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카리스마에게 시련은 없다. 찰스 밍거스.

(양수연의 재즈탐미 -재즈피플 2016년 5월호)



뉴햄프셔로 향하는 보스턴 북쪽 1번 도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나올법한 투박한 시골 정경이 펼쳐진다. 한적한 도로에 띄엄띄엄 서 있는 백 년 넘은 집들은 목공소, 골동품 가게, 잡화점으로 채워져 있다. 누가 찾아올까 싶은 한적한 곳이지만 반세기 전엔 유명한 재즈 클럽이 있었다. 레니 소고로프가 운영했던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Lennie’s-on-the-Turnpike). 지금의 풍경처럼 허름하고 낡은 재즈 클럽이었다. 천장이 주저앉을 듯 낡았고 비좁고 여자 화장실도 없어서 니나 사이먼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러나 재즈의 인기가 록으로 대체된 그 시절에 내로라하는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은 이 먼 곳까지 올라와서 안식을 얻곤 했다. 그중에는 찰스 밍거스도 있었다. 

토마스 리치만이 연출한 1968년 작품 찰스 밍거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밍거스의 연주 장면들은 바로 이곳,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에서 촬영된 것이다. 그는 대니 리치몬드(드럼), 찰스 맥퍼슨(알토 색소폰), 존 길모어(테너 색소폰), 로니 힐리어(트럼펫)과 함께 All the Things You Are, Take the ‘A’ Train, 그리고 Peggy’s Blue Skylight를 연주한다. 밍거스의 둔탁한 손은 과도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어 보는 이를 짓누를 것만 같다. 공격적인 터치, 엄청난 하모닉 센스, 괴성을 지르며 스캣하는 밍거스는 음악과 인생을 달관한 도인과 같다. 레니스 언 더 턴파이크는 71년에 화재로 문을 닫았다. 밍거스는 79년에 죽었다. 

재즈 워크샵, 프리재즈와 모달.

1951년 5월, <다운비트> 매거진은 샌프란시스코의 블랙 호크 클럽에서 열린 비브라폰 주자 레드 노보 트리오 공연을 취재하던 중 놀라운 귀재를 발견한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실력의 베이스 주자가 바로 여기 있다. 그는 연주하면서 미소짓고 행복해 한다….” 비평가 랄프 글리슨은 6월 1일자 다운비트에 스물 아홉살 그 베이스 연주자를 소개하는데 이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 한다. 타이틀을 “찰스 밍거스, 생각하는 뮤지션”이라고 뽑았다. 나는 그 어떤 무엇보다 이 기사가 초기 찰스 밍거스의 진가를 대중에게 알린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밍거스는 레드 노보(비브라폰)와 기타(탈 팔로우)와 함께 활동 하고 있었다. 다운비트는 클래식 음악 배경을 갖추고 재즈의 크리에이션을 갖춘 밍거스를 극찬하는 것도 모자라 “진정한 재즈는 예술”이라며 그의 어깨에 예술과 혁신이라는 짐을 얹어 주었다. 밍거스의 ‘생각’이란 재즈의 미래이고 재즈의 발전 가능성으로 치환되었다. 그해 말 레드 노보 트리오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리고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그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이듬해 52년에는 맥스 로치와 함께 공동으로 독립 레이블인 데뷔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음악 비즈니스에도 발을 내디뎠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맥스 로치가 함께한 비밥의 걸작 <The Quintet, Live at Massey Hall>앨범도 이 데뷔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생각하는 뮤지션, 찰스 밍거스. 그의 혁신성은 그의 ‘재즈 (컴포저스) 워크샵’ 프로젝트로 표상된다. 재즈 워크샵은 말 그대로 연구 모임 이름이자 그룹 이자 나중엔 회사 이름이기도 했다. 53년에 첫 재즈 워크샵 때는 한동안 작곡된 음악을 했다. 그러나 밍거스는 이내 이런 악보화된 재즈가 연주자의 즉흥연주와 창의력을 구속한다고 생각하고 56년에 새로운 재즈 워크샵을 시작했을 때는 악보 자체를 폐기했다. 그 어떤 멜로디 악보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악보없는 연주는 밍거스와 고등학교 밴드에 같이 참가했던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학교 밴드에서 엘드리지가 악보를 거부하자 밍거스는 의아해했다. 

 “내 악기를 봐. 나는 내가 느끼는 걸 연주해. 그것이 재즈야. 너도 악보를 버리고 너의 것을 발견해봐. 스스로 터득해보라고. 그러면 넌 언젠가 나에게 고마워할거야.” 


많은 연주자들이 재즈 워크샵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자아를 발견하고 떠났다. 그러나 악보가 없으므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새로 들어온 멤버들은 기존의 창작곡들을 악보없이 배워야 했고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는 기존 멤버들에게도 타격이 됐다. 그런데도 밍거스는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이 가장 진솔한 방법임을 주장하였고 언젠가 멤버들이 떠날 것을 알면서도 각 연주자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작곡했다. 이런 면에서 밍거스는 그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듀크 엘링턴과 비슷했다. 악보 없이 진행되는 재즈 워크샵 리허설 공연에서 밍거스는 청중을 향해 이 곡은 새로 작곡된 것이라서 몇 번 다시 연주해봐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청중은 같은 곡을 그 자리에서 여러 번 들으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고 완성이 되면 박수를 쳤다. 

밍거스는 연주자가 진솔하게 즉흥연주하는 것과 시늉만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재즈 워크샵에서 이루어진 집단 즉흥 연주에서 프리 재즈에 관한 밍거스는 입장은 완고했다. 밍거스는 프리 폼에 대해서 우려의 말을 종종 했는데 색소폰이 프리 재즈를 연주할 때 뭐가 나올 줄 모르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누르는 것일 뿐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밍거스는 청중에게는 음악을 보여야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실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밍거스의 음악에는 분명 프리 폼이 들어있다. 재즈 워크샵에서는 프리 폼에 관현 실험이 이루어졌고 이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다. 솔로 주자는 익숙한 구성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밍거스는 본인의 주장들에 반하는 내용을 직접 라이너 노트에 쓰기도 했다. “나는 우리 그룹이 ‘토널’(조성)로 즉흥 연주를 하기를 바라지만 프리 폼의 불협화음으로도 나아갈 의향이 있다” (Jazz Composer’s Workshop, Savoy, 1954) 밍거스 재즈 워크샵은 오네트 콜맨, 알버트 아일러, 세실 테일러에 수년 앞선 50년대 중반 프리 재즈 요소를 담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밍거스가 원하는 것은 자기 능력 한계에 벗어난 실험을 청중 앞에서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프리 폼은 어떤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밍거스의 선견지명과 혁신성은 모달 재즈에 관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모달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으로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거론되지만, 찰스 밍거의 56년 작품 <Pithecanthropus Erectus>(Atlantic)의 마지막 수록곡 Love Chant에서 모달 재즈가 시도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밍거스는 블루스를 구성하는 3개 코드를 더 줄여서 주문(Chant)의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가 모달 재즈를 연주할 때 밍거스는 모달이 이미 20년대 젤리 롤 모튼이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밍거스의 시련, Epitaph.

89년 6월 3일,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는 군터 실러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찰스 밍거스가 작곡한 2시간 30분에 이르는 모음곡 ‘Epitaph’가 18년 만에 청중에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Epitaph는 1962년 10월 2일 찰스 밍거스가 뉴욕 타운홀에서 초연한 뒤 연주되지 않았다. 69년 초연 당시 청중석에 앉아있던  군터 실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밍거스의 역할은 떠오르는 신예 크리스챤 맥브라이드가 맡았다.

62년 초연 무대는 밍거스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무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연주자들은 20악장에 달하는 대곡을 소화하지 못해 갈팡질팡했고 밍거스는 무대에서 불같이 화를 내었으며 악보를 쓰는 기보자 세 명이 무대에 올라 다음 연주되어야할 노트를 즉석에서 그린 뒤 연주자들에게 전해주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공연에 앞서 Epitaph 악보를 놓고 토론하던 중 밍거스는 57년부터 그와 함께 해온 트럼본 주자 지니 네퍼를 폭행해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는 참극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네퍼는 공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공연은 심지어 라이브 레코딩까지 되었는데 이 재앙의 연주를 엿보고 싶으면 The Complete Town Hall Concert (United Artists UAJ 14024, 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잊혀진 Epitaph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음악학자 앤드류 혼즈였다. 그가 미망인 수 밍거스 자택에서 Epitaph를 발견했을 때 베토벤 10번 교향곡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순서도 뒤죽박죽, 희미해진 500페이지 분량의 악보를 퍼즐처럼 맞추어 복원에 성공했다. 그러나 20개 악장 중 7번째 악장 ‘Inquisition’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89년 공연도 악장 하나가 빠진 채 연주되었으니 완벽한 복원 공연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다시 18년이 흘렀고 2007년에야 할레너드사에 의해 온전한 Epitaph 악보가 출판될 수 있었다. 사라진 악보는 다름아닌 89년 복원 공연이 열린 바로 그 뉴욕 링컨 센터, 그곳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찰스 밍거스가 링컨 센터 도서관에 돈 받고 팔았다는 것을 미망인이 뒤늦게 기억해낸 탓이었다.

찰스 밍거스의 시련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어려웠던 순간들이 레코딩이나 영상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리라. 재앙과 같은 타운홀 라이브 레코딩 보다 더욱 가슴 아픈 건 앞서 말했던 토마스 리치만의 찰스 밍거스 다큐였다. 이 다큐는 1966년 11월 22일, 밍거스가 자신의 보금자리, 맨해튼 그레이트 존스가 5번지에서 퇴거 명령을 받고 짐을 싸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블렛 준 여자가 렌트비를 안 냈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살 난 밍거스의 딸 캐롤린이 사방에 흩어진 박스와 잡동사니 사이를 뛰어다니고 때론 피아노를 치고 있는 밍거스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딸을 보는 밍거스의 얼굴이 어찌나 다정하고 자애로운지 마음이 짠하다. 밍거스의 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퇴거 당일, 그는 느닷없이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집에서 주사기와 약들이 발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두 명의 경찰이 밍거스의 팔을 한쪽씩 껴 잡고 경찰차로 걸어가는 동안 기자들이 나타나 그의 모습을 촬영하고 인터뷰한다. “당신 헤로인 했나? 왜 체포되는건가?”

마약을 하지 않은 밍거스는 떳떳하다. 그는 흑인이고 흑인 재즈 뮤지션이기 때문에 의심을 산 것임에 분명하다.

그의 집에서 나온 주사기와 약은 의사 처방을 받은 치료용 약물이었다. 밍거스를 태운 경찰차가 떠나고 카메라는 수 밍거스의 얼굴과 길가로 쏟아진 짐 중에서 밍거스의 콘트라베이스에 고정된다. 

찰스 밍거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던가? 위대한 찰스 밍거스, 그의 콘트라베이스가 쓰레기 차에 실린다. 그가 힘들었을 이후 수년간의 암흑기를 암시하면서. 그는 1972년,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를 발표하며 그의 카리스마스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찰스 거스가 경찰에 체포되는 실제 장면 (찰스서스 1968년 다큐멘터리 화면 캡쳐)


<양수연의 추천 앨범>


1. Pithecanthropus Erectus / Atlantic / 1956

원시 인류 종인 ‘직립 원인’을 제목으로 한 독특한 구성의 앨범, 진화하고 멸망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오네트 콜맨 이전의 프리 재즈적인 요소와 마일스 데이비스 이전의 모달 재즈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아틸란틱 레코드 데뷔작. 재키 맥린, 주니어 몬테로즈, 말 왈드론, 윌리 존스 참여.

2. The Clown / Atlantic / 1957

아이티 민중의 독립 투쟁을 그린 Haitian Fight Song, 찰리 파커를 위한 Reincarnation Of A Lovebird이 담긴 밍거스 역작. 지미 네퍼(tb), 샤피 해디(s), 웨이드 레게(p),대니 리치먼드(d)참여

3. Mingus Ah-Um / Columnia / 1959

레스터 영을 위한 ‘Goodbye pork pie hat, 인종문제를 건드린 Fables of Faubus 등이 녹음된 콜럼비아 데뷔작. 존 핸디(as), 부커 어빈(ts), 샤피 해디(ts), 윌리 데니스(tb), 지미 네퍼(tb), 호레이스 파란(p), 대니 리치몬드(d)가 참여했다. 

4. Mingus Dynasty / Columnia / 1959

듀크 엘링턴 영향이 느껴지는 동시에 다양한 스타일의 밍거스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콜롬비아사에서 발매된 두번째 앨범. 기존 고정 멤버 외에 비브라폰, 첼로, 보컬을 더 넣어 풍부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더했다. 

5. Blues & Roots / Atlantic / 1960

블루스, 가스펠, 뉴올리언즈 등 흑인 음악의 뿌리와 초심을 담은 밍거스의 명작. 슬로우 블루스, 열정적인 스윙, 집단 즉흥 연주 등 고전적인 재즈, 블루스의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담아 냈다.

6. Oh Yeah / Atlantic / 1961

재즈계 기인, 라산 롤랜드 커크 영입 이후 발표한 수작. 밍거스는 베이스 대신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베이스는 더그 와트킨스가 연주했다. 전통 어법을 기반으로 역동적이며 다소 기괴하고 유쾌한 사운드가 시종 펼쳐진다.

7.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 / Impulse! / 1963

타운홀 콘서트 ‘재앙’후 석달 뒤 녹음된 발레 스타일의 6개 악장으로 채워진 기념비적인 작품. 빅밴드 리더이자 작곡가로서 듀크 엘링턴 이상의 면모를 보여준, 재즈사에 길이 남을 오케스트레이션 앨범. 

8.Cornell 1964 / Blue Note / 2007

1964년 3월 18일 코넬 대학에서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 라이브. 미망인 수 밍거스에 의해 발견되어 2007년 <블루노트>에서 처음 발표됐다. 에릭 돌피, 자니 콜, 클리포드 조던, 재키 바이어드, 데니 리치몬드가 참여했다. 유럽 투어를 앞둔 최상의 찰스 밍거스 섹스텟을 감상할 수 있다.



posted by jazzlady


월간 재즈피플 -2016년 2월호




샌프란시스코의 ‘소살리토’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이다. 나는 그 작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제법 잘 알고 있다. 아스라한 노을이 펼쳐진 해변에 누워 서핑하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오순도순 모인 빅토리아풍 집 정경이 펼쳐진 카페에서 우유 맛 나는 북태평양 굴의 비릿함에 취하기도 했다. 폴 블레이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소살리토가 떠올랐다. 몇해 전 나는 그곳에서 폴 블레이의 음악에 취해있었다. 소살리토에선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포근하고 나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아마 그때 들었던 음악에 54년 블레이 데뷔 앨범 [Introducing Paul Bley]도 있었을 것이다. 찰스 밍거스와 아트 블레이키, 특히 폴의 피아노가 무척 아름다웠던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곡도.


폴 블레이는 그즈음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살리토에서 칼라 블레이와 그림 같은 결혼식을 올렸다. 숲 속에서 은둔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던 칼라의 아버지도 왔고 향연을 즐기며 행복한 순간을 소살리토에서 누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왠지 칼라 블레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인들이 있다. 자유롭고 고집스럽고 재능있는 여자들. 아티스트거나 히피의 후예이거나 어떤 무엇인 여인들. 나는 어린 칼라가 헐벗게 자랐을지언정 행복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샌프란스시코의 자연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같다." 폴 블레이는 그 점에 반했을 것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했고 그 자연의 돌봄을 받은 칼라를 사랑했다. 칼라는 해변에서 수영복이 없으면 두르고 있던 스카프로 브래지어를 만들어 척하니 걸치고 있는 여인이었다. 너무나 멋있어서 폴도 그녀와 진짜 사귀기로 마음 먹었다. ‘썸타는 사이’가 된지 하루가 안 된 시점이었다. 둘은 맨해튼의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이 만난 정경은 폴이 자서전에 묘사해 놨다.


1956년 여름, 버드랜드에서 연주할 때였다. 뒷문 옆 평소 내가 주로 서 있는 자리에 키 크고 마른 여자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서 있었다. 담배 파는 여자였다.  담배를 담은 쟁반을 목에 걸고 서 있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었다.

“당신 문제는 뭐요?”

그녀의 고민은 길었다. 이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클럽 사장이 치근덕대고 피곤하다……어쩌고저쩌고.

그때 그녀는 칼라가 아니라 캐런이라고 불렸다. 폴은 조언했다. 

“해법은 간단하죠. 지금 당장 담배통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걸어나가세요, 그리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요.”

그러자 그녀는 담배통 쟁반을 내려놓았고 나랑 같이 문밖으로 나갔다.


폴 블레이의 앨범 [Annette] 수록곡 ‘Cartoon’처럼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카툰의 다음 장면은 이것이겠다. 


LA에 머물고 있는데 칼라가 나랑 살고 싶다고 뉴욕에서 왔다. 그녀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결혼은 내 인생 우선순위에서 최하위에 있는 사안이었다. 뮤지션은 대부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라에게 말했다. “시간을 줘요, 우리 잠시 떨어져 있어요. 고민해 볼게요.” 칼라는 뜻밖의 내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 길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버렸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칼라가 있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흥분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모든 사람과 수다를 떨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니 한 남자가 나왔다. 어떤 아티스트가 칼라랑 살고 있었다. 칼라는 그 남자 옆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 누구지? 이름이 뭐지? 이런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밖으로 불러냈다. 난 칼라랑 결혼하려고 이곳에 왔소. 당신은 혹시 칼라랑 결혼할 생각이 있나요? 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칼라에게 이제 결혼할 준비 됐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비꼬듯 대답했다 “오, 리얼리?”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결혼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나에게 쏘아붙였다. 나는 칼라에게 맘이 바뀌면 전화하라고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후, 칼라의 전화를 받았다. 폴, 당신에게 가겠다고…..

 칼라 블레이와 폴 블레이, 1957년 결혼 초기 무렵


폴 블레이는 저도 모르게 열정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곤 했다. 여인들은 적극적으로 폴에게 다가와 그의 지순한 사랑을 얻어냈다. 두 번째 아내, 아네트 피콕도 그러했다. 그녀도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고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의 아내로서 이미 교류가 있던 여인이었다. 1966년 게리 피콕과 별거 중인 아네트가 몇 년 만에 폴에게 느닷없이 전화했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친구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위험한 상황에서 폴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떨어진다구요. 제가 갈께요!” 

세번째 부인, 비디오 작가 캐롤 고스는 폴의 하우스 파티에서 만났다. 이번엔 폴도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캐롤은 재능이 있고 지적이며 배려심도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을 함께 했다.  


 아네트 피콕. 그녀는 칼라 블레이와 더불어 폴 블레이에게 음악적인 교감과 영향을 주고 받은 여인이었다.



폴에게 여자란 어떤 존재였을까. 폴은 그녀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으려 노력했다. 어려서도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여인에게 익숙했으니, 폴의 어머니 베티 얘기이다.

폴은 다섯 살 때 본인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인생을 두고 큰 영향을 끼쳤다. 폴이 받은 두 번째 충격은 어머니 베티가 어느 날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한 뒤 집을 떠난 일이었다. 부모가 부부동반으로 극장에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는 우연히 첫사랑과 마주친 뒤 아버지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이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폴을 데리고 첫사랑과 재혼을 했다. 사춘기 폴은 갑자기 새 아버지가 생긴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에 더욱 정진했다. 어머니는 폴이 음악 공부를 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거금 500불을 쥐여주며 뉴욕으로 가라고 말했던 화끈한 여인이었다.


세 번째 충격은 시간이 흘러 1992년, 폴의 나이 60세에 일어났다. 클럽에서 한세트 연주하고 쉬고 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 블레이. 폴에게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신은 입양되었지만, 당신 아버지가 생부 맞아요, 생모는 당신의 유모, 루시였어요.” 

폴은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가장 행복하다고 여겨졌던 유년 시절의 기억에 유모 루시가 있었다는 점이 상기됐다. 그러나 폴은 청년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2년 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 갔다가 라디오 호스트 랜 도빈의 소개로 폴은 93세 되는 노인을 만나게 됐다. 그 노인은 폴의 입양문제를 처리한 당시 변호사였다. 폴은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 노인과 점심을 먹으며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 베티가 아이를 못 낳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루시라는 여인과 바람이 났고 폴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인에게 그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고, 베티가 그 아이를 선택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베티는 원래 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으나 베티에게 다가와 ‘마마’라고 부르는 폴을 베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절대 바닥에 다시 내려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생모 루시는 유모로 들어와 5년여 간 폴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60세 폴은 성경에서 모세와 모세의 유모로 들어간 생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폴 블레이.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허둥지둥 마음이 급해졌다. 뭔가 빨리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예전에는 어린 아이의 속도로 느리게 살고 있었는데 충격을 받은 후 시간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역사가 없고 백그라운드가 부족하다는 허탈감. 음악만이 그 공허를 메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총알같이 달렸다.


그 총알 같이 달려온 시간 중 아름다운 몇 장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58년 어느 날 폴은 매사추세츠주의 그 유명한 ‘레녹스 스쿨 어브 재즈 나잇’에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LA의 힐크리스 클럽에서 찰리 헤이든과 빌리 히긴스와 고정적으로 연주했고 오네트 콜맨, 돈 체리도 불러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레녹스에 가는 건 이스트 코스트 재즈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경험할 좋은 기회였다. 이미 그곳엔 ‘써드 스트림’의 중심인물들, 존 루이스, 랜 블레이크, 조지 러셀을 비롯해 찰스 밍거스, 지미 쥐프리 등이 있었다. 폴은 칼라를 데리고 반대편 동부인 레녹스까지 삼일 밤낮을 운전했다. 그들이 가까스로 레녹스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밤 11시. ‘스쿨 어브 재즈 나잇’의 마지막 날의 마지막 곡이 소개되던 참이었다. 마지막 곡을 연주하려던 랜 블레이크에 다가갔다. “같이 연주해도 되요?”

폴의 향후 4년간의 연주 생활은 그날 연주한 마지막 한 곡에서 비롯됐다. 폴은 그 마지막 곡이 진정 인생 마지막 곡인 것처럼 온 에너지와 열정을 집중해서 연주했다고 술회했다. 그 공연 이후 찰스 밍거스, 조지 러셀, 지미 쥐프리, 랜 블레이크를 비롯해 많은 연주자가 폴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서 요청을 해왔으니 말이다. LA에서 레녹스까지 운전하면서 만일 단 한 곳에서라도 신호등이 초록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면 아마 그날 무대에 서지 못했겠지? 폴은 이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날 만난 랜 블레이크와는 인연이 깊어갔다. 스티브 스왈로우를 폴에게 소개해준 것도 랜 블레이크였다. 랜은 폴에게 그가 몸담고 있던 바드 칼리지에서의 공연을 주선하면서 폴의 양해 하에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를 데려왔다. 스티브는 당시 명문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수재였다. 폴은 스티브의 연주에 반해서 같이 연주하러 다니자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스티브는 결국 예일대를 중퇴한 뒤 폴이 마련해준 거처로 옮겼다. 스티브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 졌다. 스티브가 학업을 포기하자 부모의 충격이 몹시 컸다고 한다. 폴은 뉴욕의 자기 집 옆 6애버뉴의 빈 다락방에 방을 마련한 뒤 전등을 끌어와 스티브가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차후 스티브 스왈로우와 평생 연인이 될 폴의 아내 칼라도 이때 처음 스티브를 만나게 된다. 폴과 스티브는 그 뒤 2년간 듀오로 소호의 블리커 스트릿에 있는 작은 커피샵에서 연주했다. 폴은 그 당시 지미 쥐프리에게 스티브를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었다. 폴은 지미에게 조금씩 스티브의 실력에 대해 풀어내며 함께 연주하게 되면 절대 음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할 따름이었다. 폴은 한달 가까이 이렇게 신신당부만하며 지미의 애간장을 태워놓았고 지미가 정말 베이스 주자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 더 기다렸다. 지미가 결국 스티브 좀 보자고 사정사정하는 시점이 되자 폴은 아끼는 친구 스티브를 데려왔다.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로 이루어진 전설적인 지미 쥐프리 트리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89년, 프랑스 재즈 매거진에서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재결성을 제안했고 지미, 폴, 스티브는 1990년에 다시 모여 <The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를 녹음했다.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세 장의 앨범 Fusion, Thesis,Free Fall이 나온 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폴 블레이는 평생 사랑에 빠져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랑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랑했던 여인들과 음악적으로 함께 성장해 갔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평생 존경을 잃지 않았다. 칼라, 아네트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었던 아내 캐롤,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 게리 피콕과 그밖의 많은 뮤지션 친구들, 어머니 베티, 아버지 조, 유모 루시까지도. 그들을 향해 평생 사랑이 넘쳤던 폴 블레이,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빈다. 



(*본 칼럼에 등장하는 인용문은 1999년에 발간된 폴 블레이 자서전 <Stopping Time: Paul Bley and the Transformation of Jazz>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양수연이 뽑은 폴 블레이 앨범 10>




1.[Barrage] (ESP DISK, 1965)

칼라 블레이의 곡으로 이루어진 프리재즈 앨범으로 오네트 콜멘의 [Free Jazz] 앨범과 비견되는 수작. 선 라 밴드의 색소포니스트 마샬 알랜과 이듬해 존 콜트레인의 프리 재즈 걸작 [Ascension]에 참여한 트럼펫터 드위 존슨의 참여가 눈에 띈다. 

Paul Bley(p), Dewey Johnson(tp), Marshall Allen(as), Eddie Gómez(b), Milford Graves(perc)


2. [Closer] (ESP-Disk, 1966)

트리오로 녹음된 ESP에서의 두 번째 앨범. 수록곡 각각이 2-3분 내외로 짧으나 개성이 강하고 깔끔한 연주가 일품이다. 프리 재즈적 접근, 라틴 음악의 감각, 전통적 색채의 서정적 발라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짧은 곡들에 핵심적인 요소를 담았다. 칼라 블레이의 클래식 Ida Lupino을 비롯해 총 7곡의 칼라의 작품과 아네트 피콕, 오네트 콜맨의 곡도 한 곡씩 연주되었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Barry Altschul(perc)




3. The Paul Bley Synthesizer Show (Milestone, 1971)

폴 블레이는 일렉트릭 신디사이저 사용에 있어서도 선두주자였다. 아내 아네트 피콕의 작품들을 담은 퓨전 앨범으로 아네트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요소를 담은 실험성이 돋보인다. 

Paul Bley(p, syn, ep-p),Glen Moore/Frank Tusa/Dick Youngstein (b), Steve Hass/Bobby Moses (d)




4. [Open, To Love] (ECM, 1972)

폴 플레이의 솔로 앨범으로 칼라 블레이 작품 세 곡(Closer, Seven, Ida Lupino), 아네트 피콕의 작품 두 곡(Open, to Love, Nothing Ever Was, Anyway)과 폴 블레이 작품 두 곡(Started, Harlem)이 하나의 큰 스토리를 들려주듯 아름답게 배치되고 연주되었다. 블루지한 슬픔과 서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Ida Lupino’를 비롯해 모든 곡들이 빼어나다.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최고의 솔로 앨범 중 하나.

Paul Bley(p)




5. [Life of a Trio: Saturday & Sunday]

폴 블레이, 지미 쥐프리, 스티브 스왈로우가 ‘지미 쥐프리 트리오’ 이름 하에 30년 만에 만나 녹음한 앨범. 1989년 12월 16일 토요일과 17일 일요일 양일간에 걸쳐 두 장의 앨범으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각 연주자의 개성이 절제와 내적 융합으로 오묘하고 깊은 사운드를 만들어낸 수작이다.

Paul Bley(p), Steve Swallow(b), Jimmy Giuffre(ss, cl)



6. Plays Carla Bley (Steeplechase, 1991)

전 아내 칼라 블레이에 대한 경외를 담은 또 다른 컨셉의 앨범. Seven, Ida Lupino 등 폴이 즐겨 연주하는 칼라 블레이 주요 레파토리 외에도 Vashja, Floater, Around Again 등 칼라의 대표작 12곡이 스윙, 아방가드, 밥의 이디엄으로 연주되었다. 

Paul Bley(p), Marc Johnson(b), Jeff Williams(d)




7. [Annette] (hat ART, 1993)

아네트 피콕. 그녀를 주제로 한 이 앨범을 위해 전 남편들 게리 피콕과 폴 블레이가 함께 했다. 아네트의 대표곡Touching과 Blood는 take 1, 2로 나뉘어 연주되었고 애니타에게 바치는 Annette, Mister Joy 등 총 12곡의 수록곡은 생략적, 그야말로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미니멀리즘 미학이라 불릴만하다.

Paul Bley(p), Gary Peacock(b), Franz Koglmann(tp, flgn)




8. [Chaos] (1998, Soul Note)

피아노 솔로곡 -베이스 솔로곡 - 드럼 솔로곡- 트리오의 순서로 곡을 배치하였으며 독특한 감각과 아이디어로 색다른 칼러를 내뿜는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의 걸작이다. 

Paul Bley(p), Furio Di Castri(b), Tony Oxley(d)



9. [Sankt Gerold] (ECM, 2000)

폴 블레이, 애반 파커, 배리 필립스가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중턱의 장크트 게롤트 수도원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12곡의 프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풀어낸 수작. 

Paul Bley(p), Evan Parker (ts, ss), Barre Phillips (b)



10. [Play Blue Oslo Concert](ECM,2014)

2008년 ECM의 에릭 콩쇽과 만프레드 아이어가 기획한 노르웨이의 ‘오슬로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솔로 라이브 실황으로 폴 블레이의 유작으로 남게 됐다. 폴 블레이의 작품 4곡(Far North, Way Down South Suite, Flame, Longer)과 소니 롤린스의 ‘Pent-up House’가 연주되었다. 노장 폴 블레이의 연륜이 집약된 더없이 열정적이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다운 솔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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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소스를 곁들인 피쉬 케익 샐러드 (with 윈튼 마샬리스)

쉽게 구할 수 있는 흰살 생선과 감자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




4월의 첫날인데 아직도 눈이 펄펄 쏟아지는 이곳 보스턴. 오랜만에 포스팅합니다. 

피쉬 케익을 만들면서 윈튼 마샬리스 재즈 오케스트라의 데이브 브루백 트리뷰트 2014년 4월 공연을 맛보는 중입니다. 

흰살 생선과 삶아 으깬 감자와 여러 허브를 넣어서 팬에 그릴한 피쉬 케익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공연이 계속되네요.

가끔, 링컨 센터에 직접 가서 윈튼 마샬리스의 향연을 감상합니다. 하지만 직접 가지 않더라도 링컨 센터만큼 열심히 온라인 중계해주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합니다. 재즈의 메카, 재즈 교육의 코어답게 대중을 향한 러브콜이 적극적인 것 같아요. 언제든지 유투브 채널을 통해 윈튼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어서 즐겁기만 합니다.

윈튼 마샬리스는 미국 음악 공교육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할만큼 모범적인 뮤지션이자 작곡가, 음악감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82년 21살의 나이에 <Wynton Marsalis>(Columbia)를 들고 나타난 윈튼 마샬리스. 재즈 명문 '윈튼 가'의 자제로서 십 대부터 날렸던 그의 솜씨가 빼어나게 드러나던 앨범이었습니다. 그 풋풋했던 천재적인 트럼펫터가 이제는 미국의 국민 재즈 아티스트로서 사랑받고 있는 거죠. 이 데뷔 앨범에서 Father Time이란 곡을 듣고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986년, 윈튼이 24살일 때, 밴쿠버 재즈 페스티벌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처음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어린 사자(Young Lion)'이라 불리는 윈튼을 향해 불만스러움을 토로하는데요, 80년대 거침없은 록-퓨전의 세계로 나가던 마일스에게 윈튼은 전통 스타일을 고수하는, 지루한 연주자였던 거죠. 마일스는 본인 자서전에 윈튼을 향해 냉소를 내뿜습니다. "어린 녀석이 죽은 유러피언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잖아!"

윈튼의 이미지는 마일스 데이비스로 인해 더욱 굳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윈튼이 뉴올리언즈 출신인 데다가 이른바 '신고전주의' 연주자라며 그를 전통의 틀 안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윈튼은 딕시랜드, 비밥, 퓨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블루스를 바탕으로 윈튼만의 창의적인 언어로 여러 스타일을 창조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윈튼 마샬리스는 생선 요리를 좋아하고 그중 스시를 가장 즐겨먹는다고 측근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 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냉동 대구로 피쉬 케익 만들어봅니다.


<피쉬 케익 재료 (2-3인분)>

냉동 대구 240g 

감자 작은 것 2개

소금, 후추, 마늘 1~2톨

라임주스 1T, 식용유, 물1T, 와이트 와인(또는 미림) 1T

다진 파 1 T, 실란트로 1T, 바질 1T, (옵션: 고춧가루 약간)

달걀 1개, 1/3컵 빵가루, 1/3컵 밀가루


<만드는 법>

1. 뜨겁게 달군 팬에 식용유를 넣은 뒤 불을 줄인 후 마늘 1~2쪽을 2분 정도 볶다가 마늘은 건져내어 버린다.

2. 냉동 대구를 해동시킨 후, 소금, 후추를 뿌린 뒤 팬에서 겉이 노릇하게 굽다가 라임주스, 물, 와이트 와인 또는 미림을 넣고 약간 조려준다.

3. 다 익힌 대구를 건져내 그릇에 담고 포크로 으깨준다.

4. 대구를 구웠던 팬에 감자를 저며 썬 감자를 넣고 감자가 잠길 때까지 물을 부은 뒤 두껑을 덮고 조리는 듯 삶는다. (약 15분)

5. 감자가 으깨질 만큼 다 익으면 남은 물을 버린 후 팬에서 으깨준다.

6. 으깬 감자를 으깬 대구에 넣고, 다진파, 다진 실란트로(고수), 바질, 달걀, 빵가루, 달걀을 넣고 버무린 뒤 손바닥 크기로 모양을 만든다.

7. 밀가루에 묻힌 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서 앞뒤로 굽는다.

8. 적당한 샐러드 야채(양상치, 베이비 스피니치 등)을 깔고 피쉬 케익을 올린 뒤 미소 당근 소스를 얹는다.



<미소 당근 소스>(뉴욕 타임즈 레써피)

피넛 오일 (또는 포도씨 유) 1/2컵 

쌀식초 1/4컵 

미소 된장(소금기가 덜한 화이트 미소 이용) 2T

참기름 1 T

당근 중간 크기 2개 (얇게 썰기)

서양 생강 한톨 (한국 생강은 쓴 맛이 강하므로 추천하지 않으나, 이용할 경우 약간만 넣습니다)

후추

<만드는 법>

모든 재료를 믹서나 푸드 프로세서 넣고 간다.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