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클래식, 두 연인을 한번에 얻은 행복한 사나이.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를 그리며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Gunther Schuller (1925. 11. 22 ~ 2015. 6. 21)


드러머 조지 슐러를 처음 본 것은 색소폰 연주자 리 코니츠와 연주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이햇을 두드리며 무심히 청중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하도 깊고 강렬해서 그 눈은 세트에 더해진 하나의 드럼 심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형형색색 조약돌이 한데 부딪히듯 밀도 있고 섬세한 멜로딕 드러밍에 취해버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연주는 오십이 넘은 재즈 연주자들의 무르익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2년 전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 추모 세미나에서 조지 슐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 재즈의 현주소에 관한 그의 역동적인 연설에 전율했다. 조지의 연설은 이 시대 위대한 작곡가 건서 슐러가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협회에서의 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부전자전이구나....그날 비로소 나는 조지가 풍겼던 ‘사뭇 다른 느낌’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슐러가(家)에 흐르는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마일스 데이비스의 정신과 그들 혈통에 내려오는 음악 유전법칙의 외연이었음을.

지난 6월 21일 건서 슐러가 훌륭한 두 연주자 아들, 조지와 에드를 남기고 8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에 나는 슐러를 통해 연구해야 할 음악 계보학이 얼마나 방대한지 그리고 그 작업에 매료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 그는 생전에 200여 곡을 작곡했고 재즈와 클래식이라는 이중 살림을 꾸렸으며 두 장르를 혼합하여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 이라고 불렀다.

건서 알랙산더 슐러는 1925년 11월 22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1936년까지 독일에서 사립 학교를 다녔고 뉴욕으로 건너와 중학교를 마쳤다. 아버지는 뉴욕 필하모닉의 바이올린주자였다. 어려서 프렌치 혼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슐러는 불과 열다섯 살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대타로 연주했으며 열여섯에는 신시네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린치 혼 주자로 발탁되었다. 클래식 분야 촉망받는 연주자였지만 그 시절 슐러는 재즈에 푹 빠져있었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듀크 엘링턴의 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에게 듀크 엘링턴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이라고 말하자 그는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셨다. 엘링턴이 베토벤만큼 위대하다는 발상은 클래식 세계에서는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


Birth of the Cool 녹음으로 전설을 만들다.


재즈를 향한 슐러의 애정은 재즈 연주자들과의 교류를 이끌었다.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젊은 백인의 뉴욕 필하모닉 혼 주자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었다. 1949년 초 9인조 빅밴드라는 야심찬 구성으로 쿨 재즈의 탄생을 알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역작 <Birth of the Cool>에 건서 슐러가 프렌치 혼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은 주니어 콜린스의 대타로 슐러를 추천한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덕분이었다. 이날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될 예정인 Moon Dreams 곡이 까다로워서 녹음할 때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A토널로 연주되는 코다 부분은 여러 번의 리허설을 해도 악기 밸런스가 맞지 않고 리듬도 왔다갔다 했고 녹음을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녹음 시간을 남겨두고 곡이 포기되기 직전 슐러는 마일스에게 자신이 지휘를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Birth of the Cool 연주자들은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아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하는 슐러를 따르며 Moon Dreams의 녹음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슐러가 혼 부분에 집어넣은 손을 떼면 피치가 1/4음 올라가기 때문에 손을 혼에 넣을 수 없는 지휘 시에는 입술로 1/4음을 낮게 조정하며 불었다는 ‘슐러의 전설’이 전해진다. 사운드가 비슷한 어두운 저음 악기들의 구성, 비밥의 전성기였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이 9인조 컨셉은 클루드 톤힐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렇듯 슐러의 재즈 외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 뿐만 아니라 모던 재즈 쿼텟, 에릭 돌피, 찰스 밍거스, 오네트 콜맨, 짐 홀 등 최고의 임프로바이저들과 함께 작업했다. 

슐러의 ‘본바닥’ 클래식에서도 그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은 지속되었고 작곡가로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1956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뮤직 디렉터가 슐러의 곡 Music for Brass를 연주하였고 방송을 탔다. 서른살의 프렌치혼 연주자이자 천부적인 작곡가, 지휘자인 슐러에 대한 평단의 호평이 이어졌다. 사무엘 바버와 아론 코플란드등 위대한 현대 작곡가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슐러는 전도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클래식 세계에서 오롯이 섰다. 슐러의 뛰어난 작품들 중에는 서로 잘 결부시키지 않는 악기들의 조합, 또는 많이 쓰지 않는 악기들을 차용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초기 작품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In the Symphony for Brass and Percussion (1950)은 현악기나 관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1960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Spectra는 오케스트라를 7개 그룹으로 나누어 매 그룹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하고 혼합해서 들을 수도 있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다섯개의 혼을 위한 Five Pieces for Five Horns(1952), 네 개의 더블 베이스 작품(1947), 네 개의 첼로를 위한 작품(1958) 등 획기적인 작품들도 있다. 콘체르토도 20개 이상 작곡했는데 더블 베이스가 솔로를 하는 콘체르토(1968), 콘트라바순(1978), 알토 색소폰(1983) 등 상대적으로 드물게 등장하는 악기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슐러는 거칠고 독특한 작품 외에도 한편의 시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도 많았다. 92년에 사망한 아내 마조리에게 바치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1993)이나 챔버곡 Impromptus and Cadenzas(1990)는 거친 하모니가 예측하기 어려운 무드와 톤의 변화에 따라 따듯한 느낌을 주는 멋진 곡들이다. 슐러는 Of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로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슐러의 평생에 걸친 야심은 클래식과 재즈의 따로 살림을 합치는 것이었다. 1957년 무렵부터 슐러는 클래식과 재즈의 결합을 스스로 ‘써드 스트림(The Third Strea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재즈 클럽에 콘서트홀을 들여놓고 콘서트홀에 재즈 클럽을 옮겨다 놓을 작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을 화나게 했다. 촉망받는 작곡가에게 비판이 이어졌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이 나에게는 논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이런 두 장르의 위대한 음악이 서로 나누어져 있고 얘기도 안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대 쪽을 욕하고 있으니 나는 합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재즈와 클래식을 결혼시킬 유능한 사람들을 물색했다. 같은 목표를 위해 제자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를 합류시켰다

“써드 스트림 운동은 서로 다른 취향의 작곡가, 연주가, 임프로바이저들을 같이 일하게 하고 여러 다른 장르의 음악을 결혼시키는 일이다. 이 운동이 멜팅팟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써드 스트림 개념으로 청중에게 다가간 중요한 기점은 써클 인 더 스퀘어 씨어터에서 컨템포러리 스트링 쿼텟, 빌 에반스 트리오, 배리 갈브레쓰, 에릭 돌피, 오네트 콜맨 등이 함께 슐러의 써드 스트림 작품이 선보였던 1960년 5월 17일이었다. 슐러는 써드 스트림 개념을 반영시킨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써드 스트림에 주력하면서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를 실감했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끝내고 밤새 작곡을 하는 등의 연주와 작곡이 병행되는 생활을  십오년 이상 지속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스케쥴이 계속되자 그는 과감히 프렌치혼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연주자의 생활이 사라지자 그는 저술과 교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혼 주자들의 교과서 격이자 92년도에 재판된 <혼 테크닉>(1962)이 나온 것도 이맘때였다. 1963년에는 카네기 홀의 새 음악 시리즈인 <20세기 이노베이션>을 기획 감독했다. 그 해 여름에는 ‘탱글우드’ 대리 학과장으로, 65년에는 정식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70년부터 84년까지는 클래식, 재즈 음악의 전당인 버슈어 뮤직 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다. 세계적인 음악제 탱글우드에서 건서 슐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84년 탱글우드의 모든 직에서 은퇴한 후 아이다호주 샌드포인트의 여름 페스티벌을 시작했고 미국내 여러 앙상블과 교류하면서 클래식과 재즈 오케스트라들의 게스트 컨닥터와 디렉터를 맡았다. 1950년도에 맨해튼 스쿨 어브 뮤직에서 시작되었던 교육 경력은 예일 대학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음악 대학인 권위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7년이었다. 슐러는 NEC에 써드 스트림 전공을 만들고 이후 총장 재직 10년 동안 재즈와 써드 스트림 음악을 NEC의 주력 분야로 키워냈다. 써드 스트림 과(科)의 학장은 슐러의 제자이자 동료인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였다.

건서 슐러 이전에도 조지 거슈인, 라벨, 바르톡 등 여러 작곡가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지만, 건서 슐러의 위대함은 재즈-클래식 결합을 개인의 작업을 넘어서 ‘써드 스트림’이라는 음악계에 하나의 조류를 형성케 하였고 대학이라는 제도권 교육 안으로 써드 스트림을 가져와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재즈를 클래식과 학문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르로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 또한 클래식과 재즈, 두 장르의 음악을 완벽히 이해해야 훌륭한 써드 스트림 음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써드 스트림이란 재즈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클래식과 재즈의 전통의 비율을 반반으로 가장 좋은 혼합 상태로 만들어야한다. 재즈, 클래식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더 깊게 혼합될수록 더 좋은 써드 스트림이다. 나는 클래식에서 조금, 재즈에서 조금 섞는 얄팍한 교배를 싫어한다. 이상적인 써드 스트림을 만들려면 클래식과 재즈 각각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최고의 전통과 업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건서 슐러는 클래식 명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총장을 지내고 클래식 분야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정작 본인은 제도권 교육은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비록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 오케스트라에 합류했으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사사받는 스승을 두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자서전에서도 밝혔듯 그의 스승은 음악과 악보였다.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1980년 ‘전미 대학 작곡가 협회’ 연설을 통해 슐러는 공개적으로 독학에 대한 자부심을 처음 드러냈다. 음대 교육자들을 앞에 둔 이 아이러닉한 명연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슐러는 남들 하는데로 하기보다 튀는 성향이 짙었다. 항상 음악계에 대해 독설을 쏟았으며 청중을 향해서도 음악 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건서 슐러의 발언은 이율배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작곡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정작 본인은 청중을 잃어버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빠져있었다. 탱글우드 디렉터였던 79년에는 공부하러온 학생들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음악 노조 등 모든 음악인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너희들이 잘못해서 오늘날 연주자들의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무관심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슐러의 음악계를 향한 날센 비판은 그의 저서 <묵상: 건서 슐러의 음악 세계>(1986), <완벽한 지휘자>(1997) 등 그의 저서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건서 슐러는 독학으로 작곡을 터득했지만 음악 가계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지휘자였고 부친은 무려 42년간이나 뉴욕 필하모닉에서 연주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려서부터 악보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고 부친이 그의 멘토였다. 현악기 연주자보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프렌치 혼을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다. 77년도 뉴욕 타임즈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듯 음악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슐러에게는 진정 행운이었다.

건서 슐러가 창설했던 뉴잉글란드 음악원의 ‘써드 스트림’과는 몇 년 전 ‘컨템포퍼리 임프로비제이션’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다 재즈적인 느낌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학교측 설명이다. NEC에서 건서 슐러와 함께 써드 스트림을 일구었던 랜 블레이크 전 학장으로부터 본인은 물론 슐러 역시 명칭 변경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때 동거했던 재즈와 클래식의 한집 살림이 끝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비록 이름은 달라졌더라도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 배합을 추구했던 건서 슐러의 엄중했던 써드 스트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주자들은 물론 많은 청중이 어찌보면 클래식과 재즈라는 두 연인을 함께 얻기를 꿈꿔 왔기 때문이다.


써드 스트림의 창시자, 건서 슐러와 피아니스트 랜 블레이크(좌). 두 사람은 각각 총장과 학장 신분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써드 스트림'의 조류를 만들고 후학을 양성했다.



posted by jazzl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