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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Column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2 - 아폴로 극장을 빛낸 그녀들.

할렘의 한복판에서 재즈를 쫓다 2

아폴로 극장을 빛낸 그녀들.


(지난 호에 이어)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침침한 형광등 아래 표정없는 풍경과 퀴퀴한 실내 공기를 환희로 바꾸어주는 요인은 나에게 있어서는 Take The "A" Train 이였다.

You must take the "A" train

To go to Sugar Hill, way up in Harlem

If you miss the "A" train

You'll find you missed the quickest way to Harlem.


이 곡의 그 유명한 4 마디 인트로에 이어 "할렘의 슈거힐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A 트레인을 타는 것, 서둘러라, 서둘러…." 라 노래하는 엘라 핏제랄드의 경쾌한 음성을 떠올리면 핑거 스냅이 절로 나왔다. 춘천행 기차에서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아련해지듯, 소양강 댐 앞에서 '소양강 처녀'에 문득 미소가 번지듯 장소와 방향이 주는 여행의 감흥에는 음악이 한몫하기 마련이다.


(나는 할렘으로 가는 A 기차에 몸을 실은 채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대표곡 ‘Take The "A" Train’을 떠올렸다.)


블랙 뮤직의 중심, 아폴로 극장 앞에 도착했다. 극장 앞에는 행인들로 붐볐지만,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리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코튼 클럽과 비슷한 느낌의 낡고 색이 변한 붉은 카페트, 몇 장의 사진들과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 전용 극장처럼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식이나 관리가 잘 된 느낌은 없었다. 협소한 로비 중앙으로 나 있는 통로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이 홀로 앉아 있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은 매일 공연하지 않는다, 주말 혹은 아마추어 나잇이 있는 수요일에 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화를 원했다. 썰렁한 공기가 싫은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폴로 극장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곳은 50여 년 전 비틀즈가 미국에 가면 꼭 무대에 서리라 소망했던 바로 그곳, 아폴로였다. 마이클 잭슨이 데뷔했고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제럴드, 듀크 엘링턴, 사라 본, 잭슨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셀 수 없이 많은 유명 가수들이 섰던 소울, 록, 가스펠, 재즈, 블랙 뮤직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블랙 뮤직의 중심이었던 할렘의 아폴로 극장)


한때 내 기억에서 사라졌던 아폴로 극장을 되새기게 된 것은 실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지난 8월, 뉴욕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 제츠의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던 한 소녀. 그녀의 이름은 리에나 산타 아나였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2010년 아폴로 극장이 주최하는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던 패기있고 아리따운 소녀였던 것이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은 1934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재능있는 예비 스타를 뽑는 행사로 아메리칸 아이돌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츠라이프 스타디움에서의 리에나를 보면서 동시에 소녀 엘라 핏제럴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엘라 핏제럴드야말로 아폴로 극장의 원조 '내일의 스타'였기 때문이다. 엘라 핏제럴드가 아마추어 나잇의 내일의 스타로 뽑힌 것은 아폴로 극장이 이 이벤트를 시작한 직후인 1934년 11월 21일이었다. 엘라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엘라는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듀오로 아마추어 나잇에 도전했는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팝가수 보스웰 시스터즈의 Judy, The Object of My Affection을 불렀다고 한다. 친구는 주로 춤을 추고 엘라는 메인 보컬을 맡았다. 아폴로 극장을 가득 채웠던 청중들은 천진난만한 엘라 듀오의 모습에 웃고 손뼉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아폴로 극장의 작은 로비에 앉아 할렘 최고의 무대에 섰던 흑인 여성들의 환희를 공감해보려 노력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그러하지만 1930년대 할렘의 여성들은 지독히도 불우했다. 가난, 마약, 성범죄에 노출되기 에 십상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다. '흑인' 보다 못한 존재는 흑인 여성이었다. 흑인 여성으로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던 그때, 그러니까 1939년 어느 날. 아폴로 극장의 무대에 Strange Fruits가 울려 퍼졌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무대였다. 제목에 붙여진 '이상한 과일'이란 흑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메세지를 담은 곡이었다. 극장에선 이 곡을 못마땅해 하였으나 빌리는 이미 그 누구도 제어하기 어려운 아폴로 극장의 대스타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깊은 울림에 청중은 압도당했고 숙연해졌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면 희열과 환희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지독히 가난하고 소외된 흑인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두 여성, 서로 다른 빛깔로 아폴로 극장을 비롯한 할렘의 크고 작은 무대들을 누비며 관객을 압도했던 두 여성,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핏제랄드. 그녀들은 할렘을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 용기를 준 존재이기도 했다.

빌리 홀리데이 (출처: goole image)


할렘에 머물면서 코튼 클럽을 찾아가기도 했지만(지난 호 참조) 교회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도 즐거웠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가톨릭 교회에 들어가 보았다. 열 명 남짓의 성가대 멤버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가창력과 흑인 특유의 표현법들이 내 마음을 흠뻑 사로잡았다. 청중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인상 좋은 목사님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분, 빌리 조엘 백 코러스도 했었답니다. 노래 끝내주지 않아요?" 정말 멋있는 보이스였다. 빌리 조엘 코러스를 했던 안 했건 최소한 이 작은 교회 안의 보컬은 동네 사람들이었지만 비범했다. 저 흑인 특유의 소울 필과 가창력은 우리가 아무리 흉내를 낸다 해도 솔직히 '넘사벽'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어진다. 목사님은 예배 날 다시 오면 훌륭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내가 혹시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잠깐 돕고 싶다고 했더니,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수녀원에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길로 수녀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는 '노크 금지,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쓰여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몸을 벽에 기댔다. 그리고 여러 번 보았던 빌리 홀리데이의 유튜브 영상을 재생시켰다. 나는 그녀가 노래할 때마다 살짝 들려 가볍게 떨리는 윗입술이 너무도 좋다. 뚜렷이 각졌지만 둔탁해서 오히려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턱도 사랑스럽다. 과장되지 않게 들어 올린 까만 머리에 꽂힌 하얀 꽃과 그녀의 자태는 눈이 부시다.

1934년 엘라 핏제럴드가 아폴로 극장의 '내일의 스타'가 되었을 무렵, 빌리 홀리데이는 이름없는 할렘의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의 기획자였던 랄프 쿠퍼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은 곳은 1935년 어느 날 핫 차 바 그릴이란 곳이었다. 랄프 쿠퍼는 빌리의 노래에 홀딱 반해서 아폴로 극장의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에게 흥분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껏 이렇게 질질 끌면서 노래하는 창법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이건 블루스도 아니고…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당신은 반드시 그녀를 들어봐야 합니다." 쉬프만은 안목이 남다른 랄프 쿠퍼의 말을 믿고 1935년 4월 19일 그 주 프로그램에 빌리 홀리데이를 끼워 넣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자신이 부킹된 것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빌리의 아버지 클라란스 홀리데이는 그녀에게 아폴로 극장의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워줬다. 빌리는 행여 뮤지션 아버지의 덕을 본 것이라는 오해를 피하고자 성을 'Halliday'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빌리를 발탁한 랄프 쿠퍼는 그녀의 아폴로 극장 데뷔 무대를 위해서 드레스와 구두도 사줬다. 데뷔의 날, 빌리는 심장이 터질 듯 긴장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대에 나가기 직전에도 떨려서 몸이 굳어있었는데 코메디언인 피그미트 매크햄이 빌리의 등을 떠밀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무대로 나갈 수 있었다. 조명이 그녀를 향하고 청중들이 숨을 죽이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빌리는 Them There Eyes, If The Moon Turns Green을 불렀다. 청중들은 그녀의 노래에 넋을 잃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빌리가 The Man I Love를 앵콜곡으로 부르고 무대를 떠나는 순간 아폴로 극장과 그녀와의 관계는 확고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4개월 뒤에 당시 주가를 올리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와 다시 아폴로 극장에 섰고 그 뒤 승승장구하며 아폴로의 대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수녀원의 문이 열렸고, 수녀님이 내게 용건을 물었다. 나는 이 수녀원에서 매일 아침 빈민들을 위한 무료 음식 제공 시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틀간의 여행 시간, 짧지만 할렘식 사람들과 가깝게 있고 싶고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래 봬도 설거지는 잘한답니다" 수녀님은 활짝 웃었고 부엌을 보여주시더니 다음날 새벽 6시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들의 아침은 몹시 분주했다. 열댓 명의 수녀님들이 바쁘게 부엌을 오갔다. 부엌은 대단히 큰 개수대가 눈에 띌 뿐 조리대는 적었고 썰렁했다. 그래도 백 명 이상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엌 크기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대형 들통에는 오랜 시간 끓였을 슾이 보글거렸고 기부를 받은 음식 봉지와 빵과 음료가 한편에 놓여있었다. 수녀님이 나에게 말했다. "할렘 사람들은 많이 가난하고 아프답니다."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이었고 노인들, 중년의 여성들도 많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음식을 먹었고 다 먹은 뒤에는 아멘 하고 느릿하게 자리를 떠났다. 크디큰 흰자위는 검은 얼굴 위에서 더욱 하얗게 떠 있었는데, 그 눈빛도 그 두꺼운 입술도 아무 말이 없는 이유가 그들은 이미 서로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였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배려, 익숙한 가난, 그들에게 오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란 오직 나라는 동양 여성 하나인 듯싶었다. 바쁘게 설거지를 하고 치우느라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수녀님들은 침묵했고 경건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와 바쁜 걸음들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수녀님은 어려운 할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은 "할렘을 풍요롭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뭉클한 정경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수녀원은 사진 촬영 금지였고 마중해주신 수녀님들이 사진 촬영 금기(?)를 깨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열여섯 처녀 엘라 핏제럴드는 수녀님의 해맑은 웃음을 꼭 빼 닮았다. 나는 어린 엘라 핏제럴드의 플라토닉 러브를 떠올렸다. 드러머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 두 사람의 만남은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서로 용기와 존경을 보내는 깊은 사랑이었다.

엘라가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내일의 스타'로 뽑혔다고 서두에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선 1934년 시쉬프만스 할렘 오페라 하우스의 아마추어 나잇에서 엘라는 처음 발탁되었다. 청중석에는 티미 로저스라는 코메디언이 있었는데, 엘라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백스테이지로 달려가 내일 당장 사보이 볼룸에 와서 칙 웹을 만나야 한다고 종용했다. 혹시 엘라가 오지 않을까 봐 집 주소를 알아둔 뒤 집으로 데리러 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칙 웹은 드러머이자 할렘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리더였다. 특히 사보이 볼룸에서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의 힘 있고 독특한 드럼 솔로를 듣기 위해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칙은 엘라의 노래를 듣고 “바로 이거다, 나는 진짜 싱어를 만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엘라는 사운드가 모던 했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멜로디와 리듬에 비중을 두었다. 칙 웹 밴드가 연주하는 미디엄 템포의 그저 그런 스윙 곡들도 엘라가 부르면 평범하지 않은 곡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엘라는 흘리지 않고 또박또박 발음했고 악보도 읽을 수 있었다. (엘라 말기에는 표준 발음을 안하고 뉴욕 액센트가 들리긴 했지만.)

하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외견상으로는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칙 웹은 결핵 환자였고 작고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였다. 척추 이상으로 허리도 구부정해서 큰 드럼 세트에 매달려 있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반면, 엘라는 덩치가 컸고 예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글리 더클링', 세즉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렀다. 칙과 엘라 모두 외모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재능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존중하는 가족애'라고 말하곤 했다. 엘라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자 칙 웹 밴드도 덩달아 전국적 인사가 되었는데 많은 유혹, 특히 베니 굿맨이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라는 칙 웹 밴드를 떠나지 않았다. 칙 웹 밴드는 멤버 중 누구 한 명이 성공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라는 우호적인 가족애가 흐르고 있었다. 엘라는 밴드에서 작곡하기도 했는데 You Showed Me The way라는 곡은 멘토였던 칙 웹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비롯된 첫 작품이었다. 아폴로 극장 총책임자 프랭크 쉬프만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칙 웹이 1939년 결핵으로 숨졌을 때 엘라가 칙 웹의 관을 끌어안고 My Buddy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내 아버지는 일생 일대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하셨지요. 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엘라의 그 노래에 감동 받아서 펑펑 울었거든요”

엘라는 칙이 사망한 뒤에도 칙을 대신하여 3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보컬도 에니타 오데이 같이 새로 떠오르는 다른 여성들도 적극 참여시켰다. 

나는 재능있고 의리와 리더십있는 엘라 핏제럴드의 모습에서 흑인 여성의 강인함을 엿본다. 그리고 흑인 여성들이 엘라를 통해 얼마나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엘라 핏제럴드와 칙 웹. 엘라는 칙을 멘토로서 사랑했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NPR.org)


서브 프라임 모게지 파동 이후 아직도 할렘은 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70년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 만큼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렘인들은 1920년대부터 이어져 온 할렘 르네상스의 저력을 되새기고 싶어한다. 아폴로 극장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고 관광객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엘라 핏제럴드처럼 꿈을 이룬 소녀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할렘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걷히고 정화되기를 꿈꾼다.

할렘의 한 흑인 소녀가 썼던 1922년도 3월의 일기를 소개한다. 지금도 할렘 어디선가 세상을 욕망하는 일기를 쓰고 있을 빈곤하나 재능있는 여성들을 위해 나도 기도한다. 

 “내 이름은 루쓰 스미스. 그러나 무대에서 내 이름은 아다 스미스라고 불리길 원해요. 나는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알지요. 엄마에게 매일 백인의 집에서 청소하는 일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백인 집에서 슬쩍 음식을 훔치기도 해요. 엄마는 훔치는 게 아니라 미리 받을 돈을 당겨온다고 생각하래요. 엄마, 나는 떠나고 싶어요. 친구야,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이 고된 일을 벗어나 블루스 싱어가 되고 싶어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끝)

할렘의 거리에서 만난 여성들


<추천 음반>

Chick Webb & Ella Fitzgerald Decca Sessions (1934-41) (Mosaic 252)

본문에 소개했던 칙 웹과 엘라 핏제럴드의 사랑과 우정을 음악으로 듣고 싶다면 이 앨범을 추천한다. 1939년 칙 웹이 사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존경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41년도까지 칙 웹 밴드를 이끌었던 엘라 핏제럴드. 칙과 엘라, 그들의 모든 레코딩이 이 앨범에 담겨있다. 모작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8장 박스 세트로 오리지널 레코딩을 리마스터링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