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재즈를 들어야하는가?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며


지난 여름 서울의 한 재즈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청중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십수 년 전 그곳은 분명 중년층들 대다수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날 본 청중은 대부분이 20대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상당수가 몇 시간 전 처음 맞선 본 사람처럼 격식을 갖춘 옷차림으로 데이트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무대를 바라보며 음식을 주문하고 칵테일이나 와인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솔로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괄 박수를 쳤고 파트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날 특별히 시간을 내어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그들 나이 또래의 연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 나는 그곳 청중이 어떤 이유나 계기로 왔는지를 떠나서 먼저 그들의 젊음이 새삼스러웠다. 설령 재즈 클럽을 찾는 이유가 재즈라는 음악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본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재즈를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즈를 소비하는 사람, 재즈를 소비하는 청중. 재즈팬의 한 사람으로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재즈를 들으러 즐겨 방문하는 보스턴 혹은 뉴욕의 공연장이나 재즈 클럽은 상당수의 청중이 중장년층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의 보스턴 레가터 바 공연에선 청중의 70%가 60대 이상이었다. 그 이상의 노인들도 대단히 많았다. 느닷없이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존 스코필드는 일렉트릭 기타로 퓨전 재즈계의 거목이 된 연주자니 만큼 젊은 청중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와 로바노가 나란히 무대에선 건 2008년 이후 7년 만이었으니 귀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러 온 것은 대부분 옛날 팬들,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팬들이었다. 63세의 존 스코필드와 62세의 조 로바노, 그들은 [Past Present] 앨범 출시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노인 청중 앞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미국의 많은 재즈 비평가들이 재즈 청중의 감소를 우려하고 있고 그 현상으로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지적하고 있다. 1987년 미국 정부의 ‘재즈는 미국의 유산’이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재즈는 미국에서 죽어가는 예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즈의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청중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듀크 엘링턴과 데이브 브루백이 타임 표지를 장식하곤 했던 1950년대였다.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30~40년대를 풍미했던 듀크 엘링턴은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입장에서 구세대 연주자일지언정 변화를 모색하고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새로운 청중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Kind of Blue]를 발표하고 데이브 브루백이 [Time Out]을 발표했던 1959년은 얼마나 찬란했던 한 해였던가? 어디서나 재즈가 들리고 누구나 재즈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곧 재즈의 시대는 갔고 록의 시대가 열렸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베스트셀링 연주자, 재즈의 거장도 시대에 발맞추어 록을 차용했다. 찰스 밍거스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를 버렸다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재즈 연주자들은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즈의 파격적인 스타일 변화 역시 재즈의 긍정적인 면모이고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재즈를 보여주는 양상이었다. 

최근의 몇몇 통계는 미국에서조차 재즈가 일부 매니아의 장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국립 예술 기금(NEA)의 미국 국민들의 예술 참여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SPPA, Survey of Public Participation in the Arts)를 보면 2008년 한 해 동안 한 차례 이상 재즈 공연을 봤다고 응답한 성인은 7.8%에 불과했고 이는 2002년 10.8%에 비해 3% 줄어든 수치였다. 재즈 청중의 평균 연령은 1982년에 29세였음에 비해 2008년에는 평균 연령이 46세로 크게 높아졌다. 재즈 청중의 노령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중장년층 중에서도 매년 재즈를 소비하는 비율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45세에서 54세 사이의 성인 중 재즈 공연을 보는 비율은 2002년 13.9%에서 2008년엔 9.8% 줄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30%나 감소한 수치이다.

2014년 넬슨 리서치의 앨범 시장 조사는 재즈 청중의 급격한 감소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넬슨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한해 미국 전체 인구의 1.4%만이 재즈 앨범을 소비했다. (클래식 음악 청중 감소도 재즈 못지않게 심각한데 클래식 앨범 판매량도 1.4%로 재즈 쪽과 사정이 같다.)이는 또한 종교 음악(3.1%), 라틴 음악(2.6%)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지는 치수이다. 강세는 역시 록 (29%)와 R&B/힙합 (17.2%), 팝 (14.9%), 컨트리 음악(11.2%)이었다.

미국에서 재즈 청중 감소를 우려하는 의미심장한 보고서로 1999년 비평가 윌리아드 제킨스의 아티클을 들 수 있다. 그는 재즈가 클래식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아야 하고 정규 교육에서 재즈를 보다 광범위하게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비평가 스튜어트 니콜슨은 도발적인 제목의 ‘재즈는 죽었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재즈의 중심이 미국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예술 보호에 힘쓴다고 기대되는 유럽으로 이동하는 것이 재즈의 미래를 봤을 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니콜슨은 또 현재 미국의 재즈 교육이 40년대 후반의 모던 재즈 언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이 변화해야 재즈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역설한다. ‘링컨 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총감독인 윈튼 마샬리스가 니콜슨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클은 비평가 티치 아웃의 2009년 ‘월 스트리트 저널’ 기고문 ‘재즈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국의 위대한 예술 형식의 청중이 사라져가고 있다’일 것이다. 저자는 재즈 청중의 노령화를 우려하며 재즈 프로듀서와 연주자들이 젊은 청중을 끌어들일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즈 청중의 감소는 비단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른바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재즈 청중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의 재즈 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도 95년을 전후로 재즈 청중이 반짝 늘었다가 사그라진 상태이다.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법은 글 말미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재즈를 듣는가? 왜 들어야하는가?


우리는 왜 재즈를 들어야 하는가? 


이제 나의 주장을 하겠다. 당신은 왜 재즈를 듣는가? 당신은 왜 재즈 앨범을 사고 <재즈피플>을 구독하는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다. 본인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깨닫는 일, 그리고 그 이유가 널리 퍼지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재즈 청중도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음악은 본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니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그 음악이 쉽게 좋아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칫하다가는 막연한 저항감에 휩싸인다.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이 들어오면 우리의 뇌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재즈가 난해해서 다가오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사람에게 오픈 마인드하고 그 저항감, 내면의 요동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팬, 재즈 소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앤드리슨 이론의 예술 수용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보았다. 재즈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정신이 자라고 영혼이 풍만해지는 경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영혼의 충만함. 내가 재즈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1단계) 무관심에서 관심으로(이제 나는 재즈를 들어보겠다)

2단계) 앨범을 사던 공연을 보던 들으려는 ‘시도’ (재즈를 소비하겠다) 

  - A. 저항감이 덜한 음악 시도 B. 도전의 음악.

3단계) 오픈 마인드 (그 음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4단계) 받아들이기 (그 음악을 온전히 깊게 느끼려 노력하고 수용하기)

5단계) 확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만족감, 음악에 대한 만족감, 다시 들어야 하겠다는 확신)


1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생활 양식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특유의 쿨한 이미지 때문에 재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서 접했던 사운드 트랙이 좋아서 재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릴렉스 하기 위해 재즈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 짓기>(1979)에서 광범위하게 소개된 바와 같이 문화 계급 상승을 위해 재즈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부르디외는 <구별 짓기>에서 소비와 생활 양식에서 선호, 취향, 관행이 특정 직업과 계급 진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례로 재즈를 등장시켰다.)

일단, 1단계로 진입하면 2단계 - 공연을 보고 앨범을 사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2단계부터는 사회경제학적 변수가 등장한다. 공연을 보고 앨범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어떤 앨범, 어떤 공연이 적절한지 정보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단계를 즐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방대한 재즈 명반의 양에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구입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내 정신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저항감이 덜한 음악을 편하게 구입할 것.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훌륭한 재즈 작품 중에서 듣기에 난해한, 도전이 필요한 음악을 구입할 것. 도전이 필요한 음악은 우리를 훈련하게 해주고 귀를 섬세하게 길들여 준다. 여러 음식을 맛보아야만 미각이 발달하듯 도전적인 음악은 내 귀를 발전시킬 수 있다. 저항감이 덜한 편한 음악(상당수의 명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은 디저트와 같은 것이다. 저항감이 덜한 음악만 들으면 듣는 수준이 발전하기 어렵다. 왜 굳이 듣는 수준을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본 칼럼 ‘재즈 탐미’를 쓰는 탐미주의자로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운드에 대한 이해, 맛의 범위를 넓혀야 쾌락이 극대화된다고. 위의 다섯 단계 모두는 따지고 보면 인간의 욕망 충족 단계와 같은 것이다. 나의 정신적 쾌락의 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재즈를 소비하는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 ‘오픈 마인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뿐, 음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애써 분석할 필요는 없다. 오직 오픈 마인드와 집중. 두 가지면 충분하다. 나를 도전하게 하는 음악을 존중하는 습관을 지녀 본다. 그만큼 내 정신과 마음이 자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운드 자체의 질감과 칼러에 집중하고 연주되는 곡 안에서의 뮤지션 쉽도 감지해 본다. 어떤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고 영혼을 느껴 본다. 오픈 마인드를 했다면 4단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마지막, 확신의 단계에 들어서면 깊은 만족감과 영혼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귀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사운드를 통한 만족감이 반복되면 진정 예술의 묘미의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지고 못 하고 퇴보하기도 하고 3단계로 나아가지 못하여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5단계까지 충족되면 매번 이 단계는 재즈를 대할 때마다 반복되고 그 충만함도 골이 깊어진다.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재즈 매니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 청중의 확대를 위해선 이러한 재즈 매니아들의 적극적인 음악 추천도 필요하다. 재즈 매니아는 잠재적인 재즈 청취자들의 좋은 모델이자 전도사이다. 공연장에 그들의 연인이나 친구, 가족을 데려갈 수도 있는 안내자가 된다. 재즈 비평가는 아니지만, SNS나 블로그를 통해 자유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추천할 수 있고 이는 재즈계에 좋은 활력이 된다.


청중 확대를 위한 고민, 카네기홀 예술감독과 함께. 


2014년 2월 나는 뉴욕의 한 프라이빗 모임에서 저녁을 먹으며 카네기홀 총책임자인 클라이브 길린슨 예술감독과 클래식과 재즈 음악의 미래에 관해서 허심탄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날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이날 모임 후 길린슨 예술 감독이 기획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전 주에는 키쓰 자렛의 솔로 공연을 카네기 홀에서 감상했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 오케스트라 공연은 훌륭했지만, 객석은 텅 빈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키쓰 자렛 솔로 공연은 매진이었다. 카네기 홀 정문에 서서 ‘티켓 구함’을 사인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을 정도였다. 길린슨 예술 감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 보다 키쓰 자렛 한 사람의 솔로 공연이 카네기 홀 입장에서는 더 큰 수익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명성과도 걸맞고 품격있는 키쓰 자렛과 같은 재즈 스타가 있으니 재즈계는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재즈나 클래식 음악 소비가 높았던 과거에는 음악 비평가들의 역할도 중요했고 신뢰도 엄청났다. 비평가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된다 치면 가차 없이 찍어 내려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길린슨 감독은 비평가는 잠재적 음악 애호가를 고려하여 논하는 음악에 대해 적절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비평은 비평다워야 하지만 청중을 성장시키기 위해 적절하게 그런 무기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론은 이러했다. 음악비평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음악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음악 애호가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요지를 잘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글에는 분명한 주제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감상문이어서는 안된다. 예술 감독으로서 길린슨 씨가 실천하고 있듯 청중에게 익숙한 음악,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도전적인 공연을 올리고 때론 키쓰 자렛의 공연을 기획하는 것처럼 수익 창출과 변신을 꿰하는 능력도 청중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즈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재즈 매니아, 기획자, 연주자, 교육자, 비평가 각자 모두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는 훌륭한 재즈 잡지와 비평가와 연주자와 매니아들이 존재한다. 거품일지언정, 일시적일지언정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점잖게 앉아 비싼 값을 치르며 재즈 클럽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9월 19일, 보스턴 레가터 바에서 열린 존 스코필드와 조 로바노 쿼텟 공연. 이달 상당수의 청중들이 60대 이상 노년층이었다.>



< 2014년 넬슨 리서치가 조사한 2013년 장르별 앨범 판매량>




2014년 초, 카네기홀 예술 총감독 클라이브 길린슨씨와 함께 음악 청중 확대에 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월간 재즈피플 2015년 3월호-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