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며


지난 여름 서울의 한 재즈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청중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십수 년 전 그곳은 분명 중년층들 대다수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날 본 청중은 대부분이 20대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상당수가 몇 시간 전 처음 맞선 본 사람처럼 격식을 갖춘 옷차림으로 데이트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음식을 주문하고 칵테일이나 와인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솔로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괄 박수를 쳤고 파트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날 특별히 시간을 내어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그들 나이 또래의 연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 나는 그곳 청중이 어떤 이유나 계기로 왔는지를 떠나서 먼저 그들의 젊음이 새삼스러웠다. 설령 재즈 클럽을 찾는 이유가 재즈라는 음악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본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재즈를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즈를 소비하는 사람, 재즈를 소비하는 청중. 재즈팬의 한 사람으로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재즈를 들으러 즐겨 방문하는 보스턴 혹은 뉴욕의 공연장이나 재즈 클럽은 상당수의 청중이 중장년층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의 보스턴 레가터 바 공연에선 청중의 70%가 60대 이상이었다. 그 이상의 노인들도 대단히 많았다. 느닷없이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존 스코필드는 일렉트릭 기타로 퓨전 재즈계의 거목이 된 연주자니 만큼 젊은 청중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와 로바노가 나란히 무대에선 건 2008년 이후 7년 만이었으니 귀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러 온 것은 대부분 옛날 팬들,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팬들이었다. 63세의 존 스코필드와 62세의 조 로바노, 그들은 [Past Present] 앨범 출시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노인 청중 앞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미국의 많은 재즈 비평가들이 재즈 청중의 감소를 우려하고 있고 그 현상으로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지적하고 있다. 1987년 미국 정부의 ‘재즈는 미국의 유산’이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재즈는 미국에서 죽어가는 예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즈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청중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듀크 엘링턴과 데이브 브루백이 타임 표지를 장식하곤 했던 1950년대였다.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30~40년대를 풍미했던 듀크 엘링턴은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입장에서 구세대 연주자일지언정 변화를 모색하고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새로운 청중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Kind of Blue]를 발표하고 데이브 브루백이 [Time Out]을 발표했던 1959년은 얼마나 찬란했던 한 해였던가? 어디서나 재즈가 들리고 누구나 재즈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곧 재즈의 시대는 갔고 록의 시대가 열렸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베스트셀링 연주자, 재즈의 거장도 시대에 발맞추어 록을 차용했다. 찰스 밍거스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를 버렸다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재즈 연주자들은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즈의 파격적인 스타일 변화 역시 재즈의 긍정적인 면모이고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재즈를 보여주는 양상이었다. 

최근의 몇몇 통계는 미국에서조차 재즈가 일부 매니아의 장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국립 예술 기금(NEA)의 미국 국민들의 예술 참여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SPPA, Survey of Public Participation in the Arts)를 보면 2008년 한 해 동안 한 차례 이상 재즈 공연을 봤다고 응답한 성인은 7.8%에 불과했고 이는 2002년 10.8%에 비해 3% 줄어든 수치였다. 재즈 청중의 평균 연령은 1982년에 29세였음에 비해 2008년에는 평균 연령이 46세로 크게 높아졌다. 재즈 청중의 노령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중장년층 중에서도 매년 재즈를 소비하는 비율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45세에서 54세 사이의 성인 중 재즈 공연을 보는 비율은 2002년 13.9%에서 2008년엔 9.8% 줄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30%나 감소한 수치이다.

2014년 넬슨 리서치의 앨범 시장 조사는 재즈 청중의 급격한 감소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넬슨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한해 미국 전체 인구의 1.4%만이 재즈 앨범을 소비했다. (클래식 음악 청중 감소도 재즈 못지않게 심각한데 클래식 앨범 판매량도 1.4%로 재즈 쪽과 사정이 같다.)이는 또한 종교 음악(3.1%), 라틴 음악(2.6%)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지는 치수이다. 강세는 역시 록 (29%)와 R&B/힙합 (17.2%), 팝 (14.9%), 컨트리 음악(11.2%)이었다.

미국에서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는 의미심장한 보고서로 1999년 비평가 윌리아드 제킨스의 아티클을 들 수 있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아야 하고 정규 교육에서 재즈를 보다 광범위하게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비평가 스튜어트 니콜슨은 도발적인 제목의 ‘재즈는 죽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재즈의 중심이 미국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예술 보호에 힘쓴다고 기대되는 유럽으로 이동하는 것이 재즈의 미래를 봤을 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니콜슨은 또 현재 미국의 재즈 교육이 40년대 후반의 모던 재즈 언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이 변화해야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역설한다. ‘링컨 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총감독인 윈튼 마샬리스가 니콜슨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클은 비평가 티치 아웃의 2009년 ‘월 스트리트 저널’ 기고문 ‘재즈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국의 위대한 예술 형식의 청중이 사라져가고 있다’일 것이다. 저자는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우려하며 재즈 프로듀서와 연주자들이 젊은 청중을 끌어들일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즈 청중의 감소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른바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재즈 청중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의 재즈 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95년을 전후로 재즈 청중이 반짝 늘었다가 사그라진 상태이다.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법은 글 말미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재즈를 듣는가? 왜 들어야하는가?


우리는 왜 재즈를 들어야 하는가? 


이제 나의 주장을 하겠다. 당신은 왜 재즈를 듣는가? 당신은 왜 재즈 앨범을 사고 <재즈피플>을 구독하는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다. 본인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는 일, 그리고 그 이유가 널리 퍼지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재즈 청중도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음악은 본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니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그 음악이 쉽게 좋아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칫하다가는 막연한 저항감에 휩싸인다.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이 들어오면 우리의 뇌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재즈가 난해해서 다가오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사람에게 오픈 마인드하고 그 저항감, 내면의 요동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팬, 재즈 소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앤드리슨 이론의 예술 수용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보았다. 재즈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정신이 자라고 영혼이 풍만해지는 경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영혼의 충만함. 내가 재즈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1단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이제 나는 재즈를 들어보겠다)

2단계) 앨범을 사던 공연을 보던 들으려는 ‘시도’ (재즈를 소비하겠다) 

  - A. 저항감이 덜한 음악 시도 B. 도전의 음악.

3단계) 오픈 마인드 (그 음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4단계) 받아들이기 (그 음악을 온전히 깊게 느끼려 노력하고 수용하기)

5단계) 확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만족감, 음악에 대한 만족감, 다시 들어야 하겠다는 확신)


1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활 양식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특유의 쿨한 이미지 때문에 재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서 접했던 사운드 트랙이 좋아서 재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릴렉스 하기 위해 재즈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 짓기>(1979)에서 광범위하게 소개된 바와 같이 문화 계급 상승을 위해 재즈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부르디외는 <구별 짓기>에서 소비와 생활 양식에서 선호, 취향, 관행이 특정 직업과 계급 진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례로 재즈를 등장시켰다.)

일단, 1단계로 진입하면 2단계 - 공연을 보고 앨범을 사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2단계부터는 사회경제학적 변수가 등장한다. 공연을 보고 앨범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어떤 앨범, 어떤 공연이 적절한지 정보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단계를 즐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방대한 재즈 명반의 양에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구입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내 정신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저항감이 덜한 음악을 편하게 구입할 것.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훌륭한 재즈 작품 중에서 듣기에 난해한, 도전이 필요한 음악을 구입할 것. 도전이 필요한 음악은 우리를 훈련하게 해주고 귀를 섬세하게 길들여 준다. 여러 음식을 맛보아야만 미각이 발달하듯 도전적인 음악은 내 귀를 발전시킬 수 있다. 저항감이 덜한 편한 음악(상당수의 명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은 디저트와 같은 것이다. 저항감이 덜한 음악만 들으면 듣는 수준이 발전하기 어렵다. 왜 굳이 듣는 수준을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본 칼럼 ‘재즈 탐미’를 쓰는 탐미주의자로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 맛의 범위를 넓혀야 쾌락이 극대화된다고. 위의 다섯 단계 모두는 따지고 보면 인간의 욕망 충족 단계와 같은 것이다. 나의 정신적 쾌락의 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재즈를 소비하는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 ‘오픈 마인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뿐, 음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애써 분석할 필요는 없다. 오직 오픈 마인드와 집중. 두 가지면 충분하다. 나를 도전하게 하는 음악을 존중하는 습관을 지녀 본다. 그만큼 내 정신과 마음이 자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운드 자체의 질감과 칼러에 집중하고 연주되는 곡 안에서의 뮤지션 쉽도 감지해 본다. 어떤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고 영혼을 느껴 본다. 오픈 마인드를 했다면 4단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마지막, 확신의 단계에 들어서면 깊은 만족감과 영혼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귀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사운드를 통한 만족감이 반복되면 진정 예술의 묘미의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지고 못 하고 퇴보하기도 하고 3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여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5단계까지 충족되면 매번 이 단계는 재즈를 대할 때마다 반복되고 그 충만함도 골이 깊어진다.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재즈 매니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 청중의 확대를 위해선 이러한 재즈 매니아들의 적극적인 음악 추천도 필요하다. 재즈 매니아는 잠재적인 재즈 청취자들의 좋은 모델이자 전도사이다. 공연장에 그들의 연인이나 친구, 가족을 데려갈 수도 있는 안내자가 된다. 재즈 비평가는 아니지만, SNS나 블로그를 통해 자유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추천할 수 있고 이는 재즈계에 좋은 활력이 된다.


청중 확대를 위한 고민, 카네기홀 예술감독과 함께. 


2014년 2월 나는 뉴욕의 한 프라이빗 모임에서 저녁을 먹으며 카네기홀 총책임자인 클라이브 길린슨 예술감독과 클래식과 재즈 음악의 미래에 관해서 허심탄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날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이날 모임 후 길린슨 예술 감독이 기획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전 주에는 키쓰 자렛의 솔로 공연을 카네기 홀에서 감상했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 공연은 훌륭했지만, 객석은 텅 빈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키쓰 자렛 솔로 공연은 매진이었다. 카네기 홀 정문에 서서 ‘티켓 구함’을 사인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을 정도였다. 길린슨 예술 감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 보다 키쓰 자렛 한 사람의 솔로 공연이 카네기 홀 입장에서는 더 큰 수익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명성과도 걸맞고 품격있는 키쓰 자렛과 같은 재즈 스타가 있으니 재즈계는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재즈나 클래식 음악 소비가 높았던 과거에는 음악 비평가들의 역할도 중요했고 신뢰도 엄청났다. 비평가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된다 치면 가차 없이 찍어 내려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린슨 감독은 비평가는 잠재적 음악 애호가를 고려하여 논하는 음악에 대해 적절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비평은 비평다워야 하지만 청중을 성장시키기 위해 적절하게 그런 무기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론은 이러했다. 음악비평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음악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음악 애호가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요지를 잘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글에는 분명한 주제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감상문이어서는 안된다. 예술 감독으로서 길린슨 씨가 실천하고 있듯 청중에게 익숙한 음악,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도전적인 공연을 올리고 때론 키쓰 자렛의 공연을 기획하는 것처럼 수익 창출과 변신을 꿰하는 능력도 청중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재즈 매니아, 기획자, 연주자, 교육자, 비평가 각자 모두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는 훌륭한 재즈 잡지와 비평가와 연주자와 매니아들이 존재한다. 거품일지언정, 일시적일지언정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점잖게 앉아 비싼 값을 치르며 재즈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9월 19일, 보스턴 레가터 바에서 열린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 공연. 이달 상당수의 청중들이 60대 이상 노년층이었다.>



< 2014년 넬슨 리서치가 조사한 2013년 장르별 앨범 판매량>




2014년 초, 카네기홀 예술 총감독 클라이브 길린슨씨와 함께 음악 청중 확대에 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월간 재즈피플 2015년 3월호-

posted by jazzlady

1943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듀크 엘링턴의 “Black, Brown and Beige”가 초연되던 날.


어느덧 밤 열두 시. 사람들이 일제히 문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1월의 야심한 토요일, 거리로 쏟아진 일련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수군거렸다.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듣고 나온 거지?” 좀 전까지 카네기 홀의 청중이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세 시간을 넘긴 참으로 긴 공연이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도 있었지만 몇몇 곡은 몹시 길고 내용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월요일 아침,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신년을 맞아 카네기 홀이 야심 차게 준비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 공연이 총체적인 실패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허세로 가득 찬 음악, 조잡하고 산만한 음악, 지루하고 요점 없는 음악……평론가 상당수가 이런저런 매체에 혹평했다. 백인의 세계에서 오롯이 빛났던 검은 천재, 당대 최고의 재즈 스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더없이 혹독한 비판이었다. 듀크 엘링턴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45분짜리 대작 “Black, Brown and Beige”가 세상에 처음 공개된 이 날, 댄스 홀을 벗어나 인생 처음으로 카네기 홀 무대에 섰던 이 날, 듀크 엘링턴에게 1943년 1월 23일 이날은 최악의 매서운 날로 기록되려 하고 있었다.

Black, Brown and Beige는 아메리칸 흑인의 애환을 담은 긴 오케스트라 작품을 만들겠다는 듀크의 염원으로부터 출발한다. 듀크는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들어오면서 시작된 아메리칸 흑인의 역사를 Black / Brown / Beige 라 명명된 세 개의 악장에 나누어 담았다. 1930년대 스윙 시대를 이끌어온 주역이었지만 듀크는 일개 밴드 리더나 송 라이터가 아닌,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에 비견될 만한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파퓰러 작곡가로 출발해 큰 무대에서 뜻을 펼치고 평단의 인정을 받은 조지 거슈인처럼 듀크는 흑인 작곡가로서 흑인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점치는 음악적 예지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이를 위한 듀크의 첫 도전은 이미 1931년 Creole Rhapsody로 시작되었다. 단편 영화로도 나온 Symphony in Black (1934년), 어머니의 사망 후 예술적인 자각에 힘입어 완성된 Reminiscing in Tempo(1935년)도 그 일환이었다. 특히 네 개 파트로 이루어진 Reminiscing in Tempo은 78rpm 두 장에 나누어 담길 만큼 긴 작품이었다. 그러나 듀크의 예술적 시도는 번번이 평단의 외면을 받았다. 댄스 홀에서는 거물로 인정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 듀크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작곡가에 불과했다. 듀크를 코튼 클럽에 연결해주고 재즈의 스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매니저 어빙 밀러도 Reminiscing in Tempo가 발매된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듀크와 멀어졌다. 어빙 밀러는 듀크와 재정적으로 반반의 수익을 나누어 갖기로 계약된 관계였고 악보 출판업자로서 듀크의 작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밀러가 보기에 Reminiscing in Tempo와 같이 복잡한 긴 오케스트라 작품 따위가 수익을 안겨줄 리 만무했다. 결국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두번 째 유럽 투어 길에 오른 1939년 듀크와 어빙은 완전히 결별한다. 

1942년, 듀크 엘링턴의 새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카네기 홀 무대에 올릴 긴 작품을 만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듀크는 전율했다. 클럽 청중의 입맛에 맞춘 댄스곡이 아닌 진정한 예술 작품을 작곡할 명분이 주어진 것이었다. 1943년 1월 23일 토요일, 카네기 홀은 전쟁 중인 러시아 주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위해 특별한 신년 콘서트를 발표한다. 흑인 재즈 작곡가를 위한 최초의 무대. 아카데믹하고 섬세한 청중이 기다리는 카네기홀 입성을 위해 듀크는 고도의 몰입으로 작품에 매진한다.

1943년 1월 역사적인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 홀 데뷔 공연은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음반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장의 LP로 차곡차곡 담긴 그 날의 무대를 반세기 이상 흐른 지금에 와서 듣노라면 그저 감개무량하고 감사할 뿐이다. 듀크 엘링턴의 멘트는 침착을 가장하지만 다소 격양되어 있다. 그가 이날을 위해 작곡한 A Tone Parallel to the History of Negro in America라는 부제가 달린 흑인의 서사시 <Black, Brown, Beige>는 매 악장이 연주될 때마다 그 의미에 대해도 설명되었다. 흑인의 고난을 다룬 22분짜리 1악장 “Black”. 강한 베이스 라인은 흑인의 비극을 암시한다. 12분 50초 부분에서 등장하는 조니 호지스의 처연한 색소폰 솔로는 다름 아닌 Come Sunday이다. 비통에 찬 이 극도로 아름다운 멜로디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간판 멤버 조니 호지스를 위해 작곡한 곡이었다. 아름답고 슬픈 Come Sunday가 끝나면 다소 혼란스러운 새로운 국면의 리듬과 멜로디로 악장이 채워져 간다. Come Sunday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공연 후 가장 혹평이 쏟아졌던 첫 악장에 대한 평가를 일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산만함에 대한 지적은 그릇되다 할 수 없다. 짧은 곡들이 꼬리를 물며 등장하기에 전체적인 조화나 통일성을 찾기가 어려운 면도 분명 보인다. 그러나 평론가 헨리 사이먼의 혹평은 과도하다 “1악장 Black이야말로 거의 망가진다. 2악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분산되면서 망가진다”라고 썼다. 월드 텔레그램 신문은 “너무 길다, Black, Brown and Beige를 가지고 24개의 짧은 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을 심포니로 만들어놓았다.” 뉴욕 포스트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데 쓸데없이 45분이나 걸렸다”고 비아냥거렸다. “과연 듀크가 오케스트라 작품을 쓸 능력이 되는가? 듀크가 재즈를 버렸는가?” 따위의 힐난은 새해 벽두부터 듀크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무엇보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폴 바울스의 리뷰는 직격탄이었다. 듀크는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한동안 작곡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듀크 엘링턴은 악장이 시작되기 전에 거창한 내용에 관해서 설명을 했지만 결국 속된 댄스 음악과 기교 부리는 솔로가 내용의 전부였다. 조잡스러운 원곡을 조잡스럽게 인용했다. 전체의 곡 진행을 방해하는 반복적인 클라이맥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심포니를 흉내 내지만 템포는 들어 맞지 않는다. 템포를 방해하려는 위험한 성향이 무척이나 많이 보인다. 규칙적인 비트가 없다면 싱코페이션도 없을 수밖에 없고 텐션도 없으며 결국 재즈도 없다. 

재즈를 예술 음악(클래식)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재즈와 클래식은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르게 존재하며 둘 다 동시에 초점을 맞추기 힘들다. 재즈와 클래식은 다른 주파수로 존재하는 음악이다. 조율은 불가능하다.”

듀크의 꿈, 듀크의 소명.

모두가 희망을 말하는 신년, 그래서인지 나도 2016년 첫 호부터 누군가의 실패와 절망을 다루는 것이 유감스럽다. 신년 벽두부터 상심에 가득 찬 사람이 다름 아닌 영화배우처럼 근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신사 듀크 엘링턴이라는 점이 애석하다. 그는 카네기 홀에서 화려하게 데뷔식을 치르고 진정한 현대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는 위치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24년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가 그러했듯 그 누구의 영향이 아닌 오직 블랙 스윙의 요소로 훨씬 젊은 나이에 예술적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듀크 엘링턴은 1936년 7월 다운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음악적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숲 속에서 스윙하며 흔들거리는 덩굴의 소리를 아직 잡아본 적이 없어요. 그 덩굴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며 나뭇잎을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가볍게 스칠 때의 그 순간을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음악 역사의 획기적인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듀크 엘링턴은 화려한 무대 매너와는 달리 매우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다정다감하고 시적이었으며 혼자 고민하기를 즐겼고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지만 특별히 누군가와 깊게 지내지는 않았다. 문학적이었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20년 장기 단원들이 있는 이유도 그의 좋은 성품 탓도 한몫했다. 그는 자존심이 셌지만 느긋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네기 홀 공연의 혹평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서서히 스스로 치유를 해 나갔다. 그를 믿고 의지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책임도 있었다. 듀크는 빌리 스트레이혼이라는 젊고 유능한 작곡가와 재능있는 단원들이 있었다. 빌리 스트레이혼은 Take A Train 곡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선사한 듀크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듀크 엘링턴은 Black, Brown and Beige에 대한 평단의 혹평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판의 요소들을 면밀히 살펴 그 곡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보통 작곡가라면 그저 내버려둔 채 후세의 다른 평가를 기대할 법도 한데 듀크는 가슴을 후벼 파는 비난을 수용하면서 일일이 고쳐나갔다. “조잡한 짧은 곡들의 긴 나열”이라는 부분을 깊게 염두에 두었다. 듀크는 곡의 구성에 큰 변화를 줬다. 조화로움을 위해 Come Sunday의 멜로디를 주제로써 극대화하였다. 이윽고 1958년, 듀크 엘링턴은 십 오 년 전 카네기 홀 무대에 올랐던 Black, Brown and Beige 새로이 각색하여 녹음하게 된다.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Black, Brown and Beige>(Columbia-CS 8015)는 Part I (Work Song - Full Orchestra) - Part II (Come Sunday Instrumentally) - Part III (Work Song And Come Sunday) - Part IV (Come Sunday) - Part V (Come Sunday Interlude) - Part VI (23rd Psalm)로 전격구성되었다. 초연 당시 조니 호지스의 솔로로 연주된 Come Sunday는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로 부활했다. 조니 호지스가 로맨틱하고 처연하게 Come Sunday를 연주했다면 마할리하 잭슨은 파워풀한 가스펠로 신을 향한 애절한 기도를 담았다. 

1958년의 < Black, Brown and Beige>는 50년대 초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침체기를 벗어나 이들의 부활을 알렸던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 직후 야심차게 추진된 것이었다. 50년대 초반, 듀크 엘링턴은 큰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조니 호지스, 로렌스 브라운, 소니 그리어 등 주요 멤버들이 밴드를 떠났고 청중은 로큰롤이나 프랑크 시내트라와 같은 보컬 음악으로 쏠렸다. 게다가 듀크는 한 매체의 잘못된 인용으로 큰 낭패를 봤다. 듀크가 흑백인종 분리정책에서 흑인이 벗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이 말은 흑인의 공분을 샀고 흑인 청중이 듀크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출연을 계기로 명실상부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권위가 회복되었다고 평가되지만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의미의 듀크 재탄생은 바로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에 기인한다. 이 앨범 속에는 듀크가 바랐던 음악적 소명, 쓰라렸던 1943년, 실패와 좌절 그리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니까 말이다. 1958년 앨범<Black, Brown and Beige>은 온전히 평가받았으며 비로소 위대한 작곡가 듀크 엘링턴의 지위를 확고히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60-70년대에 발표된 스피리츄얼한 <Sacred Concert>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 

듀크가 바르톡처럼 스트라빈스키처럼 조지 거슈윈처럼 인정받으려 했던 욕망은 결코 허세로 치부될 수 없다. 덩굴의 미세한 스윙,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고 싶다는 그의 말, 그 시절 그 누구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순수하고 내밀한 그의 감성이 만들어낸 그 시절 그 누구도 쉽게 꿈꿀 수 없는 아름다운 소망이었다.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1977 발매된 1943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1943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사진설명

1. 1943년 1월 23일. 듀크 엘링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 포스터

2. 1977년 발매된 1943년 카네기홀 데뷔 공연 실황 앨범 The Duke Ellington Carnegie Hall Concerts: January 1943 (Prestige – P-34004)

3. 1958년 <Black, Brown and Beige>녹음 중인 듀크 엘링턴과 마할리아 잭슨

4. 마할리와 잭슨과 듀크 엘링턴을 커버로 한  <Black, Brown and Beige>앨범 (Columbia-CS 8015)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