른 스윙과 소울을 한껏 느낄 수 있다.




Body and Soul (작곡: 자니 그린 / 작사: 에드워드 헤이만, 로버트 사워, 프랭크 입튼 / 1930년)


Libby Holeman


앨범: Moanin’ Low - Early Recordings 1927-1934 (Take Two Records – TT415CD, 1995)


바디 앤 소울은 1930년 작곡된 후 영국에서 발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리비 홀맨이 처음 선보였다. 대표적인 토치 싱어로서 그녀는 이 노래의 히트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청초하고 우수에 가득한 음색, 리비 호울맨의 영원한 클래식으로 남을 연주.





Stormy Weather(작사 작곡: 해롤드 아렌, 데드 콜러 /1933년)

Lena Horne


앨범: Stormy Weather (56~57년 녹음/ RCA Victor – LPM-1375, 1957년)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 엘라 핏제럴드를 비롯해 여러 연주자들이 Stormy Weather를 훌륭하게 연주했지만 1943년 영화 <Stormy Weather>의 사운드 트랙 버전도 유명하다. 레나 혼 그녀 자신이 출연했고 노래했다.





Glad to be Unhappy (작곡:리차드 로저스 /작사: 로렌즈 하트 / 1936년)


Eric Dolphy


앨범: Outward Bound (1960년 4월 1일 녹음/ New Jazz-NJLP 8236, 1960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으로 프레디 허버드, 재키 브리드, 조지 터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걸작. 수록곡 중 Glad To Be Unhappy에서 섬세하고 처연한 돌피의 플루트 연주가 일품이다. 가장 좋아하는 Glad to be Unhappy 버전.

                                                       (월간 재즈피플 2016년 9월호)











posted by jazzlady


글: 양수연 (재즈 비평가) - 재즈피플 2018년 11월호


맨해튼에 오면 저녁은 거의 일정하다. 블루노트 혹은 빌리지 뱅가드, 재즈 스탠다드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블루노트에서 정형화된 어메리칸 메뉴로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일. 저녁 공연이 끝나면 스몰스에서 밤의 충만함을 이어가거나 반대편 업타운으로 달려가 스모키 재즈 클럽에 들른다. 연주자를 확인하고 그들이 내 감성과 어떻게 화학작용을 할 것인지 미리 가늠하는 일은 항상 설렌다. 시장기를 느끼면서 레스토랑 메뉴를 읽는 것처럼 내 뇌가 먼저 음악의 맛과 멋을 감지한다. 재즈 클럽은 늘 혼자 다녔다. 재즈를 같이 들을 사람을 찾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다. 음악과 내가 직접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하고 온전하다. 심지어 벅차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재즈를 같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뉴욕에 있다. 오래전 재즈로 만났고 여전히 재즈적 삶을 사는 그 사람, 이기준 씨(49). 그를 불러냈다. 그는 고맙게도 할렘의 중심부에서 달려왔다. 그는 재즈와 삶을 깊이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나에게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는 지금 목사가 됐다. 음악인 이기준이 목사 이기준이 되었을 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음악과 신앙이 하나로 연결된 사람이라는 걸 느껴왔으니까.

뜨거운 공기가 맨해튼 빌딩 사이에 꽉 채워진 7월, 우리는 스몰스 재즈 클럽 만났고 이런저런 장소에서 수다를 이어갔다. 그와의 시간이 즐거운 것은 단지 재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와는 음악과 영적인 세계, 삶의 본질과 치유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키쓰 자렛 전문가이자 열정의 재즈 리서쳐인 목사 이기준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수개월, ‘재즈 피플’의 커버 스토리가 됐던 키쓰 자렛,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빌 프리셀, 비제이 아이어 등의 인터뷰는 그의 작품이다. 그 인터뷰 기사들에서 상당한 노고와 진중함을 느꼈다. 그는 뮤지션의 주변부터 야금야금 그 심장 깊은 곳까지 적극 파고드는 대화를 한다. 음악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일진대, 좋은 인터뷰는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허점을 다독거리며 행간을 읽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어의 장악 능력이 몹시도 중요한데, 이기준은 어떤 음악가를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간과 열정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어서 어지간한 애정가지고는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오래전 재즈 잡지 편집장으로서 ‘뉴욕 통신원’ 이기준을 겪어봤기에 그 열정을 감지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뜨거운 열정. 더 깊어진 통찰력. 물론, 열정과 통찰력만으로 연주자의 마음을 다 열 수는 없다. 이기준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뉴욕 스몰스 재즈 클럽에서. 이기준 목사/ 사진 Ernest Gregory)


1998년, 이기준 씨는 뉴욕 한복판에서 내가 운영하는 잡지사 <재즈 힙스터>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뉴욕에서 내 재즈 잡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좀 전까지 어떤 대단한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처럼 고양된 목소리로 세세하게 뉴욕 재즈의 현장을 묘사했다. 그때는 ‘뉴욕’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레일 때였다. 재즈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도서관을 뒤지고 해외 서적이 있는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는 나는 영락없는 ‘서울 촌사람’이었다. 그래서 권위있고 신선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운비트 매거진과 스윙저널과 제휴를 맺을 방법도 모색하고 있던 차였다.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잡지를 만들었지만, 고민으로 한가득이었다. 사소한 재즈 정보 하나에도 밤잠을 설치며 설레는 열정만 가득했다. 내 열정을 이기준이 건드렸다. 이기준은 현재 어떤 연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뉴욕에서 쿨하게 연주를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그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처럼 거대한 서사시로 나에게 나가왔다. 나는 이기준의 매력 서사시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 당시 그는 뉴스쿨을 졸업하고 루이스 포터가 가르치는 재즈 리써치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 키쓰 자렛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브레드 멜도우와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조슈아 레드맨 등 당시 급부상하던 재즈의 신예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 뒤 기사를 보내줬다. 다운비트가 99년에 브레드 멜도우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 1년 전, 재즈 힙스터는 브레드 맬도우를 커버스토리로 내보내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런 음악을 알아보는 사람이 이기준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도 실감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뉴욕의 신예 주자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깊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참으로 멋지고도 멋진 일이었다. 맨해튼의 미슐렝 3 스타 ‘르 버나딘’의 캐비어를 맛본 것과 같다는 걸, 한참 후에야 느꼈다.


이기준은 거침없이 연주자들을 사로잡는다. 그가 달려들면, 연주자들은 그의 매력에 함께 빠져든다. 그는 연주자의 뒷조사를 샅샅이 해놓는다. 연주자들의 이웃, 가족 관계(심지어 연주자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어떤 삼촌 이름까지), 함께 연주했던 연주자들 족족을 연구한 뒤 만난다. 이런 것까지 어떻게 알지? 연주자들은 탐복한다. 재즈를 들어온 사람들은 연주자들을 만나면 그럭저럭 얘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편일률적인 질문을 하고 말지만, 이기준은 다르다. 그는 모호한 재즈의 이야기들을 연주자의 삶을 끌어내 구체화시켜 놓는다. 연주자와 함께한 테이블에서 그는 여러 맥락을 소화하고 연주자가 더 본질적인 부분을 쏟아내도록 유도한다. 재즈 주변부의 수많은 재즈 키즈를 만나온 연주자들은 이기준의 남다름에 마음을 활짝 연다. 이기준이 달려들면 엄청난 걸 건진다. 순간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람 중심부로 들어간다. 그래서 키쓰 자렛이 공연장에서 서성이던 그를 백스테이지로 불렀던 것 아닌가? 키쓰 자렛이 만성피로증후군을 극복하고 수년 만에 처음 대중과 만났던 1998년 11월, 뉴왁의 바로 그 공연장에서 말이다. 그때 이기준은 키쓰 자렛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논문을 쓰고 있었다. 키쓰 자렛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키쓰 자렛을 연구하기 위해 ‘들쑤시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동양 청년이 자렛에 대해 논문을 쓴다던데? 아, 그 친구? 나에게도 연락이 왔더군. 그 사람 지금 밖에서 서성대고 있다구. 이걸 들은 키쓰 자렛이 이기준을 들어오라고 했다. 키쓰 자렛의 첫 마디는 이랬다.


 “오늘 내 공연이 당신의 논문을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빈둥거림의 승리다.


(사진 Ernest Gregory )

깨달음을 얻는 빈둥거림의 미학.


우리는 스몰스 재즈 클럽에서 트럼펫터 듀우웬 유뱅스 퀸텟의 공연을 봤다. 유뱅스의 연주가 딱히 궁금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히 실력 있고 정렬적인 그룹이고, 우리는 그걸 안다. 스몰스는 그저 집처럼 친근할 따름이다.

“공연 재미 있었나요?”

“재미 없었어요.”

“저도 재미없었어요.”

웃음이 나왔다.


“이젠 그런 것들이 단번에 보인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해요.”

“진실한 음악이란 정직한 음악인 것이죠.”

그에게 ‘정직한’ 음악은 키쓰 자렛이고 빌 프리셀 같은 음악을 말하는 것이리라. 빌 프리셀은 테크닉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들의 음악에는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다. 이기준이 말하는 순간의 충실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이나 생각을 파고드는 깊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그 끝에 영적인 세계까지 건드릴 능력이 있는 연주자들이죠”

목사 이기준이 단번에 알아보는 깊이의 음악에 공감한다. 

“요즘 무슨 음악 들어요?”

“음악 잘 안 들어요.”

“그럼 뭘 하시나요?”

“전 빈둥대는 걸 좋아해요.”

“어려운 걸 하시는군요.”

그의 예사롭지 않은 빈둥댐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순간에 정직한 음악’에 대해서 그는 얘기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요즘 들었던 앨범 몇 장을 얘기한다. 소니 스틱의 Shangri-La와 Personal Apperance 앨범도 있다. 피터 케이틴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과 폴 데스먼드 쿼텟의 East Of The Sun,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래리 골딩스의 In My Room 앨범도 있다. 훑어듣다가 꽂히면 집중 몰입으로 듣는다고 한다. 

“예전엔 센티멘틀한 음악을 좋아했고 누군가를 좋아하면 사이드맨까지 샅샅이 찾아봤는데 이제는 형식적인 것보다 음악을 들을 때 왜 이 사람이 이렇게 했을까? 영감의 소스가 뭘까를 생각하게 돼요.”

이기준이 재즈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건 피아니스트 임인건 씨 때문이었다. 조동진,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같은 언더그라운드 포크 록 밴드들을 좋아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하덕규 씨와 연이 닿아 그들의 세계에 기웃거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임인건 씨를 만나게 됐다. 1회 유재하 경연대회 게스트 연주자가 임인건이었는데 그의 연주를 보고 홀딱 반해버렸다. 임인건 씨를 통해 재즈의 감성이 뭔지 느낄 수 있었고 키쓰 자렛과 ECM 작품들을 접하게 됐다. 그리고 92년 뉴욕 매니스 칼리 어브 뮤직으로 유학을 왔고 나중에 뉴스쿨로 통합되면서 뉴스쿨 학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년을 ‘빈둥대다’가 루이스 포터의 재즈 리써치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하지만 졸업 후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또 몇년간 빈둥대다 할렘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도 빈둥거리고 있다.

“재즈 피아노 전공자로 입학했지만, 제대로 잘 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노크하고 들어오더라구요. 여기는 자기가 일주일을 예약한 연습실이니 자리를 비켜달라더군요.”

자리만 비켜주면 될 걸 이기준은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당신이 연습하는 걸 구경해도 되냐고 부탁했다. 그리고 연습실 구석에서 그 남자의 피아노 연주를 한참을 지켜봤다. 마침내 건반에서 손을 뗀 남자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제 연주 구경하러 안 올래요?”

이기준은 남자의 초대로 빌리지 뱅가드에 갔다. 도대체 뭘하기에?

이기준의 열렬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 멋진 남자는 베니 그린이었고 그날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녹음됐다. 바로 베니 그린 트리오의 명작 <The Benny Green Trio – Testifyin'!: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앨범이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칼 알랜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이기준 주변에선 “네가 베니 그린을 만났다고?” 경악을 했다. 

오호, 이런 식이다. 이기준과 대가들과의 만남은 하나하나가 우연과 드라마틱함으로 가득하다. 

이기준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나는 그가 인간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호기심과 열정이 습관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준 은혜일 것이지만. 

만약 그가 빈둥대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생산적인 빈둥거림은 키쓰 자렛을 파고들게 했고 빌 프리셀, 브레드 멜도우, 베니 그린, 애비 링컨, 크리스챤 맥브라이드를 비롯해 수많은 대가들과 오랫동안 깊은 교류를 하게 했다. 

베니 그린은 그의 스승인 월터 비샵 주니어를 이기준에게 소개해줬다. 그와 공부하면서 이기준은 재즈에 바짝 다가갔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스승이고 얼마만큼 중요한 재즈 레전드인지도 몰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가를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 있을 뿐이었다. 이기준은 야무지고 차근차근히 전략을 짜는 사람이 아니었다. 휩쓸릴 때조차 진실의 탯줄이 그를 매달고 있었다. 그런 직통의 교감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 탯줄이 연결된 곳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이리라.

“순간에 정직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해요.”

인도의 철학자, 크리스챤 나무르티의 화두를 목사 이기준 입에서 듣고 있다. 이기준은 그걸 재즈 연주자에게 투사한다. 시간의 예술 음악, 순간 순간 그 음악에 정직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연주자, 이기준을 감동하게 하는 음악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깨어있는 자만이 깨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스몰스 재즈 클럽 앞에서, 필자와 이기준 목사. 사진 Ernest Gregory )

키쓰 자렛의 매력.

“처음 들었던 키쓰 자렛 앨범은 Staircase (1976) 솔로 앨범이었죠.”

“키쓰 자렛의 어떤 점이 좋아서 논문까지 쓰게 된 거죠?”

“키쓰 자렛은 30년 동안 같은 멤버와 연주했잖아요? 보통 재즈 연주자들은 매너리즘을 탈피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과 많이 연주하려고 하는데 키쓰 자렛은 다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고 지루하지 않아요.

같은 맥락에서 키스 자렛은 자기 곡을 연주하지 않았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곡을 표현하고 발표하기 위해 활동하는데 키쓰 자렛은 그렇지 않았어요. 비슷한 레퍼토리를 새롭게 큰 역량을 가지고 연주를 합니다. 그는 다만 임프로비제이션을 할 뿐이죠. 대단한 임펙트예요. 그건 키쓰 자렛이 깨어있는 연주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발표하기 위한 연주와 음악을 자체를 위한 연주가 다르다는게 이기준의 생각이다. 

“크리스챤 맥브라이드 말처럼 모두 자기 것 하기 바쁜 세상이잖아요. 음악 자체를 정직하게 연주하는 깨어있는 연주자들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창조의 빛이 관통할 때

“재즈가 가장 훌륭한 음악일까요? 예전에 아프리카 젬베를 배운 적이 있어요. 말리에서 온 선생은 자기는 재즈가 지루하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 리듬은 몹시 복잡한데 재즈는 끽해야 12/8, 7/4박자 정도라는 거죠. 중요한 건 음악을 들을 때 창조의 빛이 나를 관통하느냐 아니냐인 것 같아요.”

내 존재가 정말 신비하고 기이하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였던가? 나무와 풀과 공기와 물이 진정 신비롭고 경이롭게 다가올 순간은? 이기준의 말처럼 당연한 것처럼 지나치고 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서 음악도 예술도 무감각해기 마련이다

“20대에 들은 마일스와 50대에 듣는 마일스가 다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음악은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예술이잖아요. 어떤 음악을 듣던 어떻게 접근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창조의 빛이 나를 통과할 때 그 눈이 떠집니다. 그 빛이 나를 통과하는 순간 그것이 들리는 거죠.”

이기준은 미국에 이민 온 후 할렘 토박이가 됐다. 할렘이 주는 깊은 가스펠 에너지, 할렘에서 목사가 된 독특한 이력이다. 

한국 영화 <블랙 가스펠>촬영팀이 할렘에 왔을 때, 이기준은 할렘에 살고 있는 가스펠 피아니스트 위다 하딩 목사를 알게 됐다. 내친김에 하딩 목사에게 가스펠을 배우고 싶다고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냈다.

“잊고 있었는데 일년 2개월만에 지금 메세지 봤다고 하딩 목사로부터 연락이 오더군요.” 

하딩 목사와의 음악적 영적 교제가 진행되던 가운데 하빙 목사는 이기준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줬다. 이기준에게 목사 안수를 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풀어놓으라고.”

그래서 빈둥거리던 이기준은 ‘말도 안되게’ 2016년 5월, 할렘의 목사 단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할렘의 자택에서 소규모 그룹 모임과 예배를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기준은 교회 언어로 말하면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사다. 


최근에 그는 스승이었던 루이스 포터의 솔로 앨범을 제작했다. 존 콜트레인의 권위자인, 바로 그 위대한 재즈 비평가이자 재즈 히스토리안, 루이스 포터 말이다. 그는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은퇴한 뒤 남은 삶을 피아니스트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면서 비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 반대로 위대한 비평가가 창조해 낸 음악이라니. 그래서 루이스 포터의 이번 앨범은 나로서도 큰 관심이 있다. 창작곡과 스탠다드 곡으로 채워진 진솔한 작품이다. 


루이스 포터로부터 진정성의 음악을 끌어내기 위해 이기준은 그와 1년여간 끝없이 대화하고 토론 했다. 


이기준의 삶은 빈둥거림을 타고 지금껏 흘러왔다. 그의 빈둥거림은 휴지기나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도 꾸리지만, 세속적인 경력 자체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사람과 신령한 사람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세속적인 삶에서 신령한 걸 찾는 사람이다. 창조의 빛을 느끼는 감수성과 온화한 덕으로 가득찬 그의 빈둥거림 앞에서 음악은, 연주자들은 무장해제된다. 빈둥거림은 하나님이 이기준이라는 사람에게 준 놀라운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목사로 풀어줬고 그는 양떼처럼 창조의 빛을 느끼는 자유인이 됐다. 


이기준 목사: 이기준은 재즈 리써쳐이자 목사이다. 92년 뉴욕의 ‘뉴 스쿨’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뒤, 1999년에 재즈학자 Dr.루이스 포터의 지도 하에 재즈 히스토리와 리써치로 Rutgers 대학에서 석사를 마쳤고 2007년 보스턴 대학에서 뮤직 에듀케이션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 과정 당시 키쓰 자렛을 전공하여 키쓰 자렛에 관한 방대한 자료 수집, 음악 듣기에 몰두했다. 2011년, 이기준은 재즈연주자이자 리써쳐로서의 삶을 잠시 뒤로하고 뉴욕의 ATS; Alliance theological seminary 신학 대학원에 입학, 졸업후 목사 안수를 받아 현재 뉴욕 할렘에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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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이어트 하는데 있어 악조건을 가지고 있다. 음식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요리하는 세프이기 때문이다. 잘 먹지 않으면서 요리만 하는 세프도 있지만, 나는 먹는 것 자체를 워낙 좋아하고 즐긴다. 배고픈 걸 결코 참지 못하기 때문에 배고픈 다이어트는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지난 20년간 거의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했는데, 정기적으로 내 식대로의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니까 좀 걱정이 됐다. 좀 더 섬세하고 잘 관리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에 올인하는 다이어트, 한끼만 먹는 다이어트, 애킨스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 듀칸 다이어트, 케토 다이어트 등을 모두 지양한다. 특히 고단백, 고지방을 위주로 먹는 케토 다이어트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


최근의 동향

매일 아침, 나는 북미 대륙과 유럽에서 연구된 많은 식품 관련 뉴스, 건강 정보를 시간들여 찾아 읽고 스트랩 한다. 다이어트에 관한 주요 논문도 챙겨 읽곤한다. 비만인구 많은 미국에선 다이어트에 관한 연구 지원도 활발하고 성과도 크다.

최근 나온 다이어트 뉴스 중에 인상적인 것은 칼로리 계산식의 다이어트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다이어트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음식의 퀄러티이지 칼로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2018년 2월 20일자 뉴욕 타임즈 링크) 

JAMA에서 출판된 이 연구는 Stanford Prevention Research Center의 영양 연구 책임자인 Christopher D. Gardner박사가 주도했고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등으로부터 8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지원받아 주진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실험 참가자만해도 600여명에 달한다. 이 논문에서는 최근에 많이 지적되고 있는 저지방 다이어트와 저탄수화물 다이어트 효과가 비슷하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논문 링크)


내 다이어트의 핵심은 "퀄러티 다이어트"


중년의 다이어트는 무조건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노화를 늦추고, 윤기있는 피부와 건강한 몸을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 근육양이 줄어들면 안되기 때문에 적절한 근력 운동도 필요하다. 

내 8주간의 중년 다이어트 핵심은 조화로운 "퀄러티 다이어트"이다. 물론 이 다이어트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중년의 퀄러티 다이어트에서 내가 고집하는 것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칼로리를 계산하지 않는다.

2)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의 그람만을 계산한다.

3) 하루에 먹을 것을 '미리' 정한다. 

2) 매끼 적절한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을 섭취한다. 

3) 매끼 단백질 2가지, 탄수화물 1가지, 지방 1가지, 야채 2종을 기본으로 한다.

4) 매일 바나나와 키위를 1개(또는 2개)씩 섭취한다.

5) 매일 강황, 레몬 1개, 생강을 섭취한다.


적절한 탄수화물 섭취의 중요성

저지방 식과 저탄수화물 식 중 어느 것이 살을 빼는데 효과적일까? 다이어트를 좀 해본 사람들 상당수는 저탄수화물 식이 몸무게를 줄이는데 효과적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저지방식이나 저탄수화물식이나 효과는 비슷하다. (2017년 7월 워싱턴 포스트 기사 링크: Low-carb vs. low-fat: New research says it doesn’t really matter)

저탄수화물식은 단기간에 효과를 나타내지만 스탠포드 대학의 2007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험대상자 311명 여성의 95%가 원래 몸무게로 되돌아 갔다. 탄수화물을 적게 섭취하면 오히려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더 살이 찌기 쉬운 체질로 변한다. 

여러가지 다이어트 중 특히 현재도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고지방 저탄수화물 중심의 '케토 다이어트'는 단기간에 살이 빠지는 건 맞지만 장기적으로는 케톤증을 유발해 몸의 대사를 떨어뜨리고 신장에 무리를 준다. (동아일보 2015년 12월 1일 기사: 케토제닉 다이어트의 허점)

정제된 탄수화물, 흰쌀, 흰빵, 흰설탕 등 GI지수가 높은 탄수화물을 피하고 통밀, 현미를 식단을 유지하자.



충분한 단백질 섭취는 필수. 단, 단백질 파우더는 피해라.


체중 1킬로그람 당 0.8 그람이 하루에 필요한 최소 단백질 양이다. 50 킬로 그람 체중이라면 40g이 최소 단백질 양인 것이다. 그러나 운동량이 적고 앉아 있는 직접을 가진 여성은 46g, 남성은 56g를 적정 단백질 양으로 본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이보다도 더 많은 단백질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량을 잃고 허약해지며 골다공증에 걸릴 위험이 크다. 보디빌더가 되고 싶지 않더라도 중년에는 근육량을 유지하기 위해 평균 권장량보다 더 많은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Journal of Nutritional Science>에 실린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단백질 섭취를 늘리면 근육량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며 중년이 되면 체중 1킬로 당 약 1.2g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면 더 많은 단백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백질은 자연 식품에서 얻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시판 중인 거의 모든 프로틴 파우더는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2018년 3월 1일 자 폭스뉴스는 '클린 레이블 프로젝트'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프로틴 파우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2018년 3월 1일 폭스뉴스: Protein powders may be damaging your health)

'클린 레이블 프로젝트'에서 미국 내 134개 주요 프로틴 파우더를 테스트한 결과, 제품 70%가 납 성분, 74%가 카드늄, 55%는 BPA가 검출되는 등 대부분의 파우더가 중금속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암, 뇌 손상, 생식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콩 등 식물성 프로틴과 유기농 프로틴 제품은 BPA 함량은 낮은 반면, 납성분은 더 많이 검출되어서 충격이다. <컨슈머 리포트>전문가들은 ‘깨끗한’ 프로틴 파우더는 없다. 그냥 프로틴 파우더를 버리라고 조언하고 있을 정도이다. 


포화지방이 나쁜가?


195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안셀 키즈 교수의 논문 하나가 식품-의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지질 가설(The lipid hypothesis) 이론으로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를 많이 먹으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동맥벽에 쌓여 혈관이 좁아지며 심장병과 뇌졸중의 원인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설'은 많은 반증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참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의학계에서는 "포화지방이 해롭다는 것은 틀렸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관련 한국기사 링크: 2016년 12월 동아일보 -포화지방의 누명, 60여년 만에 벗나?

 -관련 미국 정보 링크: Saturated Fats Not So Bad? Not So Fast, Critics of New Analysis Say


천연에서 얻어진 포화지방, 천연 버터, 코코넛 오일, 올리브 오일 등을 적절히 섭취할 경우 건강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버터인 경우, 시중에 판매되는 버터 중에서 100% 우유로 만들어진 제품을 찾아야 한다.


이제부터 8주간의 다이어트 기록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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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프리셀, <Music Is> (OKeh, 2018)



평점  ★★★★★

짧은 평: 기법과 상상력의 집약체. 밀도 높은 단상으로 채운 솔로 기타의 걸작.


빌 프리셀은 솔로 앨범을 '도전 과제'라고 말해왔다.

독창적인 기법으로 채워진 음악적 시선이 확장되어 정점에 이르는 곳.

그걸 청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빌 프리셀에겐 솔로 앨범이다.

그리고 "음악은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고 말한다.

새 앨범 타이틀 <Music Is>가 말해주듯 그가 말하는 음악, 그가 생각하는 음악 본질을 이번 앨범에 담아냈다. 

빌 프리셀의 오리지널로 채워진 16곡, 매 곡의 러닝 타임은 평균 3분 선으로 짧다.

가장 긴 곡은 Rambler인데(1984년 동명앨범 명이기도) 이것도 6분 33초에 불과하다.

우리가 '프리 임프로비제이션' 솔로 연주자에게서 목격하는 길고 서사적인 솔로와는 거리가 있다.


빌 프리셀은 밀도를 높인 음악 단상으로 오밀조밀 앨범을 채웠다.  

트레이드 마크인 루핑과 겹겹 레이어 연주는 여전하고 익숙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긴장감을 전해준다.

왜냐하면 빌 프리셀이 무난한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녹음을 준비하면서 뉴욕의 더 스톤 클럽에서 일주일간 연주했는데 매일 밤 새로운 음악을 했죠. 

나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리려고 애썼습니다. 무난한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녹음할 때도 밀어붙일 수 있었죠." (2018년 2월 '기타월드'매거진 인터뷰)


빌 프리셀은 이전 솔로 앨범 <Ghost Town>(2000) 과 <Silent Comedy> (2013)에서 솔로 연주의 음악적 비전을 

분명히 제시한 바 있다. <Music Is>은 <Ghost Town>의 프리셀의 오랜 동반자 프로듀서 리 타운샌드(Lee Townsend)가 

참여하여 프리셀의 특색있는 레이어링에 빛을 더했다. 그래서 <Ghost Town>에서와 같은 낭만적인 느낌도 상당하다. 

사이키델릭한 곡, "Think About It"는 전작 <Silent Comedy>를 연상시킨다. 

세련된 아이디어를 투박하고 단순하게 담아내는 능력과 결코 내성 들지 않는 반복구.

<Music Is>은 빌 프리셀의 음악적 비전과 순수한 상상력을 더해 동시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앨범으로 

탄생시켰다. 보기 드문 솔로 기타 앨범의 걸작이다. 


Rambler (Alternate Version) (Official Video) by Bill Frisell on VEVO.


― Bill Frisell: electric & acoustic guitars, loops, bass, ukelele, music boxes.

― Track Listing: Pretty Stars / Winslow Homer / Change in the Air / What Do You Want? / 

  Thankful / Ron Carter / Think About It / In Line / Rambler / The Pioneers / Monica Jane/ 

  Miss You / Go Happy Lucky / Kentucky Derby / Made to Shine / Rambler (bonus, alternate version).

― 2018년 3월 16일 OKeh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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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른한 오후, 재즈 스탠다드를 듣는 특별한 방법.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의 피아니시즘.

1961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의 맨해튼 빌리지 뱅가드. 빌 에반스, 스캇 라파로, 폴 모션 - 세 명의 젊은이, 빌 에반스 트리오는 어둡고 담배 연기 뿌연 지하의 이곳에서 다섯 세트에 달하는 긴 하루를 시작한다. 첫 번째 세트, Gloria’s Step, Alice in Wonderland에 이어 세 번째로 연주된 곡은 빅터 영 작곡, 네드 워싱턴 작사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My Foolish Heart)’. 보통 발라드는 분당 60~70비트로 연주되곤 하는데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보통과 달리 분당 50비트로 훨씬 느리게 연주했다. 이날 몇 안 되는 오후 관객들은 심장 박동수 보다도 느린 그 곡을 들으며 일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운지 음악을 즐기듯 편안하고 무덤덤했던 청중과 달리, 그날 오후 이후 빌 에반스라는 이름은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투명하고 고결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빌 에반스가 아니었다면 그 시절 누가, 특히 59년~62년 사이에 누가 이렇게 모던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가. 에반스는 재즈 피아노 모더니티의 핵심이고 시작이었다. 

빌 에반스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각별히 사랑했다. 64년 코펜하겐에서도, 이듬 해 파리와 런던에서도, 그리고 1980년 여름 빌리지 뱅가드에서 다시 연주할 때까지, 말년에 이르러까지도 열 번 이상 라이브 레코딩으로 남겼다. 

사랑스러운 멜로디 같은 밤이 되었어요.

조심해야지요, 내 어리석은 마음이여.

영원히 변함없이 하얗게 빛나는 달이여,

나의 이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주세요.

사랑과 매혹, 두 개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그 간격을 알아보기 힘들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가왔던지.

사랑인지, 매혹인지, 그러나 느껴지는 감각은 비슷하거든요.

그의 입술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어요.

아, 어리석은 내 마음이여, 조심해야 해요.

열망하는 두 입술이 맞닿아지는 순간, 

이제 불꽃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건 더 이상 매혹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랑이랍니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여. 

나에게 다가오는 존재, 나에게 한눈에 매혹됐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비슷한 이 감정의 간극을 분별하려 애쓰는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 그러나 많은 상처가 있었던 여인은 머뭇거린다.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탓하고 독려한다. 변별하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주려는 듯, 빌 에반스는 느린 호흡으로 노래에 숨을 쉬게 만들고 있다. 

본디, 빅터 영이 1949년 영화 <My Foolish Heart> 사운드 트랙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영화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못잊는 여인 엘루이즈의 심정을 중심으로 다룬다. 에반스의 느리면서 차갑고 세련된 연주는 위스키 잔에 얼음을 떨어뜨리는 차가운 낯빛 그녀의 어떤 씬을 연상시킨다. 빌 에반스는 토니 베넷과의 듀엣으로도 이 곡을 남겼다. 1975년 캘리포니아 팬타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나의 어리석은 마음’은 에반스와 토니의 애정어린 밀착 교감으로 한편의 로맨스 단편 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빅터 영(1900-1956)은 내면에 멜로디가 너무 많아 일찍 산화된, 한편의 풍경 같은 사람이다. 그가 남긴 그 숱한 아름다운 곡들, My Foolish Heart, Love Letters, Stella By Starlight, Beautiful Love……나는 빌 에반스야말로 빅터 영과 감성적 궁합이 맞은 최초의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에반스 자신이 쇼팽의 팬이었듯, 인상주의 어법으로 피아니시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멜로디와 리듬의 긴장과 이완, 드럽 보이싱, 대체 코드, 크로매틱 어프로치 등 테크닉적으로도 진보적이고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면서 빅터 영의 옛스러움을 고풍스럽게 현대화켰다. 이후 그 어떤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에반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빅터 영의 많은 작품 중에 유난히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 내 감성이 꽂히고 만 것은 멜로디와 가사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딜레마의 뉘앙스 때문이다. 매혹과 사랑, 구분하기 모호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지만 본질은 다른 것이고 딜레마적이다.  빅터 영이 주린 배를 참으며 폴란드에서 고된 음악 훈련을 받았던 어린 시절, 그는 밀수품 음식과 그 내면에 넘쳐나는 멜로디를 그 주린 배에 함께 채워 넣어야 했던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작곡가 호기 카마이클의 명곡 ‘Stardust’의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선택 되었던 순간에도 그는 고향 시카고와 성공 가도 헐리우드의 환희를 두고 숱한 딜레마에 잠식 되었을 것이다. 빌 에반스가 모든 음을 조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서정시의 슬픈 아이러니였던 것처럼.


빌 에반스 이후 여러 재즈 연주자들이 빅터 영의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녹음 했지만, 나에게 압권은 키쓰 자렛이었다.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키쓰 자렛 연주에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발라드로 주제부를 이끌다가 어느덧 자신의 이야기로 훅 바꾸어버렸다. 안그래도 그토록 아름다운 주제를 더욱 품격있고 신비로운 멜로디로 확장시키면서 중요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가 생산해 내는 음에 밀착된 나의 영민한 감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화음과 멜로디를 미묘하게 변화시키면서 동기를 부여하고 흐름을 끝까지 유지시켰다. 


키쓰 자렛은 빅터 영 이상으로 한없이 멜로디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에반스가 재즈 피아노의 현대 문학이었다면 키쓰 자렛은 철학이었다. 스피리츄얼한 키스 자렛의 멜로디 조합은 헤쳐졌다 다시 모여 군집하고 하나의 방향성과 맥락을 이루면서 지향점있는 고결한 악풍을 이루는 것이니. 키쓰 자렛 ‘나의 어리석은 마음’의 그녀는 연약한 수동적 여인이 아니라, 그 어떤 상처도 감내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승격되었다.

재즈 스탠다드 곡들을 들을 때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을 낳는다. 지금 우리가 재즈 스탠다드라고 부르는 곡들의 상당수는 주로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작곡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재즈 연주자들에 의해 주요 레퍼토리가 됨으로써 ‘재즈 스탠다드’로 불리게 된 것들이다. 옛날 곡인 경우, 뮤지컬, 클럽 쇼,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경우가 많았고 작곡 당시부터 본유의 노랫말과 함께 짝을 이루었다. 재즈 연주자들은 가사와 노랫말이 서로 의지하는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주제 삼아 본유의 어법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발전시켰는데, 익숙하게 듣고 자란 아름다운 노랫말은 연주자에게도 창의성의 영감이 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비영어권 연주자들도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할 때 본래의 노랫말을 음미해 볼 것을 나는 권장한다.)

노랫말을 음미한다는 것은 문학을 음악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며 리스너로서는 보컬 없는 연주곡일지라도 심미적 내러티브와 무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최고 수준의 연주일 경우 카타르시스나 초월적 상태까지도 이를 수 있다.   

키쓰 자렛은 고대 중동 음악의 엑스터시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왔다. 원시 주술의 세계에선 가상과 실재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예술이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 행위였다. 사냥을 많이 해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동물 그림을 벽에 그렸고 종족 보존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인의 가슴과 배, 엉덩이를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그렸다. 곡소리 같은 주술적인 보이스를 반복적으로 내어 실제 세계 너머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었고 그들이 믿는 한 그것은 실재가 되었다. 우리가 믿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실재와 가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는 자신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술, 특히 미술에서는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판타시가 존재한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실제이며 어리석은 마음의 여인은 가상이다. 나는 시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진 재즈 스탠다드와 최상의 연주가 만났을 때, 리스너의 상상력과 감성을 파고드는 문학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초월적 상태로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쓰 자렛의 표현으로는 ‘엑스터시’이고 나의 표현으로는 ‘에로티시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는 리스너와 진정한 인터렉션을 할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관계 미학을 창출해 낼 수 있다.

나는 키쓰 자렛이야말로 문학적 맥락을 자신의 음악에 끌어들일 수 있는 시인이요, 철학가라고 여긴다. 2005년에 발매된 키쓰 자렛의 다큐멘터리 <The Art of  Improvisation>에서 음악 외의 어떤 것에 영향 받느냐는 질문에 “음악은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기가 아기로부터 나온다는 말과 같다.”라고 잘라 대답한다. 키쓰 자렛에게 영감을 주는 비음악적 요인들, 문학, 철학, 그리고 인간의 삶. 키쓰 자렛이 테크닉을 너머 미학적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인은 여기에 있다. 키쓰 자렛이 쓰는 관용구들 조차 멜로디 윤곽을 선명하게 하기 위한 트렌지션 장치로 보이는 것도 그가 스탠다드 재즈를 연주할 때 그 곡의 전통과 심미적 요소 모든 것을 통렬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에서의 여인의 욕망은 우리가 아는 맹목적인 육체적 욕망을 넘어 선 것이다. 그녀는 매혹과 사랑이 같은 성적 강도로 어프로치된다는 것을 알고 분별하려는 여인이며, 육욕을 넘어선 지순한 사랑을 꿈꾸는 여인이다. 키쓰 자렛의 연주는 리스너의 그러한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우리가 피하려고 할 수록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이 주는 교훈 아니던가.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이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왜 욕망하는 지는 모르고 살아간다. 욕망의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느 나른한 한낮에 듣는 옛날 재즈 스탠다드 한 곡만으로도 우리는 감성의 힘을 빌려 간접적으로 나마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의 어리석은 마음이 욕망의 작동 장치일진대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욕망의 매커니즘을 그 곡을 통해 주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즈 곡 하나 듣는데 왜 이렇게 쓸모없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가?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예술은 쓸모 없는 것이어야 한다. 편하거나 실용이 되어버리는 순간 예술은 예술이 되지 않는다. 예술은 한없이 어리석어야 한다.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 내 마음을 울렸던 피아니시즘 앨범.

빌 에반스의 My Foolish Heart가 수록된 앨범.

(빌 에반스는 My Foolish Heart를 열 네차례 앨범으로 남겼다. 이 중 추천 앨범>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 (Riverside, 3RCD-4443-2, 2005)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 전체를 담은 세 장의 박스 셋, 같은 곡이 <Waltz for Debby>(Riverside, RLP-399, 1962)에도 수록되어 있다.

빌 에반스 (p), 스캇 라파로(b), 폴 모션(d)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Fantasy, F-9489, 1975)

보컬 토니 베넷과 빌 에반스의 듀엣 앨범. 두 사람의 밀착된 애정어린 교감의 My Foolish Heart을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 트리오의 My Foolish Heart

<My Foolish Heart>(ECM, ECM 2021/2022, 2007)

2001년 몬트레 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최상의 My Foolish Heart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키쓰 자렛(p), 개리 피콕(b), 잭 드죠넷(d)




1961년 6월 25일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빌 에반스 트리오의 모습



(재즈피플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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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azzlady

나에게 음악은, 때때로 폭력이다. 거리에서, 마켓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원치 않은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조르쥬 바따이유가 말했던 비천함(abjection)에 몸을 떤다. 나는 그 음악을 거부하기 위해 감각의 환각을 동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 귀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한편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화하는 나를 느낀다. 또한, 동시에 내 귀의 사용가치가 쾌락을 향한 감각적 확신임을 느끼면서 섬뜩해진다. 사적인 공간을 벗어난 내 쾌락의 욕망이 불손하여 다시 비천함을 느낀다. 공공장소에서 나의 쾌락은 배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만큼 특정 부분을 과장되게 그리는 아이처럼 내가 그리는 그림 역시 커다란 귀를 갖은 무언가일 것이다. 나에게 귀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공공장소에서, 혹은 어떤 이미지를 두고 갈팡질팡한다면 그것은 아마 귀로 형상화되지 못한 ‘에로티시즘’을 향한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에로티시즘. 이것은 성행위라고 말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초감각적인 경험이다. 쾌락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유한한 내 신체와 귀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비밀의 세계이다. 그 비밀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나에게는 음악만큼 좋은 도구는 없는 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문을 열기 위해 형이하학적인 내 몸을, 내 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내가 토마스 차핀의 음반을 걸어놓는 지금 이 순간도 그 에로티시즘이 작동한다. 존 콜트레인의 오리지널 LP를 사기 위해 이베이를 기웃거릴 때도 그 에로티시즘은 작동한다. 키쓰자렛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 눈길을 헤치고 수백 마일을 달려갈 때도 그 에로티시즘이 꿈틀댄다. 쾌락을 향한 에너지가 뒤숭숭하게 일상에 섞이고 말 때, 마치 사이렌의 아름다운 소리를 거부하기 위해 제 몸을 기둥에 묶어버리는 오디세이처럼 비장해진다. 오디세이가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제 몸을 묶은 것은 그 쾌락의 끝에 있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파멸로 이끄는 사이렌의 소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그것은 곧 심오한 쾌락이고 죽음이다. 에로티시즘은 죽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디세이처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
"감각의 정신으로의 추상이 에로티시즘"


나에게는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다.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재즈인가? 클래식인가? 유행가요인가? 이른바 장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나에게 릴랙스를 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인가? 예민하고 영민한 나의 감각을 일깨우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말인가? 

좋은 음악이란 감각과 그 감각이 느끼는 쾌락과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나에게 좋은 음악이란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하는 음악이다. 에로티시즘으로 가기 위해서는 감각을 ‘추상(抽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감각적인 편안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관념화하고 정신적으로 추상시킬 수 있어야 에로티시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은 흔히 말해지는 감각적 일차 단계, 섹스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영원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측면이다. 관념화된 쾌락, 이것이 에로티시즘이다. 우리의 귀는 정신적인 것에 닿으므로 감각기관인 귀를 발전시킬 때 고차원적인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악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느낄 것인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재즈와 같이 임프로비제이션 음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임프로바이저의 창의성, 유동성, 노마드적 요소, 반-토널리티, 테크닉…. 재즈는 타부를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던 에로티시즘 그 자체와도 유사하다. 임프로비제이션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하모니, 리듬, 형식 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특히 소규모 재즈 캄보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변증법은 우리를 충분히 깊은 재즈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서로 코멘트하기도 하고 백업도 하는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을 보며 각각 독립적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연주자의 자기희생을 응시하게 된다. 뛰어난 임프로바이저는 분석적이고 창의적이며 기술적인 테크닉을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가. 응시와 집중으로 그러한 연주의 사이클에 참여하여 유동적이고 효율적으로 감각의 협상을 진행하여야 한다. 리스너는 각자 다른 식으로 음악에 어프로치하게 되는데. 따라서 리스너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그루브와 무드만 지닌 채 챌린지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듯, 리스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루브와 무드만 느끼며 재즈의 본질을 다 아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로티시즘으로 가려는 동기를 가졌다면, 단기적,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좋은 음악을 수집하고 집중하고 챌린지하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음악을 오래 들었다고 반드시 ‘에로티시즘’ 훈련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어떻게 듣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진지한 집중과 탐구 없이 수집 그 자체에 골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발랜스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공연장에서 재즈를 감상할 때 연주자가 간혹 과장된 스킬로 청중을 순간 무아지경으로 이끌려고 하는 수준 낮은 경우를 보곤하는데 훌륭한 음악은 스킬과 챌런지 사이의 밸런스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재즈 공연에서 많이 행해지는 작풍 자체도 청중의 음악 수요와 뉘앙스 적으로 펼쳐지는 음악 자체의 수요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변증법적으로 합류된 방식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음악작품은 계획과 짜임새의 논리적인 면과 즉흥적이고  듣는 현지 상태의 논리가 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주로부터 전해지는 그 무아지경의 상태가 밸런스를 통해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에로티시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로티시즘은 안정적인 쾌락의 상태인 것이다.

에로티시즘이 감각의 관념화, 정신 추상의 상태라고 말해질진대, 그렇다면 이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유용한 방식을 선택해볼 수 있다. 시각화된 이미지가 그것이다. 트럼보니스트 커티스 풀러는 임프로바이징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도 “그래픽적인 방법을 통해 음악을 보라”로 이미지화를 강조하곤 했다. 음악의 시각화에 대한 허쉬의 생각은 명료하다. “멜로디를 들을 때 어떤 큰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을 상상하라. 올라갔다 내려가고 비틀고…추락하려할 때는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려보라. 나는 이미지화시키는 것을 늘 생각한다” [폴 베르니너 저, Thinking in Jazz: The Infinite Art of Improvisation 중)

청각을 시각화시켜 추상하는 작업을 몸소 현실화하는 대표적인 연주자는 앤써니 블렉스톤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편의 추상화 양상으로 악보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공항 터미널을 영감으로한 그의 작품 Composition No. 377의 악보를 보라.  

앤써니 블렉스톤과 같이 청각에서 시각으로, 다시 시각에서 정신 추상을 하는 방법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시각 이미지 외에도 맛을 탐구하는 요리 연구가로서 나는 미각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일상에 나의 감각 기관으로 상상할 수 있는 다채로움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감각의 추상화는 그 자체가 새로운 감각기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다시 추상으로 발전해나가는 변증의 속성이 된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죽음과 하나로 보았다. 에로티시즘을 죽음의 축소판으로 보는 ‘작은 죽음’의 세계로 본 것이다. 절정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 암컷에게 잡아먹힐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수컷처럼.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이 존재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므로 삶을 포함한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갈 줄 알면서 영위되는 것처럼 삶 역시 죽음을 포함한다. 죽음을 말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기 위함이고 삶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출발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고 과정에 생성과 파괴가 있다. 죽음은 삶을 본질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며 죽음과 삶의 통로에 에로티시즘이 있고 좋은 음악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에 이르는 음악은 죽음을 표상하는 음악이며 동시에 삶을 표상하는 음악이다. 성행위와 달리 에로티시즘은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정상에는 에로티시즘이 존재하고 있을진대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독과 대면하고 극단, 다시말해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리스너는 이를 체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에로틱의 영역인 섹스는 하나의 재료이자 단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섹스를 통해 합일과 연속성을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섹스는 개별자의 안정적된 감각을 저해하고 다시 우리를 위협한다. 섹스는 하나로 합일되고자 하는 개별 본성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좌절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장치이다. 리스너는 음악의 ‘몸’성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집중과 훈련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법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한 나의 재즈 훈련은 일주일 단위로 구성된다. 워밍업 / 집약과 집중 / 발전 / 성숙의 사이클로 구성해둔다. 

1) 워밍법 : 워밍업은 말 그대로 워밍업이다. 최근 나온 음반일 수도 있고 옛날 음악일 수도 있다. 포인트나 무드로 선택되기도 한다. 내가 식사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할 때 들을 수도 있는 BGM으로 내버려둘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BGM이라도 종일 틀어두지는 않는다. 집중의 시간을 위해 귀를 아낀다. 

2) 집약과 집중 : 집중해서 들어야 할 음악을 평소 골라둔다. “탐미용”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탐미를 하라는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사정이 조금 다르겠지만) 리스너는 제대로 탐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케일을 연구하는 등 굳이 재즈 이론을 공부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국문학자나 작가가 아니어도 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듯 탐미를 제대로 하다 보면 재즈의 언어가 제대로 들린다. 재즈의 본성이 느껴진다. 

집중해야 할 음악의 선곡은 오래 하다 보면 자체 발전하여 자기 스스로 꾸미는 경우가 많지만(이것 역시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어느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리뷰나 전문지를 참고해볼 만 하다. 제대로된 리뷰를 읽고 재즈 음반을 구입하여 라이너 노트를 읽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약과 집중도 귀를 아껴야 한다. 아무리 애정이 깊다 하여도 일반적으로 30분을 혼신으로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상을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능력자이거나 건성으로 듣는 것이다. 듣지 않거나 공기의 허무 속으로 음들을 날려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집중할 곡은 10분 내외로도 충분하다. 아니 2-3분짜리 중요한 솔로를 몇 번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10분~30분을 투자할 수 있어야 진지한 리스너가 될 수 있다. 음반 전체를 다 듣지 못하더라도 나누어서 들어도 좋다. 집중과 집약을 할 수 있으면 나와 관계 맺은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음악이 형성되는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정기적인 텀으로 근육을 발전시켜 나간다. 에로티시즘의 훈련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나의 정신의 근육을 발전시키는 위해서는 정기적인 양질의 훈련이 필요하다. 리스너는 자신의 피상적인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할 줄 알아야 한다. 달콤한 디저트만 맛보려한다면 진정 좋은 음식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리스너는 감상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어야 한다. 음악은 감상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콤하고 편안 음악만 듣다보면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같은 공연료를 내고도 그 묘미의 극히 일부만을 겉핧기로 알고 갈 뿐이다. 오픈 마인드하고 집중하라.

3) 발전: 책 한 권을 읽어도 그 감동은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 텍스트가 주는 영향력을 음악에서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집약과 집중으로 자기화된 음악을 통해 내 일상에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진지한 리스너는 일상의 삶도 진지할 수밖에 없다. 음반 수집에만 골몰할지언정 그 물리적 음반에 대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 정리정돈하는 습관이라도 갖게 된다. 발전의 단계는 음악을 내 삶 속으로 끌어들여 그 음악의 체계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음악이 단지 듣고 있는 그 순간으로만 끝나버린다면 음악의 중요한 효과를 우리는 놓쳐버리는 꼴이 된다. 우리가 시간을 애써 써가며 듣는 음악을 그렇게 순간으로 날려보낸다는 것은 정말 아깝지 않은가. 강조하건대 음악은 정신의 영역에 존재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의 정신은,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감각의 경험을 기억한다. 좋은 재즈 음악을 통해 우리는 삶을 유동적이고 긍정적이고 소통하는 세계로 이끌 수 있다. 겸손과 비천과 위대함을 일상에서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발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소개하겠다.


4) 성숙 : 감각을 추상하는 단계, 즉 에로티시즘의 단계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하고 많은 음들을 체험하면서 쾌감에 이르는 어떤 공통분모를 산출하고 총체화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본능은 자연스럽게 데이터베이스화시켜 축적한다. 에로티시즘은 단편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아폴로적인 양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뮤즈의 어머니가 “기억”이라는 뜻의 므네모시네로 명명되는 것처럼 우리는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발전시켜야 한다.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의 2010년 저서 <Primacy of The Ear>에서 강조된 ‘뮤지컬 메모리’ 훈련도 도움이 된다. 감각의 기억력이 모여져 관념으로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닿을 때 새롭고 견고한 음악의 세계가 뮤즈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니까.


< 양수연의 추천 음반 >

추천 음반에는 재즈 언어의 법칙 안에서 형식을 파괴한 아방가드 음반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해하게 느껴지는 아방가드의 추상적 속성이 감각의 관념화를 더 용이하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꿔 말하면 용이하다는 것이지, 아방가드나 프리 재즈 음악이 다른 스타일의 음악보다 작품적으로 반드시 더 훌륭하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별의 작품들이 그 수준을 말해준다. 어떤 음악이든 에로티시즘에 이르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나의 예와 같이 나름의 훈련이 필요하다.



The Art Ensemble of Chicago, [Bap-Tizum], Atlantic, 1998

시카고 아트 앙상블은  1966년 12월 시카고에서 색소포니스트 로스코 미첼(1940~)을 중심으로 레스터 보위(트럼펫), 마라치 패버스(베이스), 필립 윌슨(드럼)이 주축이 되어 처음 조직되었다. [Bap-Tizum]은 앤 마버 블루스&재즈 페스티벌 실황으로 괴성과 다채로운 악기들을 활용하여 급직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낸다. 신경질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자유분방하며 기괴한 면이 있지만, 혹사당한다고 느낄 만큼 분투하는 음악의 몸성이 느껴지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느린 호흡으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색소폰과 베이스 듀엣 곡 Unanka, 음을 가루처럼 흩뿌리는 다채로운 칼러와 무한한 혼란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작 Ohnedaruth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Albert Ayler Trio, [Spiritual Unity], ESP-Disk, 1965

1960년대 프리 재즈의 클래식이 된 음반, 제목 그대로 ‘영적인 합일’로 향하려는 알버트 아일러(색소폰), 게리 피콕(베이스), 서니 머레이(퍼커션)-개별자의 몸부림이다."Ghosts: First variation,” "The Wizard,” “Spirits,” “Ghosts: Second variation” 총 30분이 안되는 4곡으로 프리재즈에 새로운 혁신성을 던져주었다. 알버트 아일러보다 수년 앞선 1959년 오네트 콜맨이 막강한 프리재즈의 역량을 과시한 바 있다. 콜맨의 ‘파괴’와 ‘혼란’이라는 프리 재즈의 언어가 형식만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던 존 폴락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면, 알버트 아일러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어찌 보면 날 것과 같은 음을 영적인 조합으로 이끌며 보다 디테일 있는 아티스틱한 표현으로 감동을 준다. 본작은 존 콜트레인의 혁신적 음반 [Love Supreme]보다 5개월 전인 1964년 7월에 녹음되었다. 6년 뒤 34세를 일기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알버트 아일러, 그의 시신이 발견됐던 이스트 리버를 지날 때마다 나는 ‘영적인 합일’을 생각하곤 한다.



Mal Waldron & Steve Lacy, [Live at Dreher, Paris 1981], Hat Hut, 1981

최고의 색소폰-피아노 듀오 앨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81년 8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파리의 클럽에서 녹음된 피아니스트 말 왈드론과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랙시의 멋진 교감. 이 라이브는 1996년에 볼륨 1과 2로 나뉘어 각각 두 장의 더블 시디로 나왔었고 2003년에는 볼륨 1 & 2, 총 4장으로 합쳐 발매됐다. 재키 바이어드와 셀로니어즈 몽크의 어법을 연상시키는 말 왈드론은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의 감각성을 촘촘하게 조각한다. 평생 오직 소프라노 색소폰에 몰입했던 스티브 랙시는 그의 긴 연주 경력 동안 알려지지 않은 보석같은 곡이 많아 스타일을 캐내는 기쁨을 준다. 재즈의 본질의 특성을 잘 살리는 듀오 편성은 감각의 교미와 표현의 성실함을 직접 감지하기 쉽고 리스너에게 오픈된 상상의 공간을 제시한다. 돌발성의 우연이 심연 깊은 곳으로 직행한다.


Paul Bley, [Annette], hatOLOGY, 1992

폴 블레이의 연주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재즈 탐미 미학을 제공한다. 읊조리듯 느껴지나 동시에 무척이나 분명하고 독특하여 움직임 자체가 율동의 챌린지와 같다. 본작 대부분은 블레이의 첫째 부인 애니트 피콕(앨범 사진)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한 곡 한 곡이 표상적이며 라인 사이의 짧은 침묵은 미끄러져 내린 벌거벗은 음들이 숨죽이는 긴장의 공간이다. “Touching” 곡은 미니멀리즘이다. 피부에 간신히 닿아 떨리며 매만지듯, 또한 감성의 표피를 간절하게 벗겨내듯, 그렇게 ‘닿는’ 음악이다. 간절하기에 한없이 고독하다. 센스가 센서빌리티로 형성되는 교착점에서 끊임없이 리스너를 추궁한다. 감각의 세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고. 



Dave Liebman [Lookout Farms], ECM, 1974

이 음반은 노스탤지어를 향한 끝없는 여정을 상상하게 한다. 계획된 여정이다. 어래인지먼트가 주는 감동이 임프로비제이션의 맛깔스러움을 압도할 지경이다. 존 애버크롬비, 리치 바이락, 프랭크 투사, 제프 윌리암스를 비롯해 10명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프로그레시브 모던 재즈 앨범으로 Pablo's Story, Sam's Float, M. D. / Lookout Farm 등 세 곡으로 구성되었다. 24분간 연주되는 마지막 곡 M.D./Lookout Farm은 치밀하게 구성된 여러 패턴을 통해 다양한 텍스쳐와 칼러를 선사하는데, 본 음반의 구성과 컨셉을 설명하기 위해 리브맨이 동명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이다. 리브맨은 훌륭한 임프로바이저이자 개념론자(conceptualist)라 할 수 있다. 본작이 발표되기 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혁신적인 [On The Corner]앨범을 녹음했었으므로 리브맨의 이른바 ‘뉴 사운드’에 대한 실험력이 물이 올랐을 때이기도 하다. 본작은 데이브 리브맨의 ECM 데뷔 음반이다. 리브맨은 ECM을 통해 본작과 이듬 해 [Drum Ode] 총 두 장의 앨범을 냈다. [Lookout Farms]는 숨죽이고 한번에 들을 수 있는 음반이다. 장황한 Farm의 숲속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Don Cherry [Blue Lake], BYG, 1971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한 음반이다. 이 음반을 듣고 네이티브 어메리칸 인디언 플룻을 사서 연습했을 정도였으니까. 광활한 뉴멕시코주의 타오족 거주 지역의 블루 레이크. 야생의 세계에서 존재의 확고함을 실감하기 위해 분투해야했던 투쟁의 인디언 역사. 돈 체리의 본 악기 트럼펫 외에도 인디언 플룻으로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저항하는 인디언, 그들의 삶 한복판으로 잡입해 새로운 음 족(族)을 창출해낸 것 같다. 보이스로 주술 하는 돈 체리는 가히 새 음족의 추장이다. 음들을 흩뿌리고 감성을 건드린다. 존재가 추구하는 합일의 세계로, 또한 그것을 방해하는 내 안의 저항을 매만진다. 탐미는 매만짐이다.



Julius Hemphill [Fat Man and the Hard Blues], Black Saint. 1991

줄리우스 헴필(1938~1995)은 나에게 있어 새롭고 신선한 에너지가 오랜기간 누적된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그 화석을 연구할수록 또 새롭고 신비스러운 것들이 쏟아져서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그런 존재. 줄리우스 헴필의 리스너라면 전작들, [Dogon A.D.](1972)나 [Coon Bid’ness](1975)만으로도 충분히 매료됐겠지만 헴필의 다른 양상의 혁신적 앨범들은 World Saxophone Quartet 이후의 줄리우스가 섹스텟을 구성하면서부터 본격화됐으므로 살펴볼 만하다. 듀크엘링턴이 색소포니스트였다면 분명 이러한 그룹을 꿈꾸지 않았을까? 한 명의 알토(줄리우스 헴필), 두 명의 소프라노(마르티 에이를리히, 칼 그럽스), 두 명의 테너(제임스 카터, 앤드루 화이트), 바리톤(샘 퍼니스), 여섯 명 멤버 모두가 섹소포니스트라는, 대단히 독특한 구성의 섹스텟이 아닌가. 줄리우스는 색소폰 섹스텟으로 두텁고 깊은 하모니의 수준 높은 극 하나를 완성한 것만 같다. 블루스, 가스펠 등 흑인의 뿌리와 감성을 캔버스 위에 논리적으로 배열한 뒤 창의적인 또 다른 감성의 구조를 쌓아놓았다. 색소폰이 닿으려는 에로티시즘의 세계, 바로 이것이 아닐까.



Thomas Chapin [Menagerie Dreams], Knitting Factory, 1994

토마스 차핀(1957-2005)은 라산 롤랜드 커크와 에릭 돌피를 합쳐놓은 것 같은 숨은 천재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치코 해밀턴 밴드와 활동했고 재즈 클럽 '니팅 팩토리'가 만든 니팅 팩토리 레이블의 간판 연주자였으며 존 존, 안토니 블랙스톤과 많이 협연했다. [Menagerie Dreams]에도 존 존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본작은 차핀 트리오의 역량이 집결된 음반 중 하나로 차핀 작곡의 “Bad Birdie”의 2분부터의 솔로와 듀크 엘링턴 곡 Daydream의 인상적인 형식에 집중해볼 만 하다. 차핀이 그려내는 세계는 역동적 몽환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몽상가였고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에릭 돌피처럼 새소리를 탐구하고 자아화시켰다. 차핀의 몽상에 동참해보자. 사후에도 그의 몽상을 쫓는 리스너들이 그를 기념하고 있다. 몽상을 낳은 천재. 그 몽상을 에로티시즘으로 연결하는 것은 리스너의 몫이다.


Keith Jarrett [Radiance], ECM 2005

키쓰 자렛은 늘 전작의 명반들과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걸출함은 워낙 독보적이고 이슈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여러 명반을 차치하고 [Radiance]의 각별함 역시 별개의 운명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 언급되지만 몹시도 탐미적이다. 이전의 키쓰 자렛과 관련한 나의 글에서 나는 키스 자렛 음악의 몸성과 옴짤달싹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지고 마는 수동적 리스너로서의 나에 대한 한탄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다. 신체적 병약함을 극복하고 솔로이스트로서 다시 무대에 오른 키스 자렛이 음악의 몸성에 힘겹게 분투하고 자기화하고 그런 음악적 자아가 표출하는 음악적 팡세를 [Radiance] 음반으로 구성하였다. 진실을 담은 간결한 아포리즘이다. 유명세를 타는 키쓰 자렛에게 리스너는 소수의 참여자와 다수의 관찰자로 구성된다. 그의 새 앨범은 비참을 포함한다. 키쓰 자렛은 분투하는 만큼 존엄을 갖는다. 존엄을 갖는 만큼 키쓰 자렛은 소진된다. 키쓰 자렛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인가? 오만한 것은 키쓰 자렛이 아니라 리스너일 수 있다. 그는 멜로디 그 자체이다. 그는 에로티시즘 그 자체이다. 빛남, 광명의 의미가 있는 Radiance의 솔로 ‘단편집’(기존의 긴 솔로 트랙들을 떠올려보라)을 통해서 무한함과 허무의 중간 상태에서, 광명과 비참의 중간 상태에서 리스너는 비로소 심연의 질서 속으로 키쓰 자렛이 이끌어가는 에로티시즘의 단계로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John Coltrane, [Love Supreme], Impulse!, 1965

재즈가 스피리추얼의 세계로 올라섰다면 단연 그 시작과 중심에는 존 콜트레인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명반 중 명반으로 꼽고 있지만, 대중적인 음반은 아니다. 나는 이 음반이 시디장 구석에서 빠져나와 모두의 리빙룸에서 끊임없이 자주 재생되는 것을 꿈꾼다. 음반에서처럼 나는 “Love Supreme” 보이스를 주술처럼 19번 읊조리곤 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 작품의 의도와 정신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과 평행선을 이루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 꿈틀대는 물결은 잔잔하되 심연에 들끓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는 삶을 압도할 지경이다. 좋은 음악은 죽음을 다룬다고 하였는가. 이 음반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에로티시즘의 세계는 그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히 흐르고 마르는 법이 없다.



<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1>은 <재즈피플> 2015년 3월호를 통해 소개했다. 본 글은 후속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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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카리스마에게 시련은 없다. 찰스 밍거스.

(양수연의 재즈탐미 -재즈피플 2016년 5월호)



뉴햄프셔로 향하는 보스턴 북쪽 1번 도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나올법한 투박한 시골 정경이 펼쳐진다. 한적한 도로에 띄엄띄엄 서 있는 백 년 넘은 집들은 목공소, 골동품 가게, 잡화점으로 채워져 있다. 누가 찾아올까 싶은 한적한 곳이지만 반세기 전엔 유명한 재즈 클럽이 있었다. 레니 소고로프가 운영했던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Lennie’s-on-the-Turnpike). 지금의 풍경처럼 허름하고 낡은 재즈 클럽이었다. 천장이 주저앉을 듯 낡았고 비좁고 여자 화장실도 없어서 니나 사이먼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러나 재즈의 인기가 록으로 대체된 그 시절에 내로라하는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은 이 먼 곳까지 올라와서 안식을 얻곤 했다. 그중에는 찰스 밍거스도 있었다. 

토마스 리치만이 연출한 1968년 작품 찰스 밍거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밍거스의 연주 장면들은 바로 이곳,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에서 촬영된 것이다. 그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찰스 맥퍼슨(알토 색소폰), 존 길모어(테너 색소폰), 로니 힐리어(트럼펫)과 함께 All the Things You Are, Take the ‘A’ Train, 그리고 Peggy’s Blue Skylight를 연주한다. 밍거스의 둔탁한 손은 과도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어 보는 이를 짓누를 것만 같다. 공격적인 터치, 엄청난 하모닉 센스, 괴성을 지르며 스캣하는 밍거스는 음악과 인생을 달관한 도인과 같다.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는 71년에 화재로 문을 닫았다. 밍거스는 79년에 죽었다. 

재즈 워크샵, 프리재즈와 모달.

1951년 5월, <다운비트> 매거진은 샌프란시스코의 블랙 호크 클럽에서 열린 비브라폰 주자 레드 노보 트리오 공연을 취재하던 중 놀라운 귀재를 발견한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실력의 베이스 주자가 바로 여기 있다. 그는 연주하면서 미소짓고 행복해 한다….” 비평가 랄프 글리슨은 6월 1일자 다운비트에 스물 아홉살 그 베이스 연주자를 소개하는데 이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 한다. 타이틀을 “찰스 밍거스, 생각하는 뮤지션”이라고 뽑았다. 나는 그 어떤 무엇보다 이 기사가 초기 찰스 밍거스의 진가를 대중에게 알린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밍거스는 레드 노보(비브라폰)와 기타(탈 팔로우)와 함께 활동 하고 있었다. 다운비트는 클래식 음악 배경을 갖추고 재즈의 크리에이션을 갖춘 밍거스를 극찬하는 것도 모자라 “진정한 재즈는 예술”이라며 그의 어깨에 예술과 혁신이라는 짐을 얹어 주었다. 밍거스의 ‘생각’이란 재즈의 미래이고 재즈의 발전 가능성으로 치환되었다. 그해 말 레드 노보 트리오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리고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그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이듬해 52년에는 맥스 로치와 함께 공동으로 독립 레이블인 데뷔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음악 비즈니스에도 발을 내디뎠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맥스 로치가 함께한 비밥의 걸작 <The Quintet, Live at Massey Hall>앨범도 이 데뷔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생각하는 뮤지션, 찰스 밍거스. 그의 혁신성은 그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샵’ 프로젝트로 표상된다. 재즈 워크샵은 말 그대로 연구 모임 이름이자 그룹 이자 나중엔 회사 이름이기도 했다. 53년에 첫 재즈 워크샵 때는 한동안 작곡된 음악을 했다. 그러나 밍거스는 이내 이런 악보화된 재즈가 연주자의 즉흥연주와 창의력을 구속한다고 생각하고 56년에 새로운 재즈 워크샵을 시작했을 때는 악보 자체를 폐기했다. 그 어떤 멜로디 악보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악보없는 연주는 밍거스와 고등학교 밴드에 같이 참가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학교 밴드에서 엘드리지가 악보를 거부하자 밍거스는 의아해했다. 

 “내 악기를 봐. 나는 내가 느끼는 걸 연주해. 그것이 재즈야. 너도 악보를 버리고 너의 것을 발견해봐. 스스로 터득해보라고. 그러면 넌 언젠가 나에게 고마워할거야.” 


많은 연주자들이 재즈 워크샵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자아를 발견하고 떠났다. 그러나 악보가 없으므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새로 들어온 멤버들은 기존의 창작곡들을 악보없이 배워야 했고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는 기존 멤버들에게도 타격이 됐다. 그런데도 밍거스는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이 가장 진솔한 방법임을 주장하였고 언젠가 멤버들이 떠날 것을 알면서도 각 연주자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작곡했다. 이런 면에서 밍거스는 그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듀크 엘링턴과 비슷했다. 악보 없이 진행되는 재즈 워크샵 리허설 공연에서 밍거스는 청중을 향해 이 곡은 새로 작곡된 것이라서 몇 번 다시 연주해봐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청중은 같은 곡을 그 자리에서 여러 번 들으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완성이 되면 박수를 쳤다. 

밍거스는 연주자가 진솔하게 즉흥연주하는 것과 시늉만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재즈 워크샵에서 이루어진 집단 즉흥 연주에서 프리 재즈에 관한 밍거스는 입장은 완고했다. 밍거스는 프리 폼에 대해서 우려의 말을 종종 했는데 색소폰이 프리 재즈를 연주할 때 뭐가 나올 줄 모르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누르는 것일 뿐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밍거스는 청중에게는 음악을 보여야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실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밍거스의 음악에는 분명 프리 폼이 들어있다. 재즈 워크샵에서는 프리 폼에 관현 실험이 이루어졌고 이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다. 솔로 주자는 익숙한 구성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밍거스는 본인의 주장들에 반하는 내용을 직접 라이너 노트에 쓰기도 했다. “나는 우리 그룹이 ‘토널’(조성)로 즉흥 연주를 하기를 바라지만 프리 폼의 불협화음으로도 나아갈 의향이 있다” (Jazz Composer’s Workshop, Savoy, 1954) 밍거스 재즈 워크샵은 오네트 콜맨, 알버트 아일러, 세실 테일러에 수년 앞선 50년대 중반 프리 재즈 요소를 담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밍거스가 원하는 것은 자기 능력 한계에 벗어난 실험을 청중 앞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프리 폼은 어떤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선견지명과 혁신성은 모달 재즈에 관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모달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으로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거론되지만, 찰스 밍거의 56년 작품 <Pithecanthropus Erectus>(Atlantic)의 마지막 수록곡 Love Chant에서 모달 재즈가 시도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는 블루스를 구성하는 3개 코드를 더 줄여서 주문(Chant)의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가 모달 재즈를 연주할 때 밍거스는 모달이 이미 20년대 젤리 롤 모튼이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밍거스의 시련, Epitaph.

89년 6월 3일,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는 군터 실러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찰스 밍거스가 작곡한 2시간 30분에 이르는 모음곡 ‘Epitaph’가 18년 만에 청중에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Epitaph는 1962년 10월 2일 찰스 밍거스가 뉴욕 타운홀에서 초연한 뒤 연주되지 않았다. 69년 초연 당시 청중석에 앉아있던  군터 실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밍거스의 역할은 떠오르는 신예 크리스챤 맥브라이드가 맡았다.

62년 초연 무대는 밍거스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무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연주자들은 20악장에 달하는 대곡을 소화하지 못해 갈팡질팡했고 밍거스는 무대에서 불같이 화를 내었으며 악보를 쓰는 기보자 세 명이 무대에 올라 다음 연주되어야할 노트를 즉석에서 그린 뒤 연주자들에게 전해주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공연에 앞서 Epitaph 악보를 놓고 토론하던 중 밍거스는 57년부터 그와 함께 해온 트럼본 주자 지니 네퍼를 폭행해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는 참극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네퍼는 공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공연은 심지어 라이브 레코딩까지 되었는데 이 재앙의 연주를 엿보고 싶으면 The Complete Town Hall Concert (United Artists UAJ 14024, 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잊혀진 Epitaph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음악학자 앤드류 혼즈였다. 그가 미망인 수 밍거스 자택에서 Epitaph를 발견했을 때 베토벤 10번 교향곡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순서도 뒤죽박죽, 희미해진 500페이지 분량의 악보를 퍼즐처럼 맞추어 복원에 성공했다. 그러나 20개 악장 중 7번째 악장 ‘Inquisition’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89년 공연도 악장 하나가 빠진 채 연주되었으니 완벽한 복원 공연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다시 18년이 흘렀고 2007년에야 할레너드사에 의해 온전한 Epitaph 악보가 출판될 수 있었다. 사라진 악보는 다름아닌 89년 복원 공연이 열린 바로 그 뉴욕 링컨 센터, 그곳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찰스 밍거스가 링컨 센터 도서관에 돈 받고 팔았다는 것을 미망인이 뒤늦게 기억해낸 탓이었다.

찰스 밍거스의 시련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어려웠던 순간들이 레코딩이나 영상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리라. 재앙과 같은 타운홀 라이브 레코딩 보다 더욱 가슴 아픈 건 앞서 말했던 토마스 리치만의 찰스 밍거스 다큐였다. 이 다큐는 1966년 11월 22일, 밍거스가 자신의 보금자리, 맨해튼 그레이트 존스가 5번지에서 퇴거 명령을 받고 짐을 싸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블렛 준 여자가 렌트비를 안 냈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살 난 밍거스의 딸 캐롤린이 사방에 흩어진 박스와 잡동사니 사이를 뛰어다니고 때론 피아노를 치고 있는 밍거스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딸을 보는 밍거스의 얼굴이 어찌나 다정하고 자애로운지 마음이 짠하다. 밍거스의 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퇴거 당일, 그는 느닷없이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집에서 주사기와 약들이 발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두 명의 경찰이 밍거스의 팔을 한쪽씩 껴 잡고 경찰차로 걸어가는 동안 기자들이 나타나 그의 모습을 촬영하고 인터뷰한다. “당신 헤로인 했나? 왜 체포되는건가?”

마약을 하지 않은 밍거스는 떳떳하다. 그는 흑인이고 흑인 재즈 뮤지션이기 때문에 의심을 산 것임에 분명하다.

그의 집에서 나온 주사기와 약은 의사 처방을 받은 치료용 약물이었다. 밍거스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고 카메라는 수 밍거스의 얼굴과 길가로 쏟아진 짐 중에서 밍거스의 콘트라베이스에 고정된다. 

찰스 밍거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던가? 위대한 찰스 밍거스, 그의 콘트라베이스가 쓰레기 차에 실린다. 그가 힘들었을 이후 수년간의 암흑기를 암시하면서. 그는 1972년,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를 발표하며 그의 카리스마스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찰스 거스가 경찰에 체포되는 실제 장면 (찰스서스 1968년 다큐멘터리 화면 캡쳐)


<양수연의 추천 앨범>


1. Pithecanthropus Erectus / Atlantic / 1956

원시 인류 종인 ‘직립 원인’을 제목으로 한 독특한 구성의 앨범, 진화하고 멸망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오네트 콜맨 이전의 프리 재즈적인 요소와 마일스 데이비스 이전의 모달 재즈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아틸란틱 레코드 데뷔작. 재키 맥린, 주니어 몬테로즈, 말 왈드론, 윌리 존스 참여.

2. The Clown / Atlantic / 1957

아이티 민중의 독립 투쟁을 그린 Haitian Fight Song, 찰리 파커를 위한 Reincarnation Of A Lovebird이 담긴 밍거스 역작. 지미 네퍼(tb), 샤피 해디(s), 웨이드 레게(p),대니 리치먼드(d)참여

3. Mingus Ah-Um / Columnia / 1959

레스터 영을 위한 ‘Goodbye pork pie hat, 인종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ubus 등이 녹음된 콜럼비아 데뷔작. 존 핸디(as), 부커 어빈(ts), 샤피 해디(ts), 윌리 데니스(tb), 지미 네퍼(tb), 호레이스 파란(p), 대니 리치몬드(d)가 참여했다. 

4. Mingus Dynasty / Columnia / 1959

듀크 엘링턴 영향이 느껴지는 동시에 다양한 스타일의 밍거스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콜롬비아사에서 발매된 두번째 앨범. 기존 고정 멤버 외에 비브라폰, 첼로, 보컬을 더 넣어 풍부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더했다. 

5. Blues & Roots / Atlantic / 1960

블루스, 가스펠, 뉴올리언즈 등 흑인 음악의 뿌리와 초심을 담은 밍거스의 명작. 슬로우 블루스, 열정적인 스윙, 집단 즉흥 연주 등 고전적인 재즈, 블루스의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담아 냈다.

6. Oh Yeah / Atlantic / 1961

재즈계 기인, 라산 롤랜드 커크 영입 이후 발표한 수작. 밍거스는 베이스 대신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베이스는 더그 와트킨스가 연주했다. 전통 어법을 기반으로 역동적이며 다소 기괴하고 유쾌한 사운드가 시종 펼쳐진다.

7.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 / Impulse! / 1963

타운홀 콘서트 ‘재앙’후 석달 뒤 녹음된 발레 스타일의 6개 악장으로 채워진 기념비적인 작품. 빅밴드 리더이자 작곡가로서 듀크 엘링턴 이상의 면모를 보여준, 재즈사에 길이 남을 오케스트레이션 앨범. 

8.Cornell 1964 / Blue Note / 2007

1964년 3월 18일 코넬 대학에서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 라이브. 미망인 수 밍거스에 의해 발견되어 2007년 <블루노트>에서 처음 발표됐다. 에릭 돌피, 자니 콜, 클리포드 조던, 재키 바이어드, 데니 리치몬드가 참여했다. 유럽 투어를 앞둔 최상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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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6년 2월호




샌프란시스코의 ‘소살리토’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이다. 나는 그 작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제법 잘 알고 있다. 아스라한 노을이 펼쳐진 해변에 누워 서핑하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오순도순 모인 빅토리아풍 집 정경이 펼쳐진 카페에서 우유 맛 나는 북태평양 굴의 비릿함에 취하기도 했다. 폴 블레이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소살리토가 떠올랐다. 몇해 전 나는 그곳에서 폴 블레이의 음악에 취해있었다. 소살리토에선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포근하고 나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아마 그때 들었던 음악에 54년 블레이 데뷔 앨범 [Introducing Paul Bley]도 있었을 것이다. 찰스 밍거스와 아트 블레이키, 특히 폴의 피아노가 무척 아름다웠던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곡도.


폴 블레이는 그즈음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살리토에서 칼라 블레이와 그림 같은 결혼식을 올렸다. 숲 속에서 은둔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던 칼라의 아버지도 왔고 향연을 즐기며 행복한 순간을 소살리토에서 누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왠지 칼라 블레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인들이 있다. 자유롭고 고집스럽고 재능있는 여자들. 아티스트거나 히피의 후예이거나 어떤 무엇인 여인들. 나는 어린 칼라가 헐벗게 자랐을지언정 행복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샌프란스시코의 자연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같다." 폴 블레이는 그 점에 반했을 것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했고 그 자연의 돌봄을 받은 칼라를 사랑했다. 칼라는 해변에서 수영복이 없으면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브래지어를 만들어 척하니 걸치고 있는 여인이었다. 너무나 멋있어서 폴도 그녀와 진짜 사귀기로 마음 먹었다. ‘썸타는 사이’가 된지 하루가 안 된 시점이었다. 둘은 맨해튼의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이 만난 정경은 폴이 자서전에 묘사해 놨다.


1956년 여름, 버드랜드에서 연주할 때였다. 뒷문 옆 평소 내가 주로 서 있는 자리에 키 크고 마른 여자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서 있었다. 담배 파는 여자였다.  담배를 담은 쟁반을 목에 걸고 서 있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었다.

“당신 문제는 뭐요?”

그녀의 고민은 길었다. 이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클럽 사장이 치근덕대고 피곤하다……어쩌고저쩌고.

그때 그녀는 칼라가 아니라 캐런이라고 불렸다. 폴은 조언했다. 

“해법은 간단하죠. 지금 당장 담배통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걸어나가세요, 그리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요.”

그러자 그녀는 담배통 쟁반을 내려놓았고 나랑 같이 문밖으로 나갔다.


폴 블레이의 앨범 [Annette] 수록곡 ‘Cartoon’처럼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카툰의 다음 장면은 이것이겠다. 


LA에 머물고 있는데 칼라가 나랑 살고 싶다고 뉴욕에서 왔다. 그녀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결혼은 내 인생 우선순위에서 최하위에 있는 사안이었다. 뮤지션은 대부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라에게 말했다. “시간을 줘요, 우리 잠시 떨어져 있어요. 고민해 볼게요.” 칼라는 뜻밖의 내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 길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버렸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칼라가 있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흥분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모든 사람과 수다를 떨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니 한 남자가 나왔다. 어떤 아티스트가 칼라랑 살고 있었다. 칼라는 그 남자 옆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 누구지? 이름이 뭐지? 이런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밖으로 불러냈다. 난 칼라랑 결혼하려고 이곳에 왔소. 당신은 혹시 칼라랑 결혼할 생각이 있나요? 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칼라에게 이제 결혼할 준비 됐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비꼬듯 대답했다 “오, 리얼리?”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결혼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나에게 쏘아붙였다. 나는 칼라에게 맘이 바뀌면 전화하라고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후, 칼라의 전화를 받았다. 폴, 당신에게 가겠다고…..

 칼라 블레이와 폴 블레이, 1957년 결혼 초기 무렵


폴 블레이는 저도 모르게 열정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곤 했다. 여인들은 적극적으로 폴에게 다가와 그의 지순한 사랑을 얻어냈다. 두 번째 아내, 아네트 피콕도 그러했다. 그녀도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고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의 아내로서 이미 교류가 있던 여인이었다. 1966년 게리 피콕과 별거 중인 아네트가 몇 년 만에 폴에게 느닷없이 전화했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친구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위험한 상황에서 폴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떨어진다구요. 제가 갈께요!” 

세번째 부인, 비디오 작가 캐롤 고스는 폴의 하우스 파티에서 만났다. 이번엔 폴도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캐롤은 재능이 있고 지적이며 배려심도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을 함께 했다.  


 아네트 피콕. 그녀는 칼라 블레이와 더불어 폴 블레이에게 음악적인 교감과 영향을 주고 받은 여인이었다.



폴에게 여자란 어떤 존재였을까. 폴은 그녀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으려 노력했다. 어려서도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여인에게 익숙했으니, 폴의 어머니 베티 얘기이다.

폴은 다섯 살 때 본인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인생을 두고 큰 영향을 끼쳤다. 폴이 받은 두 번째 충격은 어머니 베티가 어느 날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한 뒤 집을 떠난 일이었다. 부모가 부부동반으로 극장에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는 우연히 첫사랑과 마주친 뒤 아버지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이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폴을 데리고 첫사랑과 재혼을 했다. 사춘기 폴은 갑자기 새 아버지가 생긴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에 더욱 정진했다. 어머니는 폴이 음악 공부를 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거금 500불을 쥐여주며 뉴욕으로 가라고 말했던 화끈한 여인이었다.


세 번째 충격은 시간이 흘러 1992년, 폴의 나이 60세에 일어났다. 클럽에서 한세트 연주하고 쉬고 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 블레이. 폴에게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신은 입양되었지만, 당신 아버지가 생부 맞아요, 생모는 당신의 유모, 루시였어요.” 

폴은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가장 행복하다고 여겨졌던 유년 시절의 기억에 유모 루시가 있었다는 점이 상기됐다. 그러나 폴은 청년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2년 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 갔다가 라디오 호스트 랜 도빈의 소개로 폴은 93세 되는 노인을 만나게 됐다. 그 노인은 폴의 입양문제를 처리한 당시 변호사였다. 폴은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 노인과 점심을 먹으며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 베티가 아이를 못 낳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루시라는 여인과 바람이 났고 폴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인에게 그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고, 베티가 그 아이를 선택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베티는 원래 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으나 베티에게 다가와 ‘마마’라고 부르는 폴을 베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절대 바닥에 다시 내려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생모 루시는 유모로 들어와 5년여 간 폴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60세 폴은 성경에서 모세와 모세의 유모로 들어간 생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폴 블레이.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허둥지둥 마음이 급해졌다. 뭔가 빨리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예전에는 어린 아이의 속도로 느리게 살고 있었는데 충격을 받은 후 시간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역사가 없고 백그라운드가 부족하다는 허탈감. 음악만이 그 공허를 메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총알같이 달렸다.


그 총알 같이 달려온 시간 중 아름다운 몇 장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58년 어느 날 폴은 매사추세츠주의 그 유명한 ‘레녹스 스쿨 어브 재즈 나잇’에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LA의 힐크리스 클럽에서 찰리 헤이든과 빌리 히긴스와 고정적으로 연주했고 오네트 콜맨, 돈 체리도 불러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레녹스에 가는 건 이스트 코스트 재즈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경험할 좋은 기회였다. 이미 그곳엔 ‘써드 스트림’의 중심인물들, 존 루이스, 랜 블레이크, 조지 러셀을 비롯해 찰스 밍거스, 지미 쥐프리 등이 있었다. 폴은 칼라를 데리고 반대편 동부인 레녹스까지 삼일 밤낮을 운전했다. 그들이 가까스로 레녹스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밤 11시. ‘스쿨 어브 재즈 나잇’의 마지막 날의 마지막 곡이 소개되던 참이었다. 마지막 곡을 연주하려던 랜 블레이크에 다가갔다. “같이 연주해도 되요?”

폴의 향후 4년간의 연주 생활은 그날 연주한 마지막 한 곡에서 비롯됐다. 폴은 그 마지막 곡이 진정 인생 마지막 곡인 것처럼 온 에너지와 열정을 집중해서 연주했다고 술회했다. 그 공연 이후 찰스 밍거스, 조지 러셀, 지미 쥐프리, 랜 블레이크를 비롯해 많은 연주자가 폴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서 요청을 해왔으니 말이다. LA에서 레녹스까지 운전하면서 만일 단 한 곳에서라도 신호등이 초록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면 아마 그날 무대에 서지 못했겠지? 폴은 이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날 만난 랜 블레이크와는 인연이 깊어갔다. 스티브 스왈로우를 폴에게 소개해준 것도 랜 블레이크였다. 랜은 폴에게 그가 몸담고 있던 바드 칼리지에서의 공연을 주선하면서 폴의 양해 하에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를 데려왔다. 스티브는 당시 명문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수재였다. 폴은 스티브의 연주에 반해서 같이 연주하러 다니자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스티브는 결국 예일대를 중퇴한 뒤 폴이 마련해준 거처로 옮겼다. 스티브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 졌다. 스티브가 학업을 포기하자 부모의 충격이 몹시 컸다고 한다. 폴은 뉴욕의 자기 집 옆 6애버뉴의 빈 다락방에 방을 마련한 뒤 전등을 끌어와 스티브가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차후 스티브 스왈로우와 평생 연인이 될 폴의 아내 칼라도 이때 처음 스티브를 만나게 된다. 폴과 스티브는 그 뒤 2년간 듀오로 소호의 블리커 스트릿에 있는 작은 커피샵에서 연주했다. 폴은 그 당시 지미 쥐프리에게 스티브를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었다. 폴은 지미에게 조금씩 스티브의 실력에 대해 풀어내며 함께 연주하게 되면 절대 음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할 따름이었다. 폴은 한달 가까이 이렇게 신신당부만하며 지미의 애간장을 태워놓았고 지미가 정말 베이스 주자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 더 기다렸다. 지미가 결국 스티브 좀 보자고 사정사정하는 시점이 되자 폴은 아끼는 친구 스티브를 데려왔다.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로 이루어진 전설적인 지미 쥐프리 트리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89년, 프랑스 재즈 매거진에서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재결성을 제안했고 지미, 폴, 스티브는 1990년에 다시 모여 <The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를 녹음했다.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세 장의 앨범 Fusion, Thesis,Free Fall이 나온 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폴 블레이는 평생 사랑에 빠져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랑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랑했던 여인들과 음악적으로 함께 성장해 갔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평생 존경을 잃지 않았다. 칼라, 아네트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었던 아내 캐롤,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 게리 피콕과 그밖의 많은 뮤지션 친구들, 어머니 베티, 아버지 조, 유모 루시까지도. 그들을 향해 평생 사랑이 넘쳤던 폴 블레이,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빈다. 



(*본 칼럼에 등장하는 인용문은 1999년에 발간된 폴 블레이 자서전 <Stopping Time: Paul Bley and the Transformation of Jazz>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양수연이 뽑은 폴 블레이 앨범 10>




1.[Barrage] (ESP DISK, 1965)

칼라 블레이의 곡으로 이루어진 프리재즈 앨범으로 오네트 콜멘의 [Free Jazz] 앨범과 비견되는 수작. 선 라 밴드의 색소포니스트 마샬 알랜과 이듬해 존 콜트레인의 프리 재즈 걸작 [Ascension]에 참여한 트럼펫터 드위 존슨의 참여가 눈에 띈다. 

Paul Bley(p), Dewey Johnson(tp), Marshall Allen(as), Eddie Gómez(b), Milford Graves(perc)


2. [Closer] (ESP-Disk, 1966)

트리오로 녹음된 ESP에서의 두 번째 앨범. 수록곡 각각이 2-3분 내외로 짧으나 개성이 강하고 깔끔한 연주가 일품이다. 프리 재즈적 접근, 라틴 음악의 감각, 전통적 색채의 서정적 발라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짧은 곡들에 핵심적인 요소를 담았다. 칼라 블레이의 클래식 Ida Lupino을 비롯해 총 7곡의 칼라의 작품과 아네트 피콕, 오네트 콜맨의 곡도 한 곡씩 연주되었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Barry Altschul(perc)




3. The Paul Bley Synthesizer Show (Milestone, 1971)

폴 블레이는 일렉트릭 신디사이저 사용에 있어서도 선두주자였다. 아내 아네트 피콕의 작품들을 담은 퓨전 앨범으로 아네트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요소를 담은 실험성이 돋보인다. 

Paul Bley(p, syn, ep-p),Glen Moore/Frank Tusa/Dick Youngstein (b), Steve Hass/Bobby Moses (d)




4. [Open, To Love] (ECM, 1972)

폴 플레이의 솔로 앨범으로 칼라 블레이 작품 세 곡(Closer, Seven, Ida Lupino), 아네트 피콕의 작품 두 곡(Open, to Love, Nothing Ever Was, Anyway)과 폴 블레이 작품 두 곡(Started, Harlem)이 하나의 큰 스토리를 들려주듯 아름답게 배치되고 연주되었다. 블루지한 슬픔과 서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Ida Lupino’를 비롯해 모든 곡들이 빼어나다.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최고의 솔로 앨범 중 하나.

Paul Bley(p)




5.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

폴 블레이,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가 ‘지미 쥐프리 트리오’ 이름 하에 30년 만에 만나 녹음한 앨범. 1989년 12월 16일 토요일과 17일 일요일 양일간에 걸쳐 두 장의 앨범으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각 연주자의 개성이 절제와 내적 융합으로 오묘하고 깊은 사운드를 만들어낸 수작이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Jimmy Giuffre(ss, cl)



6. Plays Carla Bley (Steeplechase, 1991)

전 아내 칼라 블레이에 대한 경외를 담은 또 다른 컨셉의 앨범. Seven, Ida Lupino 등 폴이 즐겨 연주하는 칼라 블레이 주요 레파토리 외에도 Vashja, Floater, Around Again 등 칼라의 대표작 12곡이 스윙, 아방가드, 밥의 이디엄으로 연주되었다. 

Paul Bley(p), Marc Johnson(b), Jeff Williams(d)




7. [Annette] (hat ART, 1993)

아네트 피콕. 그녀를 주제로 한 이 앨범을 위해 전 남편들 게리 피콕과 폴 블레이가 함께 했다. 아네트의 대표곡Touching과 Blood는 take 1, 2로 나뉘어 연주되었고 애니타에게 바치는 Annette, Mister Joy 등 총 12곡의 수록곡은 생략적, 그야말로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미니멀리즘 미학이라 불릴만하다.

Paul Bley(p), Gary Peacock(b), Franz Koglmann(tp, flgn)




8. [Chaos] (1998, Soul Note)

피아노 솔로곡 -베이스 솔로곡 - 드럼 솔로곡- 트리오의 순서로 곡을 배치하였으며 독특한 감각과 아이디어로 색다른 칼러를 내뿜는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걸작이다. 

Paul Bley(p), Furio Di Castri(b), Tony Oxley(d)



9. [Sankt Gerold] (ECM, 2000)

폴 블레이, 애반 파커, 배리 필립스가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중턱의 장크트 게롤트 수도원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12곡의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풀어낸 수작. 

Paul Bley(p), Evan Parker (ts, ss), Barre Phillips (b)



10. [Play Blue Oslo Concert](ECM,2014)

2008년 ECM의 에릭 콩쇽과 만프레드 아이어가 기획한 노르웨이의 ‘오슬로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솔로 라이브 실황으로 폴 블레이의 유작으로 남게 됐다. 폴 블레이의 작품 4곡(Far North, Way Down South Suite, Flame, Longer)과 소니 롤린스의 ‘Pent-up House’가 연주되었다. 노장 폴 블레이의 연륜이 집약된 더없이 열정적이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다운 솔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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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소스를 곁들인 피쉬 케익 샐러드 (with 윈튼 마샬리스)

쉽게 구할 수 있는 흰살 생선과 감자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




4월의 첫날인데 아직도 눈이 펄펄 쏟아지는 이곳 보스턴. 오랜만에 포스팅합니다. 

피쉬 케익을 만들면서 윈튼 마샬리스 재즈 오케스트라의 데이브 브루백 트리뷰트 2014년 4월 공연을 맛보는 중입니다. 

흰살 생선과 삶아 으깬 감자와 여러 허브를 넣어서 팬에 그릴한 피쉬 케익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공연이 계속되네요.

가끔, 링컨 센터에 직접 가서 윈튼 마샬리스의 향연을 감상합니다. 하지만 직접 가지 않더라도 링컨 센터만큼 열심히 온라인 중계해주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합니다. 재즈의 메카, 재즈 교육의 코어답게 대중을 향한 러브콜이 적극적인 것 같아요. 언제든지 유투브 채널을 통해 윈튼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어서 즐겁기만 합니다.

윈튼 마샬리스는 미국 음악 공교육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할만큼 모범적인 뮤지션이자 작곡가, 음악감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82년 21살의 나이에 <Wynton Marsalis>(Columbia)를 들고 나타난 윈튼 마샬리스. 재즈 명문 '윈튼 가'의 자제로서 십 대부터 날렸던 그의 솜씨가 빼어나게 드러나던 앨범이었습니다. 그 풋풋했던 천재적인 트럼펫터가 이제는 미국의 국민 재즈 아티스트로서 사랑받고 있는 거죠. 이 데뷔 앨범에서 Father Time이란 곡을 듣고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986년, 윈튼이 24살일 때, 밴쿠버 재즈 페스티벌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처음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어린 사자(Young Lion)'이라 불리는 윈튼을 향해 불만스러움을 토로하는데요, 80년대 거침없은 록-퓨전의 세계로 나가던 마일스에게 윈튼은 전통 스타일을 고수하는, 지루한 연주자였던 거죠. 마일스는 본인 자서전에 윈튼을 향해 냉소를 내뿜습니다. "어린 녀석이 죽은 유러피언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잖아!"

윈튼의 이미지는 마일스 데이비스로 인해 더욱 굳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윈튼이 뉴올리언즈 출신인 데다가 이른바 '신고전주의' 연주자라며 그를 전통의 틀 안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윈튼은 딕시랜드, 비밥, 퓨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블루스를 바탕으로 윈튼만의 창의적인 언어로 여러 스타일을 창조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윈튼 마샬리스는 생선 요리를 좋아하고 그중 스시를 가장 즐겨먹는다고 측근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 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냉동 대구로 피쉬 케익 만들어봅니다.


<피쉬 케익 재료 (2-3인분)>

냉동 대구 240g 

감자 작은 것 2개

소금, 후추, 마늘 1~2톨

라임주스 1T, 식용유, 물1T, 와이트 와인(또는 미림) 1T

다진 파 1 T, 실란트로 1T, 바질 1T, (옵션: 고춧가루 약간)

달걀 1개, 1/3컵 빵가루, 1/3컵 밀가루


<만드는 법>

1. 뜨겁게 달군 팬에 식용유를 넣은 뒤 불을 줄인 후 마늘 1~2쪽을 2분 정도 볶다가 마늘은 건져내어 버린다.

2. 냉동 대구를 해동시킨 후, 소금, 후추를 뿌린 뒤 팬에서 겉이 노릇하게 굽다가 라임주스, 물, 와이트 와인 또는 미림을 넣고 약간 조려준다.

3. 다 익힌 대구를 건져내 그릇에 담고 포크로 으깨준다.

4. 대구를 구웠던 팬에 감자를 저며 썬 감자를 넣고 감자가 잠길 때까지 물을 부은 뒤 두껑을 덮고 조리는 듯 삶는다. (약 15분)

5. 감자가 으깨질 만큼 다 익으면 남은 물을 버린 후 팬에서 으깨준다.

6. 으깬 감자를 으깬 대구에 넣고, 다진파, 다진 실란트로(고수), 바질, 달걀, 빵가루, 달걀을 넣고 버무린 뒤 손바닥 크기로 모양을 만든다.

7. 밀가루에 묻힌 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서 앞뒤로 굽는다.

8. 적당한 샐러드 야채(양상치, 베이비 스피니치 등)을 깔고 피쉬 케익을 올린 뒤 미소 당근 소스를 얹는다.



<미소 당근 소스>(뉴욕 타임즈 레써피)

피넛 오일 (또는 포도씨 유) 1/2컵 

쌀식초 1/4컵 

미소 된장(소금기가 덜한 화이트 미소 이용) 2T

참기름 1 T

당근 중간 크기 2개 (얇게 썰기)

서양 생강 한톨 (한국 생강은 쓴 맛이 강하므로 추천하지 않으나, 이용할 경우 약간만 넣습니다)

후추

<만드는 법>

모든 재료를 믹서나 푸드 프로세서 넣고 간다.












posted by jazzlady

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며


지난 여름 서울의 한 재즈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청중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십수 년 전 그곳은 분명 중년층들 대다수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날 본 청중은 대부분이 20대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상당수가 몇 시간 전 처음 맞선 본 사람처럼 격식을 갖춘 옷차림으로 데이트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음식을 주문하고 칵테일이나 와인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솔로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괄 박수를 쳤고 파트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날 특별히 시간을 내어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그들 나이 또래의 연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 나는 그곳 청중이 어떤 이유나 계기로 왔는지를 떠나서 먼저 그들의 젊음이 새삼스러웠다. 설령 재즈 클럽을 찾는 이유가 재즈라는 음악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본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재즈를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즈를 소비하는 사람, 재즈를 소비하는 청중. 재즈팬의 한 사람으로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재즈를 들으러 즐겨 방문하는 보스턴 혹은 뉴욕의 공연장이나 재즈 클럽은 상당수의 청중이 중장년층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의 보스턴 레가터 바 공연에선 청중의 70%가 60대 이상이었다. 그 이상의 노인들도 대단히 많았다. 느닷없이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존 스코필드는 일렉트릭 기타로 퓨전 재즈계의 거목이 된 연주자니 만큼 젊은 청중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와 로바노가 나란히 무대에선 건 2008년 이후 7년 만이었으니 귀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러 온 것은 대부분 옛날 팬들,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팬들이었다. 63세의 존 스코필드와 62세의 조 로바노, 그들은 [Past Present] 앨범 출시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노인 청중 앞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미국의 많은 재즈 비평가들이 재즈 청중의 감소를 우려하고 있고 그 현상으로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지적하고 있다. 1987년 미국 정부의 ‘재즈는 미국의 유산’이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재즈는 미국에서 죽어가는 예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즈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청중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듀크 엘링턴과 데이브 브루백이 타임 표지를 장식하곤 했던 1950년대였다.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30~40년대를 풍미했던 듀크 엘링턴은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입장에서 구세대 연주자일지언정 변화를 모색하고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새로운 청중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Kind of Blue]를 발표하고 데이브 브루백이 [Time Out]을 발표했던 1959년은 얼마나 찬란했던 한 해였던가? 어디서나 재즈가 들리고 누구나 재즈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곧 재즈의 시대는 갔고 록의 시대가 열렸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베스트셀링 연주자, 재즈의 거장도 시대에 발맞추어 록을 차용했다. 찰스 밍거스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를 버렸다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재즈 연주자들은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즈의 파격적인 스타일 변화 역시 재즈의 긍정적인 면모이고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재즈를 보여주는 양상이었다. 

최근의 몇몇 통계는 미국에서조차 재즈가 일부 매니아의 장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국립 예술 기금(NEA)의 미국 국민들의 예술 참여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SPPA, Survey of Public Participation in the Arts)를 보면 2008년 한 해 동안 한 차례 이상 재즈 공연을 봤다고 응답한 성인은 7.8%에 불과했고 이는 2002년 10.8%에 비해 3% 줄어든 수치였다. 재즈 청중의 평균 연령은 1982년에 29세였음에 비해 2008년에는 평균 연령이 46세로 크게 높아졌다. 재즈 청중의 노령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중장년층 중에서도 매년 재즈를 소비하는 비율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45세에서 54세 사이의 성인 중 재즈 공연을 보는 비율은 2002년 13.9%에서 2008년엔 9.8% 줄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30%나 감소한 수치이다.

2014년 넬슨 리서치의 앨범 시장 조사는 재즈 청중의 급격한 감소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넬슨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한해 미국 전체 인구의 1.4%만이 재즈 앨범을 소비했다. (클래식 음악 청중 감소도 재즈 못지않게 심각한데 클래식 앨범 판매량도 1.4%로 재즈 쪽과 사정이 같다.)이는 또한 종교 음악(3.1%), 라틴 음악(2.6%)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지는 치수이다. 강세는 역시 록 (29%)와 R&B/힙합 (17.2%), 팝 (14.9%), 컨트리 음악(11.2%)이었다.

미국에서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는 의미심장한 보고서로 1999년 비평가 윌리아드 제킨스의 아티클을 들 수 있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아야 하고 정규 교육에서 재즈를 보다 광범위하게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비평가 스튜어트 니콜슨은 도발적인 제목의 ‘재즈는 죽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재즈의 중심이 미국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예술 보호에 힘쓴다고 기대되는 유럽으로 이동하는 것이 재즈의 미래를 봤을 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니콜슨은 또 현재 미국의 재즈 교육이 40년대 후반의 모던 재즈 언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이 변화해야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역설한다. ‘링컨 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총감독인 윈튼 마샬리스가 니콜슨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클은 비평가 티치 아웃의 2009년 ‘월 스트리트 저널’ 기고문 ‘재즈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국의 위대한 예술 형식의 청중이 사라져가고 있다’일 것이다. 저자는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우려하며 재즈 프로듀서와 연주자들이 젊은 청중을 끌어들일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즈 청중의 감소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른바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재즈 청중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의 재즈 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95년을 전후로 재즈 청중이 반짝 늘었다가 사그라진 상태이다.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법은 글 말미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재즈를 듣는가? 왜 들어야하는가?


우리는 왜 재즈를 들어야 하는가? 


이제 나의 주장을 하겠다. 당신은 왜 재즈를 듣는가? 당신은 왜 재즈 앨범을 사고 <재즈피플>을 구독하는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다. 본인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는 일, 그리고 그 이유가 널리 퍼지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재즈 청중도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음악은 본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니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그 음악이 쉽게 좋아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칫하다가는 막연한 저항감에 휩싸인다.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이 들어오면 우리의 뇌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재즈가 난해해서 다가오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사람에게 오픈 마인드하고 그 저항감, 내면의 요동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팬, 재즈 소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앤드리슨 이론의 예술 수용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보았다. 재즈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정신이 자라고 영혼이 풍만해지는 경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영혼의 충만함. 내가 재즈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1단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이제 나는 재즈를 들어보겠다)

2단계) 앨범을 사던 공연을 보던 들으려는 ‘시도’ (재즈를 소비하겠다) 

  - A. 저항감이 덜한 음악 시도 B. 도전의 음악.

3단계) 오픈 마인드 (그 음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4단계) 받아들이기 (그 음악을 온전히 깊게 느끼려 노력하고 수용하기)

5단계) 확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만족감, 음악에 대한 만족감, 다시 들어야 하겠다는 확신)


1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활 양식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특유의 쿨한 이미지 때문에 재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서 접했던 사운드 트랙이 좋아서 재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릴렉스 하기 위해 재즈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 짓기>(1979)에서 광범위하게 소개된 바와 같이 문화 계급 상승을 위해 재즈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부르디외는 <구별 짓기>에서 소비와 생활 양식에서 선호, 취향, 관행이 특정 직업과 계급 진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례로 재즈를 등장시켰다.)

일단, 1단계로 진입하면 2단계 - 공연을 보고 앨범을 사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2단계부터는 사회경제학적 변수가 등장한다. 공연을 보고 앨범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어떤 앨범, 어떤 공연이 적절한지 정보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단계를 즐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방대한 재즈 명반의 양에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구입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내 정신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저항감이 덜한 음악을 편하게 구입할 것.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훌륭한 재즈 작품 중에서 듣기에 난해한, 도전이 필요한 음악을 구입할 것. 도전이 필요한 음악은 우리를 훈련하게 해주고 귀를 섬세하게 길들여 준다. 여러 음식을 맛보아야만 미각이 발달하듯 도전적인 음악은 내 귀를 발전시킬 수 있다. 저항감이 덜한 편한 음악(상당수의 명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은 디저트와 같은 것이다. 저항감이 덜한 음악만 들으면 듣는 수준이 발전하기 어렵다. 왜 굳이 듣는 수준을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본 칼럼 ‘재즈 탐미’를 쓰는 탐미주의자로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 맛의 범위를 넓혀야 쾌락이 극대화된다고. 위의 다섯 단계 모두는 따지고 보면 인간의 욕망 충족 단계와 같은 것이다. 나의 정신적 쾌락의 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재즈를 소비하는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 ‘오픈 마인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뿐, 음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애써 분석할 필요는 없다. 오직 오픈 마인드와 집중. 두 가지면 충분하다. 나를 도전하게 하는 음악을 존중하는 습관을 지녀 본다. 그만큼 내 정신과 마음이 자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운드 자체의 질감과 칼러에 집중하고 연주되는 곡 안에서의 뮤지션 쉽도 감지해 본다. 어떤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고 영혼을 느껴 본다. 오픈 마인드를 했다면 4단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마지막, 확신의 단계에 들어서면 깊은 만족감과 영혼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귀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사운드를 통한 만족감이 반복되면 진정 예술의 묘미의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지고 못 하고 퇴보하기도 하고 3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여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5단계까지 충족되면 매번 이 단계는 재즈를 대할 때마다 반복되고 그 충만함도 골이 깊어진다.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재즈 매니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 청중의 확대를 위해선 이러한 재즈 매니아들의 적극적인 음악 추천도 필요하다. 재즈 매니아는 잠재적인 재즈 청취자들의 좋은 모델이자 전도사이다. 공연장에 그들의 연인이나 친구, 가족을 데려갈 수도 있는 안내자가 된다. 재즈 비평가는 아니지만, SNS나 블로그를 통해 자유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추천할 수 있고 이는 재즈계에 좋은 활력이 된다.


청중 확대를 위한 고민, 카네기홀 예술감독과 함께. 


2014년 2월 나는 뉴욕의 한 프라이빗 모임에서 저녁을 먹으며 카네기홀 총책임자인 클라이브 길린슨 예술감독과 클래식과 재즈 음악의 미래에 관해서 허심탄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날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이날 모임 후 길린슨 예술 감독이 기획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전 주에는 키쓰 자렛의 솔로 공연을 카네기 홀에서 감상했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 공연은 훌륭했지만, 객석은 텅 빈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키쓰 자렛 솔로 공연은 매진이었다. 카네기 홀 정문에 서서 ‘티켓 구함’을 사인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을 정도였다. 길린슨 예술 감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 보다 키쓰 자렛 한 사람의 솔로 공연이 카네기 홀 입장에서는 더 큰 수익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명성과도 걸맞고 품격있는 키쓰 자렛과 같은 재즈 스타가 있으니 재즈계는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재즈나 클래식 음악 소비가 높았던 과거에는 음악 비평가들의 역할도 중요했고 신뢰도 엄청났다. 비평가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된다 치면 가차 없이 찍어 내려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린슨 감독은 비평가는 잠재적 음악 애호가를 고려하여 논하는 음악에 대해 적절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비평은 비평다워야 하지만 청중을 성장시키기 위해 적절하게 그런 무기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론은 이러했다. 음악비평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음악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음악 애호가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요지를 잘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글에는 분명한 주제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감상문이어서는 안된다. 예술 감독으로서 길린슨 씨가 실천하고 있듯 청중에게 익숙한 음악,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도전적인 공연을 올리고 때론 키쓰 자렛의 공연을 기획하는 것처럼 수익 창출과 변신을 꿰하는 능력도 청중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재즈 매니아, 기획자, 연주자, 교육자, 비평가 각자 모두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는 훌륭한 재즈 잡지와 비평가와 연주자와 매니아들이 존재한다. 거품일지언정, 일시적일지언정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점잖게 앉아 비싼 값을 치르며 재즈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9월 19일, 보스턴 레가터 바에서 열린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 공연. 이달 상당수의 청중들이 60대 이상 노년층이었다.>



< 2014년 넬슨 리서치가 조사한 2013년 장르별 앨범 판매량>




2014년 초, 카네기홀 예술 총감독 클라이브 길린슨씨와 함께 음악 청중 확대에 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월간 재즈피플 2015년 3월호-

posted by jazzlady

1943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듀크 엘링턴의 “Black, Brown and Beige”가 초연되던 날.


어느덧 밤 열두 시. 사람들이 일제히 문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1월의 야심한 토요일, 거리로 쏟아진 일련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수군거렸다.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듣고 나온 거지?” 좀 전까지 카네기 홀의 청중이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세 시간을 넘긴 참으로 긴 공연이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도 있었지만 몇몇 곡은 몹시 길고 내용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월요일 아침,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신년을 맞아 카네기 홀이 야심 차게 준비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공연이 총체적인 실패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허세로 가득 찬 음악, 조잡하고 산만한 음악, 지루하고 요점 없는 음악……평론가 상당수가 이런저런 매체에 혹평했다. 백인의 세계에서 오롯이 빛났던 검은 천재, 당대 최고의 재즈 스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더없이 혹독한 비판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45분짜리 대작 “Black, Brown and Beige”가 세상에 처음 공개된 이 날, 댄스 홀을 벗어나 인생 처음으로 카네기 홀 무대에 섰던 이 날, 듀크 엘링턴에게 1943년 1월 23일 이날은 최악의 매서운 날로 기록되려 하고 있었다.

Black, Brown and Beige는 아메리칸 흑인의 애환을 담은 긴 오케스트라 작품을 만들겠다는 듀크의 염원으로부터 출발한다. 듀크는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들어오면서 시작된 아메리칸 흑인의 역사를 Black / Brown / Beige 라 명명된 세 개의 악장에 나누어 담았다. 1930년대 스윙 시대를 이끌어온 주역이었지만 듀크는 일개 밴드 리더나 송 라이터가 아닌,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에 비견될 만한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파퓰러 작곡가로 출발해 큰 무대에서 뜻을 펼치고 평단의 인정을 받은 조지 거슈인처럼 듀크는 흑인 작곡가로서 흑인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점치는 음악적 예지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이를 위한 듀크의 첫 도전은 이미 1931년 Creole Rhapsody로 시작되었다. 단편 영화로도 나온 Symphony in Black (1934년), 어머니의 사망 후 예술적인 자각에 힘입어 완성된 Reminiscing in Tempo(1935년)도 그 일환이었다. 특히 네 개 파트로 이루어진 Reminiscing in Tempo은 78rpm 두 장에 나누어 담길 만큼 긴 작품이었다. 그러나 듀크의 예술적 시도는 번번이 평단의 외면을 받았다. 댄스 홀에서는 거물로 인정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 듀크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작곡가에 불과했다. 듀크를 코튼 클럽에 연결해주고 재즈의 스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매니저 어빙 밀러도 Reminiscing in Tempo가 발매된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듀크와 멀어졌다. 어빙 밀러는 듀크와 재정적으로 반반의 수익을 나누어 갖기로 계약된 관계였고 악보 출판업자로서 듀크의 작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밀러가 보기에 Reminiscing in Tempo와 같이 복잡한 긴 오케스트라 작품 따위가 수익을 안겨줄 리 만무했다. 결국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두번 째 유럽 투어 길에 오른 1939년 듀크와 어빙은 완전히 결별한다. 

1942년, 듀크 엘링턴의 새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카네기 홀 무대에 올릴 긴 작품을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듀크는 전율했다. 클럽 청중의 입맛에 맞춘 댄스곡이 아닌 진정한 예술 작품을 작곡할 명분이 주어진 것이었다. 1943년 1월 23일 토요일, 카네기 홀은 전쟁 중인 러시아 주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위해 특별한 신년 콘서트를 발표한다. 흑인 재즈 작곡가를 위한 최초의 무대. 아카데믹하고 섬세한 청중이 기다리는 카네기홀 입성을 위해 듀크는 고도의 몰입으로 작품에 매진한다.

1943년 1월 역사적인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 홀 데뷔 공연은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음반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장의 LP로 차곡차곡 담긴 그 날의 무대를 반세기 이상 흐른 지금에 와서 듣노라면 그저 감개무량하고 감사할 뿐이다. 듀크 엘링턴의 멘트는 침착을 가장하지만 다소 격양되어 있다. 그가 이날을 위해 작곡한 A Tone Parallel to the History of Negro in America라는 부제가 달린 흑인의 서사시 <Black, Brown, Beige>는 매 악장이 연주될 때마다 그 의미에 대해도 설명되었다. 흑인의 고난을 다룬 22분짜리 1악장 “Black”. 강한 베이스 라인은 흑인의 비극을 암시한다. 12분 50초 부분에서 등장하는 조니 호지스의 처연한 색소폰 솔로는 다름 아닌 Come Sunday이다. 비통에 찬 이 극도로 아름다운 멜로디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간판 멤버 조니 호지스를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아름답고 슬픈 Come Sunday가 끝나면 다소 혼란스러운 새로운 국면의 리듬과 멜로디로 악장이 채워져 간다. Come Sunday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공연 후 가장 혹평이 쏟아졌던 첫 악장에 대한 평가를 일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산만함에 대한 지적은 그릇되다 할 수 없다. 짧은 곡들이 꼬리를 물며 등장하기에 전체적인 조화나 통일성을 찾기가 어려운 면도 분명 보인다. 그러나 평론가 헨리 사이먼의 혹평은 과도하다 “1악장 Black이야말로 거의 망가진다. 2악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분산되면서 망가진다”라고 썼다. 월드 텔레그램 신문은 “너무 길다, Black, Brown and Beige를 가지고 24개의 짧은 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을 심포니로 만들어놓았다.” 뉴욕 포스트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데 쓸데없이 45분이나 걸렸다”고 비아냥거렸다. “과연 듀크가 오케스트라 작품을 쓸 능력이 되는가? 듀크가 재즈를 버렸는가?” 따위의 힐난은 새해 벽두부터 듀크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무엇보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폴 바울스의 리뷰는 직격탄이었다. 듀크는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한동안 작곡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듀크 엘링턴은 악장이 시작되기 전에 거창한 내용에 관해서 설명을 했지만 결국 속된 댄스 음악과 기교 부리는 솔로가 내용의 전부였다. 조잡스러운 원곡을 조잡스럽게 인용했다. 전체의 곡 진행을 방해하는 반복적인 클라이맥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심포니를 흉내 내지만 템포는 들어 맞지 않는다. 템포를 방해하려는 위험한 성향이 무척이나 많이 보인다. 규칙적인 비트가 없다면 싱코페이션도 없을 수밖에 없고 텐션도 없으며 결국 재즈도 없다. 

재즈를 예술 음악(클래식)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재즈와 클래식은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르게 존재하며 둘 다 동시에 초점을 맞추기 힘들다. 재즈와 클래식은 다른 주파수로 존재하는 음악이다. 조율은 불가능하다.”

듀크의 꿈, 듀크의 소명.

모두가 희망을 말하는 신년, 그래서인지 나도 2016년 첫 호부터 누군가의 실패와 절망을 다루는 것이 유감스럽다. 신년 벽두부터 상심에 가득 찬 사람이 다름 아닌 영화배우처럼 근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신사 듀크 엘링턴이라는 점이 애석하다. 그는 카네기 홀에서 화려하게 데뷔식을 치르고 진정한 현대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는 위치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24년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가 그러했듯 그 누구의 영향이 아닌 오직 블랙 스윙의 요소로 훨씬 젊은 나이에 예술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듀크 엘링턴은 1936년 7월 다운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음악적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숲 속에서 스윙하며 흔들거리는 덩굴의 소리를 아직 잡아본 적이 없어요. 그 덩굴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나뭇잎을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가볍게 스칠 때의 그 순간을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음악 역사의 획기적인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듀크 엘링턴은 화려한 무대 매너와는 달리 매우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다정다감하고 시적이었으며 혼자 고민하기를 즐겼고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지만 특별히 누군가와 깊게 지내지는 않았다. 문학적이었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20년 장기 단원들이 있는 이유도 그의 좋은 성품 탓도 한몫했다. 그는 자존심이 셌지만 느긋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네기 홀 공연의 혹평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서서히 스스로 치유를 해 나갔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책임도 있었다. 듀크는 빌리 스트레이혼이라는 젊고 유능한 작곡가와 재능있는 단원들이 있었다. 빌리 스트레이혼은 Take A Train 곡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선사한 듀크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듀크 엘링턴은 Black, Brown and Beige에 대한 평단의 혹평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판의 요소들을 면밀히 살펴 그 곡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보통 작곡가라면 그저 내버려둔 채 후세의 다른 평가를 기대할 법도 한데 듀크는 가슴을 후벼 파는 비난을 수용하면서 일일이 고쳐나갔다. “조잡한 짧은 곡들의 긴 나열”이라는 부분을 깊게 염두에 두었다. 듀크는 곡의 구성에 큰 변화를 줬다. 조화로움을 위해 Come Sunday의 멜로디를 주제로써 극대화하였다. 이윽고 1958년, 듀크 엘링턴은 십 오 년 전 카네기 홀 무대에 올랐던 Black, Brown and Beige 새로이 각색하여 녹음하게 된다.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Black, Brown and Beige>(Columbia-CS 8015)는 Part I (Work Song - Full Orchestra) - Part II (Come Sunday Instrumentally) - Part III (Work Song And Come Sunday) - Part IV (Come Sunday) - Part V (Come Sunday Interlude) - Part VI (23rd Psalm)로 전격구성되었다. 초연 당시 조니 호지스의 솔로로 연주된 Come Sunday는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로 부활했다. 조니 호지스가 로맨틱하고 처연하게 Come Sunday를 연주했다면 마할리하 잭슨은 파워풀한 가스펠로 신을 향한 애절한 기도를 담았다. 

1958년의 < Black, Brown and Beige>는 50년대 초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침체기를 벗어나 이들의 부활을 알렸던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 직후 야심차게 추진된 것이었다. 50년대 초반, 듀크 엘링턴은 큰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조니 호지스, 로렌스 브라운, 소니 그리어 등 주요 멤버들이 밴드를 떠났고 청중은 로큰롤이나 프랑크 시내트라와 같은 보컬 음악으로 쏠렸다. 게다가 듀크는 한 매체의 잘못된 인용으로 큰 낭패를 봤다. 듀크가 흑백인종 분리정책에서 흑인이 벗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이 말은 흑인의 공분을 샀고 흑인 청중이 듀크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을 계기로 명실상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권위가 회복되었다고 평가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의미의 듀크 재탄생은 바로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에 기인한다. 이 앨범 속에는 듀크가 바랐던 음악적 소명, 쓰라렸던 1943년, 실패와 좌절 그리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니까 말이다.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은 온전히 평가받았으며 비로소 위대한 작곡가 듀크 엘링턴의 지위를 확고히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60-70년대에 발표된 스피리츄얼한 <Sacred Concert>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듀크가 바르톡처럼 스트라빈스키처럼 조지 거슈윈처럼 인정받으려 했던 욕망은 결코 허세로 치부될 수 없다. 덩굴의 미세한 스윙,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고 싶다는 그의 말, 그 시절 그 누구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순수하고 내밀한 그의 감성이 만들어낸 그 시절 그 누구도 쉽게 꿈꿀 수 없는 아름다운 소망이었다.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1977 발매된 1943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1943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사진설명

1. 1943년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2. 1977년 발매된 1943년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4.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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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다운비트>매거진에서 지난 1월 3일 사망한 피아니스트 폴 블레이에 관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폴 블레이가 참여한 소니 롤린스의 1963년 앨범 <Sonny Meets Hawk!>(RCA)에 관한 게리 피콕의 코멘트입니다. 전에 포스팅했던 것처럼 <Sonny Meets Hawk!>는 소니 롤린스의 우상인 콜맨 홉킨스와 함께 했고 두 색소폰 거장의 멋진 플레이를 감상할 수 있는 앨범인데 All The Things Your Are에서 폴 블레이의 솔로를 크게 주목할 만 합니다. 콜맨 홉킨스의 솔로가 끝난 뒤 3분 14초부터 시작되는 그의 피아노 솔로는 대단히 오리지널하고 혁신적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제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jazzandcook.com/64

이 All The Things You Are의 폴 블레이 솔로에 관한 게리 피콕의 코멘트를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게리 피콕은 폴 블레이와 많은 협연을 했고 블레이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짧은 코멘트이지만, 폴 블레이의 연주의 특징을 잘 묘사해놓은 것 같습니다. 

폴 블레이의 음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싶다면, Sonny Meets Hawk! 앨범이 실로 가장 적절하다. 폴 블레이는 All The Things You Are를 힘 안들이고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있는데 그는 멜로디와 하모니의 구조를 동시에 살리기도 했고 또 동시에 거부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키스 자렛에게 했더니 자렛도 그 곡이 자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하더라…

(“If someone wanted to really get a firsthand experience of what Paul had to offer, you can’t do better than Sonny Meets Hawk!, where he plays on ‘All The Things You Are,’” Peacock said. “What he was able to do there, effortlessly actually, was to deny and also at the same time include what the actual structure of the melody and the harmony was ... I talked to Keith [Jarrett] the other day, and he mentioned the impact that performance had on him.”)


<다운비트, 2016년 3월 호, 폴 블레이 추모 기사>


All The Things You Are, <Sonny Meets Hawk!>, 1963, RCA

연주자: Sonny Rollins (tenor saxophone), Coleman Hawkins (tenor saxophone), Paul Bley (piano),

           Roy McCurdy(drums),  Bob Cranshaw (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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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팬 케이크 (with 핸리 러셀)


 부드럽고 맛있는 최고의 팬 케이크 레씨피. 

19세기 미국 오하이오 사라 패밀리의 레써피입니다.





옛 여인들은 나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녀들이 가족을 어떻게 보살폈고 부엌에선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녀들의 일상을 돌아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녀들의 노동은 역사 기록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세세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단서가 되는 이야기들, 소설 작품, 논문, 구술 자료 등을 참고합니다. 2001년에 류엘 포터 박사가 저술한 <Sara’s Table>도 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하이오州 뉴 콩코드 지역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이 이 책에 담겨있습니다. 뉴 콩코드는 지금도 주민이 3천여명에 불과한 시골 마을입니다. <Sara’s Table>은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은 남편의 성을 따르므로 그 집안 여인들은 성은 모두 다르지만, 여자 자손의 이름은 모두 ‘사라’입니다. 이 책은 사라 패밀리가 어떻게 뉴 콩코드에 정착했고 어떤 노동을 했는지, 그리고 음식 레써피가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펜 케이크는 사라 패밀리 중 1846년에 태어나 1916년에 세상을 떠난 ‘사라 도로시’라는 여인이 즐겨 만들던 펜 케이크 레써피를 구현한 것입니다. 사라 도로시는 뉴 콩코드에서 파이를 잘 만들기로 평판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딸 사라 에드나(1964-1925)에게 요리와 바느질을 가르쳐주었고 타이프 치는 법도 배우게 했던 깨어있는 여성이었죠. 사라 에드나도 어머니의 레써피를 그대로 이어받아 요리했답니다. 딸 사라는 독서도 좋아해서 식탁에 앉아 톰 소오여(1876), 허클베리 핀(1884), 벤 허(1880)를 읽곤 했죠. 아침에는 이 펜 케이크와 함께 소시지를 먹거나 콘 브레드, 스콘, 파이 등을 가족의 아침 식사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레써피는 맨 마지막에)


곁들여 소개하는 음악은 작곡가 헨리 러셀이 1880년대 초(정확한 연도 미상)에 작곡한 ‘A Life in the west’입니다. 같은 시기에 시인 조지 포페 모리스가 가사를 붙였죠. 그 당시 인기를 끌었으니 사라도 이 곡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 들어도 참으로 아름다운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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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펜 케이크 레써피

(컵이나 스푼은 미국 계량 기준이므로  한국에서는 gram 참고)

4인분


가루재료

채진 밀가루(다목적) 2컵  (356g)

설탕 1 Table spoon  (12g)

베이킹 파우더 4 teaspoon  (16g)

소금 1 teaspoon (5.7g)


액체 재료

달걀 2개

1~1/2컵 우유 245g ~360ml 

1/4컵 녹인 버터  (57g)


거품기를 이용해 달걀을 먼저 풀어준 뒤 계속 저으면서 우유를 천천히 붓는다. 마지막에 녹인 버터를 넣어 잘 섞어준다.

액체 재료를 가루 재료와 잘 섞는다. 

되직하면서 반죽이 똑똑 떨어지는 정도가 되어야 함. 물러서도 안되고 너무 되직해도 안됨. 

너무 되직 하면 우유를 조금 더 넣을 것. 


1센티 미안 두께로 노릇노릇하게 부친 뒤 층을 쌓는다.


마지막에 버터 작은 조각을 올리고 메이플 시럽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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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즈음만 해도 초가을 날씨 같더니 (반소매 입고 다니는 사람도 여럿 봤다) 해가 바뀌기 무섭게 기온이 뚝 떨어져버렸다.

그래, 그래야 정상이지.....

지난 해는 11월 초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2월까지 쉴새 없이 내렸다. 폭설로 갇힌 적도 있었다.

아무리 춥지 않아도 슈퍼 엘니뇨로 이상 기온을 보이는 것보다는 제대로 보스턴 겨울 맛이 나야 하거늘. 


2015년 마지막 날, 조촐한 가족 파티 사진.

지난 11월 말에 출시된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The Complete Masters>와  Moet & Chandon Imperial  샴페인을 두고 새해를 기다렸다.

1965년 존 콜트레인의 역작 <A Love Supreme> 발매 50주년을 맞아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3CD 에디션이다. 

리마스터링 되어 음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노 트랙과 미공개 음원, 65년 파리 실황까지 묶어서 나왔다. 

<A Love Supreme> 발매 이듬해인 1966년 11월,  콜트레인은 펜실베이니아의 템플 대학에서의 단독 공연을 가진 바 있다. 그때의 미공개 음원이 2014년에 앨범으로 출시돼 얼마나 기뻤던가. - <Offering: Live At Temple University>, Impulse! 

Offering에 A Love Supreme의 미공개 음원까지 더해지니 감동의 깊이란!

2016년 새해를 맞을 때 콜트레인이 내 옆에 꼭 붙어있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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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피플 1월호

Jazz Column 2016.01.07 07:23

월간 <재즈피플> 1월호는 존 콜트레인의 Love Supreme 발매 50주년 기념 특집입니다.

<양수연의 재즈탐미>는 듀크 엘링턴의 그의 역작“Black, Brown and Beige”가 초연되던 날을 출발점으로 듀크 엘링턴의 좌절, 꿈과 희망을 다룬 "1943년,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입니다.

재즈피플 1월호, 많이 성원해주세요.


월간 재즈피플 2016년 1월 vol. 116핫 이슈08 | 벤 몬더 [Amorphae]09 | 사라 맥켄지 [We Could Be Lovers]10 | 런던, 메더, 프레이먹 & 로스 [Royal...

Posted by 월간 재즈피플 on Wednesday, December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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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폴 블레이의 사망 소식.

Mr. Blake 씨,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Date: January 4, 2016 at 8:02:06 PM EST
To: undisclosed-recipients:;
Subject: Paul Bley


Dear Friends,

I'm deeply saddened to tell you that my father passed yesterday. Below is our official statement. He was at home and very comfortable with family at his side. 

Thank you,
Vanessa Bley

PAUL BLEY OBITUARY

Paul Bley, renowned jazz pianist, died January 3, 2016 at home with his family. Born November 10, 1932 in Montreal, QC,  he began music studies at the age of five.  At 13, he formed the “Buzzy Bley Band.”  At 17, he took over for Oscar Peterson at the Alberta Lounge, invited Charlie Parker to play at the Montreal Jazz Workshop, which he co-founded, made a film with Stan Kenton and then headed to NYC to attend Julliard.

His international career has spanned seven decades.  He's played and recorded with Lester Young, Ben Webster, Sonny Rollins, Charles Mingus, Chet Baker, Jimmy Giuffre, Charlie Haden, Paul Motian, Lee Konitz, Pat Metheny, Jaco Pastorious and many others. He is considered a master of the trio, but as exemplified by his solo piano albums, Paul Bley is preeminently a pianists' pianist.

He is survived by his wife of forty three years, Carol Goss, their daughters, Vanessa Bley and Angelica Palmer, grandchildren Felix and Zoletta Palmer, as well as daughter, Solo Peacock.  Private memorial services will be held in Stuart, FL, Cherry Valley, NY and wherever you play a Paul Bley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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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 아침의 나의 각오는;  다른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좀 더 배려하고 좀 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해주는 것.

가족, 친구, 아는 사람들....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은 아닐 수 있지만,

마음을 크게 열고 듬겠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야겠다.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금방 훌훌 털어버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면 나도 행복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닌,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믿는다.

이 마음, 빌 에반스도 그랬던 것일까?

빌 에반스가 연주한 "Make Someone Happy"

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여러차례 그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척 이스라엘과 아놀드 와이즈와 함께 트리오로 연주한 1966년 타운 홀 콘서트 실황이 첫 번째였고

70년에 발매된 솔로 앨범 <Alone>도 이 곡을 담았다. 

그리고 토니 베넷과의 듀엣 앨범, <Together Again> (1977)에서도.

트리오 - 솔로 - 듀오

서로 다른 세 버전으로 에반스는 Make Someone Happy를 연주했다.

루바토로 아름답게 이어지는 인트로는 비슷하지만

트리오 버전은 발랄하고 

솔로는 독백으로 속삭임 같고 (새해 각오를 다지는 나처럼)

토니 베넷과의 듀오는 서로서로 우리 행복하게 해주자....약속을 하는 것만 같다. 베넷은 청초하면서 비장한 음성으로 에반스의 낭만적인 피아노 선율을 강렬하게 감싸낸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답은 사랑이다. 

빌 에반스와 함께 행복을 느끼는 새해 아침이다.


Bill Evans at Town Hall, Verve, 1966

Bill Evans (piano), Chuck Israels (bass), Arnold Wise (drums)






Alone, 1968

Bill Evans (piano)




Together Again, Improv Records, 1977

Bill Evans (piano), Tonny Benett (vocal)





Make someone happy,

Make just one someone happy;

Make just one heart the heart you sing to.

One smile that cheers you,

One face that lights when it nears you,

One girl you're ev'rything to.

Fame if you win it,

Comes and goes in a minute.

Where's the real stuff in life to cling to?

Love is the answer,

Someone to love is the answer.

Once you've found her, build your world around her.

Make someone happy,

Make just one someone happy,

And you will be happy,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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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재즈피플 2015년 12월 vol. 115핫 이슈12 | 칙 코리아 & 벨라 플렉 [Two]13 | 송영주 [Reflection] 14 | 김성수 일렉트릭 밴드 [Drifter]15 | 토마스 스트로...

Posted by 월간 재즈피플 on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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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의 80세 기념 콘서트, Realization of a Dream : An 80th Birthday Tribute to Ran Blake

11월 13일 뉴잉글랜드 음악원(NEC) 조던 홀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NEC에서 재즈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총 출연하여 써드 스트림의 거목이자 전 학장 랜 블레이크의 80세를 기념하였다. 랜 블레이크는 이날 몇 곡을 선보였는데 가장 인상적인 연주는 보컬리스트 도미니크 이드(Dominique Eade)와의 협연이었다. 공연 서두에 도미니크 이드와 함께 호레이스 실버를 그리며 작곡한 Horace is Blue (2001년 앨범과 동명곡)를 연주했다.

도미니크 이드는 재즈 보컬에 대한 내 인식의 전환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재즈 보컬이라는 악기의 지향점을 향해 있다. 일반적으로 노래 잘한다고 불리는 가창력 좋고 목소리 좋은 가수가 재즈곡을 부른다고 해서 재즈 보컬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하는 재즈 보컬, 따라서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그러하듯 재즈라는 언어를 이론과 실기(특히 이어 트레이닝) 모두 철저하게 학습해야만 훌륭한 임프로바이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몸소 보여주고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1984년부터 NEC에서 재즈를 가르친다. 그녀가 가르치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재즈이다. 전공 악기를 불문하고 학생들은 그녀에게 재즈를 배운다. 그리고 재즈 보컬 학생에게는 재즈 보컬이 특수하게 훈련해야할 것들을 심도있게 가르친다.

보컬 듀엣은 랜 블레이크가 가장 좋아하는 컨셉이다. 작고한 천재적인 보컬리스트 진 리(Jeanne Lee)와의 앨범, <The Newest Sound Around>(1962, RCA), <Free Standards : Stockholm 1966> (Fresh Sound), <You Stepped Out of a Cloud> (Owl, 1989)는 재즈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최근 랜 블레이크는 도미니크 이드의 제자이기도 한 사라 써파(Sara Serpa)와의 협연이 돋보인다. 2015년 사라 써파와의 듀엣 앨범 <Kitano Noir>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모처럼 만의 도미니크와 랜의 조우에 정말 흥분되는 밤이었다.



Dominique Eade, voice

Ran Blake, piano


Realization of a Dream : An 80th Birthday Tribute to Ran Blake

Novembe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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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 아마씨 머핀 (with 지미 스미스)


 따듯할 때나 차가울 때나 모두 맛있는 영양 머핀

버터를 빼고 설탕을 줄인 담백한 아침 식사 대용으로 그만입니다.



나무에 붙은 잎보다 떨어진 잎으로 수북한 가을의 끝입니다. 가을 초입에는 계절이 바뀌었다는 설렘, 그러다 단풍이 지고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다다르니 일 년을 돌아보게 되고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리고 1934년 곡 When I Grow Too Old To Dream처럼 슬프기도 하고 청승맞기도 한 체념 조의 곡이 떠오르는 거지요. 노래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꿈꾸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릴 때'가 언젠가 찾아오겠지요. 도로시 데이나 냇 킹 콜의 구슬픈 보컬보다는 지미 스미스의 담백한 오르겐 연주곡이 전 더 좋더군요. 단순하게 툭툭 멜로디를 던지면서 "그런 나이가 오면 또 어때?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잘 살아가면 되는 거라구~" 말해주는 것 같아요. 원래 해몬드 올겐이 주는 악기의 매력이 그런 것 같습니다. 어둡고 블루지한 음색이지만 펑키 리듬 속에서는 마냥 즐거운. 

지미 스미스(Jimmy Smith)의 Back At The Chicken Shack (Blue Note, 1960)앨범을 들으면서 입맛 까다로운 가족이 먹을 맛있는 영양 머핀을 만들어봅니다. 애호박, 아마씨, 바나나가 들어간, 지미 스미스의 앨범처럼 달지 않고 담백한 머핀이랍니다. 

지미 스미스 (1928 - 2005)는 해먼드 B-3 올갠을 대중화시킨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이죠. 해먼드 올갠은 파이프 올갠을 작게 축소한 전자 악기인데요, 1929년 로렌스 해먼드에 의해 발명됐습니다. (정말이지 획기적인 발명이었죠!) 지미 스미스가 사용했고 지금도 해먼드 올갠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B-3 모델은 1954년도에 처음 나왔습니다. 지미 스미스는 이 B-3 올갠을 사용해서 블루 노트 레코드에서 1956년부터 1963년까지 8년간 재즈 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남깁니다. 1960년 4월에 녹음된 Back At The Chicken Shack 앨범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지미 스미스는 연주를 들을 수 있지요. 화려하고 현란한 기교 대신 단순하지만 깊은 그루브로 채운 멋진 앨범입니다. 스텐리 터렌타인의 색소폰, 캐니 버렐의 기타, 도널드 베일리의 드럼도 정말 빼어납니다. 

지미 스미스 (1928 - 2005)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 Back At The Chicken Shack (Blue Note, 1960) 앨범 중에서

Jimmy Smith - organ, Kenny Burrell - guitar, Stanley Turrentine - tenor saxophone, Donald Bailey - drums


애호박 아마씨 머핀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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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약 10개 분량.  (  )의 컵 분량은 240 ml 미국 계량컵 기준

다목적 밀가루 357g ( 1& 3/4컵 )

아마씨 (플랙씨드) 반 컵 83 g (1/2반 컵 )

황설탕 82 g ( 1/2 컵 )

베이킹 소다 2 작은술 ( teaspoon )

베이킹 파우더 1 작은술

소금 1/2 작은술

계피 가루 1 작은술 

애호박 채 썬것 ( 애호박 큰 거 한 개 분량 )

바나나 1개 ( 으깨놓기 )

우유 185g ( 3/4 cup )

달걀 1개

바닐라액 1 작은술


<만드는 법> 

포인트: 손으로 모든 재료를 마구마구 잘 섞어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1. 바나나는 포크를 이용해 으깨 놓는다.

2. 애호박은 채 칼을 이용해 채썰어 놓는다.

3. 큰 그릇을 두 개 준비함.

한 그릇에 밀가루, 플렉씨드, 베이킹 소다, 베이킹 파우다, 시나몬 가루, 설탕, 소금 등 건조한 가루를 넣어 잘 섞어준다.

다른 한 그릇에 달걀을 깨트려 가볍게 저어주고 바나나액과 우유를 넣는다. 

4. 모든 재료를 한군데에 섞는다. 거품기나 스틱을 이용하여 반죽을 잘 섞어줌. 

5. 오일 스프레이를 한 컵케익 틀에 반죽을 넣고 (반죽은 케익틀에 넘치지 않을 정도나 3/4정도 높이까지만) 화씨 350도 (섭씨 175도) 오븐에서 약 25분 익힘. (20분 경에 테스트, 케익 중앙부분을 뾰족한 꼬치로 찔러 보아 반죽이 묻어나지 않으면 익은 것)

*완성된 머핀은 냉장고에서 3-4일 보관하여 먹을 수 있습니다. 밀봉해서 보관 하시구요, 차게 먹어도 부드러움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오리지널 레써피: 마사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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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y Callier (1945.5.24 ~ 2012.10.27)


언제나 통기타를 들고 있는 시카고 출신의 인상 좋은 아저씨, 테리 칼리어.

문득, 그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재즈, 소울, 포크, 블루스....그의 범위 넓은 음악 세계를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향유하기도 전에 5년 전 세상을 떠난 그였다.

테리 컬리어의 음악은 몹시도 친근해서 누구든 그의 음악을 들으면 따스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 같다.

나의 경우, 하모니카를 불며 통기타를 치며 콜트레인 곡을 연주하고 그의 생애를 시처럼 읊는 모습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재즈와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포크 뮤지션이라 해야 할까. 그는 분명 그의 앨범 제목처럼 "새로운 포크" 음악을 창조하는 연주자였고, 그의 우상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제럴드, 존 콜트레인이었다.

그의 이력은 몹시 특이하다. 이혼 뒤 딸의 양육을 책임져야 하자 연주 생활을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을 했다. 무려 17년이나......

그동안 팬들을 그를 잊었을까? 그의 독특한 음성과 포크 사운드는 쉽게 잊힐만한 것이 아니었다.

테리 컬리어는 1962년 17세의 나이로 데뷔 싱글 "Look At Me Now"를 발표해 주목받았다.1964년에 녹음된 <The New Folk Sound of Terry Callier>는 재즈를 도입한 포크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미국의 전통 포크 송들을 담았다. 독특한 떨림을 가진 과묵한 허스키 보이스와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곡들의 분위기는 심도 깊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새롭게 표현되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이 아름답지만 나는 매우 느린 3/4자로 읖조리는 흑인 영가 Cotton Eyed Joe를 특별히 아낀다. 이 앨범은 1968년에야 앨범으로 발표되었다.

1972년에 나온 두번째 앨범 <Occasional Rain>은 테리 컬리어의 송 라이터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확고하게 보여준 앨범이다. Ordinary Joe를 비롯해 블루스적인 느낌이 진한 '재즈 포크' 앨범이다. 이어 What Color is Love (1972), I Just Can't Help Myself(1974), Fire On Ice (1977)등 수준 높은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1978년 Turn You To Love이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시카고 대학에서 컴퓨터 관련 업종에 종사한다.

컬리어가 돌아온 건 1998년 영국에서 발매된 <Timepeace>앨범을 통해서였다. 이어 Lifetime (1999), Speak Your Peace (2002), Looking Out (2004) 등 앨범을 꾸준히 내놓았다. 딸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던 아버지가 딸의 후원 하에 새롭게 부활하는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의 음악. 삶을 긍정하고 사랑해왔던 컬리어의 자세가 느껴진다. 그의 음악은 훈훈하고 더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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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와 클래식, 두 연인을 한번에 얻은 행복한 사나이.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를 그리며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Gunther Schuller (1925. 11. 22 ~ 2015. 6. 21)


드러머 조지 슐러를 처음 본 것은 색소폰 연주자 리 코니츠와 연주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이햇을 두드리며 무심히 청중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하도 깊고 강렬해서 그 눈은 세트에 더해진 하나의 드럼 심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형형색색 조약돌이 한데 부딪히듯 밀도 있고 섬세한 멜로딕 드러밍에 취해버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연주는 오십이 넘은 재즈 연주자들의 무르익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2년 전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추모 세미나에서 조지 슐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 재즈의 현주소에 관한 그의 역동적인 연설에 전율했다. 조지의 연설은 이 시대 위대한 작곡가 건서 슐러가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협회에서의 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부전자전이구나....그날 비로소 나는 조지가 풍겼던 ‘사뭇 다른 느낌’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슐러가(家)에 흐르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마일스 데이비스의 정신과 그들 혈통에 내려오는 음악 유전법칙의 외연이었음을.

지난 6월 21일 건서 슐러가 훌륭한 두 연주자 아들, 조지와 에드를 남기고 8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에 나는 슐러를 통해 연구해야 할 음악 계보학이 얼마나 방대한지 그리고 그 작업에 매료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 그는 생전에 200여 곡을 작곡했고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이중 살림을 꾸렸으며 두 장르를 혼합하여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 이라고 불렀다.

건서 알랙산더 슐러는 1925년 11월 22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1936년까지 독일에서 사립 학교를 다녔고 뉴욕으로 건너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뉴욕 필하모닉의 바이올린주자였다. 어려서 프렌치 혼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슐러는 불과 열다섯 살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대타로 연주했으며 열여섯에는 신시네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린치 혼 주자로 발탁되었다. 클래식 분야 촉망받는 연주자였지만 그 시절 슐러는 재즈에 푹 빠져있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에게 듀크 엘링턴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이라고 말하자 그는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셨다. 엘링턴이 베토벤만큼 위대하다는 발상은 클래식 세계에서는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


Birth of the Cool 녹음으로 전설을 만들다.


재즈를 향한 슐러의 애정은 재즈 연주자들과의 교류를 이끌었다.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젊은 백인의 뉴욕 필하모닉 혼 주자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었다. 1949년 초 9인조 빅밴드라는 야심찬 구성으로 쿨 재즈의 탄생을 알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역작 <Birth of the Cool>에 건서 슐러가 프렌치 혼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은 주니어 콜린스의 대타로 슐러를 추천한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덕분이었다. 이날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될 예정인 Moon Dreams 곡이 까다로워서 녹음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A토널로 연주되는 코다 부분은 여러 번의 리허설을 해도 악기 밸런스가 맞지 않고 리듬도 왔다갔다 했고 녹음을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녹음 시간을 남겨두고 곡이 포기되기 직전 슐러는 마일스에게 자신이 지휘를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Birth of the Cool 연주자들은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아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하는 슐러를 따르며 Moon Dreams의 녹음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슐러가 혼 부분에 집어넣은 손을 떼면 피치가 1/4음 올라가기 때문에 손을 혼에 넣을 수 없는 지휘 시에는 입술로 1/4음을 낮게 조정하며 불었다는 ‘슐러의 전설’이 전해진다. 사운드가 비슷한 어두운 저음 악기들의 구성, 비밥의 전성기였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이 9인조 컨셉은 클루드 톤힐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렇듯 슐러의 재즈 외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 쿼텟, 에릭 돌피, 찰스 밍거스, 오네트 콜맨, 짐 홀 등 최고의 임프로바이저들과 함께 작업했다. 

슐러의 ‘본바닥’ 클래식에서도 그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은 지속되었고 작곡가로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195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뮤직 디렉터가 슐러의 곡 Music for Brass를 연주하였고 방송을 탔다. 서른살의 프렌치혼 연주자이자 천부적인 작곡가, 지휘자인 슐러에 대한 평단의 호평이 이어졌다. 사무엘 바버와 아론 코플란드등 위대한 현대 작곡가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슐러는 전도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클래식 세계에서 오롯이 섰다. 슐러의 뛰어난 작품들 중에는 서로 잘 결부시키지 않는 악기들의 조합, 또는 많이 쓰지 않는 악기들을 차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초기 작품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In the Symphony for Brass and Percussion (1950)은 현악기나 관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1960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Spectra는 오케스트라를 7개 그룹으로 나누어 매 그룹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하고 혼합해서 들을 수도 있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다섯개의 혼을 위한 Five Pieces for Five Horns(1952), 네 개의 더블 베이스 작품(1947), 네 개의 첼로를 위한 작품(1958) 등 획기적인 작품들도 있다. 콘체르토도 20개 이상 작곡했는데 더블 베이스가 솔로를 하는 콘체르토(1968), 콘트라바순(1978), 알토 색소폰(1983) 등 상대적으로 드물게 등장하는 악기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슐러는 거칠고 독특한 작품 외에도 한편의 시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많았다. 92년에 사망한 아내 마조리에게 바치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1993)이나 챔버곡 Impromptus and Cadenzas(1990)는 거친 하모니가 예측하기 어려운 무드와 톤의 변화에 따라 따듯한 느낌을 주는 멋진 곡들이다. 슐러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로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슐러의 평생에 걸친 야심은 클래식과 재즈의 따로 살림을 합치는 것이었다. 1957년 무렵부터 슐러는 클래식과 재즈의 결합을 스스로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재즈 클럽에 콘서트홀을 들여놓고 콘서트홀에 재즈 클럽을 옮겨다 놓을 작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을 화나게 했다. 촉망받는 작곡가에게 비판이 이어졌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이 나에게는 논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이런 두 장르의 위대한 음악이 서로 나누어져 있고 얘기도 안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대 쪽을 욕하고 있으니 나는 합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재즈와 클래식을 결혼시킬 유능한 사람들을 물색했다. 같은 목표를 위해 제자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를 합류시켰다

“써드 스트림 운동은 서로 다른 취향의 작곡가, 연주가, 임프로바이저들을 같이 일하게 하고 여러 다른 장르의 음악을 결혼시키는 일이다. 이 운동이 멜팅팟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써드 스트림 개념으로 청중에게 다가간 중요한 기점은 써클 인 더 스퀘어 씨어터에서 컨템포러리 스트링 쿼텟, 빌 에반스 트리오, 배리 갈브레쓰, 에릭 돌피, 오네트 콜맨 등이 함께 슐러의 써드 스트림 작품이 선보였던 1960년 5월 17일이었다. 슐러는 써드 스트림 개념을 반영시킨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써드 스트림에 주력하면서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를 실감했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끝내고 밤새 작곡을 하는 등의 연주와 작곡이 병행되는 생활을  십오년 이상 지속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스케쥴이 계속되자 그는 과감히 프렌치혼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연주자의 생활이 사라지자 그는 저술과 교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혼 주자들의 교과서 격이자 92년도에 재판된 <혼 테크닉>(1962)이 나온 것도 이맘때였다. 1963년에는 카네기 홀의 새 음악 시리즈인 <20세기 이노베이션>을 기획 감독했다. 그 해 여름에는 ‘탱글우드’ 대리 학과장으로, 65년에는 정식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70년부터 84년까지는 클래식, 재즈 음악의 전당인 버슈어 뮤직 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다. 세계적인 음악제 탱글우드에서 건서 슐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84년 탱글우드의 모든 직에서 은퇴한 후 아이다호주 샌드포인트의 여름 페스티벌을 시작했고 미국내 여러 앙상블과 교류하면서 클래식과 재즈 오케스트라들의 게스트 컨닥터와 디렉터를 맡았다. 1950년도에 맨해튼 스쿨 어브 뮤직에서 시작되었던 교육 경력은 예일 대학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음악 대학인 권위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이었다. 슐러는 NEC에 써드 스트림 전공을 만들고 이후 총장 재직 10년 동안 재즈와 써드 스트림 음악을 NEC의 주력 분야로 키워냈다. 써드 스트림 과(科)의 학장은 슐러의 제자이자 동료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였다.

건서 슐러 이전에도 조지 거슈인, 라벨, 바르톡 등 여러 작곡가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지만, 건서 슐러의 위대함은 재즈-클래식 결합을 개인의 작업을 넘어서 ‘써드 스트림’이라는 음악계에 하나의 조류를 형성케 하였고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 안으로 써드 스트림을 가져와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재즈를 클래식과 학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르로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클래식과 재즈, 두 장르의 음악을 완벽히 이해해야 훌륭한 써드 스트림 음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써드 스트림이란 재즈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클래식과 재즈의 전통의 비율을 반반으로 가장 좋은 혼합 상태로 만들어야한다. 재즈, 클래식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더 깊게 혼합될수록 더 좋은 써드 스트림이다. 나는 클래식에서 조금, 재즈에서 조금 섞는 얄팍한 교배를 싫어한다. 이상적인 써드 스트림을 만들려면 클래식과 재즈 각각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최고의 전통과 업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건서 슐러는 클래식 명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총장을 지내고 클래식 분야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정작 본인은 제도권 교육은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비록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 오케스트라에 합류했으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사사받는 스승을 두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그의 스승은 음악과 악보였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 협회’ 연설을 통해 슐러는 공개적으로 독학에 대한 자부심을 처음 드러냈다. 음대 교육자들을 앞에 둔 이 아이러닉한 명연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슐러는 남들 하는데로 하기보다 튀는 성향이 짙었다. 항상 음악계에 대해 독설을 쏟았으며 청중을 향해서도 음악 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건서 슐러의 발언은 이율배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작곡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정작 본인은 청중을 잃어버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빠져있었다. 탱글우드 디렉터였던 79년에는 공부하러온 학생들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음악 노조 등 모든 음악인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너희들이 잘못해서 오늘날 연주자들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무관심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슐러의 음악계를 향한 날센 비판은 그의 저서 <묵상: 건서 슐러의 음악 세계>(1986), <완벽한 지휘자>(1997) 등 그의 저서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건서 슐러는 독학으로 작곡을 터득했지만 음악 가계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지휘자였고 부친은 무려 42년간이나 뉴욕 필하모닉에서 연주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려서부터 악보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고 부친이 그의 멘토였다. 현악기 연주자보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프렌치 혼을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다. 77년도 뉴욕 타임즈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듯 음악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슐러에게는 진정 행운이었다.

건서 슐러가 창설했던 뉴잉글란드 음악원의 ‘써드 스트림’과는 몇 년 전 ‘컨템포퍼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다 재즈적인 느낌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다. NEC에서 건서 슐러와 함께 써드 스트림을 일구었던 랜 블레이크 전 학장으로부터 본인은 물론 슐러 역시 명칭 변경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때 동거했던 재즈와 클래식의 한집 살림이 끝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비록 이름은 달라졌더라도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 배합을 추구했던 건서 슐러의 엄중했던 써드 스트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주자들은 물론 많은 청중이 어찌보면 클래식과 재즈라는 두 연인을 함께 얻기를 꿈꿔 왔기 때문이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와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좌). 두 사람은 각각 총장과 학장 신분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써드 스트림'의 조류를 만들고 후학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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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Allen Trio

Jazz Talk 2015.08.28 19:58

테너 색소폰 연주자 J.D. Allen (1972~)
콜트레인을 연상시키는 1999년 그의 데뷔 앨범 <In Search Of >의 감흥을 잊을 수 없다. 특히 두번 째 트랙 Omar 무척 좋아했었다. 2011년에는 <Victory>앨범이 평단의 극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NPR 선정 올해의 재즈 앨범이 되기도 했다. 1967년 흑인 폭동의 잔해와 얼룩이 남아있던 디트로이트에서 어둡고 가난한 시기를 보냈던 그가 40년대 비밥 연주자들이 그러했던 뉴욕을 꿈꾸고 훌륭한 재즈 뮤지션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세월은 앨범 이름처럼 그야말로 Victory였다. 이 작품이 출시된 해에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도 정말 끝내줬다. (빌리지 뱅가드 라이브 실황: http://www.npr.org/…/jd-allen-trio-live-at-the-village-vang…)
금년 5월에 출시된 <Graffiti> (Savant)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전통적인 어법에 충실하면서도 고유의 아이디어와 풍부한 톤이 귀를 사로잡는다. 꼭 들어봐야할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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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에 자유를 부여하라.

마일스 데이비스의 꿈, 모달을 만나다.     

-월간 재즈피플 6월호


탐미주의자로서 나는, 창작을 위한 영감(靈感),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고통을 헤아려야 함을 안다. 그 영감을 위해, 천재적인 예술가의 행위가 설령 도덕의 잣대를 비켜갈 경우에도 이를 만류하고 비난할 용기가 없을 수도 있음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창작의 영감을 얻는, 소설 <광염 소나타>의 주인공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움을 갖은 적이 있다. 천재적 예술가의 특수함이 광인의 퇴행적 병리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다행히 나의 재즈 탐미 세계에서 실제로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수의 재즈 연주자들이 과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를 독창성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마일스 데이비스, 그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적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된 진보의 화신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 이 일곱 음절은 내 탐미 여행의 주요 정박지요, 어슴푸레한 안개 너머로 서서히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잉카 제국처럼 일종의 문명이 되었다. 마일스가 받은 영감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공부했는지에 대해서 나는 탐험가가 된 양 언제나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안개를 헤치며 화려하게 솟구쳐오른 문명의 자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러니 56년 전 오늘을 마주하게 된다. 4월 22일, 뉴욕의 콜롬비아 스튜디오. 마일스 데이비스는 <Kind of Blue>를 위한 마지막 녹음에 열중하고 있다.


마일스는 번영된 도시를 이룩하려는 제국의 황제처럼 근엄한 얼굴로 “멜로디에 자유를 선사할 것”을 지시한다. 이 지상 과제를 이루기 위해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캐논볼 애덜리, 폴 챔버스, 지미 콥 등 선택된 참여자들은 기본 설계도만 손에 쥔 채 기존에 없는 창의적인 건축물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를 위해 그들이 사용해야 하는 도구는 '모달리티(modality)'였다. 그들은 자신의 솔로에서 이 도구를 사용하여 임프로비제이션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공간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했다. 코드에 의존하는 수직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드 혹은 선법이라 불리는 수평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했다. 모든 연주자는 코드톤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다만 코드와 연관된 스케일의 콤비네이션을 통해 새롭게 멜로디를 창조해야만 했다. 그러면 이윽고 멜로디는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멜로디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Kind of Blue>는 모달리티를 대표하는 획기적인 첫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고심 끝에 선정한 멤버들의 이야기, 즉 참가 연주자들이 어떤 과정으로 만나서 이날 스튜디오에까지 왔는지에 관한 에피소드는 최근 재발간된 마일스 데이비스 평전 (김현준 역, 그책, 2015년 / 원저:존 스웨드의 So What : The Life of Miles Davis)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의 탐미여행은 마일스가 받은 영감과 <Kind of Blue> 연주에 사용된 모달리티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의 마일스를 설명해주는 이 앨범의 핵심이니까.


<Kind of Blue>에서 사용된 모달리티의 아이디어는 마일스 고유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지 러셀(1923-2009)을 기억해야만 한다. 마일스는 조지 러셀의 모달리티 개념에 무릎을 쳤다. 마일스는 러셀이 발견한 재즈 화성에서 미래를 보았다. 우리는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황제는 알지만 병약한 몸으로 뒷방에 앉아 이론에 골몰했던 황제의 멘토, 조지 러셀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만약 내가 <Kind of Blue>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청년 조지 러셀이 결핵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입원 중에도 음악 연구에 열중하는 이 젊은 학자의 시선에서 마일스를 그릴 것이다. 병문안을 온 마일스가 자신의 음악적 갈망을 러셀과 토의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러셀이 연구하는 과정을 결국 마일스의 음악으로 보여줄 것이다. 번득이는 카리스마로 당대 최고의 밴드를 이끌며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에게도 호령하는 마일스였지만 동년배나 다름없는 조지 러셀 앞에서는 예외였다. 러셀의 모달 재즈 컨셉을 마일스는 <Kind of Blue>를 기획하기 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1953년, 새로운 재즈 화성 이론을 제시한 조지 러셀의 역작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이 발표되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탐구했던 사람은 마일스였기 때문이다. 러셀의 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재즈 이론서였으며 마일스 외에도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에릭 돌피 등 당대 진보적인 재즈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모달 재즈를 몸소 실현하고 개척한 마일스에게 러셀의 컨셉은 든든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


조지 러셀의 기념비적 저서,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

최초의 재즈 이론서. 재즈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옛날 재즈곡을 들으면 화성을 재분배하는 느낌이 있다. 기본 코드 속에서 서로 포개어져 있던 음들이 멜로디로 나열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모달 어프로치(선법적 접근)에서는 즉석에서 의미 있는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코드 체인지를 재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한 개의 하모니가 지속될 때 솔로이스트가 모드를 기반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하는 이 상황을 모달 재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달 재즈는 어떤 장르가 아니라 임프로비제이션을 하는 접근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모달 재즈곡들은 코드는 단순한 편이고 코드에서 비롯되는 스케일을 임프로바이즈하는데 쓰는 하나의 원료로 여겨 스케일 위에 또 다른 스케일을 겹치게 권장하고 그래서 곡이 토널 센터는 있되 결국 한 키(key)가 아니라 여러 키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59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기존과는 다른 파격적인 접근 방법이었다. 

러셀은 자유로운 임프로비제이션을 위해서 유럽의 조성 체계와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였고 리디안 모드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러셀은 '도'로 돌아가려는 음의 현상을 '중력(gravity)'개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중력이 완전 5도 간격으로 음을 잡아 내려가면 C, G, D, A, E, B, F#로 7개 음으로 나열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리디언 스케일이 된다. 러셀은 리디언 스케일을 통해 완벽한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러셀의 저서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은 재즈의 기념비적 저서이지만, 이 지면을 통해 화성에 관한 고급 지식이 요구되는 러셀의 복잡한 이론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진보적인 재즈 연주자들은 러셀의 컨셉을 바탕으로 비밥 혁명 이후 점점 복잡해지는 코드 체인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모드로 접근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그 의의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러셀의 컨셉은 연주자들에게 분명 화성적 돌파구가 되었다. 재즈 임프로비제이션을 코드 패턴에 기대는 브로드웨이 송 방식에서 이탈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고 재즈를 유럽의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되는 학문으로써 지성의 가치를 얻게 하였다. 


조지 러셀, 재즈의 판도를 바꾸다.


조지 러셀은 1923년 6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출생했다. 그는 본래 재즈 드러머로 연주자의 길을 걸었지만, 결핵으로 일 년 이상 장기 입원하는 바람에 연주 경력이 끊겼다. 그는 밴드 리더가 되기보다는 이론가의 길을 택했다. 1946년, 병상에서 회복한 뒤 뉴욕으로 가서 길 에반스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졌던 진보적인 연주자 서클에 합류했다.

1947년에 조지 러셀이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를 위해 작곡한 유명한 Cubana-Be/Cubana-Bop곡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재즈와 아프로 쿠반 스타일을 접목시킨 모달 오케스트라 작품에 몰입하던 러셀의 결실이기도 했다. 1949년 클라리넷주자 버디 디프랭코를 위해 작곡한 “A Bird in Igor's Yard”도 찰리 파커와 스트라빈스키를 개입시킨 클래식과 재즈의 내재적 접합체이자 러셀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1950년대에 러셀은 자신의 이론을 음악으로 완성하기 위해 여러 앙상블을 조직했다. 1956년 아트 파머, 빌 에반스, 폴 모션, 할 맥쿠식, 배리 갈브래이스 등이 참여한 조지 러셀 스몰텟의 <The Jazz Workshop>앨범은 러셀의 컨셉을 집대성한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들로 채워진 러셀의 명작 중 하나이다. 러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Ezz-Thetic이 수록되어있는데 이 곡은 1961년 동명 앨범 <Ezz-Thetic>으로 출시된 바 있다. 돈 엘리스, 데이브 베이커, 에릭 돌피, 스티브 스왈로우, 조 헌트가 참여한 이 앨범도 획기적인 작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몽크의 Round Midnight에서 에릭 돌피의 솔로는 심금을 울린다. 모든 곡이 독창적이며 매우 진보적이다.

브랜다이즈 대학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된 All About Rosie (1957) 역시 재즈사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10분 45초짜리 이 곡은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있는데, 주 멜로디는 첫 번째 파트에서, 블루스적 느낌을 살린 두 번째 파트를 지나 세 번째 파트에 닿으면 젊은 빌 에반스의 보석 같은 솔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에반스 역시 러셀로부터 배우고 그의 이론적 컨셉에 매료된 연주자였다. All About Rosie에서의 에반스의 솔로는 에반스의 전 곡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솔로 중 하나로 기록될 만 하다. 우리는 또 1958년에 녹음된 에반스의 Peace Piece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음을 최대한 절제하며 느린 발라드로 연주된 이 곡 역시 러셀의 컨셉을 도입한 에반스식 모달 재즈 피스이다.

조지 러셀은 교육자로서 그의 전 생애를 바친다. 진보적인 뮤지션들이 모여들었던 ‘레녹스 매사추체스의 스쿨 오브 재즈’에서 가르쳤고 이곳에서 오네트 콜맨과 칼라 블레이도 가르쳤다. 1964년 러셀은 유럽으로 건너가 스웨덴 룬튼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스웨덴 라디오와 계약해서 미사 음악과 발레 음악 등을 작곡했고 이 시기에 얀 가바렉이 러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69년, 뉴잉글랜드 컨소바토리(NEC)의 교수로 임용되면서였다.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1986년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인터네셔널 리빙 타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14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영국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러셀은 1989년에 맥아더 파운데이션 그랜트, 1990년 어메리카 NEA재즈 마스터, 가디언 어워드, 구겐하임 펠로우십,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조성 조직의 리디언 크로매틱 컨셉>의 개정판(볼륨1)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2007년 알츠하이머로 사망할 때까지 재즈계의 지성, 선구자, 멘토로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사망으로 말년에 준비하던 <리디언~>볼륨 2는 발간되지 못해서 무척 아쉽다.


무한 공간에 홀로 서서.


마일스 데이비스. 그는 모달 재즈를 통해 "창조적으로 영원히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32마디가 지나면 끝나 버리는 코드를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 체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시작도 끝도 없이 원하는 만큼 의미 있는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Kind of Blue>에서 So What의 프레이즈가  흑인들의 '아멘'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을 나 역시 동의한다. 멜로디와 리듬의 자유, 영원히 연주될 수 있는 음의 가능성이 '아멘'으로 기원 되고 응답하는 듯하여 감흥을 배가시킨다. 

안개 너머 어슴푸레 다가온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찬란한 문명, 그가 꿈꾸었던 것은 자유였다. 다만 그 자유는 1959년 콜롬비아 스튜디오에 모인 선각자들처럼 오로지 고도로 숙련된 자들의 것이다. 음의 체계와 변화, 그 모든 것을 터득한 자들의 몫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선사하는 자유의 무한 공간을 거닐다 행여 길을 헤매게 된다면, 나는 별을 보며 음을 생각했던 피타고라스와 조지 러셀과 마일스 데이비스와 여러 음악의 선구자들을 떠올리며 게오르그 루카치를 읊을 것이다. 밤하늘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말이다. 


(끝)

1953년에 발행된 조지 러셀의 기념비적 저서, 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



<조지 러셀이 리디언 컨셉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초기 걸작들>

The Jazz Workshop (RCA Victor, 1956)

아트 파머, 빌 에반스, 조 해리스, 폴 모션, 오시에 존슨, 배리 갈브라스, 밀튼 히튼, 테디 코틱 등이 참여한 초기 명작.


New York, N.Y. (Decca,1959)

아트 파머, 밥 브룩메이어,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맥스 로치 외 다수의 연주자들이 참여했고 존 렌드릭스가 나레이션을 맡은 독특한 앨범


Jazz in the Space Age (Decca,1960)

빌 에반스를 비롯한 초기 멤버들이 참여한 오케스트라 앨범. 


 Stratusphunk (Riverside, 1960)

 데이브 베이커, 데이브 영, 척 이스라엘, 알 카이거, 조 헌트가 참여.


Ezz-thetics (Riverside Records, 1961)

돈 엘리스, 데이브 베이커, 에릭 돌피, 스티브 스왈로우, 조 헌트가 참여한 역작.


 <1959년 모달 재즈의 역사적인 앨범, <Kind of Blue>의 녹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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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2>(마지막회)

기회의 땅, 유럽에서 마지막 시간들.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했던가. 고향 LA로부터 동쪽으로 4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욕에서 서른을 시작한 에릭 돌피. 에릭 돌피가 생전에 발표한 5장의 리더작 중 4장은 뉴욕 입성 직후부터 2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서른이 공자의 말처럼 뜻을 세우는 나이라면 뉴욕은 돌피의 뜻이 오롯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였던가. 

뉴욕에서 돌피의 음악은 저항에 부딪히곤 했다. 지난 호에 소개했듯 에릭 돌피는 존 콜트레인과 이른바 '뉴-재즈'를 연주하면서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돌피가 뉴욕 입성 후 의욕적으로 연주에 매진하던 시기에 평론가들은  '안티 재즈'라며 비판했고 존 콜트레인에 따르면 이것은 돌피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이미 탑 뮤지션으로 널리 알려진 콜트레인과 달리 뉴욕에서 뉴 페이스였던 돌피는 세상의 평가에 어느정도 민감했던 것 같다. 1961년 11월 23일 <다운비트>매거진은 "소름 끼치도록 (듣기 싫은) 아나키즘 음악"이라고 깎아내렸고 앞서 11월 9일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 연주를 두고는 "인토네이션 트러블, 동물 사운드, 뒤틀린 새소리"라 표현하면서 이날 출연한 웨스 몽고메리와 비교하며 폄하했다. 이외에도 <다운비트>는 이들의 공연을 꾸준히 추적하면서 "뮤지컬 넌센스를 팔아댄다(peddle)"고 혹평하곤 했다. 1961~1962년 사이에 콜트레인-돌피의 음악에 대한 찬반 레터가 <다운비트>로 집중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다운비트 매거진과 콜트레인과 돌피의 동시 인터뷰(축약)를 잠시 보자. 다운비트가 이들은 안티 재즈라고 혹평한 뒤에 이들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주자는 차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였다. 콜트레인이 돌피를 향한 애정은 물론, 세상의 평가에 대한 이들의 섭섭함도 잘 드러나 있다.

 

다운비트: 당신들은 왜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연주하는 것인가? (길게 연주하는 것도 당시 비판의 요인이었음)

▶콜트레인: 솔로이스트 각각 그 곡이 허용하는 모든 길을 탐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솔로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보여줄 것이 많다. 내가 연주할 때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게 있고 에릭이 할 때는 에릭이 하고 싶은 게 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어진다. 

 

다운비트: 도대체 당신들은 뭘 하려는 것이냐?

(30초간 침묵)

▶돌피: 좋은 질문이다. 어떤 영감을 느낄 때를 즐길 뿐이다. 항상 자발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있다. 존이 연주할 때 나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해낼 때가 있고 맥코이가 할 때도 그렇고 엘빈 존스, 지미 개리슨이 솔로를 할 때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곤 한다. 그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콜트레인: 에릭과 나는 54년부터 지금까지 깊이 교류하며 음악을 관찰하고 음악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달 전에 에릭이 뉴욕에 왔다. 에릭이 우리 쿼텟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점을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에릭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쿼텟으로서만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돌피가 참여하니까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돌피가 참여한 뒤 음악이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보자고 했다.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나는 전부터 돌피와 얘기만 나누었던 바로 그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에릭이 들어와서 우리 음악은 더 넓어졌고 예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표현되고 있다. 에릭이 계속 우리 밴드에 편안하게 있으면서 계속 성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주의 아름답고 좋은 것들에 대한 그림을 청중에게 선사하고 싶다. 놀랍고 포괄적인 우주의 한 면을, 한 예를 드는 것이 우리의 음악이다. 음악과 삶, 음악과 우주에 대한 철학을 어떤 이들은 젊을 때 터득하지만 나는 때가 지나서 이해했다. 아마 57년경이었을 것이다. 음악적으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알았어야 할 때보다 더 늦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음악의 새로운 면을 또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릭 돌피와 함께 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운비트: ‘안티 재즈’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콜트레인: 당신들이 말하는 안티 재즈가 도대체 뭔지 설명을 해달라. 

 

다운비트: 당신들이 스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콜트레인: 우리가 스윙을 안한다고?

▶돌피: 우리는 스윙을 한다. 실은 하도 스윙을 많이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존도 알고 싶다. 안티 재즈라는 뜻이 뭔가? 우리는 스윙도 하고 재즈도 하는데.

▶콜트레인: 스윙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모든 그룹은 각기 서로 다른 스윙이 있다. 우리 밴드도 마찬가지 있다. 스윙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답하기 참 힘들다.

▶돌피: 평론가들은 새로운 음악이 나타났고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있다면 연주한 뮤지션을 인터뷰를 해봐야 한다. 그러지도 않고 무조건 혹평을 하면 뮤지션은 놀랄 수밖에 없다. 기분이 몹시 상한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는다. 혹평을 받으면 피해가 크다. 뮤지션은 자신의 음악도 하지만 또한 밥벌이도 해야하는데 평론가가 뮤지션을 나쁘게 쓰면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멀리하게 된다. 

▶콜트레인: 평론가들은 이해하고 동참하고 그 뒤에 써라. 우리를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이해가 먼저이다. 나는 제대로 분석도 못 하면서 무조건 좋게 쓴 글도 봤다. 얄팍한 내용밖에 안되는 평론도 봤다. 내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이 말이다.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하라. 물론 평론가든 뮤지션이든 100% 음악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나도 노력하고 평론가도 노력해야 한다. “이해(understanding)”.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 베네핏을 누린다. 

 

'정리된 혼란' 돌피의 걸작, Out To Lunch. 

 


1964년은 재즈사에서 무척 의미 있는 한 해이다. 이노베이터들의 걸작 행진이 이어지던 해였다. 앤드류 힐의 Point of Departure (3월 21일, 에릭 돌피 참여), 앨버트 아일러의 Spiritual Unity (7월 10일),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 (12월 9일)이 녹음된 해였다. 무엇보다도 1964년 2월 25일, 에릭 돌피의 Out To Lunch 음반 녹음은 그 해의 가장 빛나는 소득일 것이다. 

1964년 에릭 돌피의 창의성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토니 윌리엄스, 바비 허쳐슨, 리처드 데이비스, 프레디 허바드가 참여한 Out To Lunch. 이 미래지향적인 음반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정리된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셀로니어즈 몽크의 이미지를 제목으로 단 첫 곡 Hat and Beard는 시작부터 베이스 클라리넷, 비브라폰, 베이스, 드럼의 특색있는 스카타토 조합으로 듣는 이를 대단히 불안정한 세계로 이끌어간다. 18세에 불과한 드러머 토니 윌리암스의 연주는 경이롭다. 그는 이듬해 윌리암스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우리도 안티 뮤직을 연주하자고 제안했을 만큼 창의적이었는데 Out To Lunch에서 이미 그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Hat and Beard에서 하이햇의 쓰임은 무척 감동적이다. 비브라폰 주자 바비 허쳐슨도 이 음반에서 대단히 특색있는 연주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비브라폰 연주자들은 서스테인 페달을 적극 이용해서 음이 초인종 소리처럼 울리게 하는데 허쳐슨은 페달을 쓰지 않고 비브라폰을 세게 내리쳐서 거친 쇠소리 사운드를 내고 있다. 셀로니어즈 몽크처럼 오픈 스페이스를 많이 두고 멜로디를 빗겨가듯 연주하면서 돌피의 솔로를 푸시하기도 한다. 허쳐슨은 비프라폰의 음역 범위 전체를 적극 이용하면서 다른 솔로이스트의 보조를 넘어선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리처드 데이비스의 베이스도 훌륭하다. 그는 보우를 많이 쓰면서 카운터포인트로 연주하는데 모던 베이스 기술의 축소판을 보여주는듯 자기 영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음반에서는 프레디 허바드가 상대적으로 덜 모험적인 것 같다. 그의 프리 재즈 연주는 조금 경직되어 있으며 전통의 틀로 되돌아오려는 조짐이 있는데 돌피는 허바드의 불편한 점을 잘 매우고 있는 것 같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내 소견상 돌피가 왜 콜트레인 그룹에서 왜 나왔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돌피는 분명 보다 진보적인 리듬 섹션을 원했던 것 같다. 구성면에서도 콜트레인과 스타일이 다른 부분이 있다. 콜트레인의 음악은 큰 틀에서 주제를 갖고 있으며 그의 솔로는 하나의 주제로 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반면, 돌피는 하나의 긴 주제를 갖는다기보다 분열된 멜로디가 반복되고 여러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져서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논리적인데 (그래서 나는 '정리된 혼란'이라고 했다) 타이밍에 대한 엄청난 센스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테크닉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은 지금 들어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이 없다. 아방가드 최첨단 음반은 아니지만, 돌피는 그 시대의 문법을 넘어선 미래지향적이고 이상적인 연주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음반이 후대의 프리 재즈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시 동쪽으로, 동쪽으로.

 

Out To Lunch 녹음을 마치고 돌피는 찰스 밍거스 섹스텟 멤버로서 유럽 투어를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지난 호에 언급했듯 그가 소장해온 음악 자료와 짐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맡겼다. 돌피는 이번에 유럽에 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돌피는 발레리나인 약혼녀 조이스 모데카이와 파리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 밍거스에게 그의 뜻을 알렸다. 이번 유럽 투어를 끝낸 뒤에 당신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돌피는 밍거스에게 "미국은 내 음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한다. 얼마 뒤 돌피는 독일의 평론가 와킴 배랜트에게도 같은 이유를 토로했다. 돌피에게 유럽은 인종차별 없고 새로운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뉴욕에서 다시 6천 킬로 동쪽으로…. 돌피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밍거스는 자신의 밴드를 떠나는 돌피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섭섭함을 평소 돌피와 함께 연주했던 블루스곡에 "So Long Eric"이라고 제목을 붙여 돌피와 함께 유럽 투어 내내 연주했다.

 

굿바이, 에릭 (So Long Eric)

 

1967년 6월 27일. 에릭 돌피는 '탕전트 재즈 클럽' 첫 무대에 서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 직후 몸이 아프다고 주변에 호소했다. 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무대에서 두 세트만 연주하고 내려와야 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이미 의식불명이었다. 치료 과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인슐린 주사 쇼크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의사가 지레짐작 흑인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흔한 마약 과용을 원인으로 보고 마약 성분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느라 살릴 기회를 놓쳤다는 설이 있다. 여러 증언과 상황을 보았을 때 후자가 유력하다. 그의 사망 원인은 혈당상승으로 인한 심장 발작이었다. 에릭 돌피는 심각한 당뇨였다. 에릭 돌피 자신도 자신의 병을 모른 것으로 추정된다. 돌피는 의식불명 이틀 뒤인 6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에릭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의사가 피검사만 했어도 당뇨인 것을 알았을 텐데, 마약 성분을 떨어뜨리는 엉뚱한 약을 주었다. 에릭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돌피의 측근이었던 트럼펫터 테드 컬슨의 말이다.

돌피는 이렇듯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망하게 떠났다. 베이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발전시킨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많은 프로젝트를 남긴 채 그렇게 허망하게.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에 온 지 불과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밍거스와 헤어진 후 뉴욕에 처음 왔을 때처럼 돌피는 성실하게 그의 음악적 목표를 하나둘씩 이룩해나가고 있었다. 미사 멩겔버그, 한 베니크, 자크 스콜스 등 네덜란드 뮤지션들과 만나 녹음한 음반은 그의 유작(Last Date 음반)이 되고 말았다. 돌피는 세실 테일러와도 연주할 일정을 가지고 있었고 우디 쇼, 빌리 히긴스와도 밴드를 구상 중이었다. 'Love Suite'라 이름 붙여진 스트링 쿼텟 작품도 작곡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으면 죽은 자의 좋은 점만 부각하고 얘기하게 된다. 그런데 에릭은 진정 좋은 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는 오로지 좋은 것만 있는 사람이었다." (찰스 밍거스)

겨우 서른 여섯, 새의 꿈을 닮은 착한 남자 돌피는 안타깝게 그렇게 떠났다. 

 

소울 메이트, 콜트레인. 슬픔을 삭이다.

 

에릭 돌피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한 사람은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이었다. 돌피가 떠난 후 돌피의 어머니는 돌피의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존 콜트레인에게 선물했다. 콜트레인이 이례적으로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부는 작품들이 있는데 모두 돌피의 악기로 녹음된 것이다. 콜트레인의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는 각각 To Be (Expression, Impulse!, 1967)과 Reverend King (Cosmic Music, Impulse!, 1968)곡에서 들을 수 있다.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마틴 루터 킹을 표상하는 Reverend King에서는 돌피의 혼을 담은 듯 콜트레인의 열정적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제, 존 콜트레인의 추모 메세지로 에릭 돌피의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1964년 8월 27일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마련한 <다운비트>가 콜트레인의 이 메세지로 끝을 맺은 것처럼. 

"내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지 간에 불충분하다. 그를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뿐이다. 에릭을 알고부터 내 삶은 훨씬 풍요로와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친구로서 뮤지션으로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에릭 돌피 추모 페이지를 실은 1964년 8월 27일자 <다운비트>. 존 콜트레인의 메세지는 짧지만 중요했던 돌피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에릭돌피 사후 돌피의 부모가 선물한 플루트를 불고 있는 존 콜트레인.


 1964년 찰스 밍거스 섹스텟으로 유럽 투어를 떠난 시절. 투어가 끝나고 두달 여 뒤에 돌피는 사망했다.


 

양수연의 에릭 돌피 베스트송 (녹음일순)

 

▶베스트 '베이스 클라리넷' 연주


Serene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Green Dolphin Street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Miss Toni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When Light Are Low (1960년 8월 30일 녹음. <Berling Concerts>, Enja 수록)

Spiritual (1961년 11월 1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India (1961년 11월 2일~5일. <John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Impulse!수록)

God Bless the Child (1963년 3월 10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The Illinois Concert>, Blue Note 수록)

Epistrophy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Fontana 수록)

 

▶베스트 '플루트' 연주


17 West (1960년 8월 15일 녹음, <Out There>, New Jazz 수록)

Sunday Go Meetin’ (Latin Jazz Quintet + Eric Dolphy, <Caribe>, Prestige 수록)

Ode to Charlie Parker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New Jazz 수록)

Inner Flight No.2 (1960년 11월 7일 녹음. 에릭 돌피 솔로곡. <Other Aspects>, Blue Note 수록)

Glad to Be Unhappy  (1960년 4월 1일 녹음. <Outward Bound>, New Jazz 수록)

Stolen Moments (1961년 2월 23일 녹음, Oliver Nelson의 <The Blues and the Abstract Truth>, Impulse! 수록>

Don’t Blame Me (1961년 9월 6일 녹음 (코펜하겐), <In Europe, Vol.2>, Prestige 수록)

My Favorite Things (1961년 11월 18~11월 29일 녹음.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수록)

You Don’t Know What Love Is (1964년 6월 2일 녹음. <Last Date>, Limelight Records 수록)

Gazzelloni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베스트 '알토 색소폰' 연주

 

Dolphy-N (1960년 11월 (?)녹음. Ron Carter와 듀엣곡 <Other Aspect>, Blue Note 수록)

Miss Ann (1960년 12월 21일 녹음. <Far Cry>, New Jazz 수록)

Round Midnight (1961년 5월 8일 녹음, George Russell의 <Ezz-thetics>, Riverside Records 수록)

Aisha (1961년 5월 25일 녹음, John Coltrane의 <Ole Coltrane>, Atlantic 수록)

Hot House (1961년 8월 30일 녹음, <Berlin Concert>, Enja Records 수록)

Tenderly (1960년 12월 21일 녹음. 에릭 돌리 솔로곡. <Far Cry>, New Jazz 수록)

Out To Lunch (1964년 2월 25일 녹음 <Out to Lunch>, Blue Not 수록)

*Jim Crow (1962년 녹음 날짜 및 돌피를 제외한 연주자 불분명. 돌피 전 악기 사용. Other Aspect, 1987년, Blue Note)

 


▶기타: Out To Lunch 녹음 50주년을 맞아 후대 뮤지션들이 새롭게 각색한 트리뷰트 음반. Out To Lunch의 곡들과 에릭 돌피의 대표작들을 수록한 멋진 앨범들이다.



Aki Takase, Alexander Von Schlippenbach <So Long, Eric! Homage To Eric Dolphy>, Intakt Records, 2014


Russ Johnson, <Still Out To Lunch>, Enja, 2014 

; Russ Johnson (t), Roy Nathanson (saxophones), Orrin Evans (p), Brad Jones (b), George Schuller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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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피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

새를 쫓던 천재 소년, 그가 남긴 유산.


(에릭 돌피 1928.6.20 ~ 1964.6.29)


서울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던 1986년. 내가 살던 지역의 학생들은 성화 봉송을 위한 매스 게임 연습에 동원되었다. 반나절 이상을 카드 섹션이나 집단 무용 따위를 연습해야 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에게 국가가 강요한 유희(遊戱)는 버거웠다. 탈주를 꿈꾸었다. 나에게 다른 세상으로 이끈 사람은 에릭 돌피였다. 돌피를 듣는 것은 비밀스러운 나만의 놀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돌피의 플루트 연주를 듣고 나서야 처음 느끼게 되었다. 여태껏 경험한 적 없는 실로 기묘한 소리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낯선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려 따라가다 강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던 아이들처럼 나는 돌피의 음에 유괴된 채 재즈의 강으로 빠져 버렸다. 1961년 에릭 돌피의 첫 리더작 Outward Bound는 '아주 멀리 떠난다'는 제목의 뜻처럼 돌피 역시 탈주와 도약을 꿈꾸는 듯 느껴졌다. 돌피의 연주가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새를 쫓고 새를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새처럼 연주하고 비상하기를 갈망했다.

“나는 항상 새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연습하곤 했습니다. 새 소리를 녹음한 뒤 느리게 재생해봤더니 플루트와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플루트를 느리게 연주하는걸 녹음해서 빨리 돌려보았더니 역시 새 소리 같았구요. 새들은 음과 음사이에 또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F와 F#사이에 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이지요. 인도 음악이 쿼터 톤을 가지고 있듯이 새는 아주 특이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운비트, 1962년 4월 12일 인터뷰)


에릭 돌피는 나의 히로우면서 동시에 미스테리였다. 그가 불현듯 다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에릭 돌피 사망 50주년을 맞아 에릭 돌피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있었던 가운데 에릭 돌피의 유품을 미 의회 도서관이 확보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박스 다섯 분량에 달하는 돌피의 유품은 대부분 그의 음악 문서와 테이프였는데 돌피의 친구인 헤일스 스미스 부부를 거쳐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뉴튼이 보관해온 것이었다.

찰리 파커, 스트라빈스키, 바흐의 작품을 채보한 문서, 특히 바흐의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Bach's Cello Suite No.1과 플루트를 위한 Partita In A Minor For Flute의 채보는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임프로비제이션의 기반으로 쓰려고 작곡한 많은 노트도 있었고 새소리를 채보한 문서도 있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이 새소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역작 "새의 카탈로그" 작품이 완성된 해가 1958년이니 아마 돌피는 메시앙과 비슷한 시기에 새를 연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돌피의 유품은 그가 얼마나 음악의 구조에 대해 면밀히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에릭 돌피는 여러 음악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 음악, 특히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 인들의 노래도 차용하고 있었다. 유품에는 발표되지 않은 곡들도 다수 있었으며 기존과 다른 편곡의 Hat and Beard, Gazzelloni, The Prophet 작품도 있었다. 

에릭 돌피는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이 물건들을 친구 헤일스 스미스에게 남기고 1964년 미국을 떠났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돌피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연습만 하는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연습을 끝내고도 집에서 더 하려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했죠. 그와 만나려면 그가 연습을 끝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요. 저 녀석은 언젠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모든사람이 생각했지요." 에릭 돌피의 중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1928년생 캘리포니아주 LA에서 태어난 에릭 돌피는 중학교 2학년 때 남가주 대학 음대의 장학금을 얻을 만큼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리었다. 부모와 학교 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초중고를 거치면서 심도 있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돌피의 부모는 외동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집 마당에 연습실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서 음악을 전공할 때에는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를 음악적 멘토로 삼게 된다.

돌피는 알토 색소폰,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이 주악기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실력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존 콜트레인을 포함해 LA에 공연하러 오는 타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면서야 그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졌다. 그에게 뉴욕에서 연주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돌피는 무척이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같은 선생에게서 개인 레슨을 받았던 여섯 살 위의 친구 찰스 밍거스도 50년에 이미 뉴욕에 정착해 찰리 파커와 연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돌피 역시 비상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완벽히 준비됐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거처에서 연구하고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닦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돌피가 서부에서 미대륙을 횡단하여 동부로 온 것은 치코 해밀턴 퀸텟의 멤버로서 활동했던 1958년이었다. 치코 해밀턴 퀸텟의 돌피가 1958년 7월 4일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Jazz on Summer’s Day>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동부의 섬에서 돌피의 플루트 연주는 뜨거운 한여름 밤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 치코 해밀턴 밴드로서 돌피는 음반을 여럿 녹음했고 이듬해 1959년에는 뉴욕의 버드 랜드 클럽에서 연주하고 방송도 탔다. 드러머 치코 해밀턴은 훌륭한 연주자이고 밴드 리더였으나 돌피는 “제한된 음악적 자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돌피는 치코 해밀턴 밴드를 떠나 자기의 음악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정착한다. 그의 옛 친구 찰스 밍거스가 돌피를 환영했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콜트레인과도 교류를 이어나간다. 서른 살 늦깎이 뉴욕 데뷔, 그러나 돌피는 강한 몰입도로 그의 음악 세계를 펼쳐보인다. 


에릭 돌피는 프레스티지사와 계약하고 1960년 한 해만 리더로서 세 장의 음반을 위해 녹음했다. 1960년 4월 1일 첫 리더작 <Outward Bound>를 녹음한다. 프레디 허버드, 재키 바이어드, 조지 투커, 로이 헤인스가 참여한 전형적인 비밥 퀸텟 구성이다. 돌피의 룸메이트였던 22세의 프레디 허버드는 첫 리더작 <Open Sesame>를 녹음하기 직전의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돌피가 베이스 클라리넷으로 연주한 On Green Dolphin Street은 압권이다. 나의 돌피 패이버릿 중 하나인 Glad To Be Unhappy곡도 이 음반에 담겨있다. 라이브로 이 곡을 들었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인다'라는 체념조의 노래를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8월 15일에는 쿼텟 구성으로 2번째 음반 <Out There>를 녹음했다. 이 음반의 독특한 사운드를 위해 첼로가 등장한다. 첼로는 치코 해밀턴 밴드에서 만나 돌피와 통했던 론 카터가 맡았다. 두 사람은 그해 11월 듀엣으로 Dolphy'N과 Triple Mix라는 곡을 녹음했는데 에릭 돌피 사후에 각각 <Other Aspect>(1987), <Naima >(1987) 음반으로 나뉘어 발매된 바 있다. 실로 귀한 음원이 아닐 수 없다. <Out There>에는 찰스 밍거스에 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를 위한 곡 The Baron (밍거스는 LA에서 Baron Mingus라는 예명을 썼다.)과 밍거스의 곡 Eclipse도 연주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녹음된 돌피의 세 번째 음반, <Far Cry>에서는 찰리 파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재키 바이어드의 곡 두 개를 담았다. 론 카터와 재키 바이어드, 로이 헤인즈가 다시 참여했고 클리포드 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22세의 트럼펫 천재 부커 리틀과의 짧지만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부커 리틀이 이듬해 10월 요독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사망 석 달 전 FIve Spot 클럽에서의 라이브 <At The Five Spot>은 Far Cry와 더불어 에릭 돌피와 부커 리틀이 남긴 명작이다.

“재즈는 내 삶의 모든 것이다. 걷고 보고 듣고 내 감각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나는 음악으로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인 따스한 감정을 내 연주에 쏟아 부으려 한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앞으로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시도해야 할 것도 많다.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색다른 것들을 항상 듣게 된다. 그러면 늘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내가 음악가로서 더 성장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운드를 영원히 발견해 나갈 것이다.” (에릭 돌피)


소울 메이트, 존 콜트레인과 논란에 휩싸이다.


1961년 5월에 녹음된 존 콜트레인의 음반 <Ole>의 오리지널 LP에는 George Lane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한다. 프레스티지사와의 계약을 고려해 에릭 돌피가 가명으로 참여한 것이다. 

앞서 약간 언급했지만 존 콜트레인은 에릭 돌피의 LA 시절에 처음 알게 됐다. 1954년 존 콜트레인이 색소포니스트 조니 호지스와 공연하기 위해 LA에 왔을 때 콜트레인은 돌피 연주를 듣고 반하는데, 콜트레인 전기를 보면 마약을 사기 위해 돌피에게 돈을 빌린 것이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는 설을 소개한다. 돌피는 마약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콜트레인은 동부에 오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콜트레인은 조니 호지스 공연을 위해 1954년에 여러 번 LA를 왔고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LA에서 공연하러 왔을 때도 돌피와 시간을 가졌다. 돌피는 콜트레인과 잼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 얘기를 하느라 밤을 새울 정도로 깊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돌피는 콜트레인 전 인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콜트레인은 돌피에게 재즈의 메카 뉴욕에서 연주하기를 원했고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두 사람은 멀리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전화로 음악 얘기를 나누며 끈끈한 우정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에릭 돌피가 콜트레인 밴드에 참여한 것은 돌피가 세 장의 리더작 녹음을 끝낸 1961년이었다. 에릭 돌피는 오네트 콜맨과 비견되며 재즈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논란을 만들던 중이었다.  콜트레인도 Blue Train(1957), Giant Steps(1959), My Favorite Things(1960) 등을 비롯해 많은 작품으로 재즈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고 새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었다. 돌피와 콜트레인의 만남은 사건이었다. 특히 1961년 여름의 공연부터  11월 1일부터 5일간 연린 뉴욕 빌리지 뱅가드의 연속 공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공연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도 11월 23일 <다운비트> 잡지는 이렇게 혹평한다.

“최근에 커지고 있는 안티 재즈(Anti-jazz) 트렌드 성향, 즉, 아방가드 뮤직이라는 이름 아래 성장하고 있는 이 안티 재즈의 두 리더, 존 콜트레인과 에릭 돌피의 연주를 몸소 체험했다. 소름 끼치고 몸서리쳐진다. 두 개의 혼이 만드는 니힐리즘적인 운동(다운비트는 ‘연주’라는 말도 쓰기 싫어서 ‘exercise’라고 표현했다)이 그 밴드의 좋은 리듬 섹션을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콜트레인과 돌피는 의도적으로 스윙을 파괴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안티 재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나키적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다운비트>의 혹평은 독자들의 상반된 뜨거운 반응으로 나타났다. 뉴욕 재즈신이 마치 혼란에 휩싸인듯했다. 

다운비트의 혹평으로 에릭 돌피는 크게 상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에릭 돌피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조롱을 받았다. 콜트레인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들은 우리가 음악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양 비판했다. 돌피가 마음이 상하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상했다.” 

다행히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에게 ‘해명’의 기회를 줬다. 62년도 4월 12일에 <다운비트>는 콜트레인과 돌피의 공동 인터뷰를 진행한다. 콜트레인과 돌피의 서로를 향한 애정과 재즈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인터뷰의 내용은 지면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관련해서 독자께 숙제를 드린다면 당시 논란의 정점이었던 돌피 & 콜트레인의 빌리지뱅가드 공연이 다행스럽게도 1997년 콜트레인 탄생 71주년을 기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점, 그래서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을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2001년 파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61년~63년까지 존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를 담은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7장 박스 셋에서는 콜트레인 유럽 투어에 참여한 돌피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이 박스 셋에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이 포함되었고 특히 My Favorite Things에서 돌피의 플루트 솔로는 탄성을 불러 일으킨다. 

돌피를 포함해 콜트레인, 그리고 프리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터트리고 싶어서 참으로 근질근질하다. 다음 호에는 재즈 사에 길이 남을 역작 <Out To Lunch>와 돌피의 마지막 음악 여정을 이어가겠다. 

(다음 호에 계속)


에릭 돌피와 존 콜트레인의 공연. 다운비트 매거진이 '안티 재즈'라 혹평했던 1961년 경이다.


<프레스티지 시절 발매된 돌피의 앨범들>

Outward Bound (1960)

Out There (1960)

Far Cry (1961)

At the Five Spot, Vol. 1 (1961)







<콜트레인과 1961년 11월에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을 담은 박스셋,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Impulse!)>


 

돌피의 연주를 담은 2001년 출시된 콜트레인의 유럽 투어 박스 셋, <Live Trane: The European Tours> (Pablo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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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피터슨의 곡 Hymn To Freedom은 1962년 Civil Right Movement (공민권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작곡되었습니다. 제목처럼 자유를 위한 시, 자유를 위한 열망을 담은 작품으로 오스카 피터슨의 가장 스피리츄얼한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싶습니다. 가스펠적 느낌이 강한 이 작품은 오스카 피터슨의 1962년도 앨범 <Night Train>에 수록되었습니다. 

최근 네델란드 피아니스트 피터 베이츠 (Peter Beets)의 오스카 피터슨 헌정 앨범 <Portrait of Peterson>에도 이 곡이 담겼는데, 피터 베이츠의 오스카 피터슨 연주도 정말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Oscar Peterson Trio : Oscar Peterson (piano), Ray Brown (bass), Ed Thigpen (drums)

Live in Denmark,1964.


피터 베이츠의 Hymn To Freedom.


오스카 피터슨 (1925.8.15 ~ 200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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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맹글스도로프 (Albert Mangelsdorff, 1928~2005). 무려 6노트를 동시에 부는 등의 폴리포닉 테크닉으로 유명한 트럼본 주자이다. 아방가드, 퓨전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탐험해왔던 알버트 맹글스도프는 독일 재즈계의 거목이자 재즈계에 가장 혁신적인 트럼본 주자 중 하나였다.

웨더 리포트 시절의 자코 패스트리우스가 참여한 1977년 Trilogue Live. 전통 재즈를 기반으로 실험적인 사운드가 곳곳에서 번득이는 앨범이다. Ant Steps On An Elephant's Toe는 펑키 리듬을 타고 릴렉스한 느낌으로 여유를 부리다가 환상적인 솔로로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무심코 듣다가도 마치 여기저기 흩어진 퍼즐 조각 몇개가 딱 맞았을 때 느껴지는 쾌감 같은 걸 던져주는 가볍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곡. 멋진 트리오 라이브.

Albert Mangelsdoff (trombone)

Jaco Pastorius (electric bass)

Alphonse Mouzon (drums)


Albert Mangelsd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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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12일, 노르웨이

에릭 돌피 죽기 두달 전 영상. 

찰스 밍거스와 함께 유럽 투어하던 시절입니다. 

Take The A Train에서 에릭 돌피의 베이스 클라리넷 솔로는 진정 명연주입니다.


Eric Dolphy - Bass Clarinet

Charles Mingus - Bass

Eric Dolphy - Bass Clarinet

Clifford Jordan - Tenor Sax

Johnny Coles - Trumpet

Jaki Byard - Piano

Dannie Richmond - Drums


에릭 돌피 (1928.6.20~196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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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테리(1920.12.14 ~ 2014.2.21) 

             

이 시대 위대한 혼 주자, 클락 테리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4세. 듀크 엘링턴, 찰스 밍거스, 카운트 베이시, 셀로니오즈 몽크, 퀸시 존스와 함께했던 화려한 경력, 그리고 밴드 리더로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재즈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뮤지션이었습니다. 그는 장수를 누렸을지언정 오랫동안 당뇨와 싸워왔고 3년 전에는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을 만큼 당뇨 후유증에 시달리며 힘겨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연주와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며 크게 존경받았습니다.

재즈사에 역동적인 발자취를 남겼고,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가족과 학생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생을 마감했으니 그는 행복한 사나이요, 행복한 뮤지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클락 테리, 당신은 천사들이 노래하는 하늘나라의 빅 밴드에 참여하실 테이지요. 우리는 당신을 한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테리의 아내 그웬 테리가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의 메시지에 숙연해집니다.

스윙과 비밥 시대를 거치면서 빅 밴드 및 여러 다양한 편성과 스타일로 무대를 빛내왔던 클락 테리.

1920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클락 테리는 2차 대전 중 해군에서 악단생활을 거친 후 1948~1951년까지 카운트 베이시 빅 밴드, 1951~1959년까지 8년간은 듀크 엘링턴 빅 밴드에서 연주했습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빅 밴드에 참여하며 명성을 높이던 시기에 퀸시 존스가 어래인징을 맡은 첫 리더작 <Clark Terry>(EmArcy, 1955)가 나왔습니다. 진취적인 퀸시 존스의 곡 Swahili와 Double Play등 시종 밝고 깊은 그루브로 산뜻함을 더하는 이 음반에는 당대 최고의 베이시스트 중 하나였던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가 첼로로도 참여해 특색을 더했습니다. 

클락 테리는 이후에도 마지막 작품인 <Live at Marian's with the Terry's Young Titans of Jazz>이 나왔던 2005년까지 리더로서 남긴 음반이 80여 장이 넘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50-80년대를 거치면서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뮤지션들, 셀로니오즈 몽크, 클리포드 브라운, 게리 버튼, 찰리 브리드, 아트 파머, 엘리 핏제럴드, 디지 길레스피, 데이브 그루신, 밀튼 잭슨, 찰스 밍거스, 소니 롤린스, 올리버 넬슨, 맥코이 타이너, J.J 존슨, 오스카 피터슨 등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만큼 많은 연주자들과 협연했고 그들과도 훌륭한 레코딩을 남겼습니다.

클락 테리는 NBC 투나잇 쇼에 10년간 고정 출연해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위트있는 연주와 보컬로 시청자를 사로잡았고 소위 ‘한물 간’ 빅 밴드 스타일과 재즈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 무단히 애썼던 브라운관 속의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지난해, 클락 테리와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맹인 청년과의 사제간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Keep On Keepin' On이 미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

클락 테리를 멘토로 삼으며 희망을 키우는 청년의 감동적인 모습, 그리고 병마와 힘겹게 싸우면서도 사람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93세 클락 테리를 보며 큰 바위 얼굴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뭉클했었지요.

플루겔혼의 개척자이자 위대한 트럼펫터, 클락 테리. 음악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던 큰 그릇의 인간, 클락 테리.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빕니다. 


추천 앨범.

Clark Terry, EmArcy, 1955

수록곡 : 1. Swahili" (Quincy Jones) / 2. Double Play" (Jones) / 3. Slow Boat / 4. Co-Op" (Terry, Rick Henderson) /5. Kitten / 6. The Countless" (Freddie Green, Terry) / 7. Tuma" (Jones) / 8. Chuckles

연주자: Clark Terry(trumpet), Jimmy Cleveland (trombone), Cecil Payne (baritone saxophone), Horace Silver (piano), Wendell Marshall (bass), Oscar Pettiford(bass, cello), Art Blakey(drums), Quincy Jones (arranger) 

녹음일: 1955년 1월 3일 & 4일

1955년 발표된 클락 테리의 데뷔 앨범으로 퀸시 존스가 어래인징을 맡았습니다. 아프리칸 느낌의 리듬을 차용한 Swahili는 퀸시 존스의 특유의 힙한 감각이 전해집니다. 역시 존스의 작품인 미디엄 스윙곡 Double Play는 피티포드의 베이스 & 마샬의 드럼과 혼이 각각 A섹션, B섹션을 나누어 맡으며 대화하듯 멜로디를 주고 받는 멋진 곡이지요. 테리의 작품인 Slow Boat에서는 멋진 펑키 블루스, 테리의 깊은 그루브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이 멜로디, 하모니, 리듬 여러 면에서 스타일리쉬하고 트레디셔널 메인스트림 재즈의 멋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Duke with a Difference (with Johnny Hodges), Riverside, 1957


수록곡 1. C Jam Blues / 2. In a Sentimental Mood / 3. Cotton Tail" / 4. Just Squeeze Me" / 5. Mood Indigo /6. Take the "A" Train /7. In a Mellow Tone / 8. Come Sunday

녹음일: 1957.7.29 & 1957.9.6 

연주자: Clark Terry (trumpet, arranger), Quentin Jackson & Britt Woodman (trombone), Johnny Hodges (alto saxophone), Paul Gonsalves (tenor saxophone), Tyree Glenn (vibraphone, trombone), Billy Strayhorn (piano), Luther Henderson (celeste), Jimmy Woode (bass), Sam Woodyard (drums, Marian Bruce (vocals), Mercer Ellington (arranger)

클락 테리가 한창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동하던 1957년, 그가 좋아하는 듀크의 곡들을 골라 녹음한 음반입니다. 이미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서 7년간 주요 멤버로 활동하면서 음악적 역량을 키웠고 리더로서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던 클락 테리. 클락 테리 본인을 포함해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주요 멤버인 자니 호지슨(알토 색소폰), 폴 곤잘브스(테너 색소폰), 지미 우드(베이스), 샘 우드야드(드럼), 타이리 글렌(트럼본)이 참여하여 눈길을 끕니다. 

클락 테리가 편곡한 이 음반의 듀크 엘링턴 곡들은 기존의 듀크와는 사뭇 다른 신선한 매력이 있습니다. 섹스텟 구성이지만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사운드 팔레트의 느낌을 살렸고 오케스트라 내에서 제한되었던 연주자의 솔로가 여유롭게 들립니다. 듀크의 악기인 피아노 대신 비브라폰이 참여했는데 비브라폰 연주는 트럼본 주자 타이리 글렌이 맡았습니다. 최초 녹음 1957년 7월 29일이며 같은 해 9월 6일 피아니스트 빌리 스트레이혼이 참여한 Come Sunday, 보컬인 마리안 브루스의 참여한 In a Sentimental Mood이 추가되었습니다. 빌리 스트레이혼이야말로 듀크 엘링턴 밴드에서 중요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죠.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적인 곡 중 하나인 Take The A Train도 빌리 스트레이혼의 작곡한 곡입니다.

듀크 엘링턴 간판 멤버들이 함께한 색다른 듀크 엘링턴 작품집. 어래인저이자 밴드 리더로서 클락 테리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멋진 음반입니다. 


In Orbit (with Thelonious Monk), Riverside, 1958

수록곡 1.In Orbit (Terry) / 2. One Foot in the Gutter (Terry)/ 3. Trust in Me /4. Let's Cool One" (Monk)/ 5. Pea-Eye" (Terry)/6. Argentina (Terry)/7. Moonlight Fiesta" (Mills, Tizol)/8. Buck's Business" (Terry)/9. Very Near Blue" (Cassey)/10. Flugelin' the Blues" (Terry)

연주자: Clark Terry (flugelhorn), Thelonious Monk (piano), Sam Jones (bass), Philly Joe Jones (drums)

녹음일: 1958년 5월 7일 & 12일


플루겔혼을 중심으로한 쿼텟 구성도 매우 참신할뿐더러 셀로니어즈 몽크가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드문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셀로니오즈 몽크는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사이드맨으로 녹음한 앨범이 열장 남짓에 불과합니다.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몽크의 강하고 특색있는 사운드 때문에 부담스러워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3/4리듬이 부분 삽입된 경쾌한 블루스 곡  One Food In The Gutter, 몽크의 곡으로 유일하게 수록된 감성 넘치는 Let's Cool One 등 매 곡들이 멜로디에 대한 민첩한 센스로 빛나는듯 합니다. 몽크의 시크한 멋과 테리의 깊고 풍성한 매력이 만난 멋진 앨범. 1987년에 리마스터링 되면서 Flugelin’The Blues가 보너스 트랙으로 삽입되었습니다.


Color Changes, Candid, 1960

Clark Terry (trumpet, flugelhorn), Yusef Lateef (tenor, flute, English horn, oboe), Timmy Knepper (trombone), Julius Watkins (French horn), Seldon Powell (tenor, flute), Tommy Flanagan (piano), Budd Johnson (piano, Nahstye Blues), Joe Benjamin (bass), Ed Shaughnessy (drums)

수록곡: 1.Blue Waltz / 2. Brother Terry / 3. Flutin’ And Fluglin’ / 4. No Problem /5. La Rive Gaiche / 6. Nahstye Blues / 7. Chat Qui Peche

녹음일: 1960년 11월 19일


가 가장 좋아하는 클락 테리의 앨범입니다. 다양한 무드, 다양한 칼러로 귀를 사로잡습니다. 왈츠로 시작되는 첫 곡에서 토니 플라나간의 피아노, 셀던 파월와 유세프 라티프 색다른 느낌의 두 명의 테너 솔로이스트를 비롯해 모든 연주자가 화려하고 멀티플한 스킬로 매혹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유세프 라티프 작곡인 Brother Terry도 정말 신선합니다. 스페이스를 충분히 살리면서 라티프의 오보에를 비롯해 각 악기가 층을 쌓아가며 이국적인 색채를 내뿜습니다. 

Flutin'And Fluglin은 테리의 플루겔혼과 라티프와 셀던 파웰, 두대의 플루트가 교차하며 멜로디를 만드는 대단히 멋진 곡입니다. 플루트의 멜로디 위에 얹어진 테리의 플루겔혼 임프로바이징은 꽃 위에 앉은 나비처럼 사뿐하고 정겹습니다. 플루트 솔로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왼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라티프, 오른쪽 스피커에서는 파웰이 속삭이듯 주고 받는 멜로디. 플루겔혼에서 트럼펫으로 바꾸어가며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클락 테리.... 모든 혼 주자들이 정겨운 대화를 나누듯한 이 곡은 그야말로 명품입니다.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